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서 정이
지난 2일 오후 바람이나 좀 쐬고 들어오고자 둘이서 나섰다. 찾아간 곳은 국립공원 계룡산 수통 골. 수통 골은 사는 아파트에서 자동차로 왕복 10km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제법 많은 사람이 늘 찾아가는 한 계곡이다.
점심 후 아무리 하늘을 쳐다보아도 비가 올지 오지 않을지 자신이 서지 않는 날씨여서 오후 3시 출발을 결심하기까지는 한동안 망설였다. 유성에서 동학사로 가는 길에 들어서니 계룡산 쪽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가로수들은 강풍에 가지라도 찢어질 듯이 심란했다.
수통 골 주차장은 날씨 탓인가 곳곳이 비어 있었다. 주차장에서 계곡을 끼고 흐르는 맑은 물소리 산새소리에 귀를 모으며 간간히 세찬 바람이 몰아내려오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앞서가던 아내가 잠시 주춤거리더니 길 옆 나무 그늘 아래 긴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두 여인에게 다가서는 모습이 보였다. 다가서자 의자에 앉아있던 한 여인이 벌떡 일어나며 반갑게 인사했다. 아름아름한 얼굴만으로는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어 반갑게 답례를 하지 못해 순간 퍽 미안했다.
이 때 아내가 눈치를 채고 설명했다. 근 20년 전 우리가 살던 대전 유천동 같은 불럭에 살던 아무개 선생님의 부인이라고. 설명을 들으니 부인이 살던 집이며 그의 남편 그리고 자녀들의 어린 시절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렇게 만나 정든 인사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부인의 생생한 기억력 덕을 톡톡히 본 셈이라 여겨져 고마웠다. 남편이 귀가했다는 휴대전화를 받은 부인에게 우리 집 주소를 알려주고 집에 꼭 놀러오라고 한 뒤 헤어져 계곡 길을 다시 걸었다.
이 때 갑자기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요란하고 계곡에는 강풍이 몰아쳐 내려왔다. 한 낫 두 낫 제법 굵은 빗방울도 떨어졌다. 큰 비를 만나지 않고 간신히 차 안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귀가하는 도중에 어느 새 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바람이 잠잠해지는 변덕스런 날씨.
귀로에 갑자기 싱싱한 상추 쌈 생각이 나서 정육점을 거쳐 시장으로 채소 파는 집을 찾았다. 그러나 점포들은 고르지 못한 날씨 때문에 거의 다 철시하다 시피 한 상태. 혹시나 하며 여러 가지 야채를 파는 젊은 부부가 하는 노점을 찾았다.
다행히 주인 남자가 있어 상추를 사려했으나 두 사람은 카드만 지녔을 뿐 현찰은 한 푼도 없는 딱한 처지. 망설이던 아내가 앞장섰던 나를 믿었는지 상추 1000원어치를 외상으로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주인 남자는 쳐다보더니‘아주머니는 모른다’고 간단하게 딱 한마디. 나를 따라서 처음 온 사람이니 모를 수밖에.
안내한 죄로 민망해 그냥 가자고 했다. 이 때‘그냥 가자’는 남다른 내 목소리를 들은 주인은 정답게 쳐다보며‘아저씨는 안다’면서 선뜻 상추를 외상으로 주었다. 덤으로 더 주기까지. 이를 지켜보던 아내는 용기를 얻었는지 부로콜리도 달라고 했다. 주인은 부로콜리도 집어주며 값이 많이 떨어졌다는 설명에 물건이 좋다고도 했다.
그리고는 외상을 갚으러 일부러 나오질 말고 볼 일 보러 나오는 길에 들려달라고 했지만 다음 날 일부러 나가 갚았다.
나는 지금도‘아저씨는 안다’던 주인의 말이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어서 안다고 한 것인지 내 남다른 목소리를 듣고서 소리를 안다고 한 것인지는 모른다. 어떤 것이 됐든 주인이 기억해 준 바람에 외상으로 줘서 먹고 싶던 상추쌈을 제때에 즐기게 해 주었으니 고마운 일임에 틀림없다. (2009. 6. 10.)
첫댓글 수통골도 가본지가 오래 된것같으네,요지음은 주변이 너무많이 개발이 되어 그옛날 임업시험장이 있을시절의 골짝이 맛이 나지 않을듯 하네.
훈훈한 마음을 느끼게 하는 잔잔한 감동을 주는 글이군. 선량한 사람들의 인정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지네
목소리든 얼굴이든 안다고 말해 준 주인 아저씨의 믿음도 고맙지만 다음날 일부러 가서 갚아 준 천규의 마음도 복ㄱ받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