<꽁트> 캐나다 동포 정춘성(丁春成)씨
정춘성씨는 자기 이름 석자를 무척이나 못 마땅하게 생각한다.
한자로는 丁春成이다. 성(姓)은 한자로 <고무래 정씨>이다.
고무래는 말리기 위해 멍석에 널어놓은 나락들을 긁는 나무로 된 농기구이다. 그리고 이 정(丁)씨는 또 <곰배 정씨>라고도 한다. 한 팔이 없는 외팔이를 <곰배팔이>라 한다. 글자에 아래로 긋는 획이 하나라 해서 정자는 곰배팔이 정자가 된 것이다.
한문의 글자들은 써 놓고 보면 대개가 네모 반듯해지는데 비해 이 정(丁)자는 균형감이 없다.
정춘성씨는 무식한 녀석들이<당나귀 정씨, 정일권 정씨>라 부르는 자신의 성을 싫어한다. 요즘 세상에 어디 귀천이 있으랴만은 양반의 성씨로는 인정받기 어쩐지 어려운 성씨라고 생각한다.
성(姓)이야 그렇다 치고, 자신의 이름(名) 두 자는 또 웬일인가?
시골서 농사만 짓다가 세상을 떠나신 일자무식꾼 그의 조부님께서 큰손자녀석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런데 실은 건너 마을에서 선비를 자칭하던 강생원에게 부탁했다. 사실여부야 알길 없지만 자신이 젊었을 때 생원고시에 패스했다고 내세우기 때문에 그냥 <강생원!>으로 불리웠다. 전라도 사투리로는 <강새환!>이다.
춘성씨는 54년전 음력 4월 초칠일에 고추를 달고 이 세상에 왔다.
비산비야(非山非野),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지역, 산들과 평야지대가 만나는 궁벽한 동네, 논은 모두 천수답(天水畓)이라서 제때에 비가 와야만 모내기를 하는 곳이다.
그저 모두가 하나같이 가난하게 살면서 언덕바지 밭에서 감자, 고구마, 그리고 콩 갈아 먹는 깡촌이다.
그래서 조금만 크면 농삿일 시켜먹을 수 있는 사내아들의 탄생은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조부는 주막에서 강새환을 만나 손자 봤다고 자랑하며 막걸리 값 내고 손자의 이름, 작명을 받아왔다.
"그래! 축하하네, 정새환!"
강새환은 곧 죽어도 양반의 후예라고, 만나는 이들마다 <새환> 생원 칭호를 붙여준다.
그리곤 춘성, 이른 봄에 태어났고 앞으로 늙어 죽는 날까지 항상 봄기운 속에서 살라고 봄 춘(春)자, 그리고 앞으로 큰 인물이 되라고 이룰 성(成), 성공할 성(成)자를 붙였다.
이 이름 풀이를 들은 조부님이 입이 함박만하게 되며 좋아했을 것은 당연지사!
오늘날, 이곳 캐나다 토론토땅에서 컨비니언스 스토어(Convenience Store, 속칭 구멍가게)를 경영하는 정춘성씨의 이름 석자가 이렇게 정해진 것이다.
춘성씨의 영어 이름은 <제이>이다. 오래전 캐나다 이민 올 때 그의 한자이름을 들여다 보던 이민관 녀석이 알만한 글자를 보고는 좋아했다. 알파벳의 제이, J자로 본 것이다.
"네 이름이 J 냐?"
영어를 못 알아들었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그 이민관이 커먼네임(Common Name) 란에다 영어로 Jay를 써 놓은 것. 그래서 그의 영어 이름은 Jay Choon-sung Jung 이 됐다. 운전면허는 물론 캐나다여권을 비롯해 모든 서류와 증명서에는 Jay가 이름이 됐다.
그 때 일을 회상하며 정선생은 슬며시 웃는다. 만약 이민관이 T자로 보았더라면 Ice-T나 T-Rex 처럼 티-정(T-Jung)이 됐을 거 아닌가?
제이-정은 시골티가 물씬나는 <춘성>이란 이름을 싫어한다. 어릴 때 동네 개구쟁이들이 그를 놀려먹을 때, 춘생이라 불러댔다.
<춘성이 춘생이! 얌생이 춘생이! 비쩍 마른 얌생이!>
이장집 아들 영구와 몇 놈이서 아예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합창을 해댔다. 성질 나는 대로라면 뒤돌아 서서 그 놈들하고 한바탕 주먹다짐을 하겠지만 체구도 작고 힘 약한 춘생이는 울분만 삼켰을 따름이다.
얌생이는 농가마다 한 두 마리씩 키우던 염소를 말한다. 돼지처럼 누가 때 맞춰 먹이를 주며 키우는 게 아니라서 염소는 비쩍 말라 있다. 춘성이가 키도 작고 바짝 마른 체구였기에 <얌생이>별명이 잘 어울리기도 했다.
강영구는 춘성이와 동갑내기로 국민학교 동창이다. 영구네는 영구아버지가 동네 이장을 맡아 한다해서 그냥 이장댁으로 통한다. 영구할아버지는 바로 정춘성이란 작명을 해준 강생원이다.
