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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3년 4월 26일 토요정례법회 ○
원불교를 만나서
김혜민 교우님 강연이 있었습니다.
무한진급 7단 여러분들의 깜찍한 율동!
'예쁜 아기곰' 축하공연이 있었습니다.
김제원 교무님 설법
혜민 교우가 강연 중에 눈물을 보여주셨다.
혜민 교우도 원불교와 지중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나이가 70넘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내가 빨리 원불교 만났더라면 전무출신도 하고 이 생에 이런 고생 안하고 이렇게 안 살았을 텐데
너무 늦게 만나서 한이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혜민 교우는 그 속에 살아서 어떻게 느끼려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일찍 만난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가족교화를 하고 싶어도 가족들이 따라주지 않고 교당에 못 가게 하는 사람도 있고
혜민 교우는 동생도 출가하고, 가족이 모두 원불교 식구이니 그야말로 일원가족 아니겠는가.
어릴 때 교무한다고 선물도 받은 것 같은데 지금은 별로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지요?
인연은 상생의 선연이 있고 상극의 악연이 있다.
악연은 서로 해코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악연은 아주 원수 같은 악연이 있다.
그 집안에 가까이 태어나서 제일 예쁠 때 죽어버리고,
부모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시원하다” 하면서 떠나버리는 때도 있다.
선연과 악연은 가까이 있다.
어떤 변호사가, 다른 사람에게는 돈을 갖다 주는데,
형제간에는 죽어도 10원짜리도 주지 않으려고 하며 철저하게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선연과 악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연도 더 좋은 선연으로 바뀌며, 악연도 선연으로 바꿀 수 있다.
누가 바꾸는가?
공부인이 먼저 깨친 사람이, 먼저 믿는 사람이 인과를 믿는 신앙인이 바꾸는 것이다.
설사 그 사람이 학벌이 많고 돈이 많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바꾸는 것이 아니다.
설사 조금 못났어도 마음을 공부하고 자기 마음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악연도 선연으로 바꾸어가서
빚을 갚아 나갈 때 그 빚을 달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인과를 모르는 사람은 그 빚을 달게 받지 못한다.
가는 몽둥이, 오는 홍두깨 하면서 점점 더 그 악연이 더 커지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가까운 인연이 90% 이상이 악연으로 끝나기 쉽다.
같은 직장 내에서, 형제 자매간에, 동업하면서 악연으로 되기 쉽다.
왜 악연으로 끝나기 쉬운가?
여러분 친척 형제간에 나이 먹어서 명절 때 웃고 찾아다니는 집 많던가요?
거래 없는 집도 많다.
왜 그러한가?
그 부모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 할 것이다.
그것은 좋을 때는 누구나 좋은데 한번 안 좋을 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내가 손해 보지 않으려는 욕심. 때로는 체면과 자존심. 나도 컸다 하는 생각
그것이 형제간에 거래를 없애고 친구 간에 또는 친척 간에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원불교 신앙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런 주위 인연들에게 내가 손해보고 내가 그 인연을 좋게 풀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공부를 잘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알량한 자존심. 그 용서하지 못할 마음
여러분들 내가 내일 모래 죽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럴 때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영원히 살 것 같이 착각하지 말라. 그렇게 착각하니 용서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전부 저 사람이 잘못했다고 한다.
자기가 지은 법이다.
큰 바다는 어떤 물도 받아들이며 큰 나무는 그 안에 많은 새들이 모이고, 깊은 계곡에 많은 생령들이 모인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 크자면 한량없이 큰 우리의 마음이 국한 없이 모두 탄력적으로 내가 없는 마음,
불필요한 자존심을 놓아버린 마음이 된다면 어떠한 인연들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가?
미워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불행하다.
스스로 행복감을 못 느낀다.
미워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내 그릇이 작다는 것의 표현이다.
그 사람이 미운짓거리를 해서 미워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내가 세상을 모르는 것이요 내가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혜민 교우가 아까 울었는데 내가 몇 번 혜민이를 혼냈다.
