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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 역사속의 인물
제 1절 유현(儒賢)
■ 김 구(金 絿) 1488(성종 19)?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또는 삼일재(三一齋). 의몽(義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예(司藝)이고, 아버지는 대흥현감(大興縣監) 계문(季文)이며, 어머니는 이겸인(李兼仁)의 딸이다.
거주지는 서울 인수방(仁壽坊)이었고, 충청도 예산에도 근거지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해 1503년(연산군 9)에 한성시(漢城試)에서 일등으로 뽑혔고, 1507년(중종 2) 생원?진사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해 시관을 놀라게 하였다. 6년 뒤인 1513년에 별시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정자를 거쳐 전경(典經)?사경(司經)?부수찬 등을 지냈다.
1515년에는 기준(奇遵)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이어서 홍문관?수찬부교리를 거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다. 신병으로 일시 사직했다가 다시 관직에 나가 이조좌랑?정랑?사간?홍문관직제학?동부승지?좌승지 등을 지냈다.
1519년 5월 같은 사림파인 김식(金湜)이 성균관대사성이 되자, 그의 후임으로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이로 인해 사림파는 관료들을 육성하는 성균관과 문한?언론기관인 홍문관을 장악해 그들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1519년 11월에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 훈구 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개령(開寧)에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뒤에 죄목이 추가되어 남해로 이배되었다. 남해에 이배된 지 13년 만에 임피(臨陂)로 가깝게 옮겼다가, 2년 뒤에 풀려나와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유배중 부모가 모두 죽고 그 때문에 그도 병을 얻어 죽었다. 그 뒤 선조 때 그가 지은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표문(表文)이 명나라로부터 호의를 얻어 그 공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었다.
일찍부터 성리학 연구에 전념해 학문 실력이 조광조(趙光祖)?김식과 겨눌만했다 한다. ≪전고대방 典故大方≫의 문인록에 의하면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음률에도 능통해 악정(樂正)에 임명된 적이 있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안평대군 용(安平大君瑢)?양사언(楊士彦)?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시대 전기 서예계의 4대가로 손꼽힌다. 서체가 매우 독특해 그가 살았던 인수방의 이름을 따서 ?인수체(仁壽體)?라고 했으며, 중국 사람들까지도 그의 글씨를 사갈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시독관(侍讀官)으로도 활약해 중종으로 하여금 사림파의 개혁 정치에 적극 호응하도록 하였으며, 조정의 일에 임해서는 매우 강개하였다. 또, 조광조와 함께 소격서(昭格署)의 혁파에 앞장섰고, 사림파 대간(臺諫)의 현실 개혁 상소에도 적극 후원하였다.
예산의 덕잠서원(德岑書院)과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암집 自庵集≫, 유품으로는 ≪자암필첩 自庵筆帖≫?≪우주영허첩 宇宙盈虛帖≫과 예산 소재의 〈이겸묘지 李謙墓誌〉 등이 있다. 또 단가 3수와 〈화전별곡 花田別曲〉이 그의 문집에 전한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 김정희(金正喜) 1786(정조 10)?1856(철종 7).
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503여 종에 이른다. 예산 출신이다.
〔생애〕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 판서 노경(魯敬)과 기계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큰아버지 노영(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 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된다. 그리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온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온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활동 상황〕(1) 학문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 기예(聰明氣銳)하여 일찍이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 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같은 거유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 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러 점차 난숙해 갔다. 종래 경학(經學)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金石學)?사학?문자학?음운학?천산학(天算學)?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의 수탐(搜探)과 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 禮堂金石過眼錄≫?〈진흥이비고 眞興二碑攷〉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신위(申緯)?조인영(趙寅永)?권돈인?신관호(申觀浩)?조면호(趙冕鎬)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경학은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실사구시설 實事求是說≫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수많은 청대 학술의 거벽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 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불교학(佛敎學)이다. 용산의 저택 경내에 화엄사(華嚴寺)라는 가족의 원찰(願刹)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佛典)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특히 백파(白坡)와 초의(草衣) 양 대사와의 관계가 깊었다. 그리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 서간 및 영정(影幀)의 제사(題辭)와 발문(跋文)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선지식(善知識 :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거유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미칭(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 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2) 예술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국서(國書)와 국화풍(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眞蹟 : 친필)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趙孟琅)?소동파(蘇東坡)?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는 시도(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蘇軾)?두보(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시도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시선제가총론 詩選諸家總論≫에서 시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화풍(畵風)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서?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怜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고담(枯淡 : 글이나 그림 따위의 표현이 꾸밈이 없고 담담함)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를 노출하는 문기(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난(蘭)을 잘 쳤다.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였다.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 : 맑고 고결하며 예스럽고 아담하다)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이하응(李昰應)?전기(田琦)?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藝苑 : 예술가들의 사회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 歲寒圖〉와 〈모질도 幢屬圖〉?〈부작란도 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시?서?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각(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인신(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청나라의 비파서도(碑派書道)가 낳은 등석여(鄧石如)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김정희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인각(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고인(古印)의 인보(印譜 : 여러 가지 인발을 모아둔 책)를 구득하여 직접 진한(秦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 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낙관(落款)에 쓰고 있었다.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자각풍(自刻風)인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여, 졸박청수(拙樸淸瘦)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3) 문학 김정희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한묵(翰墨 : 문한과 필묵이라는 뜻으로, 글을 짓거나 쓰는 것을 이르는 말)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 같은 편지 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내면 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도 한글 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어문 의식(語文意識)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언간(諺簡 : 언문 편지라는 뜻으로, 한글로 된 편지)이 40여 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 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다. 또 한글 서예 면에서 민족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 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 나라 역사상에 예명(藝名)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였다. 즉,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완당척독 阮堂尺牘≫(2권 2책, 1867년)?≪담연재시고 覃謨齋詩藁≫(7권 2책, 1867년)?≪완당선생집≫(5권 5책, 1868년)이 있다. 그리고 ≪완당선생전집≫(10권 5책, 1934년)은 종현손 익환(翊煥)이 최종적으로 보충, 간행한 것이다.
■ 민회현(閔懷賢) 1472(성종 3)?1540(중종 3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계사(季思). 예산 출신. 열(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상(五常)이고, 아버지는 사직 질(質)이며, 어머니는 우계충(禹繼忠)의 딸이다.
1517년(중종 12) 충청감사 김근사(金謹思)의 천거로 참봉이 되고, 이듬해 군자감주부를 거쳐 감찰이 되었다. 이때 이조판서 안당(安揆)의 안내로 중종을 배알하였다. 그는 왕에게 백성을 안락하게 함을 치도(治道)의 가장 우선에 두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당시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집권층은 천거로 출사(出仕)하고 있던 인물들에게 법제적 자격을 보강해주기 위하여 1519년 현량과를 실시하였다. 이 때 경향(京鄕) 각지로부터 천거된 120인 가운데서 28인을 등용하였는데, 47세의 나이로 병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그의 천목(薦目)에는 ?지조가 순수하며 독실하고, 또 재행(才行)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기묘사화로 출신자 방목(榜目)이 혁파되어 직첩과 홍패(紅牌)를 몰수당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한거하였다. 그 뒤 20년이 지난 1538년 이조판서 윤인경(尹仁鏡)의 건의에 따라 직첩을 환급받고 좌랑에 복직되었다. 그가 파과(罷科 : 과거가 무효됨)된 뒤 고향에서 한거하고 있을 때 결성현감(結城縣監) 조우(趙佑)가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수차에 걸쳐 모시려 하였으나 결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바른 것을 굳게 지켜 동요됨이 없었으며, 겉으로는 온화하나 속은 강하여 1만명의 군사로도 움직이지 못하였다. 어떤 일을 당하였을 때 모가 나지 않는 듯하였으나, 정도를 고집하여 돌이키지 않는 것이 태산보다 무거웠다.
■ 안민학(安敏學) 1542(중종 37)?1601(선조 34).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습지(習之)?이습(而習)으로 고쳤다. 호는 풍애(楓崖). 아버지는 찰방 담(曇)이다. 한성에서 태어났다. 재질이 뛰어나 9세 때부터 ≪소학≫?≪효경≫ 등을 읽기 시작하여, 20세 전후하여 ≪심경 心經≫?≪근사록 近思錄≫ 등 성리학 서적에 접하였다고 한다.
그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경(經)?사(史)?백가(百家)를 널리 섭렵하였으며, 25세에 박순(朴淳)에게 나아가 사제관계를 맺은 뒤 이이(李珥)?정철(鄭澈)?이지함(李之旅)?성혼(成渾)?고경명(高敬命) 등과 교유하였다. 1561년(명종 16)에 20세의 나이로 이미 학행(學行)이 뛰어나므로 천거를 받아 원릉참봉(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80년(선조 13)에 이이의 추천으로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다. 1583년에 사헌부감찰이 된 뒤, 관례에 따라 외직으로 나아가 대흥(大興)?아산?현풍?태인 등지의 현감을 두루 거치고, 전주의 별서(別墅)에 우거하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소모사(召募使)로 임명되었다. 소모사로서 그는 전라도 광주를 중심으로 군량 수천 석, 전마(戰馬) 수백 필, 정예한 군사 수천 인을 모아 북상하여 아산에 이르렀으나, 병을 얻어 나아가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그 병력과 군량을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에게 돌리게 하였다.
이 공로로 나중에 사도시첨정(司歸寺僉正)에 제수되었으나, 노병으로 받지 아니하고 홍주의 신평(新平)에 돌아가서 인사를 끊고 지내던 중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학문은 대체로 이이 계열에 속하며, 필법도 뛰어났다. 저서로 ≪풍애집≫이 있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 윤봉구(尹鳳九) 1683(숙종 9)?1768(영조 4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또는 구암(久菴). 유건(惟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비경 (飛卿)이고, 아버지는 명운(明運)이며, 어머니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이다. 우참찬 봉오(鳳五)의 형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1714년(숙종 40) 진사가 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25년(영조 1) 청도군수가 되었다. 1733년 사헌부지평,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고, 1739년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1741년 부호군이 되었을 때 주자(朱子)를 보은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宋時烈)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군자감정이 되었다.
1743년 사과, 1749년 진선, 1754년 서연관(書筵官), 이듬 해 찬선을 거쳐 1760년 대사헌에 특별 임명되었으며, 1763년 지돈녕(知敦寧)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현상벽(玄尙璧)?채지홍(蔡之洪) 등과 더불어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중심 인물로 꼽힌다.
호락논의 분파는 이간과 한원진에게서 심화되어 심성론(心性論)의 한 줄기를 형성하는데,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서로 같다는 이간의 학설은 뒤에 이재(李縡)와 박필주(朴弼周)에 이어져 ?낙론(洛論)?이라 불리고,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은 윤봉구와 최징후(崔徵厚)로 연결되어 ?호론(湖論)?으로 지칭되었다. 윤봉구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간추리면,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형성 이전에 부여되는 천리(天理)는 동일하나, 일단 만물이 형성된 뒤 부여된 이(理), 즉 성(性)은 만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는 사회적?현실적 활동보다 심성론을 주로 한 성리학자로서의 입론(立論)에 치중했으며, 저술의 내용도 경전의 강의나 주석 및 성리설이 주를 이룬다. 저서로 ≪병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 이 담(李 湛)
고덕 사람으로 자는 중구(仲九), 호는 정존재(靜存齋), 본 용인(龍仁). 종유(宗?)의 아들, 김굉필의 문인이다. 중종 33년 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正言)?공조정랑(工曹正郞)?전한(典翰)?응교(應敎)?사간(司諫)?승지?공조참의 역임. 성리학자로 의약?천문?산수?궁술?서화에도 능했다. 을사사화에 심사에 유배됨. 회암서원에 배향되었다.
■ 이약수(李若水) 1486(성종 17)?1531(중종 2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지원(止源), 호는 우천(牛泉). 충주 출신. 아버지는 현감 자(滋)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 (廣州安氏)로 사간 팽명(彭命)의 딸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1510년(중종 5) 생원이 되고, 1518년 성수침(成守琛)?서경덕(徐敬德) 등과 현량과(賢良科)에 별천(別薦)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성균관에서 학업에 전념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자 소두(疏頭)로서 성균관의 유생 150여명과 함께 궁궐에 나아가 항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윤언직(尹彦直)?홍순복(洪舜福)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1521년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가 10년 만인 1531년에 예산으로 이배, 같은 해 8월 그곳에서 죽었다. 1605년(선조 38)에 설원(雪寃)되었고, 1708년(숙종 34) 대흥현(大興縣) 우정사(牛井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우천유고≫ 1책이 있다. 기묘명현으로 일컬으며 대흥 우천사(牛泉祠)에 모심.
■ 이 흡(李 洽) 1549(명종 4)?1608(선조 4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화보(和甫), 호는 취암(醉菴). 지훈(之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식(埴)이고, 아버지는 한양군(韓陽君) 흥준(興畯)이며, 어머니는 한승정(韓承貞)의 딸이다.
이증(李增)의 문인으로 1573년(선조 6) 생원이 되고 158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 뒤 정언?헌납?장령 등 요직을 지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헌납이었는데, 당시 양사는 거의 서인일파들이 차지하여 동인으로서 연루자인 최영경(崔永慶)을 국문하다가 옥사하게 하였다. 그 뒤 세자책봉문제로 서인의 영수인 정철(鄭澈)이 실각하자 그를 포함하여 기축옥사 때 양사에 있었던 관리들은 모두 파직되었다. 그 뒤 여러 지방관을 거쳐 문학?장령?헌납 등 중앙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1602년 최영경옥사사건이 다시 거론되면서 당시 양사의 관리였던 사람들은 모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 때 그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옥구에 귀양을 가서 6년 만인 1607년 풀렸으나 다음 해 죽었다. 1612년(광해군 4) 도승지를, 1623년(인조 1) 이조판서를, 1630년에는 좌찬성을 각각 추증받고 아흥군(鵝興君)에 봉하여졌다. 이는 그의 둘째아들 의배(義培)가 인조반정 때에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봉하여졌기 때문이다.
1800년(정조 24) 덕산의 회암서원(晦菴書院)에 배향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귀양중 시집 2권을 쓰기도 하였다. 그의 시와 묘지명 등을 모아 엮은 ≪취암이공실기 醉菴李公實記≫가 전한다. 묘는 봉산 봉림.
■ 임헌회(任憲晦) 1811(순조 11)?1876(고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 아버지는 천모(天模)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익화(益和)의 딸이다.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 등의 문인이다.
1858년(철종 9)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다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전라도사?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4년(고종 1) 장령?집의?장악정(掌樂正)이 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 때 만동묘(萬東廟)의 제향을 폐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절대 부당함을 재삼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하였다. 1874년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헌?좨주 등에 임명되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 하여 그의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연기의 숭덕사(崇德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전재문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조극선(趙克善) 1595(선조 28)?1658(효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제(有諸), 호는 야곡(冶谷). 곤(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흥무(興武)이고, 아버지는 경진(景璡)이다.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진사 치림(致霖)의 딸이다. 박지계(朴知誡)?조익(趙翼)의 문인으로, 처음에는 이명준(李命俊)을 사사하였다.
1623년(인조 1) 학행으로 추천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이어 종부시주부?공조좌랑을 역임하고 한때 은거하였다. 그 뒤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호조정랑을 역임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1636년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시폐(時弊)와 자강지책(自强之策)을 간곡히 진언하였다. 면천군수로 나가서도 국방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호란 당시는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다. 호란의 소식을 듣고 혼자 달려왔으나 천안에서 길이 막혀 부모와 함께 해도(海島)로 피난하였다. 뒤에 순창군수?형조정랑?사어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1648년에 온양군수로 나갔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좌의정 조익의 강력한 추천으로 성균사업(成均司業)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강화부사?순창군수?익산군수?공조정랑 등에 임명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았다.
1657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나가 곧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이 되고, 이듬해 다시 장령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병들어 죽었다. 효행과 학행으로 이름이 났으며, 효종행장에도 효종이 그의 학행을 흠모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 ≪야곡집≫ 10권과 ≪야곡삼관기 冶谷三官記≫ 등이 있다. 성리학과 예설에 밝은 학자로 뒤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신창(新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과 덕산(德山)의 회암서원(晦庵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 조 진(趙 振) 1535(중종 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기백(起伯). 충수(忠秀)의 아들이며, 우의정 정(挺)의 형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 9) 생원이 되고, 1579년 천거로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고, 1596년(선조 29) 용강현령, 1599년 성천부사를 역임하였다. 1605년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의 수뢰(受賂)사실을 폭로하였다가 삭출당하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잠저(潛邸)시절에 세자를 보도한 공으로 복관되고 총애를 받는 한편, 동생 정을 이조의 요직에 앉히고 자신은 공신이 되어 한산군(漢山君)에 봉하여졌다. 1610년 삭주군수, 1614년 개성유수?판결사를 거쳐, 1618년 공조판서, 1622년 판중추부사가 된 뒤 8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광해군은 그에 대하여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그가 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경기관찰사에게 명하여 그 상을 호송하게 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삭직되었다. 편서로 ≪상제례문답 喪祭禮問答≫ 2권이 있다.
■ 현상벽(玄尙壁)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팔거(八紺 : 星州). 자는 언명(彦明), 호는 관봉(冠峯).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영조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장릉참봉?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지냈다.
시재(詩才)가 뛰어나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또 성리학에도 일가를 이루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는 성리학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이간(李柬)과 함께 낙론(洛論)에 속하여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같다고 주장하였다.
한원진(韓元震)에게 답한 별지는 그의 대표적인 성리설의 집약으로, ≪중용≫의 천명지성(天命之性)과 ≪맹자≫의 성선설을 인용하여 태극(太極)을 통한 오성(五性)의 본원을 밝힘으로써 이이(李珥)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계승, 발전시켰다.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예론(禮論)에도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관봉문답≫?≪관봉유집≫이 있다.
제 2절. 忠節의 인물
■ 김상준(金商俊)
호는 월곡(月谷), 본은 경주(慶州), 광복회 회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3년형 복역.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 추서, 광시면 신흥리 출생. 묘는 아산(牙山).
■ 김애선(金愛善)
자는 사행(士行), 기성(記星)의 아들, 병자호란에 의거 전사함. 묘 대술면 이티리.
■ 김원묵(金元?)
자는 춘시(春時), 호는 송당(松堂), 본은 김녕(金寧). 광복회 외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3년 옥고를 치름.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 추서. 묘 광시면 신흥리.
■ 김재완(金在琬)
본은 김녕(金寧), 자는 공염(公琰), 호는 백하(白下), 광시면 신흥리 출신, 홍주의병때 모병관으로 활약.
■ 김재창(金在昶) 1887(고종 24)?1961.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예산 출신. 자는 하서(河瑞), 본은 김녕(金寧). 1915년 7월에 결성된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아산?보령 등지에 사는 부호의 군자금 수합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인천에서 곡물상을 경영하며 연락거점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만주에서 우재룡(禹在龍) 등과 독립을 위한 격문?포고문을 작성하여 국내로 발송하여 독립운동의 기풍을 진작시켰다.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7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생지는 광시면 신흥리, 묘는 부여.
■ 김재철(金在喆, 在哲)
자는 명보(明甫), 본은 김녕(金寧). 광복회 회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3년형을 복역,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 추서, 출생지는 광시면 신흥리.
■ 김재풍(金在風)
자는 순보(順甫), 호는 호석(湖石), 본은 김녕(金寧). 광복회 회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함.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 추서. 묘는 광시면 신흥리. 비문은 조규용(趙圭瑢) 찬(撰)
■ 도응(都應)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충신. 본관은 성주(星州). 초명은 유(兪), 자는 자예(子藝), 호는 청송당(靑松堂). 조선 태조의 죽마지우로서 고려말 찬성사(贊成事)를 지내다가 1392년 조선 건국 후 태조가 특히 옛 정을 생각하여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하였으나 사퇴하여 받지 않았다. 그 뒤 홍주(洪州) 노은동(老隱洞)에 은거, 다섯 차례의 소명(召命)을 모두 거절하고 끝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귀감이 되었다. 태조가 그의 곧은 절의(節義)를 찬탄하여 내려준 호가 청송당이다. 묘는 응봉에 있다.
■ 도침(道琛) ??661(문무왕 1).
백제 말기의 부흥운동가?승려.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쳐서 멸망시키자, 백제의 왕족이던 복신(福信)과 함께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 풍(扶餘淵)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아 독립된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주류성(周留城 : 지금의 한산)을 근거로 하여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승려인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칭하고 백제의 유민들을 모아 임존성(任存城 : 지금의 예산)에 웅거하여 기세를 떨쳤다. 당나라 장군 유인궤(劉仁軌)에게 ?당이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사람들은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모두 죽인 뒤에 신라에 넘겨주려 하고 있으니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야 있겠는가?? 고 말할 정도로 기세를 떨쳤다. 그리하여 백제부흥군이 수도 많고 사기가 드높은 것을 믿고는 당장 유인궤가 보낸 사신을 그 관직이 낮다 하여 답서조차 주지 않는 고자세를 취하기도 하였다. 백제부흥군은 한 때 수도 사비성(四歷城)을 포위할 정도로 전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충청남도 대전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지라성(支羅城)?사정성(沙井城)?옹산성(甕山城)?진현성(眞峴城) 등에 웅거하면서 신라군이 금강을 통해서 웅진(熊津 : 지금의 공주)과 사비(泗歷 : 지금의 부여)로 운송하는 양로(糧路)를 끊어 나당연합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해오던 복신과 도침 사이에 반목이 생겨 도침은 복신에게 피살되었다.