철없는 영구녀석은 제 조부가 멀리 내다보고 지어준 이름을 가진 춘성이를 만날 때마다 골려먹는 게 취미였다. 영구는 시골부잣집 큰손자처럼 키도 크고 몸도 실했다. 넓적한 얼굴에 볼에 살이 붙어 있었다. 또래들 중에 제일 좋은 체격에 힘도 무척 셌다. 그래서 그는 상급반 학생들과도 곧잘 싸워 이기곤 했다.
훗날 얘기지만 영구네는 5.16 후 농어촌 고리대금 정리에 걸려 큰 손해를 보았다. 그리고 영구아버지가 정치하겠다고 도의원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하는 바람에 재산을 다 날렸다.
얌생이 제이 정춘성씨는 오래 가게해서 돈을 제법 벌었다. 몇 년 전에는 오랜만에 금의환향해서 한바탕 호기를 부리고 오기도 했다.
96년 봄에 그는 고교졸업 30주년 기념 홈-커밍데이에 맞추어 고향을 찾아갔다. 그 때 그는 태평양 건너 머나 먼 캐나다에 진출하여 사업가로 성공해서 돌아 온 해외동포 사업가로 알려졌다.
그는 모교인 완주농고에 금일봉을 기증하고 전달식 기념촬영까지 하고 돌아왔다. <정춘성 장학금>을 설립해서 자기처럼 공부는 잘 하는데 가난해서 대학진학 못하는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주도록 했다.
그는 영구를 30년 만에 만났다. 하마터면 그를 못 알아볼 뻔했다. 얼굴은 넙죽이 그대로인데 주름 투성이었다. 고생을 많이 한 표가 난다. 기침을 계속 해대면서도 줄담배를 피운다. 갓 쉬흔인데도 꼬부랑 영감이다. 하기야 큰 손자가 초등학교 1학년이라 했다. 산림조합 다니다가 몇 년전에 그만두고 농사짓는다 했다. 옛날에 그를 놀려대던 <얌생이>는 이젠 영구 자신의 모습이 된 것이다.
춘성씨는 대학 문턱도 못 밟아 본 것이 천추의 한이다.
대학을 다닌 친구들은 대학이 별게 아니라 하는데도 그는 그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골프 치고 나서 술 한잔 하는 자리에서 어쩌다 대학 얘기 나오면 춘성씨는 기가 죽는다. 물론 남들에게는 전주에 있는 영생대학 야간부를 3년 다닌 것으로 해 두었다.
왜 주간이 아니고 야간부냐고?
어찌 된 일인지 토론토에는 춘성씨 말고도 영생대 출신임을 밝힌 이가 둘이나 더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모악회>라 이름지은 전북출신들의 모임에 나가서 알게 됐다. 그런 뒤부터는 야간부로 바뀐 것이다.
그의 아내는 아직도 그가 영생대 문학부 국문과를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고교 시절에 국어 실력이 좋았기 때문에 국문과 졸업으로 그녀에게 얘기했던 것이다. 하기야 그는 남달리 고사성어, 속담과 옛 시조들을 많이 알고 있다. 또 글도 제법 잘 쓴다.
그래서 소개받은 그녀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교제할 때 그는 편지를 거의 매일같이 보냈다. 그때는 지금처럼 국제전화를 시내전화처럼 통화하는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머플러공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오면 식탁에 앉아 편지 쓰는 게 그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녀는 그의 편지에 반해 자기보다 아홉 살이나 많은 서른 네 살 노총각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하이! 제이!"
단골고객 녀석이 부르는 소리에 춘성씨는 흠칫 놀라한다. 한가한 낮 시간이라 손님이 없기에 가게 카운터에 기대서서 이 생각 저 생각하던 중이었다. 잠깐 꾸벅 졸았던 것도 같다.
<죽는 그 순간까지 항상 따스한 봄기운 속에서 살아라! 또 크게 성공할지어다!>
그러고 보면 춘성이란 이름도 나쁜 이름이 아닌 것 같다. 젊을 적 이민 와서 이만하면 작은 성공을 이룬 게 아닌가?
오늘밤엔 와이프 좀 껴안아 주어야겠다. 아직도 캐나다의 한 겨울이지만 봄기운 좀 맛보아야지.
정춘성씨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2001. 2. 21.
김치맨
첫댓글 맑은오후님 본인의 애기..
제가 알기로는 맑은오후님께서는
몇년전에 고국에 들어 오셨던것 같은 기억이.........
춘성이라는 좋은뜻의 이름을 가지신분
어릴때의 아픔도 이제는 모두 추억이 되어
열심히 살아오신 보람도 있으신것 같습니다..
잘 보고갑니다..늘 건강하세요...^^*
어떻게 아셨어요? 작년에 잠깐 2주동안 있었지요.
다음 갈떈 계획을 바로 세워서 가야 겠습니다.
전 아주~ 멋있는 이름에요. "펌" 이라고 했는데... 김치맨이라는분 글도 잘 쓰시네요. 전...졸필...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