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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 고성중학교 총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갯바람
신미양요 |
1866년(고종3년) |
미국함대 침입 |
진도도호부 |
1866년-1873년(고종3-10년) |
자주국방의지 - 실권자 대원군 |
병인양요 |
1871년(고종8년) |
프랑스함대 침입 |
진도도호부폐지 |
1873년(고종10년) |
다시 진도군 환원 |
운양호사건 |
1875년(고종12년) |
일본의 조선침략 노골화 |
19세기 전반 반세기는 순조-헌종-철종 시대. 그리고 고종으로 시작된 19세기 후반은 이미 노골적으로 동서남북에서 일시에 밀려드는 외침세력 앞에 그와 맞서 싸울만한 군사적 힘도 없고 특별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할 만한 역량도 없었다. 그런 고종 초기 3년에 미국이 당장 함대를 이끌고 와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이미 25년 전 1841년에 일본을 포격으로 개항시켰던 것처럼. 그로써 일본을 개항하고 메이지유신 개혁정치로 25년 사이에 급성장한 일본은 세계 식민제국주의 열강에 진입하고 공인 받아 그들 먼저 한반도와 대륙을 삼키려고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톡톡히 재미를 본 미국이 선수를 치고 들었다. 그러나 잠자는 조선을 너무 깔보고 가볍게 여긴 미국은 그만 패전 코를 베고 물러갔다. 일본과는 달랐다.
그렇잖아도 어린 왕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실권을 한 몸에 쥔 대원군은 외침세력의 파고 앞에 마음에 굳건한 칼날을 바짝 세우고 있을 때 신미양요가 먼저 포문을 열자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한성을 향해 서해로 강화도에 상륙하려는 그들과 맞싸워 막을 곳은 오직 진도뿐이었다. 개국 태조께서 이미 개국 초기부터 진도를 그렇게 세웠던 것처럼. 그로 신미양요 바로 그해 당장 진도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켜 나아가 외적들을 막고 싸우라 했다.
그리고 대원군은 필사적으로 그들이 밀고 들어오는 바다 문을 철저히 닫아걸어 잠갔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면 개방을 하고 신문물을 받아들여 개혁해야 된다고 아우성치는 놈들은 일본에 붙은 놈들, 청국에 붙은 놈들, 노서아(露西亞)에 붙은 놈들, 미국에 붙은 놈들....... 도대체 그놈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를 알 수 없었다. 간교한 왜놈들이야 그렇다고 해도 정작 조선을 좀 먹는 것은 봉건신분사회부터 해체하고 만민이 평등한 신분의 자유부터 세워야 한다는 기독교였다. 지금 사방에서 조선을 먹어 삼키려고 기어드는 놈들이 다 그 기독교국들이 아닌가. 그놈들은 아비 어미, 장유유서, 남녀구별도 없다는 말인가. 반만년 겨레가 지켜 온 모든 체제를 모두 부정부인하고 무조건 저놈들 하자는 대로 해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간교한 기독교 선교사들. 그 넉살 좋은 미소로 구원의 새 세상을 외치는 놈들이 바로 나라를 먹어 삼키려는 외적들의 앞잡이들이다. 대원군은 당장 뽑은 칼날로 이미 들끓는 기독교(천주교)를 서슴없이 후려쳤다. 내 백성들의 목을 치는 마당에 그 못된 놈들 선교사들의 목을 치지 못할까.
그렇게 천주교와 교도들을 박해하자 신미양요 5년 후 당장 프랑스 군이 함대를 몰고 쳐들어와 강화도를 온통 불사르고 양민들까지 가리지 아니하고 모두 쓸어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기 나라 선교사를 죽였다는 것을 꼬투리로 트집 잡아. 이미 16세기로부터 그렇게 전 유색인류 사회를 먹어치운 놈들이 아닌가. 미개한 나라를 문명사회로 개척하여 잘 살게 한다며. 대원군은 치를 떨었다.
병인양요가 터지자 조정의 개방개혁파 신하들이 비로소 대원군의 실책을 집중 공격했다. 민비와 결탁 합세하여. 스스로 생각해도 큰 실책이었다. 이미 중과부적, 2년을 묵묵히 꾹 참고 버티다가 당장 진도도호부부터 폐지해야한다는 빗발치는 원성 앞에 고종 10년 대원군은 주상께 뜻대로 하라 허락했다. 그로 진도는 도호부로 승격한지 겨우 7년 만에 다시 군으로 환원되고 말았다. 그러자 곧 바로 2년 후에 일본이 운양호사건을 일으키고 그를 트집 잡아 조선침략을 노골화 하고 말았다.