■ 박대영(朴大永)
자는 문수(文秀), 호는 신포(新圃), 본은 영해(寧海). 3?1운동 때 총탄 7발을 맞았고 1년 동안 옥고를 치루었다. 198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묘 신양면 죽천리.
■ 박영진(朴英璡)
본은 울산(蔚山). 무과 급제 후 선전관(宣傳官)으로 임진왜란 때 대포진(大浦鎭) 싸움에서 전사. 병조판서의 증직을 받음. 묘는 광시면 마사리.
■ 박유(朴愈)
초명은 유(悠), 호는 유은(柳隱), 본은 울산(蔚山). 길우(吉佑)의 아들이다. 고려 때 한림학사 남평감무를 역임했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두문동의 의인들과 행동을 같이 하다가 광시면 은사리에 숨었다. 묘는 광시면 광시리에 있다.
■ 박창노(朴昌魯) 1846(헌종 12)?1918.
호는 이은(二隱). 조선 말기의 의병. 충청남도 예산 출신.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1896년 1월 정산에서 수백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채광묵(蔡光?)?안병찬(安炳瓚)?이세영(李世永) 등이 이끄는 각지의 의병과 홍주성에서 합류한 뒤 김복한(金福漢)을 의병대장에 추대하면서 의병항쟁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정제기(鄭濟驥)와 함께 홍주의병진의 항전근거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대흥의 임존산성(任存山城)을 수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관찰사 이승우(李勝宇)의 변심으로 전기(前期) 홍주의병진은 곧 와해되었다.
그 뒤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국권이 상실되자 재기항쟁을 결심하고 안병찬?채광묵 등과 1906년 3월 중순 대흥에서 거의하여 홍주성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해, 동료 수십명과 함께 잡혀 공주감옥에 수감되고 말았다. 얼마 뒤 동지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5월 19일 민종식(閔宗植) 의병진이 홍주성을 공략하고 의병진을 재편성할 때 참모사(參謀士)로 임명되어 5월 31일 성이 함락될 때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수성전(守城戰)을 벌였다. 홍주성전투에서 패한 뒤에도 예산읍을 근거지로 삼고 김덕진(金德鎭)?황영수(黃英秀) 등과 같이 민종식을 의병대장에 다시 추대, 의병항쟁을 시도하였지만 일제에게 기밀이 누설되어 무산되고 말았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변응정(邊應井) 1557(명종 12)?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문숙(文淑). 원양군(原陽君) 사겸(士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력(經歷) 윤계(胤季)이고, 아버지는 공조좌랑 열(悅)이며, 어머니는 병사 이흔(李昕)의 딸이다. 문예에 능하였으나 과거에 실패하고 무예에 열중하여 1585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월송만호(越松萬戶)?선전관(宣傳官) 등을 거쳐 해남현감으로 재직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내의 소요를 진정시키는 한편, 격문을 돌려 의병을 규합하였다. 또 대군으로 침입한 적의 본토가 비어 있을 것을 들어 이를 공략하면 왜는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 일본 정벌을 상소하였다.
금산에서 조헌(趙憲)과 합류하여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행군에 차질이 생겨 조헌이 전사한 뒤에 도착, 육박전으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으나 적의 야습을 받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는 전라수군절도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알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적은 그의 충의에 탄복하여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충간의담(朝鮮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웠다. 그는 싸움에 나서기에 앞서 동생에게 글을 보내 ?주욕(主辱 : 임금이 욕을 당함.)에 신사(臣死 : 신하로서 죽음이 마땅함.)?라 하여 비장한 결의를 보이고 노모와 작별하는 뜻을 고하며 입던 옷과 머리카락?손톱을 함께 보내 죽은 뒤 이것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당부하였다. 후에 정문(旌門: 충신을 표창하기 위하여 본인의 집앞이나 마을에 세우는 붉은 문)이 세워지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금산 종용사(從容祠)에 배향되었다.
■ 복신(福信) ??663.
백제 말의 귀족이며 부흥 운동가. 백제 무왕의 조카이자 동시에 의자왕의 사촌 동생이다. 660년 사비성(泗歷城)이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이 신라에 항복하자,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 : 현재의 韓山)을 근거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왕자 부여 풍(扶餘淵)을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동시에 서북부 지방 백제 유민들의 호응을 얻어 한때 사비성까지 쳐들어가는 성과를 얻었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지키는 사비성을 포위하자, 당나라에서는 유인궤(劉仁軌)를 급히 파견해 구원하게 하였다. 그 결과 백제 부흥군의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복신은 임존성(任存城)으로 퇴진하였다. 이 때 복신은 ?당과 신라가 백제 사람들은 다 죽이고 땅은 신라에 주기로 약속했다 하니, 어차피 죽을 몸이라면 싸우기나 하자.?라는 격문을 내걸고 백제 유민들의 호응 아래 여러 차례 나당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복신을 주축으로 한 백제 부흥군은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옹산성(甕山城 :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에 있던 계족산성으로 비정됨)?사정성(沙井城 :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사정동)?진현성(眞峴城) 등을 공격해 이를 탈환하였다. 그 밖에 신라군이 금강 상류를 통해 내려 보내는 군량 수송로를 차단해 나당 연합군은 한때 곤궁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복신은 도침과 반목해 도침을 죽이는 한편, 자기 세력을 믿고 장차 부여 풍까지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거짓 병을 핑계로 누워 있다가, 부여 풍이 문병 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챈 부여 풍이 먼저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복신을 죽였다. 이와 같은 백제 부흥군 지도부의 분열로 전후 4년에 걸친 백제 부흥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 성재한(成載翰: 일명 載平) 1860(철종 11)?1906.
조선 말기의 의병. 본관은 창녕(昌寧). 일명 재평(載平). 충청남도 예산 출신.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발표되자 예산?홍성?보령 등지를 전전하며 항일투쟁을 위한 동지규합과 여론조성에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1906년 4월 민종식(閔宗植)이 홍산(鴻山) 지치(芝峙)에서 의거한 소식을 듣고 그 휘하에 들어가 박제현(朴齊賢)과 함께 운량관(運糧官)에 임명되어 홍주입성전에 참전하였다. 그 뒤 홍주성을 빼앗긴 관군과 일본군은 보병?기병 등 많은 병력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며칠간 성을 사수하였으나, 4월 9일 새벽 적의 강력한 화약 사용으로 성이 함락되었다. 이 때 주장(主將)인 민종식은 피신하였으나, 그는 전태진(田泰鎭)?서기환(徐基煥)?전경호(田慶浩)?유준근(柳濬根)과 함께 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일본군의 총탄 앞에 육탄으로 대항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신숙서(申叔胥)
본은 평산(平山). 호는 죽당(竹堂). 문종 원년 문과 급제 후 교리?전적(典籍)?예조정랑을 역임. 육신사건(六臣事件) 때 면천(沔川)에 유배되었다가 봉산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킴. 묘는 봉산면 대지리.
■ 신형상(申鉉商) 1905?1950.
독립운동가. 일명 신현정(申鉉鼎). 충청남도 예산 출신. 1929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민당요원(民黨要員)으로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의 지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 향리인 예산에서 최석영(崔錫榮)을 포섭한 뒤 천안 호서은행(湖西銀行) 지점에서 5만8000원을 강제 조달하였다.
그 해 5월 북경으로 돌아가 상해?톈진 등 중국내 주요지점을 순회하면서 독립운동가에게 군자금을 나누어주고 사기를 북돋우었다. 1930년 3월 5일 유기석(劉基錫)과 함께 톈진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기 위하여 무기를 구입하려다가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5년을 언도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6?25 때 공산당에 의해 참화를 입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윤봉길(尹奉吉) 1908?1932.
독립운동가?의사(義士). 본관은 파평(坡平). 본명은 우의(禹儀). 호는 매헌(梅軒). 충청남도 예산 출신. 아버지는 황(璜)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원상(元祥)이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성의(聖儀)와 한학을 공부했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 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 해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농민독본 農民讀本≫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해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해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했으며, 그 해 1월 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해 2월 18일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해 성황리에 마치게 되자 일제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구애받지 않고 지방 농민들을 규합해 자활적 농촌진흥을 위해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또,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 바탕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1930년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신념이 가득찬 편지를 남기고 채 3월 6일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 그 곳에서 김태식(金泰植)?한일진(韓一眞) 등의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해 12월에 단신으로 다롄(大連)을 거쳐 중국 칭다오(靑島)로 건너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다. 이 곳에서 세탁소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을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보다 큰 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상해로로 갔다. 상해 프랑스조계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우선 생계를 위해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 해 겨울에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1월 8일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 일대는 복잡한 상황에 빠졌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이 때 일본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윤봉길은 이 해 봄 야채상으로 가장해서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였다.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김구의 주관 하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의 협의와 동의 아래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식장에 참석해 왕웅(王雄, 본명은 金弘一)이 만들어 폭발시험까지 했던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 때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11월 18일 일본에 호송되어 20일 오사카(大阪)위수형무소에 수감, 가나자와(金澤)에서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묘소는 서울 효창공원. 사당은 덕산면 시량리 충의사(忠義祠), 건국공로훈장 중장 추서.
■ 윤여익(尹汝益)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금산에서 순국하였고, 지평(持平)에 증직되었다.
■ 윤자형(尹滋亨) 1868(고종 5)?1939.
조선 말기의 의병장?독립운동가?종교인. 일명 자신(滋新)?내경(來卿)?태신(泰申). 충청남도 예산군 원천리 출신. 1891년(고종 28)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을 지냈다. 병서와 경서를 두루 섭렵한 문무겸전의 지장(智將)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될 때 동지를 규합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가 을사의병전쟁을 진두 지휘하였다. 고종은 1908년 7월 7일자로 옥새를 찍어 조칙을 내렸다. 고종은 특사를 시켜 윤자형을 가의대부 의병대장 겸 삼남도육군대도독(嘉義大夫義兵隊長兼三南道陸軍大都督)으로 삼고 남삼도대원수군제사목(南三道大元帥軍制事目) 전12개조를 지어 시행하도록 독려하였다. 12개조의 주요내용은 삼도의 군량대사 작전권을 윤자형의병대장에게 일임한다면서 윤자형은 단을 쌓아 하늘에 고하고 임진?병자 의병의 순국정신을 본받아서 석인을 새겨 쓰고 장관(將官)들을 임면하며(인사권 부여), 장병과 백성을 위무하고 상벌을 엄정, 신속하게 하되 태만자, 비협력자, 백성의 권익을 침범하는 자는 바로 참수하라는 것이다. 아울러 특별한 공이 있는 자는 기록, 포상하라고 명령하였다. 또, 사술(邪術)에 현혹되지 말고 주식(酒食)을 금하라고 명령하였다. 1930년대는 전라남도 광주 무등산에서 동지를 규합, 원각교(圓覺敎)를 개창하여 민족종교로서의 기능을 하다가 예산 향리에서 죽었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묘는 예산읍 관작리에 있다.
■ 윤후(尹候)
본은 파평(坡平). 고려 때 문과 급제 후 사섬시판사 역임.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광시에 낙향. 묘는 홍성.
■ 윤희두(尹熙斗)
오가 출신으로 본은 파평(坡平). 기미독립운동에 창의하고, 기독교 사업에 종신하였다.
■ 이근주(李根周)
자는 문약(文若), 호는 청광(靑狂), 본은 전의. 현복(玄福)의 아들, 덕산면 낙상리 출신, 을미년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시해되자, 김복한?이설과 더불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실패했고, 경술국치가 닥치자 선산에 고하고 덕산 본가에 돌아와 자결했다. 홍성군수가 순국비를 세웠다. 묘소는 덕산면 낙상리.
■ 이남규(李南珪) 1855(철종 6)?1907.
조선 말기의 의사(義士).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팔(元八), 호는 산좌(汕左)?수당(修堂). 충청남도 예산 출신. 호직(浩稙)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淸松沈氏)이다.
1861년 허전(許傳)의 문하에 들어가 일찍이 유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1875년(고종 1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883년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올랐다. 1885년 홍문관교리에 임명되고, 그뒤 부수찬?수찬을 역임하였다. 1893년 부호군을 지낸 뒤 1896년 안동부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98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내고, 1902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한편, 1894년 5월 일본공사 오도리(大鳥圭介)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자 상소를 올려 일본의 무도함을 규탄할 것을 요구하였고, 갑오경장의 부당성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의 통분함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영흥부사의 직을 사임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1906년 병오의병 당시 홍주에서 거의하였던 민종식(閔宗植)이 일본군에 패하여 은신을 요구하자 숨겨 주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의병과 관련 있다 하여 1907년 공주옥에 투옥되었다가 며칠 뒤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충구(忠求)와 함께 피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묘는 대술면 방산리.
■ 이목(李穆) 1599(선조 32)?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의 순절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명원(明遠). 아버지는 정사공신(靖社功臣) 의배(義培)이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어서 장차 무장이 되기 위하여 무예를 닦아 그 기예가 절륜하였다. 그가 미처 무과에 응시하기 전인 1624년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경기관찰사이자 부원수인 외삼촌 이서(李曙)의 휘하에 종군하였다. 이괄이 도성인 한양을 점령하자,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하여 개성으로부터 소덕문(昭德門)으로 서울에 잠입하다가 적에게 체포되었다. 이괄에게 끌려가서 관군의 형세에 관한 문초를 받았으나, 도리어 이괄의 반역을 꾸짖었을 뿐 그들에게 굴하지 않았다. 이괄이 혹형을 가하면서 문초를 거듭하였으나 끝내 항복을 거부하다가 참형을 당하였다. 뒷날 조정에서는 그 절의를 기리기 위하여 호조판서에 추증하고 한원군(韓遠君)에 봉하였다.
■ 이승복(李昇馥) 1886(고종 23)?1961.
독립운동가. 초명은 징복(徵馥), 호는 평주(平洲) 충청남도 예산 출신, 대한제국 말 애국지사 이남규(李南珪)의 손자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장통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그리고 남궁억이 교장으로 있던 청년학원(靑年學院)에서 수학하였다. 이 무렵부터 장지영(張志暎)?강매(姜邁) 등에게 독립운동을 권유받고, 형 이민복(李敏馥)과 함께 노령으로 망명하였다. 1913?1919년에 노령과 북만주에서 이동녕?이회영?이시영?이상설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20년에는 노령에서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청구신문 靑丘新聞≫을 발간했으며, 신문활자를 노령으로 운반한 일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구금당하였다. 동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박용만(朴容萬)?이민복?조성환(曺成煥) 등이 조직한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지원하기 위해 김병희와 함께 귀국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1921년에는 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의 국내 조직을 결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1923년 1월 귀국했다가 김상옥(金相玉)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파 의거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동년 7월 홍명희(洪命熹)?홍증식(洪增植)?김찬(金燦) 등과 함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를 조직하고 조직간사로 활동하였다.
정우회(政友會)에 가담해 1926년 11월에는 연구부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그 해 말 정우회 선언에 따라 민족협동전선운동이 전개되자, 1927년 1월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동년 2월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선전부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 아울러, 1927년 11월 이관용(李灌鎔)?권태석(權泰錫) 등과 신간회 충남 예산지회를 설립하고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갔다.
1927?1933년에는 조선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며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힘썼다. 1928년 6월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의 정기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족교육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1932년 안재홍(安在鴻) 등과 재만동포 구호활동을 벌이다가 일제의 구호금 소비 조작으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6년 3월에는 여운형의 도움을 받아 중국 항주(杭州)에 있는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남경?상해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하려던 정필성(鄭必成)을 중국으로 망명케 하였다. 1945년 3월 일본헌병사령부의 예비검속으로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건국준비위원회(大韓民國建國準備委員會)의 교통부장에 선임되었으나 고사(固辭)하였고, 1946년 국민당(國民黨) 총무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동년 국민당이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자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8년 신한국민당(新韓國民黨)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한편,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민주일보사의 부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51년 낙향해 한학 연구와 농업에 종사하였다. 1978년 10월 31일 서울에서 서거했으며, 묘소는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에 있다. 1980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묘는 대술면 방사리.
■ 이억(李檍)
호는 신암(愼庵).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전사.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정려를 세우다.
■ 이의배(李義培) 1576(선조 9)?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의백(宜伯).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한양군(同知中樞韓陽君) 흥준(興俊)이고, 아버지는 장령(掌令) 흡(洽)이며, 어머니는 여흥 이씨(驪興李氏)로 예조판서 우직(友直)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되고 이어 감찰로 전임되었다. 그 뒤 연해(沿海) 지역인 보령현감으로 발탁되었으나, 이 무렵은 임란 왜군이 겨우 철수한 때라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교체되었다.
광해군 혼정(昏政) 때에는 출사하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앞서 정사(靖社)의 밀모에 가담해 반정 후 통정(通政)으로 승진하고 명천부사에 제수되었다. 이괄(李适)의 난 후 전라좌수사로 승진하였다. 이어 인동부사로 전임되고, 1630년(인조 8) 한천군(韓川君)으로 봉해졌으며, 공청병마절도사(公淸兵馬節度使)?김해부사, 전라병사, 오위도총부부총관, 황해?평안?함경도 등의 병사를 거쳐 1635년 공청병마절도사로 다시 부임해 그곳에서 병자호란을 맞았다. 적의 변란 소식을 듣고 남한산성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기 위해 급히 임지 부근의 속오병(束伍兵) 수 천명을 겨우 모아 출전을 서둘렀다. 가사를 동생에게 맡기고 부인에게 흰 명주로 행전(行纏 : 바지?고의를 입을 때 정강이에 꿰어 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을 만들게 해 푸른 비단으로 바지 속 양 다리에 동여매니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묻는 말에 ?전투에 임하기 전에 사생을 알 수 없는데, 후일 이것으로써 알아차리게 함이다.?하고 결연히 고군(孤軍)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향하였다.
광주(廣州) 부근 죽산에 당도해 다음 날 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전봉장 이차형(李次衡)?이근영(李根永)이 적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중과부적이 되자, 영남 근왕병(嶺南勤王兵)의 합류를 기다렸다가 다시 진격하였다. 경상좌절도사 허완(許完)과 우절도사 민영(閔兩)의 군과 함께 광주 쌍령에 정족(鼎足)으로 진을 치고, 먼저 공격해온 적과 치열한 접전 끝에 아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무너지자 비장(裨將)의 피신 권유를 물리친 채 살아남은 노비 축생(丑生)과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허완?민영 등 양 절도사도 함께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후일 이들의 공을 가상히 여겨 이의배 부자 및 허완?민영 등 양 절도사, 노비 축생을 모두 정려하였다. 그리고 의배는 처음에 병조판서로 추증했다가 다시 영의정으로 승격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묘소 봉산면 봉림리.
■ 이재덕(李在德)
본은 전주(全州). 광복회 회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름.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추서, 생가와 묘는 신양면 만사리.
■ 이충구(李忠求)
자는 응부(凝夫), 본 한산. 남규(南珪)의 아들, 아버지와 같이 순국하니 건국공로 대통령장이 수여됐다. 왜병에게 피살.
■ 인한수(印漢洙)
본은 교동(喬洞). 아명은 금천(今川), 3?1운동 때 5,000여 고덕 시위군중을 이끌고 만세를 주도하다가 현장에서 일본헌병에게 칼로 살해당하여 순국함. 묘는 고덕면 지곡리, 고덕면 사무소 앞에 현충비가 있다.
■ 장문환(張文煥)
3?1운동 때 고덕지방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름.
■ 정뇌경(鄭雷卿) 1608(선조 41)?1639(인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지사.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을사삼간(乙巳三奸) 순붕(順朋)의 현손이며, 경기도사 담(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지겸(之謙)이고, 아버지는 생원 환(晥)이며, 어머니는 증병조참판 서주(徐澍)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이 되고, 그 뒤 공조?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부수찬?수찬 및 지평?정언 등의 언관을 역임하였다. 대간에 임명되자 간신 순붕의 현손임을 들어 스스로 탄핵하기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 피난갈 때 교리로 호종(扈從)하였다. 이듬해 봄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瀋陽)에 잡혀가자 자청해 수행했으며, 1639년 필선으로 승진해 심양에서 세자를 보위하였다. 당시 청나라에는 1618년(광해군 10) 건주위(建州衛) 정벌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갔다가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김이(金伊) 등이 우리 나라 사정을 청나라에 알려주면서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또한 양국간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임금을 모독하고 조신(朝臣)을 업신여기며, 관직이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다. 그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이들이 우리 나라에서 청나라에 보내는 세폐(歲幣)를 도둑질하자, 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청나라 사람을 시켜 그 죄상을 고발하고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증거를 없앤 뒤여서 도리어 청나라 관헌에 잡혀 처형당하였다. 그 때 나이 32세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이 자기 옷을 벗어 염(斂)을 했다 한다. 처음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찬성을 더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충신정려와 묘는 홍성군 장곡면 천태리.