아직도 아마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억울한 면도 있을 것이다.
내가 왜 그랬는가.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다 보인다. 여러분 내가 눈이 밝다는 것을 아시는가. 저 사람이 곧 어떻게 되겠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런데 내가 말했을 때 수용할 만한 사람은 내가 혼낸다.
그런데 수용하지 못할 사람은 말하기 어렵다.
나는 혜민이가 수용할 만한 사람이라 생각해서 이야기했다.
내가 예방한 것 몇 가지를 다 말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그물에 걸려서 스스로가 이 교당을 떠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을 낫게 해준다고 한다.
내가 성격인가? 아니면 진짜 생각해 주는 뜨거운 열정 있는 사람인가?
판단은 여러분이 하시기 바란다.
내가 왜 혼내는가.
여러분들도 아마 저 사람은 조금 있다가 어떤 그물에 걸리겠다, 어떻게 되겠다 하는 것을
대강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보면 그렇다.
그러나 나는 더 잘 보인다. 여러분들을 대하는 기간이 23년이 되었다.
여러분 같은 대학을 2개를 다녔고, 대학원을 다녔고 여러분들과 20년 넘게 상대하였다.
그러니 저 사람은 무슨 고민을 하고 있겠다,
조금 있다가 어떤 그물에 걸려들겠다 하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마음 아픈 것은 나갈 것 같이 보이면서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면 오해하니 가만히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종교는 그렇다.
기업은 급여를 감봉시키고, 징계를 주거나 혼자서 나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종교는 마음의 서원으로 뭉친 집단이요, 간절한 서원이 있어야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실생활에 써서 은혜가 되어야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이지 억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광주교당에 있을 때 직장 관계로 나와야 하는 사람이 반이었다.
신협 직원, 한방병원 직원, 수련원 직원들이다.
직장 생활을 위해 출석 체크를 하고 나가는 이들을 볼 때 나는 벽에 부딪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한 사람을 대할 때 너무나 힘들었다.
종교는 구도심과 서원이 없으면 떠나게 되어있다.
외부에서 “안암교당은 빡세다”라고 하신다지요.
내가 왜 빡세게 할까. 왜 그럴까.
성격이 좋지 않아서일까.
말해보시죠.
박윤호 교우님 曰 군대에서 일을 안 시키면 사고가 나니까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이진성 교우님 曰 빡세게 안하면 구멍이 새니까...
왜 그럴 수 밖에 없을까?
생각해 보라.
나도 교무로서, 그 교무님 참 편하다 교무님이 예뻐해 주신다 그런 소리를 왜 듣고 싶지 않겠는가.
나는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첫 직장생활 하거나 두 번째 직장생활 하면서 공통적으로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교당에서 배워서 잘 써먹고 있습니다. 교당에서 그래도 일차 관문을 통과하여 직장에서 버티고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즉, 놀려는 친구는 그 사람과 잘 놀아주면 된다.
저 예쁜 여자를 취하고 싶은 사람은 그 사람 비위를 맞춰줘서 취하면 된다.
그러나 정말로 그 사람을 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이 진정한 마음으로 웃게 해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대종사님의 마음이다.
우리 혜민 교우가 대학교 다닐 때... 더 참회해야 한다.
화려하게 이중적 삶을 오픈했지만 화려함에 둘러싸인 양파 같은 삶이었다.
왜 그러한가.
원불교와 그렇게 인연이 있었지만 교전이 새롭고 강연과 회화가 어색하다는 것은 원불교 교법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실생활과 연결된 것 없이 원불교라는 프라이드만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다.
밖에는 원불교인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실제 경계가 왔을 때 그 경계를 대종사님 교법으로 처리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 사람은 결국 원불교를 떠나게 되어있다.
어릴 때야 사람 좋아서, 분위기 좋아서 가지만
삶의 치열한 직장생활과 수많은 경계 속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교당에서 배운 그것이 내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결국 원불교 떠나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생활 할 때 완전히 대종사님과는 상관없이 살고 있기도 하다.