신미양요와 함께 나아가 외적과 싸우라는 국가명령을 받고 도호부가 된 진도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로 서해를 거슬러 오를 때 한반도 서남해역을 지키고 있던 진도가 그들을 모르거나 그대로 두었을 리가 만무한 일. 그리고 기타 크고 작은 낯선 전함들이 지나거나 한반도에 접근하는 것도. 그러나 도호부시절 7년 동안에 대한 일체의 기록이 없는 게 유감이다.
3. 진도도호부 통치관할 영역
당시 전라도(전라남북)엔 남원 / 담양 / 장흥 / 순천의 4도호부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해역사령부에 해당하는 수군진(水軍鎭: 水營)은 전라우수영(울돌목)과 전라좌수영(여수)이 있었다. 그리고 진도가 고려 말 섬을 비우고 내륙으로 떠났다가 조선 개국과 더불어 87년 만에 다시 복군 되어 돌아오고(세종19, 1437년) 국가가 진도를 다시 국가와 한성을 보호하는 국방요새로 크게 세우고 다시 출발하던 세종22년(14490년)에 고려 때부터 유명무실한 정라우수영을 목포지역(당시 무안군)에서 오늘의 울돌목 우수영으로 옮기고 해군력을 크게 증대 강화시켰다. 더불어 진도 본도 동남부와 서남부 해안에 금갑진과 남도진의 두 수군만호 진성도 구축했다. 그 중 남도진은 당시 무안군(오늘의 신안군) 도서들에 군사를 파견했다. 또한 조도권과 해남 화원반도(문내와 화원)를 속장으로 관할하는 진도 지력산국영목장까지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진도가 뭍에 세웠던 여말 42년 동안의 진도군이었던 영암 시종 <월악-구산>과 조선 개국과 함께 이주하여 해남 땅에 세웠던 45년 동안의 진도였던 <원진일대>를 진도가 다스리는 진도 땅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가 고종 때 도호부가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당시 진도도호부가 관할 통치한 영역이 그를 기본으로 하여 한반도 서남해역방위를 위한 보다 큰 영역으로 확장되었을 것이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 후 진도군으로 환원 된 후 <진도군>의 변천과정에서 나타나는 바로써 가능하다. 그를 기준 삼아 도호부시절 진도영역을 그리면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으나 정작 도호부시절엔 그보다 넓은 지역이었으리라. 그러한 근거는 오늘의 신안권 도초도 바로 위에 있는 비금도 사람들이 -당시엔 도초도까지 진도군으로 표기 되고 있다.- 스스로 자신들의 비금도가 옛날엔 진도였다고 말하는 자리에서 확인 된다. 그리고 전라우수군 사령부인 우수영은 국가 직속기관으로서 전라도 서남부해역과 관련된 모든 군현을 군사적으로 총괄 지휘하는 사령부로서 해군 군사 활동에 있어선 진도군도 다를 바 없었겠지만 도호부로 승격되었을 땐 그 관계와 명령체계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오늘의 목포(당시 무안)와 무안 및 신안권 도서들까지 그 모든 군사 활동을 진도도호부와 전라우수군 군영이 관할 통치했을 것이다. 그로 진도도호부를 도표로 그려본다.
진도도호부 관할 영역 | ||
군 단위 |
현 지역 |
비 고 |
진도군 |
진도본도 |
진도읍성에 도호부 소재 / 그로써 군으로 환원되었을 때 <府內面>이라 했다. |
조도군도 |
제도면 + 가사면 | |
해남군 |
원진진도 |
삼산면 : <삼촌면> |
화원반도 |
문내면, 화원면 | |
영암군 |
시종진도 |
시종면 월악-구산 : <명산면> |
무안군 |
목포 |
목포해역과 영산강유역 |
해안지역 |
망운면, 현경면 등 | |
신안권 전역 |
신안군 전 도서 : 북부 지도-임자로부터 남부 하의-장산과 서남부 흑산면까지 |
<다음 18회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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