■ 정 빈(鄭 濱)
본은 공산. 임진왜란 때 전사. 호조참판을 증직받고 시호는 충정공(忠貞公), 충훈정려가 고덕면 상몽리 2구에 있다. 묘는 고덕면 상몽리.
■ 정승중(鄭承重)
본은 온양(溫陽). 관은 갑산부사(甲山府使)로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전사.
■ 정치방(鄭治邦)
자는 성민(聖敏), 호는 고은(高隱). 본은 공산(公山), 벼슬은 선전관. 인조반정의 원종훈(源從勳)에 녹하다. 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 성공회에서 충훈정문을 고덕면 상몽리에 세웠다. 묘 고덕.
■ 조 인(趙 仁)
호는 冶雲), 본은 한양. 우국기념비가 봉산면 시동리에 서 있다.
■ 조인원(趙仁元) 1875(고종 12)?1950.
독립운동가. 일명 인원(寅元). 호는 야운(冶雲). 충청남도 예산 출신. 종호(鍾灝)의 아들이다. 1907년부터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덕산지소장(德山支所長)으로 활약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파견원인 이영식(李英植)과 연결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충청도지단(忠淸道支團)을 조직하고 서무부장으로서 각종 독립운동관계 문건의 배포에 주력하였다. 1920년 12월 20일(음) ?한국인은 납세하지 말라?는 내용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서 명의로 된 선전문을 삽교면 역촌리 게시판에 부착하다가 붙잡혀, 다음해 9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 1991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한 순(韓 栒) 1555(명종 10)?1592(선조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한(士閑). 아버지는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극심(克諶)이다. 황정길(黃廷吉)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583년(선조 16) 무과에 응시, 급제하였다. 그 뒤 선전관?평양판관 등을 거쳐 1590년 남평현감에 임명되었다.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하며 군비에 충실하여 인근의 모범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으로 가서 전라도의병대장 고경명(高敬命) 등과 적을 토벌하려 하였다. 그러나 금산에 이르기 전에 고경명의 의병군은 이미 패전하여 전세가 불리한 가운데 들어가 힘써 싸웠으나 전 군수 윤열(尹悅) 등 500여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자헌대부 병조판서 지의금부사에 증직되고, 서성군(西城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의장(毅壯)이다.
■ 흑치상지(黑齒常之) 생몰년 미상.
백제 말기의 장군. 서부출신으로 2품관인 달솔(達率)에 올라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하였다. 7척이 넘는 키에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660년(의장왕 20)에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어 백제가 망하자, 부중(部衆)과 더불어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 뒤,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효(孝)를 비롯해 여러 왕자를 사로잡고 당나라군사를 풀어서 제멋대로 약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가까운 족장 10여 명과 반기를 들어 임존성(任存城 : 지금의 大興)을 근거지로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은 곧 3만명으로 늘어나 한때 소정방의 군사를 물리치고 200여 성을 되찾아 기세를 떨쳤다. 소정방이 당나라로 돌아간 뒤, 나당연합군은 백제유민들이 전개한 광복운동을 막기 어려워 새로이 원병을 청해 수륙의 두 길로 공격을 강화하였다. 이에 백제유민의 광복운동은 더 버텨나가기가 어려워 수로로 공격해온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하였다.
당나라로 건너간 그는 좌령군원외장군 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州刺史)가 되어 토번(吐蕃 : 티베트)과 돌궐(突厥)을 치는데 공을 세웠다. 그 관직과 신임이 중국사람보다 두터워 벼슬이 연연도대총관 연국공(燕然道大總管燕國公)에까지 이르렀다. ?국공(國公)?이란 당나라에서 9등급으로 분류되어 있던 귀족의 직위 중 세번째로 3,000호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그 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통치 때 응양장군(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주흥(周興) 등의 무고로 옥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다.
가족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중녀(中女)로 적혀 있는 낙랑군부인 흑치씨는 중국의 불교미술사에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흑치씨는 백제 또는 고구려계의 유장(遺將)으로 흑치상지의 경우와 같이 당나라에 들어가 군공을 세워 천병중군부사 우오위장군 상주국 준화군 개국공(天兵中軍副使右吾衛將軍上柱國遵化郡開國公)에까지 관위가 올라간 순(珣)의 부인이다.
흑치씨는 706년에 남편 및 그의 가족들과 힘을 합쳐 8세기 전반기의 중국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산시성(山西省) 천룡산(天龍山)의 당대석굴(唐代石窟, 11?15, 17?21굴)에 삼세불상(三世佛像)과 제현성(諸賢聖)을 조각하였다. 이 불상조각은 707년에 완성되었다. 이 해 10월에 불상이 조각된 사연을 적은 공덕비가 세워져 불교미술분야 뿐만 아니라, 당제국에 있어서 한반도 출신의 유민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제 3절. 효행(孝行)
■ 강만구(康萬龜)
신암 용궁리 사람. 본은 신천(信川), 강식(康植)의 아들. 효자로 명정(命旌) 정문이 신암면 용궁리에 있음.
■ 강만채(康萬采)
신암 용궁리 사람. 본은 신천(信川), 강식(康植)의 아들. 통덕랑(通德郞), 동생 만구(萬龜)와 여동생과 같이 어머님 병환에 손가락을 깨어 주혈하여 3년 연명. 동생과 함께 명정(命旌) 정문이 신암면 용궁리에 있음.
■ 강사혁(姜師赫)
자는 자첨(子瞻), 호는 창정(滄汀), 본은 진주(晉州). 효자로 표창받다.
■ 강 씨(姜 氏)
첨사(僉使) 박지영(朴枝榮)의 아내, 효부로 표창받다. 18살에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깨물어 어머니 입에 넣어 드려 80여 세를 더 사시게 했다.
■ 고 씨(高 氏)
오태환(吳泰煥)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고 씨(高 氏)
본은 장흥, 학진의 딸, 김명규(金明圭)의 아내, 효와 열로 명륜장(明倫章)을 받음. 비가 대술면 이티리에 있음.
■ 권 씨(權 氏)
■사 이성관의 처. 효행으로 정문이 섰다.
■ 김 갑(金 갑)
자 군언(君偃), 본은 광산(光山), 자암(自庵) 구(絿)의 손자, 예빈사별제(禮賓寺別提), 임진왜란 중의 탁월한 ■행으로 사헌사지평(司憲寺持平)을 증직받았음. 왕명으로 정려가 신암면 종경리에 서 있음.
■ 김경두(金景斗)
본은 김해(金海), 자는 덕엽(德燁). 창원(昌源)의 아들, 효자로 표창받다.
■ 김 근(金 勤)
효도로 정려를 세우다.
■ 김기복(金基馥)
자는 영준(榮俊), 본은 영산(永山), 효자로 표창받다.
■ 김동필(金東弼)
본은 김해(金海), 치삼(致三)의 아들, 효자로 표창받다.
■ 김 맹(金孟)
효자로 표창받다.
■ 김방언(金邦彦)
본은 김녕(金寧). 효자로 정문이 광시면 신흥리에 있다.
■ 김병제(金秉濟)
자는 사문(士文), 호는 석하(石下), 본은 경주(慶州). 효자로 표창받다.
■ 김상익(金商翊)
자는 이윤(伊尹), 본은 경주(慶州), 의재(義載)의 아들, 효자로 표창받다.
■ 김식연(金植淵)
자는 사원(士元), 본 연안. 선행(善行)과 효도로 표창받다.
■ 김 씨(金 氏)
본 경주(慶州). 동현(東賢)의 딸, 이태화(李泰和)의 아내, 효도로 표창받다.
■ 김 씨(金 氏)
본 연안. 재후(載后)의 딸, 이온덕(李蘊德)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김 씨(金 氏)
임병국(林炳國)의 아내, 효와 열로 천포(薦褒)되다.
■ 김 씨(金 氏)
본 영산(永山). 박일화(朴壹和)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김 씨(金 氏)
본 천안(天安). 광석(光石)의 딸, 본 수원(水原) 백낙규(白樂奎)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김 씨(金 氏)
본 김해(金海). 상준(相俊)의 달, 이구성(李龜性)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김 씨(金 氏)
본 김해(金海). 중호(仲浩)의 딸, 오태환(吳泰煥)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김 씨(金 氏)
본 김해(金海). 한경수(韓鏡洙)의 아내, 효열로 표창받다.
■ 김 씨(金 氏)
본 김해(金海). 낙현(洛鉉)의 딸, 표한경(表漢卿)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김 씨(金 氏)
본 김해(金海). 현화(顯華)의 딸, 이규신(李圭紳)의 아내, 효와 열로 포상하다.
■ 김 씨(金 氏)
본 김해(金海). 현구(顯求)의 딸, 장민식(張敏植)의 아내, 효와 열로 포제(褒題)받다.
■ 김 씨(金 氏)
본 경주(慶州). 교동(喬洞) 인창선(印昌善)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김여정(金汝鼎)
호 수명재(水明齋), 본 광산(光山). 효행으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증직받음.
■ 김윤권(金允權)
자는 녹영(祿永), 본은 김녕(金寧). 효로 표창받다.
■ 김의재(金義載)
자는 성필(聖弼), 본은 경주(慶州). 효로 표창받다.
■ 김창원(金昌源)
호는 죽제(竹齋), 본 김해(金海). 효로 표창받다.
■ 김창조(金昌祚)
자는 덕우(德祐), 본 김해(金海). 효자 정문이 고덕면 몽곡리에 있다.
■ 김치화(金致和)
본은 김녕(金寧). 효행이 탁월하여 효자정려가 부 방언(邦彦)의 효자정려와 함께 광시면 신흥리에 서 있음.
■ 김 협(金 ?)
자는 군언(君偃), 본은 광산(光山). 예빈시별제, 효로 표창받고 정문이 신암면 종경리에 있다.
■ 권 씨(權 氏)
본 안동(安東). 사경(思敬)의 딸, 이봉성(李鳳性)의 아내, 정열(貞烈) 및 효로 표창받다.
■ 권중림(權重林)
자는 성률(聖律), 호는 한송(寒松), 본 안동(安東). 효로 포상받다.
■ 남 씨(南 氏)
본 의령(宜寧). 명희(命熙)의 딸, 서영기(徐英驥)의 아내, 시어머니의 노산(老産) 아이를 잘 양육하였다.
■ 마충섭(馬忠燮)
자는 원경(元景), 본 장흥(長興). 효로 표창받다.
■ 맹 씨(孟 氏)
본 신창(新昌). 석원(錫遠)의 딸, 이인영(李仁榮)의 아내, 효부, 현모양처로 포상받다.
■ 모만중(牟萬重)
효로 영조 때 정려를 세웠다.
■ 모 씨(牟 氏)
본 함평(咸平). 광옥(光玉)의 딸, 박명호(朴明浩)의 아내, 중시당상(重侍堂上) 봉공(奉供)과 유복자를 키워 포상받다.
■ 박만영(朴萬永)
자는 천문(天文), 본은 영해(寧海). 시묘살이를 하였고 효로 표창받다.
■ 박달영(朴達永)
본은 영해(寧海). 효로 표창받다.
■ 박도한(朴道漢)
본은 울산(蔚山). 효자로 정려가 신양면 황계리 서달골에 섰다.
■ 박삭원(朴溯源)
자는 경수(景洙), 본은 밀양. 통덕랑 군석(君錫)의 아들, 효행이 탁월하여 윤봉구(尹鳳九)가 효행사실을 찬(撰)함. 묘 오가.
■ 박상주(朴商?, 또는 朴尙?)
본 밀양, 승휴(承休)의 제 5자, 부모가 위중하자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도려 달여 드려 위급함을 구하였다. 상중에 너무 슬퍼하여 사망함. 효행으로 (持平)을 증직받음. 부, 숙부, 4촌이 모두 효행으로 이름났다.
■ 박세주(朴世?)
자는 원경(遠卿), 호는 정수당(靜水堂), 본은 밀양(密陽). 효자 승건(承健)의 아들, 왕이 처사(處士)의 호를 내렸다. 효자로 정려의 명이 내렸다. 정문은 보령 도화담(桃花潭)에 있다.
■ 박시무(朴時茂)
본은 밀양, 자는 상보(尙輔), 호는 신암(愼庵). 초명은 문우(文佑), 효행을 암행어사가 왕에게 아뢰었다. 묘 간양리.
■ 박신흥(朴信興)
본 밀양. 효로 정문이 오가면 오원리에 섰다.
■ 박 씨(朴 氏)
본 반남. 제옹(齊雍)의 딸, 조장묵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박 씨(朴 氏)
의정(宜貞)의 딸, 왕석종(王奭鍾)의 아내, 호?열 비각이 예산읍 오리정에 있다.
■ 박 씨(朴 氏)
본 밀양. 현명(賢明)의 딸, 부군 신효(申?)와 함께 정려가 봉산면 대지리에 있다.
■ 박 씨(朴 氏)
본 밀양. 영만(永萬)의 달, 심종갑(沈鍾甲)의 아내, 효와 현모양처로 표창받다.
■ 박원충(朴元忠)
본은 밀양. 효로 정려를 세우다.
■ 박영준(朴永俊)
본은 밀양. 대술면 화천리 출생, 친환에 다리살을 베어 달여 드려 쾌유케 함. 암행어사가 확인, 대술면 화천리에 효행비 있음.
■ 박진창(朴鎭昶)
부친 병을 고치기 위해 뱀과 같이 3일 동안 살았고, 시묘살이 3년, 효자로서 정려가 고덕면 사리 2구에 서 있다.
■ 박 충(朴忠)
효자로 명종 때 정문이 섰다.
■ 박해관(朴海觀)
자는 공필(公弼), 호는 경은(耕隱), 본 밀양. 효로 표창받다.
■ 박현황(朴鉉璜)
자는 경구(敬九), 본 영해(寧海). 효로 표창받다.
■ 박희적(朴熙積)
자는 명고(明皐), 본 밀양. 효로 정려를 세우다.
■ 방 맹(方 萌)
효자 정려가 예산읍 향천리에 있으며, 삼강행실도에 그 효행이 수록되었다.
■ 배 씨(裵 氏)
성주인 치덕(致德)의 달, 인인배(印仁培)의 아내, 효로 포상하다.
■ 백남기(白南岐)
본 수원(水原). 낙민(樂敏)의 아들, 효로 포상하다.
■ 서정돈(徐廷敦)
본 달성(達城). 병직(丙稷)의 아들, 효로 표창받다.
■ 성래기(成來基)
자는 의성(意誠), 호는 의정(意亭), 본 창녕(昌寧). 효로 표창받다.
■ 성 씨(成 氏)
본 창녕(昌寧). 한영(漢永)의 딸, 박경상(본 함양)의 아내, 효와 부도(婦道)로 표창하고 비를 세우다.
■ 성한익(成漢翼)?성운익(成雲翼) 형제
자는 동호(東鎬), 본 창녕. 어머니, 아버지의 병환에 형제가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넣어 드려 회생케 했다. 좌랑(佐郞)을 증직 받음.
■ 성일환(成佾煥)
자는 응인(應人), 호는 회운(檜雲), 본 창녕. 효와 우애로 숭앙받다.
■ 신대정(申大挺)
본은 평산(平山), 선조 때 통정부호군(通政副護軍). 효행이 탁월하였다. 묘 봉산 옥전리.
■ 신 씨(申 氏)
본은 평산. 유석환(柳錫丸)의 아내, 효와 양처, 근검치산으로 표창받다.
■ 신 씨(申 氏)
판윤 후재(厚載)의 딸, 진사 이상빈(李尙賓)의 아내, 효로 정려를 세우다. 정려각은 대술면 상항리에 있다.
■ 신현직(申鉉直)
본 평산. 효로 표창받다.
■ 신 효(申 ?) 및 밀양박씨 부부
신효(申?)의 본은 평산. 봉산면 대지리 사람. 그 부인 밀양박씨와 함께 효행이 탁월하여 그 효행이 중국황제에게까지 알려졌으며 봉산면 대지리에 정려가 섰고 감찰의 증직을 받았다.
■ 안성로(安星老)
본 순흥(順興). 효로 표창받았다.
■ 양만영(楊萬榮)
숙종 때 문과급제 후 현감과 좌랑을 역임하였고, 효로 정려를 세우다. 덕산에 거주.
■ 양 씨(梁 氏)
본 제주(濟州). 신석훈(申錫勳)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유수기(兪受基)
효로 정려를 세우다.
■ 윤동우(尹東雨)
아버님 병환에 백약이 무효여서 허벅지살을 베어 달여 드려서 즉시 완쾌하였다. 임금이 듣고 표창함. 덕산면 거주.
■ 윤상구(尹尙求)
자는 보여(保汝), 본 해평(海平). 벼슬이 주사(主事)였고, 효로 표창받다.
■ 윤상은(尹尙殷)
본 파평. 자신(滋信)의 아들, 효로 표창받다.
■ 윤영노(尹永魯)
자는 백첨(伯瞻), 본 파평. 벼슬이 현감에 오르고, 효로 표창받다.
■ 이개석(李開石)
효자 정려가 섰다.
■ 이갑준(李甲俊)
벼슬이 구급지 사과(司果). 처 이씨와 함게 효행이 탁월하였다.
■ 이거충(李巨忠)
본은 전주(全州).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역임. 효행이 뛰어나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증직받았다. 묘는 신양면에 있다.
■ 이 경(李 坰)
본 전주. 효행이 뛰어나 충청감사가 표창. 묘 대술면 이티리.
■ 이교승(李敎承)
자는 성도(聖道), 호는 야은(野隱), 본 전주. 효로 포상하다.
■ 이구성(李龜性)
자는 채경(蔡卿), 본 신평(新平). 효로 포상하다.
■ 이 규(李 奎)
본 청해(靑海). 효로 감찰(監察)에 추증되고, 정려가 고덕면 사리에 서 있다.
■ 이규영(李奎永)
자는 운오(運五), 호는 하곡(荷谷), 본 신평(新平). 효로 표창받다.
■ 이구혁(李?爀)
17세에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드려 회생케 하였다.
■ 이두상(李斗祥)
자는 문백(文伯), 호는 단정(檀亭), 본 전주(全州). 효로 표상하다.
■ 이두영(李斗永)
자는 원사(元士), 석홍(錫洪의) 아들. 효로 표창받다.
■ 이문경(李文卿)
직장(直長), 효행이 속삼강행실에 실렸고 효자정려가 오원리에 섰다.
■ 이 비(李 ?)
덕산면 봉림리 태생, 본 한산. 이의배(李義培) 장군의 아들, 효로 사복첨정(司僕僉正)을 증직받음.
■ 이 배(李 杯)
효로 사복첨정(司僕僉正)에 증직되다.
■ 이사검(李思儉)
은일인 처사로 효행이 탁어???하여 주부(主簿)로 천거되었다. 묘 신암면 종경리.
■ 이 상(李 祥)
호는 덕계(德溪), 본 신평(新平). 세종 때에 효로 호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정려를 세웠다.
■ 이석만(李錫萬)
자는 영윤(永允), 본 신평. 효로 표창받다.
■ 이석의(李錫義)
자는 유현(禹賢), 호는 쌍류정(雙柳亭), 본 신평. 효로 표창받다.
■ 이석홍(李錫洪)
자는 범심(範臣), 호는 호정(?亭), 본 신평. 구성(龜性)의 아들, 효로 표창받다.
■ 이선배(李善培)
차는 치강(致彊), 본 신평. 효로 표창받다.
■ 이성만(李成萬)
고려 때 대흥사람. 아우 성순(成淳)과 더불어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조선에서 정려를 세워 주었는데, 이즈음 그 비갈이 발결되니 일어 ‘우애비’라 한다.
■ 이세주(李世?)
효로 정려를 세우다.
■ 이송령(李松齡)
자는 여습(汝習), 본 경주. 효로 표창받다.
■ 이승유(李承瑜) 1824~1890.
자는 공근(公瑾), 호는 산음(山陰), 본 한산. 광임(廣任)의 아들, 효도가 지극하였다. 종사랑, 중학교관에 추증되고 정려를 명하였다. 묘 대술면 이티리.
■ 이 씨(李 氏)
본 한산, 응한(應翰)의 딸, 이병억(李炳億)의 아내. 효열로 표창받다.
■ 이 씨(李 氏) 본 전주, 고백창(高伯昌)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이 씨(李 氏)
본 덕수. 승지 홍(泓)의 딸, 최공유(崔公偸)의 아내, 효와 열로 정려를 세우다.
■ 이 씨(李 氏)
본 전주, 배승(培承)의 딸, 박성장(朴性長)의 아내. 효로 표상하다.
■ 이 씨(李 氏)
본 전주, 규환(奎煥)의 딸, 박수도(朴受度)의 아내, 효로 포상하다.
■ 이 씨(李 氏) 본 경주, 유승(裕承)의 딸, 오관영(吳寬泳)의 아내, 효부로 표창받고 주경야적(晝耕夜績)으로 흥가 집안을 일으켰다.