자기가 우습게 아는 기독교인은 새벽기도 나가고, 자기 가족교화 나하는데
나는 원불교인이라는 프라이드만 갖고 있다면
결국 그 사람은 본인에게도 은혜가 안되고,
그리고 일생을 그 사람에게 정성 다 바친 전무출신에게도 그 보람과 노력을 무참히 외면해 버린 배은이 될 수도 있다.
한 영혼은 대종사님 법이 좋아 일생을 다 투여하는데
자기는 룰루랄라- 내가 알아서 신앙생활 하겠다고 하면 서로 코드가 안 맞지 않은가 생각한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대학생 때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이 있고
직장생활하면서의 과정, 결혼에서의 과정이 있다. 좋은 말로 과정이지 사실 경계이다.
그 수많은 경계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그 기초를 알려주고 싶다.
그래야 언제든지 자기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직장에서도 경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후회하는 기간, 강급하는 기간이 아닌 경계 속에서도 꿋꿋이 진급하는 기회로 만들고자
나는 어떻게 보면 화롯불에 넣어 망치로 때리는 과정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너무 싫다면 빨리 판단하기 바란다.
나도 소중한 인생이다.
여러분도 소중한 인생일 것이다.
교무 인생도 생각해 달라 이것이다.
내가 하도 사교형에게 뭐라고 했더니, 누가 “교무님 사교형에게 너무 많이 뭐라 하지 말라”라고 하더라.
내가 생각해 주어서 말하는 것이다.
사교형은 기독교를 가면 참 좋겠다. 아주 환영받았을 것 같았다.
여러분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찬양과 선포를 통해서 마음을 북돋는다.
그러나 원불교는 그러한 감성에 호소하지 않고 진정한 이성에 호소한다.
감성을 버리지는 않지만 이성의 주체 위에 감성을 조화롭게 활용하자는 것이 원불교 공부이다.
그것이 자성의 정혜계를 세우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냉철하면서도, 이성적이다.
진공묘유를 통해서 감성적인 것을 충분하게 문화적,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진공을 바탕한 묘유이다.
깊이에 차이가 있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깊이가 얕은 사람은 원불교가 부담스럽게 된다.
본인이 본인을 판단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본인이 본인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려면
첫째는 자기를 비우고 나를 놓아야 한다.
내가 나를 놓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보면 자꾸 주관적이 된다.
특히 사교형 형님들. 주관적이기 쉽다. 항상 자기가 주체가 되어 바라본다.
진공이 어려운 것 같다. 진공으로 체를 삼아야지, 주관을 자기를 체로 삼으면 안된다.
둘째는 다른 사람의 충고를 받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자문자답을 해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혜민이 보니 자기가 아주 잘 사는 줄 알더라. 그러나 문제투성이였다.
그러면 혜민이가 여러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치명적일 수 있다.
따돌림 당하는 사람 특성이, 자기가 자기를 잘 모르고 전체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각의 기본은 정견이다.
객관적으로 나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정행,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가 스스로 자기에게 속고 있으니 어떻게 정행이 나오겠는가.
자기가 객관화시키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강연을 하는 것은 참으로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강연을 하면 상당한 독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기의 울을 벗어나 객관화할 수 있다. 자기의 울타리가 높을수록 강연을 최대한 피하게 된다.
우리 혜민 교우가 아픔을 잘 겪으시고 참회 기도를 하시더라.
기도하는 모습이 예쁘시더라.
그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교전에도 나와 있듯이,
참회문이라든가 심고와 기도가 왜 나왔는가 생각해 보셔야 한다.
내가 금년 1월에 출가여행을 원불교에서 어떤 프로그램보다 자신 있게 만든다고 만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것의 60% 밖에 도달이 안되었음에도 그래도 괜찮았다.
