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6주일 설교 2024년 5월 5일 (가정주일)
요한 15:9-17
‘기억’과 ‘나눔’이 기쁨으로
저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말씀 그리고 실천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앙생활의 원천과 동력은 ‘기억하는 것’에 있다고 자주 말씀드립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일일이 해석해 주시지 않습니다. 때마다 늘 몸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새라 코클리는 이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랑은 ‘기억’입니다.
사랑의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해 당신의 몸을 내어 주고 ‘나를 기억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의 감정과 느낌을 기억할 때 가능합니다. 특히 자녀는 부모의 삶을 기억해 내고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죠.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대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부모가 되면 더욱 그렇습니다.
체험한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어 자기 삶에서 늘 살려내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한 느낌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사랑은 시작됩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도 훗날 제자들의 기억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다.”
고난과 핍박의 고단함을 겪던 가운데 초기 교회와 요한 공동체는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 냅니다. 당시 이 말씀을 들었을 때와 후에 성찰을 통해 기억해 냈을 때의 울림은 어떠했을까요!
그때 하셨던 그 말씀이 어떤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지 생각해 보면 전율이 돋을 정도입니다.
과거뿐만 아니라 일상 가운데 주님의 메시지를 읽어 내는 것 또한 기억하는 기도 자세입니다.
한 가지 사안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의미를 묵상하며 성찰하는 습관을 들이자고 늘 말씀드렸습니다. 습관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우리 삶의 무기가 되려면 지금 여기 우리가 겪는 모든 일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억해 내는 영적 민감함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쁘고 만족하다면 그 느낌대로, 슬프고 분노했다면 또한 그 감정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랑이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라 정의하십니다. (15:11) 그렇다면 또한 사랑은 ‘나눔’입니다.
나의 기쁨이 다른 이들에게도 자기 일처럼 기쁨이 될 때 그것이 참다운 나눔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나의 만족이 때로는 다른 이들에게는 손해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불가피한 경우라 해도 말이죠.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의 현상이고 이치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은 이러한 인간의 상식과 질서조차 뛰어넘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친구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십니다. 가지 않은 길을 가며 수많은 조롱과 비판을 받지만 결국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당신의 수난으로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을 나누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행동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십니다. (15:10) 인생의 삶에서 상처는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기에, 그 아픔과 상처가 위로받고 치유되어야 평화로 갈 수 있습니다.
내가 평안해야 사랑의 나눔이 가능합니다. 그러려면 주님 앞에 내가 먼저 올바로 서야 하고, 그분 안에 온전히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사실 단순합니다.
포도나무인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아등바등 붙어만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주님의 그 말씀을 내 삶으로 받아 들여와 우리 삶의 동력으로 삼자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귀한 양분이 되어 안전함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너무 자책과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고, 교만의 길에도 서지 않으며 오늘 하루의 말씀이 그 하루의 거름이 되도록 해봅니다.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풍성한 삶이 우리의 인생에 기쁨이 되고 축복이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은 우리의 궁극적 기쁨이어야 합니다. 기뻐야 신앙을 하는 것이고, 신앙하는 것이 기뻐야 합니다. 그러니 사랑은 기억이고 나눔이며 또한 기쁨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이 내 삶에 기쁨이 분명하고, 내가 기쁘면 주님도 함께 기뻐하신다는 의미를 잘 새깁니다.
그 머무름은 오늘 복음처럼 예수님과 제자(우리)의 ‘상호 머무름’입니다. 서로의 안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내가, 내 안에 주님이 함께 머무는 것이니 나에게는 기쁨이어야 하고, 나의 그 기쁨이 다른 이들에게도 기쁜 일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요?
다른 이들의 기쁜 모습에 내가 위로받을 수 있어야 하고, 나의 사는 모습에 다른 이들이 기뻐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예수님이 나의 친구라는 사실이 머리로만이 아닌 진심을 다한 기쁨이고 위로이며 용기를 주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사랑의 ‘나눔’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기쁨을 체험하고 위로받은 이들이 용기를 내어 그 기쁨을 세상에 나눔으로써 성장하였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도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잠언 1:7)
그 지혜가 두려움의 사슬에서 얽매이지 않고 사슬을 끊고, 더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 종에서 하느님의 친구와 자녀가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나지안 주스의 그레고리우스)
하느님께 순종하며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지만,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나의 삶의 모든 일에서 주님을 체험하고 동행하심을 깊이 확신할 때 미숙함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여전히 바랄 것만 구하는 신앙에서 이제는 참 자유롭게 그러나 작은 일 가운데도 주님의 뜻과 의지를 체험하고 깨닫는 주님의 친구로 사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의 작은 일상에도 숨겨진 주님의 뜻을 찾고 기억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