■ 이 씨(李 氏)
본 경주, 규복(圭復)의 딸, 이현규(李賢珪)의 아내. 효와 현모양처로 표창받다.
■ 이 씨(李 氏)
본 여주, 종완(鐘完)의 딸, 김춘근(金春根)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이 씨(李 氏)
본 고부(古阜), 원경(源京)의 딸, 박헌용의 아내, 효로 포상하다.
■ 이 씨(李 氏)
본 연안(延安), 신(伸)의 딸, 김동혁(金東爀)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이 씨(李 氏)
본 한산, 홍식(洪植)의 딸, 박규헌(朴珪憲)의 아내, 효성으로 포상하다.
■ 이여방(李汝芳)
벼슬이 첨지(僉知)에 오르고, 효로 표창받다.
■ 이오규(李五珪)
본은 한산, 관은 주사(主事). 효자로서 정려의 명이 내렸다.
■ 이우영(李禹榮)
자는 선량(善良), 호는 밀암(密庵), 본 경주. 충추원의관으로 효행이 탈월하여 비서원승(秘書院丞)으로 추증받았고, 효자정려가 고덕면 상장리에 섰다.
■ 이태영(李台永)
자는 여정(汝鼎), 호는 연안(蓮庵), 본 신평. 석홍(錫洪)의 아들, 효로 표창받다.
■ 이홍조(李弘肇)
효로 표창받다.
■ 이후발(李後發)
어머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드렸고 지성으로 기도하여 꿈에 계시를 받아 약을 구하여 드림. 왕이 듣고 표창함. 삽교 사람.
■ 이후직(李厚稙)
자는 성사(聖仕), 또는 휴은(休隱), 본 한산. 엄동에 가물치를 구해 친환을 고쳐드렸고, 효자 정려가 봉산면 봉림리에 서 있다.
■ 이 흡(李 洽)
자는 화보(和甫), 호는 취암, 본은 한산. 이흥준의 아들, 벼슬은 장령에 이르렀다. 효행이 지극하였다.
■ 인여규(印汝圭)
효로 표창받다.
■ 인영원(印榮源) 및 성주배씨(星州裵氏)
본은 교동(喬洞), 경릉참봉. 증 숭정대부판돈영부사. 효행이 탁월하여 1927년 유림에서 사시(私諡) 효정(孝靖). 처 성주배씨(星州裵氏)도 효행이 탁월하여 모성존도원(模聖尊道院)에서 효자효부 정각을 덕산면 낙상리에 세우고 쌍효각이라 함.
■ 인재봉(印在鳳)
자는 건실(建實), 본 교동, 효로 표창받다.
■ 인창선(印昌善)
자는 치관(致官), 본 교동, 효로 포상하다.
■ 임기호(林箕鎬)
자는 춘방(春芳), 호는 도헌(桃軒), 본 평택(平澤). 벼슬이 주사에 이르고 효로 포상하다.
■ 임한상(林漢相)
자는 성재(聖哉), 본 나주. 수현(洙賢)의 아들, 벼슬이 감찰에 오르고, 효로 포상하다.
■ 장윤식(張胤植)
삽교 사람으로 자는 성도(聖道), 본은 인동(仁同), 벼슬이 현감에 오르고, 효로 정려가 삽교읍 월산리에 섰다.
■ 장진급(張眞汲)
자는 운서(雲瑞), 본 인동, 효로 정려가 광시면 신흥리에 세우고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추증받았다.
■ 재 씨(再 氏)
사비(私婢), 효로 정려를 세우다.
■ 전개금(田介金)
효로 영조 대 정려를 세우다.
■ 전응운(全應雲)
본 나주(羅州). 태춘(泰春)의 아들, 효로 표창받다.
■ 전태춘(全泰春)
본 나주(羅州). 낙희(洛羲)의 아들, 벼슬이 참봉에 오르고, 효로 포상하다.
■ 정면교(鄭勉敎)
자는 인배(仁培), 호는 우재(愚齋), 본 온양. 학수(鶴秀)의 아들, 품계는 통정대부이다. 효로 포상하다.
■ 정세익(鄭世翊), 정세량(鄭世良) 형제
형제가 어머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어머님 입에 넣어 드렸고 부모상 3년 동안 죽만 먹었다. 감사가 임금에게 효행을 아뢰었다.
■ 정세량(鄭世亮)
자는 명경(明敬), 효행이 탁월하고 은일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이르렀다. 호조참의를 증직받았다. 묘는 대흥면 탄방리.
■ 정 씨(鄭 氏)
본 동래, 동현(東鉉)의 딸, 이의진(李義鎭)의 아내, 효와 열로 표창받다.
■ 정학수(鄭鶴秀)
자는 춘백(春伯), 본 온양. 친환에 손가락을 깨물어 입에 피를 넣어드려 7일 연명케 하고, 3년 시묘살음. 효로 고종 7년 정려를 신양면 시왕리에 세웠다.
■ 정해열(鄭海悅)
자는 노첨(魯瞻), 호는 금호(錦湖), 본 공산(公山). 참봉, 효자로 정려가 고덕면 상몽리에 있다.
■ 조경희(趙敬熙)
자는 숙경(肅敬), 호는 송정(松亭), 본 한양. 효로 표창받고, 참봉에 등용되고, 지평에 추증되다.
■ 조기덕(趙基德)
자는 중공(仲恭), 본은 한양. 효로 포상하다.
■ 조 백(趙 柏)
자는 수직(秀直), 본 한양. 효로 포상하다.
■ 조세원(趙世元)
자는 한경(漢慶), 본 한양. 참봉, 효로 포상하다.
■ 조 씨(趙 氏)
본 한양. 구(球)의 딸, 맹홍술(孟弘術)의 아내, 효로 표창받다.
■ 조 씨(趙 氏)
본은 한양, 치경(致卿)의 딸, 이은택(李殷澤)의 아내, 효와 열로 포상하다.
■ 조 씨(趙 氏)
본은 함안, 명제(明濟)의 딸, 심인구(沈仁求)의 아내, 효와 열로 표창받다.
■ 조 씨(趙 氏)
본 한양, 병은(炳殷)의 딸, 김경두(金景斗)의 아내, 효로 포상하다.
■ 조 씨(趙 氏)
본은 한양, 강한일(康漢一)의 처, 22세에 혼자되어 정절을 지키고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1976년 9월 15일, 성균관장으로부터 표창과 명륜장(明倫章)을 받음. 묘는 용궁리.
■ 조정교(趙鼎敎)
자는 성삼(聖三), 호는 양심재(養心齋), 본 한양, 최수(最洙)의 아들, 효로 정려가 봉산면 시동리에 섰다.
■ 조최수(趙最洙)
자는 선경(善卿), 본은 한양. 효로 벼슬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다.
■ 주홍덕(朱弘德)
호는 덕암(德庵), 본 신안(新安). 통정대부, 효로 포상받다.
■ 차경징(車敬徵)
자는 공숙(恭叔), 호는 지천(芝川), 본은 연안(延安). 효자 명징(命徵)의 동생, 형과 더불어 양친 병환에 4차례나 손가락을 깨어 피를 입어 넣어드려 합 6년의 연명을 하여 드렸고, 6년간 시묘하였음. 정려는 신양면 서계양리.
■ 차명징(車命徵)
자는 기숙(起叔), 호 연리(蓮里). 부모가 편찮으시매 4차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넣어드려 6년의 수명을 연장하여 드렸고 6년간 시묘하여 효자정문이 신양면 서계양리에 있다.
■ 천만리(千萬里)
료로 정려를 세우다.
■ 최경망(崔景望)
수직(壽職) 통정대부. 고덕 사람. 아버님 병환에 손가락의 피를 입에 넣어드려 5일 연명케 하였다. 임금이 표창하였다.
■ 최망회(崔望回)
효행으로 정려가 섰다.
■ 최순강(崔舜江)
본 경주(慶州). 효자로 정려가 숙부 현필(賢弼)의 정려와 함께 신양면 서계양리에 있다.
■ 최승립(崔承立)
자는 중락(仲洛). 본 해주(海州). 벼슬이 교관(敎官)에 오르고, 효로 포상하다.
■ 최진석(崔震錫)
자는 여신(汝信), 호는 호은(湖隱), 본 해주. 효로 표창받다.
■ 최현필(崔賢弼)
본 경주. 어머님 병환에 손가락을 깨어 수혈하여 2일 연명케 하여 드렸다. 효로 정려가 신양면 서계양리에 섰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증직받았다.
■ 최후발, 후천, 후극(崔後發, 後天, 後克) 3형제
한 집 3형제가 모두 효심이 지극하여 어머님 병환에 손가락을 깨어 피를 입에 넣어드렸고, 시묘살이 3년을 함. 임금이 이를 표창하였다. 고덕 거주.
■ 표 씨(表 氏)
본 신창(新昌). 대선(大善)의 딸, 김찬희(金贊喜)의 아내, 효와 열로 포상하다.
■ 한광석(韓光錫)
본 청주(淸州). 효로 포상받다.
■ 한신묵(韓愼?)
본 청주(淸州). 효자정려가 대술면 마전리에 서 있다.
■ 한효동(韓孝東)
자는 흥원, 본 청주(淸州). 효로 포상하다.
■ 홍계성(洪啓聖)
효로 표창받다.
■ 황완성(黃玩性)
자는 문익(文益), 본 창원(昌原). 인수(仁秀)의 아들, 효로 포상받다.
제 4절. 열행(烈行)
■ 강 씨(姜 氏)
본은 진주. 성응기(成鷹基)의 처, 열녀비가 신양면 귀곡리에 있다.
■ 강 씨(姜 氏)
김태벽(金泰璧)의 아내, 정렬로 정려를 예산읍 관작리에 세웠다.
■ 강 씨(姜 氏)
공신옹주(恭愼翁主)
조선 성종대왕의 딸, 청령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의 처, 절부(節婦)로서 정려가 대술면 마전리에 서 있다.
■ 김 씨(金 氏)
본 경주. 한재건(韓在健)의 처, 열녀정려가 대술면 마전리에 서 있다.
■ 김 씨(金 氏)
본 경주. 상보(商輔)의 딸, 이의영(李義榮)의 아내, 정렬로 포상하다.
■ 김 씨(金 氏)
본 경주. 표학상(表鶴相)의 아내, 정렬(貞烈)로 표창받다.
■ 김 씨(金 氏)
조총(趙摠)의 아내, 열로 정려를 세우다.
■ 김창수(金昌洙)
본 연안. 의행(誼行)으로 표창받다.
■ 곽 씨(郭 氏)
본은 현풍(玄風). 정랑(正郞) 박근(朴根, 본 울산)의 아내, 효와 열로 정려를 세우다. 비각이 광시면 은사리에 있다.
■ 문 씨(文 氏)
본 남평. 진규(鎭奎)의 딸, 박필상의 아내, 예와 절로 포상하다.
■ 문 씨(文 氏)
본 남평. 연운(然雲)의 딸, 김성순(金星淳)의 아내. 절(節)로 표창받음.
■ 매읍덕(每邑德)
장중연(張仲淵)의 아내, 열로 정려를 세우다.
■ 박 씨(朴 氏)
류제남(柳悌男)의 아내, 열로 정려를 세우다.
■ 박 씨(朴 氏)
본 밀양. 심원성(沈遠成)의 아내, 남편에 대한 지성으로 포상하다.
■ 송 씨(宋 氏)
본 여산(礪山). 동중추 윤철(胤哲)의 딸, 나주인 김낙의의 아내, 부도(婦道)로 포상하다.
■ 송 씨(宋 氏)
이시배(李時培)의 아내, 정렬로 정려를 세우다.
■ 신 씨(申 氏)
오장(伍壯)의 딸, 한선호(韓善浩)의 아내, 정렬로 유천(儒薦)받다.
■ 엄 씨(嚴 氏)
본 영월(寧越). 주철의 딸, 성백목(成百穆)의 아내, 열로 표창받다.
■ 우 씨(禹氏)
본 단양(丹陽). 석규(錫圭)의 딸, 한홍조(韓弘祚)의 아내, 열로 정려를 예산읍 암하리에 세웠다.
■ 원 씨(元 氏)
본 원주(원두표 증손녀). 열녀로 정려가 섰다.
■ 유 덕(有 德)
이복룡(李福龍)의 아내, 사비(寺婢). 병자호란에 순절하니 열로 정려를 세우다.
■ 윤 씨(尹 氏)
이여각(李女珏)의 아내, 열로 표창받다.
■ 윤 씨(尹 氏)
본 파평. 선(?)의 딸, 박양택의 아내, 열로 표창받다.
■ 이소사(李召史)
홍덕록(洪德祿)의 아내, 정렬로 정려를 세우다.
■ 이 씨(李 氏)
본 신평(新平). 경학(?學)의 딸, 김수철의 아내, 열로 표창받다.
■ 이 씨(李 氏)
홍덕록(洪德祿)의 아내, 정렬로 정려를 세우다.
■ 이 씨(李 氏)
이흡(李洽)의 달. 권지(權遲)의 아내, 남편이 죽자 3년 동안 죽으로 연명함. 정렬로 정려를 세우다.
■ 이 씨(李 氏)
정현룡(鄭見龍)의 아내, 정렬로 정려를 세우다. 여각이 봉산면 봉림리에 있음.
■ 이 씨(李 氏)
본 경주. 집구(集?)의 딸, 전덕성(田德聖)의 아내, 열로 표창받다.
■ 임 씨(林 氏)
본 철원. 김재양(金載讓)의 처, 열녀정려가 삽교읍 상하리에 서 있다.
■ 장 씨(張 氏)
강존민(姜存閔)의 아내, 병자호란에 순절하니 열로 정려를 세우다.
■ 조 씨(趙 氏)
본은 양주. 성국진의 처, 열행비가 신양면 귀곡리에 있다.
■ 조 씨(趙 氏)
이수만(李壽萬)의 아내, 열로 표창받다.
■ 조 씨(趙 氏)
본 한양. 김진오(金振五)의 처, 아버지 병환에 살을 베어 달여 드리고, 남편이 죽자 20년 동안 상을 입고 남편 묘에서 자살하다. 열녀정려가 대흥면 노동리에 섰다.
■ 조 씨(趙 氏)
본 한양. 용한(龍翰)의 딸, 정설화(鄭說和)의 아내, 양처로 표창하다.
■ 조 씨(趙 氏)
본 한양. 인교(仁敎)의 딸, 이희(李羲)의 아내, 열로 표창받다.
■ 춘 덕(春 德)
열녀로 정문이 섰다.
■ 최 씨(崔 氏)
이준걸의 아내, 정렬로 정려를 세우다.
■ 최 씨(崔 氏)
신학균(申學均)의 아내, 정렬로 표창받다.
■ 하 씨(河 氏)
본 진주. 이기하(李基夏)의 처, 열행으로 정려가 섰다.
■ 학령(鶴 令)
정렬로 정려를 세우다.
■ 한 씨(韓 氏)
김달(金達)의 아내, 열부정려(烈婦旌閭)를 신암면 종경리에 세웠다.
■ 화순옹주(和順翁主)
영조의 둘째딸로 당시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인 한신과 혼인하였으나, 38세의 나이로 한신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 죽었다. 정렬로 정려를 세우다. 묘는 신암면 용궁리.
■ 황 씨(黃 氏)
박성망(朴聖望)의 아내, 정렬로 정려를 세우다. 남편이 죽자 3년 동안 죽을 먹고 평소 근신하였다.
제 5절. 문장(文章)?학자(學者)
■ 김붕한(金鵬漢)
본은 안동. 중학교 교장 역임. 시인(詩人)으로 도 문화상을 받음.
■ 김성적(金盛迪) 1643(인조 21)~1699(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혜(仲惠)?일한재(一寒齋). 우의정 상용(尙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현(光炫)이고, 아버지는 수민(壽民)이며, 어머니는 윤형각(尹衡覺)의 딸이다.
1669년(현종 10)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된 뒤 168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85년에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그해 홍문록(弘文錄)과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이듬해 부수찬(副修撰)?수찬을 거쳐 1687년 교리(校理)에 임명되어 옥송사(獄訟事)를 신속히 처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어서 헌납(獻納)?부교리 등을 거쳐 1689년 이조좌랑을 지냈다. 1694년에는 이조정랑?겸문학?응교(應敎)?집의(執義)?사간?사인(舍人)을 차례로 역임하고, 1696년에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었으나 흉년을 당하여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에 힘쓰지 않았다 하여 삭직당하였다. 그 뒤 곧 승지로 기용되었으며 대사간을 거쳐 1698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때 혹심한 식량난에 처해 청나라로부터 쌀 4만섬을 수입하였는데, 이에 따르는 국가의 체면과 사상(私商)들의 농간을 우려하였다. 1699년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도중에 죽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결백하였다.
■ 박두세(朴斗世) 1650(효종 1)~1733(영조 9).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사앙(士仰). 충청도 대흥 출신. 할아버지는 이건(以建)이며, 아버지는 율(僻)이다.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홍문관직이 제수되었으며, 1686년 의금부도사로 권대운(權大運)을 압송할 때 편리를 보아주었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진주목사를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남인에 속하였으며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문장에 특히 능하였으며 운학(韻學)에도 매우 밝았다. 작품으로 〈요로원야화기 要路院夜話記〉가 있는데, 그 내용은 1678년 과거에 실패한 선비가 귀향하던 길에 요로원의 주막에서 양반인체하면서 유식을 자랑하는 인물을 상대로 주고받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당시 사회의 실정을 폭로하고, 정치제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세태를 풍자하였다. 운학에 관한 저술로 ≪삼운보유 三韻補遺≫와 그것을 증보한 ≪증보삼운통고 增補三韻通考≫가 있다. 묘는 대흥면 갈산리.
■ 박 현(朴 ?)
호는 포재(浦齋), 본은 울산(蔚山). 순조 때 진사. 문장이 뛰어나 동유록(東遊錄) 등 유고 수십편이 전한다. 호조참판을 증직받았다. 묘는 광시.
■ 성 간(成 侃) 1427(세종 9)~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화중(和仲), 호는 진일재(眞逸齋). 지중추부사 염조(念祖)의 아들이며 유방선(柳方善)의 문인이다.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53년(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후, 전농직장(典農直長)?수찬(修撰)을 거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그는 경사(經史)는 물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도 두루 섭렵하여 문장?기예(技藝)?음률(音律)?복서(卜筮) 등에 밝았다. 특히, 시부(詩賦)에 뛰어나, 〈궁사 宮詞〉?〈신설부 伸雪賦〉 등을 남겼으며, 패관문학에 속하는 〈용부전 弁夫傳〉은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저서로는 ≪진일재집≫이 있다.
■ 윤봉조(尹鳳朝) 1680(숙종 6)~1761(영조 3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명숙(鳴叔), 호는 포암(圃巖). 유건(惟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비경(飛卿)이며, 아버지는 직장(直長) 명원(明遠)이며, 어머니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이다.
1699년(숙종 25) 생원이 되고,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사서?정언?부수찬 등을 거쳐, 1713년 암행어사가 되었다. 이어 이조좌랑?부교리?사인?응교 등을 역임하고 승지가 되었다. 영조가 숙종 때의 구신을 등용하려 하므로 어느 벼슬에 누구를 쓰는 것이 옳다는 식의 말을 하여 영조에게 경박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이조참의 방만규(方萬規)의 상소사건에 관련되어 하옥되었다가 삭주에 귀양갔으나 곧 석방되었으며,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에 의하여 홍문관대제학에 천거되었으나 영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광좌(李光佐)가 정권을 획득하자 정의현(旌義縣)에 귀양가서 오랫동안 안치되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에 실록도청당상을 겸하여 ≪경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735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가 1741년 관직이 복구되어 공조참판이 되었다. 1743년 다시 부제학이 되고 이어 지중추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57년 우빈객(右賓客)?판돈녕부사를 거쳐 1758년에 대제학이 되었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소차(疏箚)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포암집≫이 있다.
■ 이가환(李家煥) 1742(영조 18)~1801(순조 1).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정헌(貞軒). 익(瀷)의 종손으로, 할아버지는 명진(明鎭)이고, 아버지는 용휴(用休)이며, 어머니는 유헌장(柳憲章)의 딸이다. 천주교인 이승훈(李承薰)의 외숙이다.
학문적 교우로는 정약용(丁若鏞)?이벽(李檗)?권철신(權哲身) 등 초기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1771년(영조 47) 진사가 되고, 1777년(정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1780년 비인현감이 되었다. 1784년 생질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오고 동료 학자들이 서학에 관심을 가졌을 때, 천주교에 대한 학문상의 관심과 우려로 이벽과 논쟁을 벌이다가 도리어 설득되어 천주교인이 되었다. 이벽으로부터 서학 입문서와 ≪성년광익 聖年廣益≫ 등을 빌려 탐독하고, 제자들에게도 전교하는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1791년 신해박해 때에는 교리 연구를 중단하고,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서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그 뒤 대사성?개성유수?형조판서를 지냈고,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입국사건에 연루되어 충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도 천주교인을 탄압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천주교를 연구해 1801년 이승훈?권철신 등과 함께 옥사로 순교하였다.