우리 혜민 교우가 훈련을 잘 나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사회에서도 내가 잘해야 겠다, 내가 사회를 잘봐야겠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사회가 대중에게 어떻게 은혜가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길을 물었을 때 그 삶은 정말 몰라서 물어봤는데 내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단장 중앙으로서 사회자로서든 뭐 한마디 하더라도 정말로 상대의 입장에서 충분히 설명이 되어주어야 한다.
불공의 이치는 역지사지이다.
나도 이것이 참 안되는 것 같다. 자꾸 내 입장에서 설명되더라.
내 입장에서 그동안 설명한 것이 있어 참회하고 있다.
그래서 책도 사다보고 있다.
여러분 나도 공부한다. 같이 공부하여야 한다.
앙상블 하면서 내가 기쁘면 되었지, 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일이 잘 안되었다고 한다.
물론 노래하면서는 기쁘게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일을 할 때는 철저하게 미리연마 해야 한다.
성지순례를 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중간에 가다가, 누가 갑자기 병이 났다면 중간에 어느 병원을 가야 하는가 하는 병원번호까지 파악한다.
대전에 가다가 만약 갑자기 쓰러져 버렸다면 어떤 병원을 가야 하는가.
그것이 준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마음만 즐거우면 되었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거기까지 못간다.
인간 중심이냐 업무중심이냐.
사교형과 관계형은 인간 중심이다. 감성 중심이다.
그러나 사색형과 지시형은 철저히 업무 중심이며 정확성이 중요하다.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일을 하기 전에 이면에 준비되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앙상블 하나 하면서도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뉴스에서도 방심해서 일어나는 사고가 참 많다.
안 그럴 줄 알았는데, 그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안전사고가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할 때는 철저하게 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정말로 중요한 불공 중 하나는
내가 종원 교우에게 일을 맡겼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잘 하는 것이냐.
종원 교우가 나에게 거기에 대해 신경 쓰지 않게 해 주는 것이다.
내가 “잘됐어?” 확인하는 것은 불안하니깐 확인하는 것이다.
나중에 “끝났어?”라는 것은 보고 할 때가 됐는데 그것이 없으니 물어보는 것이다.
“수고 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혹시 서운해 할까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에게 어떠한 역할이 주어졌을 때, 그 역할을 시킨 사람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해주어라.
그것이 정말로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다른 곳에다 신경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단원이 단장에게 “나에게는 신경 안써도 됩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단장이 오늘도 못 미더워서 “일어났느냐. 오늘 올 거지. 잘 가”라고 해야 하겠는가.
우리가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주인이라는 뜻이다.
직장에서만 주인인 사람, 집에서만 혹은 교당에서만 주인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시선은 언제 어디에서나 주인으로 사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나 내가 주인으로 사는 사람은, 깨어있는 마음으로 산 사람은 무시선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복과 지혜가 함께 어우러진 사람이다.
회사에서는 상사나 직장동료가 나를 걱정하지 않게
교당에 오면 단장님이 나를 걱정하지 않게,
집에 오면 어머니가 나를 걱정하지 않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기는커녕 눈치 보는 사람은 그 삶에서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직책을 떠나서 그러하다.
나는 부교무 때 부교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냐, 내 출가서원 내가 보은하겠다고 나왔으니 내 일 하는 것이지,
윗사람 있으면 잘하고 없으면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교무님이 칭찬해 주니 잘하고, 직장 상사가 격려해 주니 잘한 것은 어릴 때 하는 것이다.
성년이 넘어가면 그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이 삶에 주체적 삶을 사는 사람이요,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것이 주관적인 삶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자존심 세우는 삶은 주관적 삶이요, 자기를 세우는 사람은 주체적 삶이다.
다르다.
얼마나 자신감 있는가. 한번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가?
나도 어디에서는 힘을 못 쓸 데가 있다.
가족들 만나러 집에 가면 힘을 못 쓴다.
내가 친구들 만나면 힘을 못 쓴다.
눈치 보면서 사는 사람은 일이 늘지 않는다.
주도적 삶을 사는 사람은 거기에서 상당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그러면서 빨리 빨리 자기 역량이 터진다.