정조로부터 ?정학사(貞學士)?라 호칭될 만큼 대학자였다.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해 스스로 "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라고 할 만큼 수학의 대가였다. 저서로는 ≪금대유고≫가 있다.
■ 이 낙(李 洛)
호는 퇴암(退庵), 본은 전주, 소생(紹生)의 아들. 벼슬은 현감, 경학(經學)에 전심하였다.
■ 이병휴(李秉休) 1710(숙종 36)~1776(영조 52).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경협(景協), 호는 정산(貞山). 사헌부지평 지안(志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실학자 익(瀷)의 숙부인 명진(明鎭)이고, 아버지는 침(諶)이며, 어머니는 조석제(趙錫悌)의 딸이다.
형 용휴(用休)는 문학적인 면에서 양명학(陽明學)을 수용했고, 조카 가환(家煥, 용휴의 아들)은 공조판서를 지냈는데, 1801년(순조 1)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 신자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다. 익의 형인 잠(潛)의 양자로 들어갔고, 자신은 삼환(森煥)을 양자로 들였다. 양부인 잠은 기사환국 후 경종의 보호를 내세우는 소를 올렸다가 노론에게 역적으로 몰려 장살되었다.
[양명학의 수용] 그는 정치적으로는 근기남인에 속하였다. 13세 내지는 14세부터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나 노론에 의해 역적의 양자로 지목되어 관계 진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익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이익의 대표적인 제자들인 윤동규(尹東奎)?신후담(愼後聃)?안정복(安鼎福) 등과 학문적으로 깊이 교류하였다. 각자의 문집 속에 서로 학문에 대해 토론한 글들이 다수 수록되어 전해진다. 학문적인 면에서 볼 때 그는 이익의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급진적인 성향을 나타냈다.
이익의 학문 중에서도 진보적인 면을 주로 계승, 발전시킨 그는 윤동규?안정복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의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경전을 자주적으로 해석하였다. 그 결과 양명학을 수용하였다. 즉 주자학은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것이므로 당연히 뒷사람이 그 결함을 변론해 완성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은 왕양명(王陽明)의 주자학에 대한 태도와 일치한 것이었다. 또한 양(楊)?묵(墨)?노(老)?불(佛)과 같은 것은 비록 성인의 학문과 다르고 인의(仁義)를 배움에 차이가 있지만 결코 이욕(利慾)을 추구하지 않으므로 그것들을 이단으로 배척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것도 양명 후학인 태주학파(泰州學波)의 이단에 대한 태도와 같다.
또한 주자의 ≪대학장구≫를 배격하고 고본 ≪대학≫의 체재를 타당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나, 도덕적인 이치에 대해서는 누구나 선천적으로 알 수 있으므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같은 지(知)에 관한 공부는 필요 없기 때문에 행(行)에 관한 공부인 성의(誠意)를 제1의 공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 심(心)의 성(性)을 지선(至善)으로 해석한 것, ?명명덕(明明德)?과 ?신민(新民)?을 같은 일로 보고 ?성의?를 ?명명덕?과 ?신민?의 공부로 삼은 것 모두 왕양명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양명의 경우 ?친민(親民)?을 통한 ?명덕?의 시련은 효제자(孝悌子)의 덕목으로 나타나고, 또한 효제자의 사상은 그 뒤 좌파인 나여방(羅汝芳) 등이 학문의 종지로 삼았으므로 그가 ?명명덕?과 ?신민?을 ?효제자?로 본 것도 양명학의 학설과 합치된다. 아울러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 그가 이기(理氣)의 개념을 사실세계의 이기[汎說의 理氣]와 가치세계의 이기[非汎說의 理氣]로 구분한 다음에 인심도심에 대해 이발기발(理發氣發)이라고 할 때의 이기는 가치세계의 이기에 해당된다고 주장해 인심도심설을 가치방면에 국한시켜 논한 점이나, 가치세계의 이치와 사실세계의 이치에 대한 앎을 선천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으로 구분한 것도 왕양명의 입장과 같거나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의 유교사상이 양명학에 입각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양명학의 전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주(程朱)의 설을 끌어다가 자신의 논거로 삼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동료들도 경전에 대한 그의 자의적 해석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양명학으로 의심하거나 배척하지는 않았다.
[사상적 특징-실학적 양명학] 그가 양명학을 수용하게 된 것은 이익의 실학사상이 본래 내포하고 있는 이론적 모순의 해소와 관련이 있었다. 이익은 학문의 궁극적인 목표를 정주학이 아니라 육경(六經)이나 사서(四書)에 두었다. 정주학은 송대에 송나라 사정에 따라 경전을 해석한 것이므로 이익이 살던 시대의 당면한 제반문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이해하였다. 조선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 맞게 경전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우선 그는 ?행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글을 배운다.?고 한 공자의 말을 근거로 덕을 이루는 공부를 실천 위주로 전환해 선진유학(先秦儒學)에서와 같이 효제(孝悌)를 공부의 주된 것으로 삼고, 교제도 ≪논어≫와 ≪효경≫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부하게 한 다음에 가르친다.? 고 한 공자의 말을 근거로 덕을 이루는 효제의 공부만으로는 당면한 정치?사회?경제?국방 등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당시의 역사적인 어려운 문제의 해결을 추구하는 사공(事功)에 관한 학문도 아울러 힘써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덕을 이루는 학문과 사공에 관한 학문을 별개로 구분한 뒤 어느 한쪽만 추구하는 것은 결함이 있기 때문에 양쪽을 다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 위에서 당면한 제반 문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옛 성현의 경전과 중국 및 우리 나라의 역사에 관한 책은 물론이고 개인 문집이나 서양 과학기술에 관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등까지도 두루 섭렵해 정치?경제?사회?국방?외교 등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갖추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익의 이러한 실학사상은 아직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실과 가치 세계를 확연히 구분해 이(理)와 기(氣)의 개념도 사실과 가치에 관한 측면으로 이원화하고, 그 인식 방법도 선천적?경험적인 것으로 구별한 이병휴의 양명학은 이익의 실학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사실세계의 이치에 대한 탐구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점에서 그의 양명학은 다른 학파의 양명학과 구별된다. 예컨대 그의 양명학은 실학적 양명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만년에 선영이 있는 충남 예산에 살면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문하생으로는 우선 이기양(李基讓)이 주목된다.
이기양은 1764년경부터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그의 영향으로 그와 달리 양명학을 정면으로 수용하였다. 또한 이기양을 통해 양명학을 수용한 권철신(權哲身)도 1768년경부터 이병휴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이기양과 권철신에 의해 양명학은 그들의 동료인 한정운(韓鼎運)?이가환(李家煥)?권일신(權日身) 등과 그들의 문도인 정약전(丁若銓)?이벽(李檗)?이승훈(李承薰) 등에게 전파되어 성호학파 소장학자들의 지배적인 학문으로 발전해 갔다. 이들 소장 양명학자들은 뒤에 서양 과학기술과 천주교 수용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이 서양 과학기술과 천주교의 수용에 있어서 특별한 반응을 나타낸 것은, 이익의 실학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해 덕을 이루는 학문을 선진 유학에서와 같이 실천 위주로 전환하고 사실세계의 이치에 대한 적극적인 탐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이병휴의 실학적인 양명학을 그들이 계승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저 서] 오로지 학문만을 연구하며 일생을 보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정산잡저 貞山雜著≫?≪심해 心解≫?≪정산고 貞山稿≫?≪정산시고 貞山詩稿≫ 등이 있다. 이 중 ≪정산잡저≫는 서간(書簡)?서문(序文)?발문(跋文)?논(論)?설(說)?변(辨)?고(考) 등을 대체로 연대순으로 묶어 놓은 것으로 그의 문집에 해당한다.
≪심해≫는 이익의 ≪질서 疾書≫와 같이 평생 여러 경전을 공부하면서 깊이 사색을 통해 얻은 독창적인 견해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서 그의 유교사상을 체계적으로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하지만 ≪순암총서 順菴叢書≫에 들어 있는 ≪대학심해 大學心解≫를 제외한 나머지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정산고≫는 권철신(權哲身)이 ≪정산잡저≫에 수록된 글들을 골라 엮은 것이고, ≪정산시고≫는 시를 모아 놓은 것이다.
■ 이삼환(李森煥)
호는 목재(木齋), 본은 여주. 이병휴(李秉休)의 아들, 성호(星湖) 이익(李翼)의 제자. 부친의 학문을 계승하여 경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소순산방장(小盾山房藏)≫ 8권, ≪목재음어(木齋◇語≫ 1권 등 저서가 있다.
■ 이영원(李榮元)
자는 자선(子善), 호는 용계(龍溪), 본은 함평(咸平). 뜻이 높고 문필이 뛰어나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였다. 유고가 전한다.
■ 이용휴(李用休) 1708년(숙종 34)~1782(정조 6).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경명(景命), 호는 혜환재(惠渶齋). 기(沂)의 아들이며, 잠(潛)의 조카로 실학의 대가 가환(家煥)의 아버지이다. 작은아버지 익(瀷)의 문하에서 배웠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시속의 풍조를 벗어나 경전에 모법을 두고 고인지법(古人之法)에 맞는 문장을 이룩하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았다. 음보(蔭補)로 벼슬이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작품은 자기 가통의 작품을 따라 천문?지리?병농 등 실학의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그와 같은 사상에 입각한 것이 많다. 〈해서개자 海西瞰者〉라는 한문소설에서 거지〔瞰乞〕가 순진하고 거짓없는 마음씨를 가졌다고 한데 이어서, 거친 들판, 옛 산협에 숨은 선비 또는 농촌에서 일하는 이들 가운데에 참된 사람이 있으리라고 하여 하층민의 입장에서 전(傳)을 썼다. 이는 전의 본래적 성격과 다른 것이었다. 그의 문학관은, 문학의 영달을 위한 수단이 아닌 문학 그 자체의 진실을 추구하자는 것이었고, 주자학적 권위와 구속을 부정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사상적 고민이 깊지 않은 한계를 지녔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문인의 사명과 창작하는 방법을 진지하게 생각하였고, 당대 30여년을 문장가로서 남인계의 문권을 잡았다. 작품으로는 신광수(申光洙)가 연천고을 원으로 부임할 때 지어 준 〈송신사군광수지임연천 送申使君光洙之任漣川〉 등이 있고, 저서로는 ≪탄만집 砥淀集≫?≪혜환시초≫ 등과 ≪혜환잡저≫가 있다.
■ 이윤정(李允貞)
본은 전주. 은일(隱逸)로 집의(執義)에 이르렀고, 율곡(栗谷)?우계(牛溪)와 친교하였다. 문집이 있고 묘는 광시면 서초정리에 있다.
■ 이지렴(李之濂) 1628(인조 6)~1691(숙종 1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함풍(咸豊). 자는 양이(養而), 호는 치암(恥菴). 아버지는 부위(副尉) 초옥(楚玉)이다.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학문에 뛰어나 이름이 떨쳐져 송준길(宋浚吉)?민진원(閔鎭遠) 등의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사퇴하고, 뒤에 부수(副率)를 잠시 지내고 광릉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1682년(숙종 8) 청산현감(靑山縣監)으로 부임하여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쓰고, 1687년 흡곡현령(縕谷縣令)이 되어 교학과 풍속의 순화에 노력하였다. 학문뿐만 아니라 시와 글씨도 뛰어났다. 유저로 ≪치암집≫이 있다.
■ 이해문(李海文) 1911~1950.
시인. 충청남도 예산(禮山) 대술면 이티리 태생. 아호(雅號) 또는 필명(筆名)으로 고산(孤山)과 금오산인(金烏山人)을 사용하고 있는데, 전자는 예산의 옛 지명이고 후자는 그가 다녔던 예산보통학교의 뒤에 위치한 산의 이름이다.
그는 예산보통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4학년 때 중퇴했다고 한다. 그가 학업을 중단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라고 하지만, 그 확실한 것은 확인되어 있지 않다. 이후 독학으로 한학(漢學)과 중등 과정을 통신강의록으로 학습하여 공무원 시험에 합격, 예산군 관내 면사무소에 근무하기도 했다. 그가 어떤 경로를 밟고 문학수업을 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1930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본명 이외에 고산 또는 금오산인 등의 이름으로 지상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37년 6월에 창간된 시동인지 ≪시인춘추 詩人春秋≫와 1938년 6월 창간된 ≪맥≫동인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전자 ≪시인춘추≫는 이가종(李家鍾)?황백영(黃白影)?박노춘(朴魯春)?이해문 등 예산 및 그 인접의 지역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이해문은 그곳 관내 면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시작 활동을 하다가 1950년 6?25동란 때, 인민군에 의해 부르주와 반동으로 몰려 총살되었다고 한다. 그의 묘소는 고향인 대술면(大述面) 소재의 선영에 있다.
시집으로는 1939년 1월 시인춘추사에서 간행한 ≪바다의 묘망(渺茫)≫ 한 권이 있을 뿐이다. 이외에도 시와 수필 및 평론 등이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각 지상에 다수 발표되어 있으나, 아직 정리되지 않고 있다.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인생이 예술을 낳는다?는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하였듯이, 이는 바로 그의 시적 기조가 되기도 한다. 일상 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자연스런 유로(流露), 곧 감상과 낭만성이 그의 시적 특색으로 되고 있다.
■ 이희환(李囍煥)
호는 운포(蕓圃). 실학자, 아들 재위(載威)와 함께 물보(物譜)를 지었다.
■ 조석형(趙錫馨) 1598(선조 31)~1656(효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자복(子服), 호는 근수헌(近水軒). 아버지는 예조참판 희일(希逸)이며, 어머니는 정흠(鄭欽)의 딸이다.
광해군 때 유배되었던 아버지를 따라 배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하고 있다가,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니 그의 할아버지?아버지와 함께 3대에 걸쳐 진사시에서 1등하는 가문이 되었다.
일찍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시직(侍直)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후에도 시직?부수(副率) 등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머물면서 스스로 당호를 ?근수헌?이라 하고 그가 지은 시편을 모아 간행하는 등 학문에 정진하였다. 당시(唐詩)와 진체(晉體)에 뛰어났다.
■ 추 식(秋 湜) 1920~1987.
소설가?방송극작가. 본명은 성춘(成春). 충청북도 청주 출신. 1940년 충청북도 도청에 근무하는 한편, 1944년 극단을 조직하여 희곡을 쓰다가 만주에 가서 외숙의 농장에서 지냈다.
광복 후 귀국하여 독립신문?평화신문?연합신문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1949년 대전의 호서신문(湖西新聞)과 중도일보(中都日報)의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내기도 하였다. 1953년 상경하여 동양통신 취재부장을 거쳤으며, 1959년 연합신문 문화부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1962년 귀향하여 작품 창작에 전념하였다.
1955년 ≪현대문학 現代文學≫ 6월호에 단편소설 〈부랑아 浮浪兒〉와 1956년 2월호에 〈모든 나는 오라〉가 추천되어 작가로 인정받았다. 이어 단편 〈비인격적 非人格的〉이 1956년 ≪현대문학≫ 7월호에, 〈곰 선생〉이 12월호에, 그리고 〈인간제대 人間除隊〉가 1957년 7월호에 각각 발표되었다. 〈인간제대〉로 같은 해에 한국문학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1950년대의 사회적 풍조가 주로 묘사되었으며, 특히 소외층의 고통에 관심이 기울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기적궁 奇蹟宮〉(文學藝術, 1957.11.)?〈죄 罪〉(文學藝術, 1958.5.)?〈다락속의 서노인〉(現代文學, 1965.1.) 등 역작을 계속 발표하였다.
1958년에 작품집 ≪인간제대≫(日新社)가, 1962년에는 연작소설 〈가시네 선생〉(乙酉文化社)이 간행되었다. 그밖에 단편으로 〈황색시인 黃色詩人〉(新太陽, 1957)?〈대류 對流〉(自由文學, 1958.5.)?〈도관장선생 都觀長先生〉(現代文學, 1959.1.) 등이 있다. 또한 〈통로 通路〉(自由文學, 1960.2.)?〈왜가리〉(現代文學, 1960.9.)?〈염병 染病〉(思想界, 1960.11.)?〈꽃제비〉(知性, 1960)?〈온선생 溫先生)(現代文學, 1964.6.) 등이 있다. 장편 〈25번풍 二五番風〉(聯合新聞, 1958)?〈바다는 마르지 않는다〉(서울日日新聞, 1959)?〈봄 눈이 녹듯이〉(民主新報, 1962)?〈58청춘 五八靑春〉(京鄕新聞, 1964) 등을 신문에 연재하였다.
시나리오는 〈인생유전 人生流轉〉(1960)?〈바위고개〉(1960)?〈견우직녀 牽牛織女〉(1961)?〈대춘 待春〉(1965)?〈합의서 合意書〉(1966) 등이 있다. 방송극으로는 〈동백아가씨〉(1963)?〈단골 지각생〉(1963)?〈김순경 金巡警〉(1963)?〈사랑의 배달부(配達夫)〉(1964)?〈마포(麻浦) 사는 황부자〉(1964)?〈날개부인〉?〈보경아가씨〉 등을 발표하였다. 삽교에서 살다가 1987년 사망. 묘지는 용인 천주교 묘지에 있다.
제 6절. 예술
■ 고영귀(高英貴)
본은 개성,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탁본(拓本)의 대가, 추사 김정희의 필적 70여 점의 목각원판(木刻原版)을 남기도 1987년 별세.
■ 고명득(高明得)
호는 운봉(雲峯), 본은 제주. 가수(歌手).
■ 김 구(金 絿) 1488(성종 19)~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또는 삼일재(三一齋). 의몽(義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예(司藝)이고, 아버지는 대흥현감(大興縣監) 계문(季文)이며, 어머니는 이겸인(李兼仁)의 딸이다.
거주지는 서울 인수방(仁壽坊)이었고, 충청도 예산에도 근거지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해 1503년(연산군 9)에 한성시(漢城試)에서 일등으로 뽑혔고, 1507년(중종 2) 생원?진사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해 시관을 놀라게 하였다. 6년 뒤인 1513년에 별시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정자를 거쳐 전경(典經)?사경(司經)?부수찬 등을 지냈다.
1515년에는 기준(奇遵)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이어서 홍문관?수찬부교리를 거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다. 신병으로 일시 사직했다가 다시 관직에 나가 이조좌랑?정랑?사간?홍문관직제학?동부승지?좌승지 등을 지냈다. 1519년 5월 같은 사림파인 김식(金湜)이 성균관대사성이 되자, 그의 후임으로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이로 인해 사림파는 관료들을 육성하는 성균관과 문한?언론기관인 홍문관을 장악해 그들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1519년 11월에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 훈구 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개령(開寧)에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뒤에 죄목이 추가되어 남해로 이배되었다. 남해에 이배된 지 13년 만에 임피(臨陂)로 가깝게 옮겼다가, 2년 뒤에 풀려나와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유배중 부모가 모두 죽고 그 때문에 그도 병을 얻어 죽었다. 그 뒤 선조 때 그가 지은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표문(表文)이 명나라로부터 호의를 얻어 그 공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었다.
일찍부터 성리학 연구에 전념해 학문 실력이 조광조(趙光祖)?김식과 겨눌만했다 한다. ≪전고대방 典故大方≫의 문인록에 의하면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음률에도 능통해 악정(樂正)에 임명된 적이 있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안평대군 용(安平大君瑢)?양사언(楊士彦)?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시대 전기 서예계의 4대가로 손꼽힌다. 서체가 매우 독특해 그가 살았던 인수방의 이름을 따서 ?인수체(仁壽體)?라고 했으며, 중국 사람들까지도 그의 글씨를 사갈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시독관(侍讀官)으로도 활약해 중종으로 하여금 사림파의 개혁 정치에 적극 호응하도록 하였으며, 조정의 일에 임해서는 매우 강개하였다. 또, 조광조와 함께 소격서(昭格署)의 혁파에 앞장섰고, 사림파 대간(臺諫)의 현실 개혁 상소에도 적극 후원하였다.
예산의 덕잠서원(德岑書院)과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암집 自庵集≫, 유품으로는 ≪자암필첩 自庵筆帖≫?≪우주영허첩 宇宙盈虛帖≫과 예산 소재의 〈이겸묘지 李謙墓誌〉 등이 있다. 또 단가 3수와 〈화전별곡 花田別曲〉이 그의 문집에 전한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 김명희(金命喜) 1788(정조 12)~1857(철종 ).
조선 후기의 서예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원(性源), 호는 산천(山泉). 노경(魯敬)의 아들이며, 정희(正喜)의 아우이다. 학문이 깊고 시문과 글씨에 능하였다. 1810년 진사에 급제하여 홍문관직제학을 지냈으며, 관직은 강동현령(江東縣令)에 그쳤다.