원불교를 만나서 내 마음에, 그 때 그 때 그 장소에서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가장 행복한 삶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무엇이 행복인가. 여기에서 눈치보고 저기에서 눈치 보는 것이 행복인가.
아니면 조금 부족한 면이 있어도 거기에서 주인 의식을 가지고 최대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인가.
내가 역량을 키워갈 수 있다며, 그 누가 나를 싫어할 것인가.
미움 받는 사람은 원망하고, 환경 탓을 하고, 조건을 들이댄다.
원불교의 신앙생활이란, 생각의 깊이를 더하고 더하는 것이다.
내가 말씀드린 주인의 삶은 생각이 깊을 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이 얕을 때는 자꾸 눈치 본다.
마치 누구를 위해 사는 삶. 그것이 노예의 삶이다. 마음의 노예이다.
이 세상에 누가 나를 구속할 것이며 무엇을 그렇게 눈치보고 살 것인가.
여러분 죽어서 손발이 불에 들어가면 고운 손도 검버선 핀 손도 낙엽같이, 다 똑같게 된다.
몸을 아끼고 아껴서 무엇 하겠는가. 오히려 일하는 것이 더 건강하다.
이왕이면 활동하면서 자신 있게 살아야지 무엇 하러 아끼고 아껴서 눈치 보면서 살 것인가.
원불교 만난 사람은 그 순간순간 한 생각 더해서
피하고 싶은 생각, 소극적 생각이 나도 불필요한 아만심, 자존심이 나와도
내가 사장, 원장, 교무, 교수, 어머니, 대종사님이라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생활 속에서 변화시켜야 할 것들이 참 많을 것이다.
질문과 답변
Q. 김명선 교우님 : 교무님께서 불공하면서 읽으시는 책은? 나를 놓는 구체적인 방법은?
평소에 할 수 있는 미리하기 연습법이 있나요?
A. 교무님 :
실제 내가 읽고 있는 책은 “재미있게 말하는 사람이 성공 한다”라는 책인데 매우 재밌게 보고 있다.
내가 말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상대에게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더 은혜 되는가. 내 본의와 다르게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 역시 많이 참회한다.
일전에 tv에 프랑스에서 50프랑을 내고 밥 먹는 예절에 대해 교육시켜주는 것을 보았다.
사실 말하는 것도 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전달되어 오해가 되거나 이것이 습관이 돼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교육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낀다.
살신성인(殺身成仁), 자기 몸을 놓아서 인을 이룬다는 뜻이다.
대산 종사님께서 좌산님께 이양하시면서 해주신 법문이기도 하다.
인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아상, 나라는 것이 자꾸 드러나게 되어있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침에 선을 하는 것도 나를 비우고 비우는 작업이다.
경계를 통해 멈추는 것도 나의 분별성을 놓아버리는 연습이다.
우리의 삼학 공부 전체가 나를 놓는 것이다.
나를 죽여버리자. 나를 비워버리자 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저 사람이 되어보자. 저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상당히 쉬울 것이다.
그다음 미리 연마를 말하겠다.
여러분들 오늘 엿을 신청하신 분들 가져가실 수 있을 것이다.
엿 처리를 어떻게 하였는가를 통해 이야기 하겠다.
지난 번 회장단 회의 때 엿이 정해졌다.
선진님들이 엿 장사를 했기 때문에 엿은 우리 선진님들의 이사병행을 하는 사례를 보여준다.
우리의 창립정신과 맞겠다 싶어 회의에서 엿이 결정된다.
그러면 그 엿이 여러분들 손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에는 철저한 미리 준비가 들어갔다.
우선 인터넷을 통해 찾아 보았다. 가격대를 찾아보고, 창평교당에 전화를 하였다.
교무님이 안계셔 한 교도님이 받아서 소개를 받아 직접 전화를 했다.
손가락 중지 사이즈로 해서 kg당 가격을 맞추었다.
맛과 두께를 확인하고자 10kg을 선주문했다.
그러고선 여러 사람들과 시식해 보았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하여 창평 교무님과 통화하여 다른 집을 소개 받았다.
그리하여 하나씩 진공 포장한 엿을 주문하게 되었다.
일단은 15kg을 주문했다.
전에 한 주문보다 가격이 10% 더 비쌌지만 개별 포장이라 더 낫다고 판단했다.
그 다음 단계로 포장이었다.
가장 저렴한 곳에서 스티커 주문 제작을 하고,
공금을 아끼기 위해 발품을 팔아 여러 가지를 뒤져보고 하여 박스를 구입했다.
그것도 모두 손으로 다 접어야 하는 것이다.
그 후에 신청을 받았다.
그리고 한 박스 안에 얼마나 들어가는지 테스트 해보았다.
그리하여 수량을 조절하고 신청했다.
엿 하나만해도 이렇게 많은 미리 준비와 보이지 않는 손이 들어간다.
미리 준비는 엄청나게 일과 돈,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일을 대충 생각하니 서로 싸운다.
하나를 해도 최대한 정성을 들여서 럭셔리가 되게 되어야 한다.
왜 호텔에서만 럭셔리해야 한다.
내가 맡은 조그만 일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높은 프라이드를 가지고 잘 해낼 수 있다.
Q. 박순명 교우님 :
진짜 궁금하다.
주변 사람들은 아끼고 아끼면서 산다.
예쁘고 쿨하고 깔끔하고 자기의 영역을 정해놓고 거기 안에서 똑부러지게 사는 사람을 보면 너무나 부럽다.
물론 주인으로 사는 삶은 깔끔하게 사는 삶과는 별개의 문제지만,
그 때 그 때 선도 긋고 싶고, 싫은 건 싫다고도 하고 싶고 때로는 의무를 좀 모른 척하고 싶다.
그래도 내가 뭐가 특별하다고 그렇게 살아야 하나. 사장의 심경으로 살고 싶지만, 신경 쓰기가 싫은 것이다.
매 순간 보통 사람의 길을 살지, 아니면 원불교인으로서의 길을 살지를 선택해야 할 것 같다.
매 순간 주인이 되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사는 것이 어려운 것 같다.
A. 교무님 :
큰 명인이나 명장이 되고 큰 교육사업가가 되든지 사회에 유익을 준 사람의 공통점은 프로페셔널 한 것이다.
대충 살고 있는 사람은 ‘나는 부처다’라는 믿음을 적용시키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평범을 중요시한다. 평범 속에 들어가 있는 무명과 나태를 합리화시킨다. 그것은 본인이 안다.
대종사님이 적당히 퍼 자고, 어어어! 하다가 대각하셨는가. 그런 사람 한 명도 없다.
사람들이 그렇다. 누가 돈 벌었다면 “너는 그렇게 했는가보다” 라고 쉽게 생각하더라.
외적 환경을 쉽게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그 사람이 거기까지 가기에는 너무나 힘들다.
대종사님께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찾아왔다.
대산종사님은 김구 선생님이 자꾸 찾아왔다.
대산종사님께 자문을 얻고 한편으로는 통했다. 말 한마디가 통한다.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다.
당신도 인고의 시간을 넘어 지도자를 하는구나, 업적을 이뤘구나 하는 진정한 박수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태자는 “너는 특이한 사람인가보다, 저 사람은 독종이야” 이런 생각을 갖는다.
어떤 일도 대충하여 되는 것이 없다.
내가 사법고시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다 느낀 점이 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포기하는 사람은 인내심의 문제이다.
끝까지 참고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에 안되기가 쉽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피나는 노력이 없이는 합격하기 어렵다.
사법고시를 내는 사람은 “네가 적당히 해서는 합격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다.
충분한 절대적 시간을 투자해야한다.
그런데 그 시간을 투자할 때 “미쳤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것을 뛰어넘은 사람이 판사, 변호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약자의 생각이요, 쉽게 생각한 것이다.
인고의 과정을 통과 했구나 그것이 인정받는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은전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