1822년 동지 겸 사은정사인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서 연경(燕京)에 들어가 청나라의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 및 진남숙(陳南淑)?오숭량(吳嵩梁)?이장욱(李璋煜) 등의 명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특히 유희해에게 우리 나라의 금석학본을 기증하여 ≪해동금석원 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의 글씨는 구양순(歐陽詢)의 법을 따랐지만 형 정희의 글씨를 익혔으며, 특히 그의 소해(小楷)는 형의 글씨와 흡사하다. 그리고 감식에도 상당히 뛰어났으나 형의 명성이 워낙 높아 오히려 빛을 발휘하지 못한 느낌이 있다
■ 김정희(金正喜) 1786(정조 10)~1856(철종 7).
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503여 종에 이른다. 예산 출신.
〔생애〕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 판서 노경(魯敬)과 기계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큰아버지 노영(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 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된다. 그리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온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온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활동 상황〕(1) 학문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 기예(聰明氣銳)하여 일찍이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 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같은 거유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 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러 점차 난숙해 갔다. 종래 경학(經學)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金石學)?사학?문자학?음운학?천산학(天算學)?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의 수탐(搜探)과 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 禮堂金石過眼錄≫?〈진흥이비고 眞興二碑攷〉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신위(申緯)?조인영(趙寅永)?권돈인?신관호(申觀浩)?조면호(趙冕鎬)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경학은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실사구시설 實事求是說≫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수많은 청대 학술의 거벽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 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불교학(佛敎學)이다. 용산의 저택 경내에 화엄사(華嚴寺)라는 가족의 원찰(願刹)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佛典)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특히 백파(白坡)와 초의(草衣) 양 대사와의 관계가 깊었다. 그리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 서간 및 영정(影幀)의 제사(題辭)와 발문(跋文)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선지식(善知識 :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거유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미칭(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 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2) 예술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국서(國書)와 국화풍(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眞蹟 : 친필)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趙孟琅)?소동파(蘇東坡)?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는 시도(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蘇軾)?두보(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시도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시선제가총론 詩選諸家總論≫에서 시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화풍(畵風)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서?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怜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고담(枯淡 : 글이나 그림 따위의 표현이 꾸밈이 없고 담담함)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를 노출하는 문기(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난(蘭)을 잘 쳤다.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였다.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 : 맑고 고결하며 예스럽고 아담하다)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이하응(李昰應)?전기(田琦)?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藝苑 : 예술가들의 사회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 歲寒圖〉와 〈모질도 幢屬圖〉?〈부작란도 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시?서?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각(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인신(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청나라의 비파서도(碑派書道)가 낳은 등석여(鄧石如)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김정희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인각(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고인(古印)의 인보(印譜 : 여러 가지 인발을 모아둔 책)를 구득하여 직접 진한(秦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 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낙관(落款)에 쓰고 있었다.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자각풍(自刻風)인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여, 졸박청수(拙樸淸瘦)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3) 문학 김정희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한묵(翰墨 : 문한과 필묵이라는 뜻으로, 글을 짓거나 쓰는 것을 이르는 말)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 같은 편지 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내면 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도 한글 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어문 의식(語文意識)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언간(諺簡 : 언문 편지라는 뜻으로, 한글로 된 편지)이 40여 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 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다. 또 한글 서예 면에서 민족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 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 나라 역사상에 예명(藝名)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였다. 즉,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완당척독 阮堂尺牘≫(2권 2책, 1867년)?≪담연재시고 覃謨齋詩藁≫(7권 2책, 1867년)?≪완당선생집≫(5권 5책, 1868년)이 있다. 그리고 ≪완당선생전집≫(10권 5책, 1934년)은 종현손 익환(翊煥)이 최종적으로 보충, 간행한 것이다.
고택이 신암면 용궁리에 있고 학예술비가 세워졌으며, 고택에 영정(影幀)을 보존하고 있다.
■ 이덕성(李德成) 1655(효종 6)~1704(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득보(得甫), 호는 반곡(盤谷)?지비자(知非子).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 후생(德泉君厚生)의 8대손으로, 아버지는 후영(後英)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호조참판 문수(文秀)의 딸이다.
1677년(숙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82년 춘당대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부정자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현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의정부사록?의금부도사?성균관전적?공조좌랑?병조좌랑 등을 거쳐 1684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685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는데, 이 때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다가 순안현령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곧 병조정랑을 거쳐 다시 정언?지평이 되어 국정 전반에 걸친 시폐(時弊)를 개혁하기 위한 적극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병조정랑?사복시정을 거쳐 1687년 동래부사가 되어 동래상인들의 잠매행위(潛賣行爲 : 밀매행위)와 왜인의 불법을 징치하는 데에 크게 힘썼다.
기사환국 때에 일시 사직하여 향리에 돌아갔다가, 해주목사?병조참지?의주부윤?장례원판결사?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96년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동부승지?예조참의가 되었다. 1699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서 사서(史書)를 구입하다 금령에 걸려 파직되었다. 다시 형조참의?무주부사?강원감사?형조참의 등을 거쳐 1704년 충청감사가 되었으나, 재직 중에 병으로 죽었다. 특히 글씨에 능하여 당시에 이름이 높았다. 묘는 응봉면 후사리.
■ 이사관(李思觀) 1705(숙종 31)~1776(영조 5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숙빈(叔賓). 시성(始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발(汝發)이고, 아버지는 종성부사 기성(基聖)이며, 어머니는 김유(金洧)의 딸이다. 기한(基漢)에게 입양되었다.
1729년(영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737년 통덕랑(通德郞)으로서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747년 정언(正言)으로 청요직(淸要職)에 발을 들여놓은 뒤 2년 후 지평(持平)?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1759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직전 논란이 있어 황주목사로 파견되었다가 결국 1762년 다시 충청감사가 되었다.
이듬 해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천거로 병조참판으로 탁용되었으며 도승지를 거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호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일시 한성부좌윤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판서?호조판서를 지냈다. 1772년 문소전(文昭殿)의 옛터에 새로이 비각을 건립한 공으로 가자되었고, 그 해 10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무고를 받고 한 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판중추부사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1774년 벼슬을 떠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듬 해 병으로 영중추부사의 한직을 맡았다가 영조가 은퇴하고 세손(世孫 : 정조)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1776년 다시 우의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던 중 등청하다가 죽었다. 영조는 직접 제문을 지어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문장에 매우 능했고 글씨도 뛰어났다 한다. 하지만 사신(史臣)은 그가 문식(文識)이 있고 평소 명망도 높았으나, 재상이 되어서는 일을 크게 처리하지 못한 ?반식재상(伴食宰相)?으로 적고 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 정언설(鄭彦說)
벼슬은 현감, 글씨를 잘 썼다.
■ 조석형(趙錫馨) 1598(선조 31)~1656(효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자복(子服), 호는 근수헌(近水軒). 아버지는 예조참판 희일(希逸)이며, 어머니는 정흠(鄭欽)의 딸이다.
광해군 때 유배되었던 아버지를 따라 배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하고 있다가,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니 그의 할아버지?아버지와 함께 3대에 걸쳐 진사시에서 1등하는 가문이 되었다. 일찍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시직(侍直)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후에도 시직?부수(副率) 등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머물면서 스스로 당호를 ?근수헌?이라 하고 그가 지은 시편을 모아 간행하는 등 학문에 정진하였다. 당시(唐詩)와 진체(晉體)에 뛰어났다.
제 7절. 선행(善行)
■ 김건식(金健植)
본 김해. 선행(善行)으로 비(碑)가 섰다.
■ 김병선(金秉善)
자는 선일(善一), 본 안동. 선행으로 표창받다.
■ 김재일(金在一)
자는 희빈(羲賓), 호는 혜산(惠山), 본 광산. 선행으로 표창받다.
■ 김지태(金智泰)
본 김해. 면민이 세운 선행기념비가 오가면 역탑리에 있다.
■ 박영주(朴永柱)
자는 영재(英材), 호는 송재(松齋), 본 밀양. 선행으로 표창받다.
■ 안 혁
자는 성로(星老), 호는 성암(醒庵), 본은 순흥(順興). 대흥향교 전교로서 향교를 중수 재건. 성균관장으로부터 성균장(成均章)을 받음.
■ 어재승(魚在乘)
자는 낙경(洛卿), 호는 양오(陽梧), 본 함종(咸從). 선행으로 표창받다.
■ 인영배(印泳培)
본은 교동(喬洞). 선행송덕비가 덕산면 낙상리에 섰다.
■ 장계환(張啓煥)
자는 보현, 본은 안동. 벼슬은 평택 현감역임. 가문에 곡간문을 열어 기민(飢民)을 구제하여 응봉면 지석리와 신리에 송덕비가 섰다.
■ 최규석(崔圭錫)
본은 전주. 벼슬은 참봉. 3?1운동 때 예산읍장으로서 경찰에 연행된 분들을 위해 진력하고, 소작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송덕비가 섰다.
제 8절. 관환(官宦)
■ 강굉량(姜宏亮)
본은 진주. 벼슬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고 길창군(吉昌君)에 봉(封)하다.
■ 강민첨(姜民瞻) ?~1021(현종 12).
고려 전기의 장군. 본관은 진주(晉州).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지기(志氣)가 있고 강하고 과감하여 주로 전공을 통하여 입신하였다. 1012년(현종 3) 5월에 동여진(東女眞)이 영일(迎日)?청하(淸河) 등지에 쳐들어오자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조자기(曺子奇) 등과 함께 안찰사로서 주군병(州郡兵)을 독려하여 격퇴하였다.
1016년에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으며, 1018년에는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내침하자 대장군으로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패배한 소배압의 군사가 바로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다시 이를 추격하여 자주(慈州)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공으로 1019년에 응양상장군주국이 되고, 곧 이어 우산기상시에 올라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이듬해 지중추사 병부상서가 되었다. 죽은 뒤에 3일 동안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그의 공로로 아들 단(旦)에게도 녹자(祿資)를 가하였다. 태자태부에 추증되었으며, 문종 때 공신각에 올랐다. 묘지는 대술면 이티리.
■ 강봉래(姜鳳來)
벼슬이 현감에 오르다.
■ 강완숙(姜完淑) 1761(영조 37)~1801(순조 1).
초기 천주교회 순교자. 최초의 여성회장이다. 세례명 골롬바. 충청남도 내포지방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덕산에 사는 홍지영(洪芝榮)에게 후처로 시집갔으나, 남편의 성품이 용렬하여 원만한 가정생활을 이루지 못하였다.
천주교가 충청도 지방까지 전해지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과 헤어져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 필주(弼周)와 함께 서울로 이사해 살았다. 서울에 올라온 뒤 교우들과 접촉하면서 전교에 힘쓰는 한편, 지황(池璜) 등을 도와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 데 큰 소임을 하였다.
주문모가 1795년(정조 19) 12월 밀입국하여 서울 최인길(崔仁吉)의 집에 숨어서 전교활동을 하던 중, 1795년 6월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강완숙은 그를 자기집 나뭇광에 숨겨주었으며, 그 뒤 6년간 주문모의 전교활동을 여러 모로 도왔다.
주문모는 그녀에게 영세를 주고 여회장으로 삼아 여자들에 대한 전교를 전담하게 하는 한편, 교회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녀는 당대의 남인학자들과도 교유하여 교리에 대한 토론도 하였으며, 구변과 수완이 좋아 많은 부녀자들을 감화시켜 입교시켰는데, 특히 왕실의 은언군(恩彦君)의 처 송씨와 그의 며느리 신씨(申氏)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문모에게 직접 영세를 받게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그녀의 다방면에 걸친 활동으로 교세는 크게 늘어났지만,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같은 해 2월 28일 체포되어 갖은 고문으로 주문모의 행방을 추궁당하면서도 끝내 함구하여, 7월 2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 강 훈(姜 薰)
자는 춘백(春伯), 본은 진주. 참의 이원(履元)의 아들. 공조 참판 역임, 묘는 신양면 도덕동에 있다.
■ 강종경(姜從慶)
생원으로 사헌부감찰 역임. 무오사화 때 3년 동안 적거(謫居), 증 대사헌. 묘 신암면 용궁리.
■ 강태봉(姜泰鳳)
본은 진주. 대흥면 금곡리 출생. 청원 영동군수, 옥천 농지개량조합장 역임.
■ 경 허(鏡 虛) 1846(헌종 12)~1912.
조선 말기의 승려.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大禪師)이다. 성은 송씨(宋氏).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전주 출신. 아버지는 두옥(斗玉).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죽었으며,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다. 계허(桂虛)의 밑에서 물긷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냈다. 1862년(철종 13) 여름부터 마을의 선비에게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서삼경과 기초적인 불교경론(佛敎經論)을 익혔다.
〔행 적〕 그 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논어≫?≪맹자≫?≪시경≫?≪서경≫ 등의 유서(儒書)와 노장(老莊) 등의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하였다. 1871년(고종 8) 동학사의 강사로 추대되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학인은 항상 80명을 넘었다.
1879년에 옛 스승인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가까운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마을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앉아 밤새도록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였음을 깨닫고 새로운 발심(發心)을 하였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조실방(祖室房)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시작하였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자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여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하였다. 석달째 되던 날, 제자 원규(元奎)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李處士)로부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듣고 의심이 생겨 그 뜻을 물어왔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오도(悟道)하였다. 그 뒤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다. 그때에도 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悟後修行)의 좌선을 계속하였다. 1880년 어느 날, 천장암에서 설법하면서 자신이 법통을 이어받은 전등연원(傳燈淵源)을 밝혔다. 그의 법통은 ?용암(龍巖)의 법통을 이었으며, 청허(淸虛)의 11대손이요, 환성(喚惺)의 7대손?이라고 하였다.
1884년 천장암에서 만공(滿空)?혜월(慧月)?수월(水月) 등의 삼대제자를 지도하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夫)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이때부터 충청남도 일대의 개심사(開心寺)와 부석사(浮石寺)를 왕래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교화활동을 하면서 크게 선풍을 떨쳤다. 그 당시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요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다.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였고,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낡은 윤리의 틀로는 파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다. 1894년 동래 범어사(梵魚寺)의 조실이 되었고, 1899년 합천 해인사에서 임금의 뜻에 따른 인경불사(印經佛事)와, 신설하는 수선사(修禪社) 등의 불사에 법주(法主)가 되어 ?해인사 수선사 방함인(海印寺修禪社蒡啣印)?과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수선사 창건기?를 집필하였다. 또, 금릉군 청암사(靑巖寺)에서 방한암(方漢巖)을 만나서 설법하여 한암을 대오(大悟)하게 하였으며, 1900년에는 지리산 천은사(天隱寺)에서 여름을 지낸 뒤 화엄사(華嚴寺)로 옮겼다. 1902년에는 범어사 금강암(金剛庵)과 마하사(摩訶寺) 나한상(羅漢像)의 개분불사(改粉佛事)에 증사(證師)가 되었다. 1904년에는 오대산?금강산 등을 두루 돌아 안변 석왕사(釋王寺)에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의 개금불사(改金佛事)에 증사로 참여하였다.
그 해에 천장암에서 다시 만공을 만나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였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새벽 임종게(臨終偈)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사상적 특징〕 그는 생애를 통하여 선(禪)의 생활화?일상화를 모색하였다. 산중에서 은거하는 독각선(獨覺禪)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선의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다. 법상(法床)에서 행한 설법뿐만 아니라 대화나 문답을 통해서도 언제나 선을 선양하였고, 문자의 표현이나 특이한 행동까지도 선으로 겨냥된 방편이요, 작용이었다.
그의 이와 같은 노력으로 우리 나라의 선풍은 새로이 일어났고, 문하에도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새로운 선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그의 문풍(門風)을 계승하는 문손(門孫)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의 선풍은 대략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① 무생(無生)의 경지를 이상으로 삼는다. 무생이란 생기지 않음을 뜻한다. 인간의 참모습을 그는 ?생김 없고, 없어짐 없는? 근원적 예지에서 비롯된다고 본 것이다. ② 무상(無常)을 초극(超克)하는 길은 오직 선(禪)에 있다고 보았다. 스스로 무상을 체험하였고, 또 선의 참구(參究)를 통해서 이것을 극복하였다. 따라서, 그의 가치관은 선의 수행과 선의 생활화를 통한 무상의 초극이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③ 선(禪)과 교(敎)는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그에 의해서 독창적으로 제기된 교설은 아니지만, 그는 이 두 가지가 마치 지혜와 자비의 양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하나만을 고집할 때 궁극적 경지의 증득(證得)이 불가능함을 역설하고 교선겸수(敎禪兼修)를 강조하였다.
④ 간화선(看話禪)과 염불선(念佛禪)을 궁극적인 면에서 하나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선과 염불은 방법상의 차이일 뿐 구경(究竟)의 완성된 경지에서 볼 때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하였다. 선문에서 정혜(定慧)가 원만히 갖추어져야만 견성(見性)이 이루어진다고 하듯이, 염불문에서도 일심(一心)이 불란(不亂)한 삼매경에서만 정불국토(淨佛國土)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견성과 불국토의 실현, 그리고 선정삼매(禪定三昧)와 염불삼매(念佛三昧)는 같은 경지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근대불교사에서 큰 공헌을 남긴 중흥조이다. 승려들이 선을 사기(私記)의 형식으로 기술하거나 구두로만 일러오던 시대에 선을 생활화하고 실천화한 선의 혁명가였으며, 불조(佛祖)의 경지를 현실에서 보여준 선의 대성자이기도 하였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馬祖)로 평가된다. 저서로는 ≪경허집 鏡虛集≫이 있다.
■ 고진태(高鎭泰)?고윤현(高允鉉)
고진태의 본은 제주. 무과급제 후 용양위사과였고, 위술에 명성이 있었다. 고윤현은 명의(名醫)로서 일본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 고한춘(高漢春)
본은 제주. 무과급제 후 절충장군교동방어사(折衝將軍喬洞防禦使)를 역임한 후 벼슬에 뜻이 없어 예산에 낙향.
■ 김연행(金淵行)
자는 인보(仁甫), 호는 허재(虛齋), 본 안동. 이조참의를 증직받음. 유고(遺稿) 있음. 묘 덕산면 외리.
■ 김 용(金 鎔)
자는 자택(自澤), 본은 광산. 자암(自庵) 구(救)의 아들, 종사랑(從仕郞)으로 예조판서를 증직 받음. 묘 신암면 종경리.
■ 김용삼(金溶三)
자는 의백(義伯), 본은 김녕(金寧). 3?1운동 때, 일본헌병이 칼을 들이대고 찌른다고 위협하자 웃옷을 벗어 붙이고 찔러 보라고 호통을 쳤다. 묘는 대술면 이티리.
■ 김용우(金溶禹)
자는 진석(鎭奭), 본은 김녕(金寧). 중추원의관, 3만석을 추수한 부호. 예산농업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 큰 재산을 기증하여 일제 때 연전 폐교위기를 면케 함. 호서은행 두취. 평생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자선을 함. 향천사?월정사에 송덕비가 있다.
■ 김우인(金友仁)
호는 매곡(梅谷), 본은 광산, 송강(松江)문인. 탄방리에 입향.
■ 김유헌(金有憲)
호는 한헌(寒軒), 본은 광산. 조중봉(趙重峰) 문인, 군자감판관.
■ 김응남(金應南)
본은 김녕. 무과급제 후 누진하여 오위도총부총관. 묘 광시면 신흥리.
■ 김이주(金蓬柱) ?~1797(정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월성위(月城尉) 한신(漢藎)이며, 어머니는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和順翁主)이다. 금석학의 대가인 정희(正喜)의 할아버지이다.
1771년(영조 47) 지평(持平)을 거쳐, 이듬해 승지가 되었고, 1773년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의 상소에 의하여 광주부윤이 되었다. 1784년(정조 8) 독옥책관(讀玉冊官)으로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뒤 승진되어 대사간이 되었다. 1785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곧 교체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이듬해 대사간을 지낸 뒤 계속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790년 행부사직?형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죽은 직후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묘 신암면 용궁리.
■ 김진권(金振權)
본은 김녕.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역임. 김형배(金炯培) 준장의 아버지. 예산읍 예산리 태생.
■ 김진규(金鎭圭) 1658(효종 9)~1716(숙종 4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 반(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영의정 익겸(益謙)이고,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만기(萬基)이며, 어머니는 한유량(韓有良)의 딸이다. 누이 동생이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2년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686년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던 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지평으로 기용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깊어지자, 1695년 소론인 남구만(南九萬)에 의해 척신(戚臣)으로 월권 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699년에는 스승을 배반했다는 명목으로 윤증(尹拯)을 공박하였다.
1701년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副提學)?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713년 강화유수에 임명되었다. 그 밖에 홍문관의 여러 관직과 사인(舍人)?빈객(賓客)?이조참판?병조참판?공조판서?좌참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병조참판으로 재직 중일 때 소론에 의해 유배당했다가 2년 후 풀려나왔다.
문장에 뛰어나 반교문(頒敎文)?교서?서계(書啓)를 많이 작성하였다. 또한 전서?예서 및 산수화?인물화에 능해 신사임당(申師任堂)의 그림이나 송시열의 글씨에 대한 해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글씨로는 강화충렬사비(江華忠烈祠碑)?대헌심의겸비(大憲沈義謙碑)?증지평이령비(贈持平李翎碑)가 있다.
정치적으로는 대표적인 노론 정객으로서, 스승인 송시열의 처지를 충실히 지켰다.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영조가 1766년 치제(致祭)했으며, 1773년 문집 간행에 재물을 하사하고 서문을 몸소 지었다. 문집으로 ≪죽천집≫, 편서로 ≪여문집성 儷文集成≫이 전한다.
■ 김택주(金澤?)
자 선경(善慶), 본 김녕. 중추 우화(祐華)의 아들.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이름.
■ 김한신(金漢藎) 1720(숙종 46)~1758(영조 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유보(幼輔). 아버지는 영의정 흥경(興慶)이며, 어머니는 황하영(黃夏英)의 딸이다. 1732년에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和順翁主)에게 장가들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고, 벼슬은 오위도총부도총관?제용감제조를 지냈다.
키가 크고 인물이 준수했으며 재주가 총명하였다. 특히, 글씨를 잘 썼으며, 그 중에서도 팔분체(八分體)에 뛰어나, 애책문(哀冊文)?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썼고, 전각(篆刻)에도 뛰어나 인보(印寶)를 전각하였다. 묘소는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 나옹화상(懶翁和尙 ) 1320(충숙왕 7)~1376(우왕 2).
법명은 혜근(惠勤), 고려 후기의 고승.
〔생 애〕 혜근(彗勤)이라고도 쓴다.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선관서영(善官署令) 서구(瑞具)의 아들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상을 느끼고,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행 적〕 그 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하였다. 그때 이 절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인 승려 석옹(石翁)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인도승 지공(指空)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지내다가 1350년(충정왕 2)에 그의 곁을 떠나 평강부(平江府) 휴휴암(休休庵)에서 한철을 보냈고, 다시 자선사(慈禪寺)의 처림(處林)을 참견(參見)하여 그의 법을 었다. 이듬해 명주(溟州)의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육왕사(育王寺)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하였다.
그곳에서 무상(無相)과 고목영(枯木榮) 등의 승려를 만나 법론(法論)을 벌였고, 1352년에는 복룡산(伏龍山)의 천암장(千巖長)을 찾았다. 그의 소문을 들은 원나라 순제(順帝)는 연경의 광제선사(廣濟禪寺) 주지로 임명하였고, 1356년 10월 15일에는 개당법회(開堂法會)를 가졌다. 순제는 사신을 보내 금란가사(金機袈裟)를 하사하고 지극한 예우로써 우대하였다. 그러나 순제의 만류를 무릅쓰고 주지직을 내놓은 뒤 다시 지공을 찾아갔다가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하였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간곡한 청에 의하여 잠시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때 홍건족이 잇따라 신광사 주위를 노략질하였지만 법력으로 신광사를 수호할 수 있었다. 그 뒤 공부선(功夫選:승과)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으로부터 금란가사와 내외법복(內外法服)?바루를 하사받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졌다. 그 뒤 송광사에 있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였으며, 1376년에는 문수회(文殊會)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다.
그는 정도(正道)가 혼침된 고려 말의 불교계에 습정균혜(習定均慧:참선과 교학을 같이 닦음)로써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승으로서, 철저한 불이사상(不二思想:여기에서는 禪과 敎가 둘이 아님을 일컬음)의 토대 위에서 선(禪)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말의 선풍은 그에 의하여 새롭게 선양되었다. 지공의 선풍이 공해탈선(空解脫禪:空의 이치를 통달하면 해탈한다는 선법)의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이나 조계종 (曹溪宗)과는 다른 임제(臨濟)의 선풍을 도입하여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의 『귀의자심삼보 歸依自心三寶』의 주장과 ?염불은 곧 참선?이라고 한 것은 이후의 우리 나라 선종에서 계속 전승되었다.
계율관(戒律觀)에서도 삼귀의(三歸依)가 아닌 사귀의를 주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계목(戒目)으로는 ① 수정신사귀의(受淨信四歸依), ② 참제제삼업죄(懺除諸三業罪), ③ 발홍서육대원(發弘誓六大願), ④ 최상승무생계(最上乘無生戒)로 나누어져 있다. 이는 일반적인 불교의 5계(戒)나 보살계(菩薩戒)와는 다른 독특한 것이다. 또,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하화중생(下化衆生:중생을 제도함)의 보살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육대서원(六大誓願)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 말 보우(普愚)와 함께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왕명으로 밀성(密城:密陽) 영원사(塋源寺)로 옮기던 중 5월 15일 나이 56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색(李穡)이 글을 지어 세운 비와 부도가 회암사와 신륵사에 있다. 제자로는 자초(自超)?지천(智泉) 등 2,000여 명이 있으며, 저서로는 ≪나옹화상어록 懶翁和尙語錄≫ 1권과 ≪가송 歌頌≫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 만공(滿 空) 1871(고종 8)~1946.
승려. 여산송씨(礪山宋氏). 속명은 도암(道巖), 법호는 만공(滿空), 월면은 법명이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 신통(神通)의 아들이다. 1883년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고, 공주 동학사(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였다. 1884년(고종 20) 경허(鏡虛)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를 은사(恩師)로, 경허를 계사(戒師)로 삼아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 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하였다. 1895년 아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에 범종을 치면서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게송(偈頌)을 읊다가 홀연 깨달았다.
〔행 적〕 그 뒤 공주 마곡사(麻谷寺) 토굴에서 보경(普鏡)과 함께 계속 수도하다가 경허로부터 ?아직 진면목(眞面目)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조주(趙州)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선을 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정진하였다. 그 뒤 경허를 모시고 서산 부석사(浮石寺)와 부산 범어사의 계명암(鷄鳴庵) 등지에서 수도하였다.
1901년 경허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白雲庵)에 들러 며칠 머무르는 동안, 새벽에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철벽의 어둠이 모두 밝게 하소서(願此鐘聲遍法界 鐵圓幽音悉皆明).?라는 게송을 읊으면서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곧 천장사로 돌아와 법열을 즐기던 중, 1904년 함경북도 갑산으로 가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1905년 예산 덕숭산(德崇山)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보임(保任:깨달은 것을 더욱 갈고 닦음)을 하는 동안 참선을 하려는 수도승들이 찾아와 그 지도를 맡게 되었다. 그 뒤 3년 동안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의 선(禪) 지도와 1937년을 전후하여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던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가까이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초암을 짓고 생활을 하다가 1946년 10월 20일에 입적하였다. 나이 75세, 법랍(法臘) 62세였다. 덕숭산에서 다비하여 유골을 모신 부도(浮屠) 만공탑을 덕숭산 금선대 근처에 세웠다. 진영(眞影)은 경허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되어 있다.
〔업적 및 사상〕 그는 덕숭산 수덕사와 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 등을 크게 중창하였고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을 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인 동시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의 성격을 지닌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 당시의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와 각도 지사가 동석한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의 31본산주지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불교를 일본불교화하려는 총독부의 종교정책방침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그 반대의 요지는 종교가 정치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과 한국불교가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에 의하여 일본불교로 변질되어 계율이 문란해지고 한국불교의 전통과 종교적 순수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리고 ?전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郎)는 한국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분명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이 미나미총독을 우리가 지옥에서 구제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941년, 서울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 초대되어 설법하고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가자고 하였다.
그의 사상과 선의 지도방법은 문도들이 편찬한 ≪만공어록 滿空語錄≫에서 살필 수 있다. 그는 존재의 본체를 마음〔心〕?자성(自性)?불성(佛性)?여여불(如如佛)?허공(虛空)?주인공(主人公)?본래면목(本來面目)?자심(自心)?동그라미(○) 등으로 표현하였는데, 이 중 마음이라는 표현을 가장 많이 쓰고 있다. 물질과 상대되는 마음이나 심리학적인 마음이 아니라 우주와 만물의 본체를 뜻하는 마음으로, 개아(個我)의 본체와 우주의 본체를 하나로 파악하였다.
불교의 진수는 이 마음을 깨닫는 데 있고 인간의 가치있는 삶도 이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찾아진다고 보았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는 현상적인 차별이나 분별의 관념에서 철저히 벗어나야 하는데, 수행을 통하여 이 경지에 이르면 그 어떤 사물의 구속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지혜와 자비를 활용할 수 있으며, 그가 바로 불(佛)이요 스승이라 하였다. 이를 위한 수행법으로는 참선을 으뜸으로 보았다.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였고, 제자들에게는 항상 조주(趙州)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도록 가르쳤다. 참선의 보조여건으로는 선지식(善知識:스승)과 수도에 적절한 도량(道場), 함께 수도하는 좋은 도반(道伴)의 세 가지를 중시하였다.
그 중에서도 스승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진정한 스승은 수행자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이며, 수행자가 스승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따라 참선의 수도가 좌우된다고 가르쳤다.
수도승들에 대한 지도방법은 매우 다양하여 침묵 또는 방망이질〔棒〕?할(喝),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격외(格外)의 대화와 동그라미 등 상대와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여러 가지 방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1927년 그가 지은 〈현양매구 懸羊買拘〉라는 글의 끝에 자신을 ?임제32대사문만공(臨濟三十二代沙門滿空)?이라 하여 그의 지도방법이 임제종풍을 계승한 것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출한 제자로는 보월(寶月)?용음(龍吟)?고봉(古峰)?서경(西耕)?혜암(惠庵)?전강(田
岡)?금오(金烏)?춘성(春城) 등과 비구니 법희(法喜)?만성(萬性)?일엽(一葉) 등이 있다.
■ 박규순(朴奎淳) 1740(영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대규(大圭), 호는 비원(肥園). 예산출신. 할아버지는 상빈(尙彬)이고, 아버지는 경명(經明)이며, 어머니는 유응린(柳應漏)의 딸이다.
1777년(정조 1) 친림토역(親臨討逆)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84년(정조 8) 낭청을 거쳐 부수찬이 되었는데, 이때 안동지방의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왕의 비답 (批答)이 안동교중(安東校中)에 보관중 가필(加筆)된 사실을 지적, 여기에 관련된 당시 안동부사 신대승(申大升)을 삭직하고, 관련자들을 모두 처단하게 하는 소를 올려 이를 실천하게 하였다. 곧이어 동부승지 때는 같은 시파(時派)로 찬배되어 있던 윤영희(尹永僖)를 구출하려다 오히려 벽파에게 탄핵을 받아 위도(論島)로 유배되었다.
1794년에는 교리가 되어 당시 외래물품인 왜물(倭物)과 당물(唐物)의 취리를 엄금하도록 하여 사치풍조를 막는 데 힘썼다. 이듬해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공조참의가 되었다. 1807년(순조 7) 영월부사로서 ≪장릉지 莊陵誌≫ 속편을 찬진(撰進)하여 널리 반포하게 하였다.
■ 박경진(朴敬鎭)
자는 성문(誠文), 본은 밀양. 부총관 기풍(基豊)의 아들, 여산부사 역임. 좌승지를 증직받음.
■ 박규세(朴奎世)
본은 울산. 현감 율(?)의 아들, 숙종 8년 문과 급제한 후 전주목사에 이름. 묘는 광시면 관음리에 있다.
■ 박기풍(朴基豊)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유(汝有). 부사 성(聖)의 아들이다. 1777년(정조 1) 무과에 급제, 1780년에 선전관이 되었고, 1800년(순조 즉위년) 함경북도절도사, 1807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도총부부총관으로 양서순무중군(兩西巡撫中軍) 겸 선봉장이 되어 청천강 이북의 각 고을을 회복하였다.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를 겸하여 정주성을 네번이나 공격하여 전세는 유리하였으나 그의 성격이 유약하여 규율을 잡지 못하고 모두 실패하였으므로, 홍문관의 탄핵을 당하고 그 대신 유효원(柳孝源)을 교대하여 마침내 파성하게 되었다.
그 뒤 1813년 좌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815년 이후 좌우포도대장, 1821년 3도통제사(三道統制使), 1823년 좌우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 박기혁(朴基赫)
자는 사현(士顯), 본은 밀양. 영장 규환(奎煥)의 아들. 무과 급제 후 부사 역임.
■ 박덕진(朴悳鎭)
본은 밀양. 부호군(副護軍), 사헌부 감찰, 오위장 역임. 묘는 예산읍 간양리.
■ 박영희(朴永喜)
자 기재(起哉), 본은 밀양. 부사 홍진(弘鎭)의 아들. 무과급제 후 태천현감. 묘 신양면 서계양리.
■ 박원종(朴元鐘)
자는 경린(慶?), 호는 미촌(米村), 본은 밀양. 대술면 농리 출생, 청양 농촌지도소장 역임. 묘는 대술면 농리.
■ 박 율(朴 僻) 1621(광해군 13)~1668(현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자명(子明), 호는 오리(梧里). 대흥(大興) 출신. 아버지는 이건(以健)이며, 어머니는 여계선(呂繼先)의 딸이다. 1642년(인조 20)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54년(효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종 때는 은산현감(殷山縣監)을 지낸 바 있으나 현직시절 부곡(付穀)을 모아 봉납(捧納)하지 않고서 봉납한 것처럼 하였다는 대사간의 탄핵을 받았다. 숙종 때는 장령(掌令)?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주학본원 籌學本原≫이 있으며, 찬서로는 ≪역대제왕전세계도 歷代帝王傳世界圖≫가 있다.
■ 박와남(朴窩男)
본은 울산(蔚山). 관은 장연부사. 임진왜란 때 원종(原從) 일등공신. 묘 광시면 구례리에 있다.
■ 박우철(朴雨喆)
본은 밀양. 대술면 마전리 출생, 충남 및 경상북도 농촌진흥청 지도국장 역임.
■ 박응태(朴應泰)
자는 응원(應元), 호는 연파(蓮波), 본은 밀양. 한학자로 이 지방의 많은 선비를 길렀다. 묘 예산읍 간양리.
■ 박응한(朴應漢)
본은 울산(蔚山). 호는 기암(祈庵). 임헌회(任憲晦)의 문인, 광시면 은사리 출신으로 학행이 뛰어났다.
■ 박인우(朴麟祐)
초명 박인우(朴?? 祐), 호 초암(草庵), 지정(芝亭). 사마양시에 합격. 삼정(三丁)을 1호(一戶)로 편성하여 수군(水軍)을 편성하는 법을 만들었고, 고려 전법판서로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뜻으로 예산읍 신례원 덕방산 아래에 초막을 짓고 은거함. 1987년 창절사(彰節祠)에 모심. 묘소 신례원 2구.
■ 박자형(朴滋亨)
본 밀양. 장손(長孫)의 아들. 병조참의 역임. 묘 예산읍 간양리, 청절사(彰節祠)에 배향.
■ 박장손(朴長孫)
호는 신재(愼齋), 본은 밀양. 전법판사 인우(麟祐)의 손자.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역임. 예산읍 간양리 청절사(彰節祠)에 배향. 묘 간양리.
■ 박정주(朴呈?)
본은 밀양. 진사 한우(旱雨)의 아들, 문과 급제 후 병조참판에 이름. 청절사(彰節祠)에 배향.
■ 박정화(朴鼎和)
자는 유실(有實). 본은 밀양. 경상좌수군절도사, 양주목사 역임. 묘는 주령리.
■ 박 제(朴 悌)
본은 밀양. 진사 영실(榮實)의 아들, 예조참판 역임. 묘 예산읍 간양리, 청절사(彰節祠)에 배향.
■ 박종성(朴宗誠)
자는 경숙(敬叔), 본은 밀양. 사정(寺正) 천원(天源)의 아들, 숙종 때 무과급제 후 삼화부사 역임. 증 좌승지. 묘 신양면 서계양리.
■ 박종량(朴宗亮)
초명은 종성(宗聖), 자는 경인(景寅), 호는 수은(睡隱). 영조 28년 문과급제 후 정언 장령 역임. 묘 광시면 은사리.
■ 박종욱(朴宗郁)
자는 광보(光甫), 본은 밀양. 영조 때 무과급제 후 해미현감.
■ 박준건(朴準建)
본은 밀양. 돈영부도정. 묘 간양리.
■ 박지지(朴知止)
현감(縣監).
■ 박천성(朴天成)
자는 성일(聖逸), 호는 월당(月塘), 본 밀양. 중평(仲平)의 아들, 웅천현감. 이괄의 난 때 호성공신이 되어 돈영부도정에 이름. 시호는 충민공(忠敏公)이다. 묘 대흥면 탄방리.
■ 박철규(朴哲圭)
덕산 출신. 국회의원. 한국전쟁 때 납북됨.
■ 박태여(朴太輿)
본은 밀양. 정주학자(程朱學者), 이위암(李魏岩), 현관봉(玄冠峰)과 친교함.
■ 박현성(朴玄成)
본은 밀양. 창성부사, 영장(營將), 수사(水使) 역임. 묘 대흥면 탄방리.
■ 박현환(朴賢煥)
자는 시중(時中), 본은 밀양. 능주목사 역임. 병조참판을 증직받음. 묘 대흥면 황계리.
■ 박 호(朴 瑚)
본은 밀양. 현감 무생(茂生)의 아들, 청도군수 역임. 대흥면에 낙향.
■ 박 홍(朴 泓) 1534(중종 29)~1593(선조2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청원(淸源). 할아버지는 한(円)이고, 아버지는 별제(別提) 영무(英珷)이다. 어머니는 직장(直長) 정인걸(鄭仁傑)의 딸이다.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에서 출생하였다. 1556년(명종 11)에 23세로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임명된 이후 강계부판관(江界府判官)?정평부사(定平府使)?종성부사(鍾城府使) 등 외직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서 왜적의 선봉을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본진을 소각하고 죽령(竹嶺)으로 후퇴, 적을 방어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령(鳥嶺)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한성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난 뒤라 행재소(行在所)로 찾아가던 중,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을 만나 좌위대장(左衛大將)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에 참여하였다. 이어 신길(申跌)?유극량(劉克良) 등과 함께 병사를 나누어 파주에서 싸웠으나 모두 패해 평양으로 탈출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뒤, 사헌부를 위시한 조신들로부터 영토를 지켜야 할 신하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군율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때가 전시이고 또 후퇴하던 과정에 종군한 것이 감안되어 처벌을 면하였다. 같은 해 6월에 평양이 함락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과 함께 평산으로 들어가 병사를 모으고 있던 중, 당시 이천(伊川)에 있던 세자의 명을 받고 세자를 호위 시종하면서 성천으로 들어갔으며 우위대장?의용도대장(義勇都大將)에 임명되었다.
그 뒤 평양 방면으로 나아가 여러 차례 왜적과 접전했으나 크게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다. 1593년 1월에 평양이 수복되자, 김명원을 따라 파주까지 종군하였다. 그러나 지병이 재발해 치료를 위해 귀향하던 중 사망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박흥양(朴興陽)
본은 반남(潘南). 대술면 이티리 출생, 서산?부여?홍성군수 때 치적이 있음.
■ 박홍진(朴弘鎭)
자는 대중(大仲), 본은 밀양. 부사 기혁(基赫)의 아들, 무과 급제 후 칠곡부사 역임.
■ 서병덕(徐秉德)
자는 유호(攸好), 호는 주은(酒隱), 본은 연산. 희조(喜朝)의 아들, 광시면 구례리 출생, 문과급제 후 관이 한성부판윤에 오르고, 범장(凡杖)을 사(賜)하고 기사(耆社)에 들었다. 시호는 정익(靖翼)이다.
■ 서 풍(徐 ?)
벼슬이 병사(兵使)에 오르다.
■ 서해조(徐海朝) 1689(숙종 15)~1770(영조 4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산(連山). 자는 종지(宗之), 호는 구구재(九九齋). 효적(孝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필행(必行)이고,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욱(○)이며, 어머니는 박율(朴僻)의 딸이다.
1714년(숙종 40) 생원이 되고, 1732년(영조 8) 성균관의 반제(泮製)에서 장원하여 전시에 직부(直赴)하라는 특전을 받았으나 이복령(李復齡)과 시권(試券)이 바뀌었음을 자백하여 취소되었다. 이 해 이 일을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하였으며, 이듬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 옮겼다. 1735년 장릉참봉(章陵參奉)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7년 자여찰방(自如察訪)으로 나갔다가 목릉별검(穆陵別檢)을 거쳐 1742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였다.
1745년 예조?병조좌랑과 병조정랑을 거쳐, 연풍현감으로 나가 빈번한 사행(使行)으로 인한 민폐를 덜어주었다. 1751년에 사헌부지평으로 직무가 번거로운 내직을 피해 외직을 원하던 조재호(趙載浩)를 탄핵하였다. 곧이어 이조정랑으로 옮겼으며, 1753년에는 황해도의 향시(鄕試)를, 1755년에는 전라도의 향시를 주관하였다. 1763년 병조참의에 오르고, 1770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죽었다.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였으며, 30여년의 관직생활 동안 한번도 권세있는 사람에게 아첨한 적이 없었다.
두보(杜甫)의 시를 좋아하였고, ≪춘추좌씨전≫의 문장을 좋아하였다. 저서로는 ≪두시보주 杜詩補注≫?≪좌사초류 左史抄類≫가 있고, 특히 제례에 밝았다.
■ 성건호(成健鎬)
자는 사순(士順), 호는 두산(斗山), 본은 창녕(昌寧). 재원(載瑗)의 아들. 고종 25년 문과에 2등 급제 후 관이 이조참판에 올랐다. 예산읍 거주.
■ 성교수(成喬修)
본은 창녕(昌寧). 수사(水使)에 이름. 청렴하였다. 묘 신양면 귀곡리.
■ 성기노(成耆魯)
자는 종오(宗吾), 호는 연정(蓮亭), 본은 창녕. 선정(善政)으로 비를 세우다.
■성석신(成碩藎)
본은 창녕(昌寧). 숙종 원년 문과급제 후 한성우윤(漢城右尹).
■ 성석기(成碩夔)
본은 창녕. 숙종 10년 문과 급제 후 필선(弼善).
■ 성수묵(成遂?) 1792(정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성취(聖就). 좌승지 범석(範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덕구(德求)이고, 아버지는 부사 긍주(肯柱)이며, 어머니는 이두원(李斗源)의 딸이다. 1825년(순조 25)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29년까지는 한림원직각 등 순탄하게 승진하였다. 같은 해 전라우도암행어사로 그 지역의 문제점을 바로 지적한 바 있고, 1832년 무안현감을 거쳐 183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 동래부사가 되어 이듬해에 대마도의 도주를 상대로 외교문서를 취급한 바 있다.
1839년 대사성, 1840년 이조참의, 1841년 도방대거승지, 1843년 함경도관찰사, 1846년 이조참판?대사헌을 거쳐 1847년 형조판서로 있을 때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8년 좌참찬, 1849년(철종 즉위년) 판윤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듬해 3월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의 정사(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경력이 다양하고 승진이 순탄하였으며, 외교활동이 많았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 성영문(成永文)
호는 정천(正泉), 본은 창녕. 단성현감. 유집(遺集) 있음.
■ 성윤적(成胤績)
본은 창녕. 신양면 귀곡리 출신, 벽동군수. 묘는 신양면 연리에 있음.
■ 성원경(成元慶)
본은 창녕, 호는 만정(萬亭). 민의원의원을 역임하였다.
■ 성원묵(成元?) 1785(정조 9)~1865(고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계연(季淵). 광석(光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덕유(德游)이고, 아버지는 노주(老柱)이며, 어머니는 최창걸(崔昌傑)의 딸이다.
1829년(순조 29)에 왕세자가 친림한 감시(柑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시(殿試)에 바로 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1831년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모사도감(模寫都監)의 도청(都廳)을 지냈다. 1846년(헌종 12)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대사성을 거쳐 1849년(철종 즉위년)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851년에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로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뒤 공조판서?의정부우참찬?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856년에는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 성응우(成應祐)
본은 창녕. 부호군(副護軍). 증 호조참판, 창천군(昌川君).
■ 성 익(成 ?)
자는 태숙(台叔), 본은 창녕. 용(鏞)의 아들, 신양면 귀곡리 출신, 무과급제 후 관이 용호영대장, 4도병사를 지냈는 바 효종 조에 3장신(三將臣)으로 일컬었다.
■ 성재준(成載璿)
자는 우옥(虞玉), 본은 창녕. 판서 원묵(元?)의 아들. 황간현감, 돈영부도정 역임. 묘는 오가.
■ 성정진(成鼎鎭)
호 사귀와(思歸窩), 본은 창녕. 영조 50년 문과급제 후 대사간, 승지 역임. 신양면 귀곡리 거주.
■ 성 한(成 淹) 1664(현종 5)~1719(숙종 4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장(汝張). 아버지는 대팽(大彭)이다. 1689년(숙종 15) 원자 위호(位號) 문제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출되자 그는 이를 개탄하여 상소하려 하였으나, 장인 허격(許格)이 극력 저지하여 그만두었다.
1691년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로 있던 남인 학자 이현일(李玄逸)을 공격하다가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와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 1693년 진해로 귀양갔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 돌아왔다. 이로부터 향리에 숨어 두문불출하다가 1705년 효성과 품행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다. 이 후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에 승진, 1708년부터 회인과 목천의 현감을 지냈는데, 백성들이 비를 세워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유를 즐기지 않았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권세가문에 간 일이 없었다.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한번 만날 것을 원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묘 신양면 귀곡리.
■ 성 흔(成 ?)
호는 삼도당(三木免 堂), 본은 창녕. 원인(元人)의 아들, 문장과 서예에 능하다. 벼슬은 사의(司議). 광해군의 정치가 어두워지자 신양면 귀곡리로 은퇴. 증 좌승지.
■ 송 계(宋啓)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이름, 덕산 송씨의 시조.
■ 숭제대사(崇濟大師)
백제 고승으로 의자왕 7년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강(講)했다.
■ 신경유(辛景愈)
자는 덕원(德元), 본은 영산, 영덕현감, 영주군수, 첨지중추부사 역임. 묘는 대술면 송석리.
■ 신계영(辛啓榮) 1577(선조 10)~1669(현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영길(英吉), 호는 선석(仙石). 서울 출신. 의정(義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鎭)이고, 아버지는 호조좌랑 종원(宗遠)이다. 어머니는 홍담(洪曇)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예산으로 낙향하였다. 몇 년 뒤 부모상을 당했으며, 광해군의 난정에 혐오를 느껴 과거를 보지 않다가 1619년(광해군 11)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검열을 거쳐, 병조좌랑?예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통신사 정립(鄭笠)의 종사관이 되어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德川家光)의 사립(嗣立)을 축하하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 때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잡혀간 조선인 146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당시 일본에서 겪은 감회를 읊은 기행시가 그의 시문집인 ≪선석유고 仙石遺稿≫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634년 동부승지가 되었고, 1637년에는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대가를 지불하고 귀환시키는 속환사(贖還使)가 되어 심양에 다녀왔는데, 이 때 속환인 600여 인을 데리고 왔다.
그 뒤 나주목사?강화유수 등을 거쳐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1639년에는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맞으러 부빈객(副賓客)으로 심양에 갔었고, 다시 1652년(효종 3)에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5년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한운야학(閑雲野鶴)과 더불어 보냈다. 1665년(현종 6) 지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7년에는 판중추부사에 특제되었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저서로 시문집인 ≪선석유고〉〉가 전한다.
■ 신명철(辛命喆)
본은 영산. 영조 26년 온천문과급제 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 신석강(申石岡)
본은 평산. 정랑(正郞) 숙서(叔胥)의 아들, 벼슬은 광양현감. 묘는 봉산면 옥전리.
■ 신수화(辛受和)
자는 제이(濟而), 본은 영산. 참봉 보벽(輔?)의 아들, 안산군수 역임. 호조참판을 증직받음. 묘는 예산읍 관장리.
■ 신종원(辛宗遠)
자는 술고(述古), 본은 영산. 호는 동강(東崗). 금박도사 사평(司?), 연천현감. 호조좌랑 역임. 좌찬성을 증직받음, 묘는 대술면 송석리 탄동.
■ 신최언(辛最彦)
자는 군미(君美), 본은 영산. 금하현감, 첨지중추부사 역임. 묘는 대술면 송석리.
■ 신태현(辛兌鉉)
본은 영산(靈山). 호는 석촌(石村), 익교(益敎)의 아들. 경성대학 졸업, 문교부 편집국장, 경희대?해양대 교수 역임. 묘는 대술면 송석리.
■ 심여경(沈餘慶)
벼슬이 현감에 올랐다.
■ 안효량(安孝良)
본은 순흥(順興).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묘는 신암.
■ 유 숙(柳 淑) 1324(충숙왕 11)~1368(공민왕 1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순부(純夫), 호는 사암(思庵). 아버지는 태상경(太常卿) 성계(成桂)이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과거에 급제해 안동사록(安東司錄)이 되었으며, 이어 강릉대군(江陵大君 : 공민왕)을 시종해 4년간 원에 있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함께 고려에 돌아와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다. 이듬 해에는 연경(燕京)에서 왕을 보좌한 공으로 연저수종(燕邸隨從) 1등공신의 호를 받았다.
이어 우대언?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하다가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무고로 파직되어 시골에 돌아가 있었다. 조일신이 죽은 뒤 다시 기용되어 1354년 우대언(右代言)?판전교(判典校)?판도판서(版圖判書)?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1356년에는 추밀원학사(樞密院學士)가 되었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에 임명되었다. 1359년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있을 때 기철(奇轍) 일당을 잡아죽이는 데(1356년) 세운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으며, 다시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올랐다.
그 해 겨울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에게 남행하도록 권하였다. 이어 한림학사 승지 동수국사(翰林學士承旨同修國史)를 역임했으나, 안우(安祐) 등의 위협으로 동경유수(東京留守)로 나갔다. 1362년에는 지도첨의(知都僉議)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시중 홍언박(洪彦博)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다.
1363년 홍건적의 난 때 세운 공으로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의 호를 받았고,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라 서령군(瑞寧君)에 봉해졌다. 또한 같은 해 김용(金鏞)이 흥왕사(興王寺)에서 변란을 일으켰을 때 공을 세워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政堂文學兼監察大夫)가 되어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僉議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에 올랐다. 1365년 그의 충직을 두려워하던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시골에 돌아가 있다가 영광에서 신돈이 보낸 자에게 교살당하였다. 1376년 11월 공민왕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유종호(柳宗浩)
본은 진주. 8?15 해방 후 입법의원 의원 역임.
■ 유진상(兪鎭相)
본은 기계(杞溪), 호서은행 초대 두취(은행장).
■ 윤동영(尹東英)
자는 사원(士元), 호는 죽암헌(竹巖軒). 본은 파평. 명주(鳴周)의 아들. 관은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다.
■ 윤 배(尹 培)
본은 파평, 자는 중익(仲益), 현감 사학(思學)의 아들, 부사(府使). 묘는 광시.
■ 윤병구(尹炳求)
호는 취봉(萃峰), 본은 파평. 광시면 시목리 출신. 제헌국회의원. 무한천 다리를 놓음.
■ 양만영(楊萬榮)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현감과 좌랑을 역임하였다. 덕산에 살았고 효로 정문이 섰다.
■ 유문통(柳文通) 1438(세종 20)~1498(연산군 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관지(貫之), 호는 괴정(槐亭). 광보(光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依)이고, 아버지는 공조판서 종식(宗植)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대사성 우(遇)의 딸이다. 가학을 이어받았다.
1460년(세조 6) 별시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제수되었으며, 그 뒤 1496년까지 예문대교?부교리?승의(承議)?예산현감?이조정랑?괴산군수?상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496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문의(文義)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죽은 뒤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조선 초기 건국창업의 기운이 한창 풍미하고 있을 때 행정가로서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여 15세기의 안정된 사회경제체제의 구축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특히, 1472년(성종 3) 예산현감으로 있을 때 그 지역에 횡행하던 도적을 일망타진하였으며, 1489년 세자시강원필선으로 있을 때는 일본사신을 맞이하여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였던 일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청천유고≫ 5권 4책이 있다.
■ 이도근(李度謹)
본 연안. 벼슬이 예산현감에 오르고, 청백리.
■ 이두양(李斗陽)
정사(靖社) 원종훈(原從勳)에 녹(錄)하고, 벼슬은 목사(牧使)에 올라 치적이 많았다.
■ 이 락(李 洛)
호는 퇴암(退?), 본 전주. 소생의 아들, 벼슬은 현감이었고, 경학(經學)에 전심하였다.
■ 이 렬(李 洌)
자는 청보(靑甫), 본 전주. 소생(紹生)의 아들, 벼슬이 흥덕현감에 올랐다.
■ 이 륜(李 綸)
본 전주. 현종 14년 문과에 급제, 벼슬이 승지, 감사에 이르다
■ 이 릉(李 稜)
벼슬이 첨지(僉知)에 오르다.
■ 이 만(李 曼) 1605(선조 38)~1664(현종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는 지만(志曼)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다. 의영고봉사 희년(希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완릉군(完陵君) 세량(世良)이다. 아버지는 형조참의 목(椧)이고, 어머니는 증영의정 윤자신(尹自新)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박사(博士)에 뽑히고, 이듬 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형조낭청 겸 기사관(刑曹郎廳兼記事官)을 거쳐 예조좌랑?정언을 지냈다. 지평으로 있을 때 대사간 정온(鄭蘊)을 옹호하다가 체직되었다. 1636년에 부수찬을 거쳐 수찬으로 있을 때 척화를 적극 주장하다가 병자호란을 맞았다. 호란 후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한때 관계를 떠났다. 1639년에 복직하여 헌납?교리?수찬 등의 청요직을 역임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은거하였다. 1644년 교리가 되고 정랑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고, 이듬 해에 완원군(完原君)에 봉해졌다.
1647년 도승지가 되고 이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청역(淸譯) 정명수(鄭命壽)의 종용으로 교체되어 대사간이 되었다. 1649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묵은 폐단을 시정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병졸을 훈련시키는 등 국방에 힘썼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듬 해인 1650년(효종 1)에는 대사헌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그가 경상감사로 있을 때 표류해 온 중국배가 있어 조정에서 이를 청나라로 압송했다. 이 때 그 주문(奏文)에 ?왜정가려(倭情可慮)?를 이유로 남방의 수성연졸(修城鍊卒)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이에 청나라는 이것이 병자호란의 강화조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어 추궁했다. 당시의 동래부사였던 조경(趙絅)과 영의정이었던 이경석(李景奭) 등이 책임을 졌고, 그도 영변으로 귀양 갔다. 곧 풀려나 이듬 해에는 황해도관찰사?강화유수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그가 전라도관찰사로 재직 시 완도의 국금지(國禁地 : 나라에서 건물 설치를 금지한 땅)에 건물을 설치해 치부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공조참판으로 복귀했다. 1661년(현종 2) 충공도관찰사로 나가 부모의 묘를 개장(改葬)하면서 민가를 철거하고 훼손했다는 오해로 파직되었다. 우의정 원두표(元斗杓)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1662년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우윤이 되었으나, 일행 중 금물도매자(禁物盜買者)가 있다는 탄핵을 받아 정사 정유성(鄭維城)의 강력한 추천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아산의 시골집에서 죽었다. 그는 지방관으로 오래 있는 동안 농사짓는 방법 및 토질을 잘 가려내는 일 등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나 너무 인색하고 이재(理財)에 밝아 당시 사람들이 싫어했다고 한다.
■ 이명준(李命俊) 1572(선조 5)~1630(인조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창기(昌期), 호는 잠와(潛窩) 또는 진사재(進思齋). 공달(公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성(文誠)이고, 아버지는 병마절도사 제신(濟臣)이며, 어머니는 목천상씨(木川尙氏)로 붕남(鵬南)의 딸이다. 이정암(李廷目)?이항복(李恒福)?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1년(선조 34)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3년 정시문과에 장원,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으며,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다.
160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와 형조좌랑?병조정랑?서원현감(西原縣監)?평양서윤(平壤庶尹)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 때 영덕으로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장령에 복직되어 영남암행어사?충청도관찰사?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난하였으며, 그 뒤 형조참판?강릉부사 등을 역임하고, 1630년 시폐(時弊)를 논하는 소를 올려 대사간이 되었다가 병조참판을 거쳐 병으로 사직하였다. 1644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잠와유고≫ 4권이 있다.
■ 이명진(李明鎭)
본은 여주. 덕산현감 역임. 처가(李湛의 집)가 있는 고덕면 지곡리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 이민제(李民濟)
성도교(性道敎: 물질과 정신이 아울러 안심입명(安心立命)해야 한다는 교지)의 시조다. 처음에 동학 수운교에 입교했다가 개종하였다. 광시면 이곡리에 본부를 두었다.
■ 이병연(李秉淵) 1671(현종 12)~1751(영조 27).
조선 후기의 시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일원(一源). 호는 사천(笑川) 또는 백악하(白嶽下). 부모를 비롯한 그의 출신배경은 알 수 없다. 백산(白山)이라는 곳에 살았다.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며, 벼슬은 음보(蔭補)로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시에 뛰어나 영조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다. 문인 김익겸(金益謙)이 그의 시초(詩抄) 한권을 가지고 중국에 갔을 때 강남(江南)의 문사들이 ?명나라 이후의 시는 이 시에 비교가 안 된다.?라고 그의 시를 극찬하였다고 한다. 일생동안 무려 1만300여수에 달하는 많은 시를 썼다고 하나, 현재 시집에 전하는 것은 500여수뿐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산수?영물시로, 대개 서정이 두드러지고 깊은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매화를 소재로 55수나 되는 시를 지었는데, 이는 대개 은일적인 기분을 표현한 것으로 생(生)에 대한 깊은 애정을 은연중 표현하고 있다. 중국의 자연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의경을 흠모하였던 것 같다. 80세가 넘도록 시작생활을 계속하였다. 저서로는 ≪사천시초≫ 2책이 전한다.
■ 이봉주(李鳳周)
자는 백겸(伯謙), 호는 기오(岐梧), 본 전주. 염직(廉直)과 돈독(敦篤)으로 선정을 베풀다.
■ 이 빈(李 ○)
자는 문달(聞達), 본 전주. 원종훈(原從勳)에 녹(錄)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다.
■ 이사공(李思恭)
본 전의. 연산군 원년 문과급제 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이르다.
■ 이사관(李思觀) 1705(숙종 31)~1776(영조 5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숙빈(叔賓). 시성(始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발(汝發)이고, 아버지는 종성부사 기성(基聖)이며, 어머니는 김유(金洧)의 딸이다. 기한(基漢)에게 입양되었다.
1729년(영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737년 통덕랑(通德郞)으로서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747년 정언(正言)으로 청요직(淸要職)에 발을 들여놓은 뒤 2년 후 지평(持平)?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1759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직전 논란이 있어 황주목사로 파견되었다가 결국 1762년 다시 충청감사가 되었다. 이듬 해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천거로 병조참판으로 탁용되었으며 도승지를 거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호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일시 한성부좌윤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판서?호조판서를 지냈다.
1772년 문소전(文昭殿)의 옛터에 새로이 비각을 건립한 공으로 가자되었고, 그 해 10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무고를 받고 한 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판중추부사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1774년 벼슬을 떠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듬 해 병으로 영중추부사의 한직을 맡았다가 영조가 은퇴하고 세손(世孫 : 정조)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1776년 다시 우의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던 중 등청하다가 죽었다. 영조는 직접 제문을 지어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문장에 매우 능했고 글씨도 뛰어났다 한다. 하지만 사신(史臣)은 그가 문식(文識)이 있고 평소 명망도 높았으나, 재상이 되어서는 일을 크게 처리하지 못한 ?반식재상(伴食宰相)?으로 적고 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 이상우(李商雨)
자는 패연(沛然), 본 한산. 준발(畯發)의 아들, 김집(金集)의 문인. 관은 면천군수. 묘 광시.
■ 이석유(李碩儒)
벼슬이 목사(牧使)에 오르다.
■ 이 선(李 璇)
본은 연안(延安). 생원 추(秋)의 아들, 관은 공조참의. 묘 대술면 산정리.
■ 이성구(李晟求)
본은 한산. 예산농업학교에서 평생을 교수 및 교장으로 근무, 많은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음.
■ 이성원(李成元)
벼슬이 현감에 오르다.
■ 이소생(李紹生)
자는 기익(其益), 호는 우계당(牛溪堂), 본 전주. 포(包)의 아들. 은일로 벼슬이 집의에 이르렀으나 세조의 불의를 간하다가 듣지 아니하니 대흥으로 은퇴하였다.
■ 이 속(李 涑)
자는 낙이(樂而), 호는 수암(樹庵), 본 한산. 상우(商雨)의 아들, 관은 동영부도정을 지냈다.
■ 이수일(李秀逸) 1705(숙종 31)~1779(정조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준(子俊), 호는 구호(龜湖). 영의정 산해(山海)의 7대손이며, 운근(雲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덕운(德運)이고, 아버지는 성(宬)이며, 어머니는 채성윤(蔡成胤)의 딸이다.
1740년(영조 1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756년에 지평에 올랐다. 이듬해 장령이 된 뒤 14년 동안 장령과 헌납을 번갈아가며 역임하였다. 1762년 삼남지방에 흉년이 들자 장령으로서 제군문(諸軍門)의 경비를 경감할 것 등 8조의 황정책(荒政策)을 진언하였다. 1771년 다시 헌납이 되고 이어 승지에 올랐다.
■ 이순규(李舜圭)
호는 화산(華山), 본 전주. 청렴하였다. 비를 주민이 세웠다.
■ 이승옥(李承玉)
자는 성윤(聖潤), 호는 송곡(松谷), 본 한산. 진재(晉在)의 아들. 관은 양지 현감을 지냈다. 묘 광시.
■ 이 식(李 埴)
벼슬이 첨지중추(僉知中樞)에 오르고, 이조판성에 추증되다.
■ 이여발(李汝發) 1621(광해군 13)~1683(숙종 9).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군실(君實). 할아버지는 정사공신(靖社功臣) 한천군 의배(韓川君義培)이며, 아버지는 목(穆)이고, 어머니는 연안 김씨(延安金氏)로 현령 희온(希溫)의 딸이다.
1651년(효종 2) 무과에 급제한 뒤 비변사낭관?도총부도사?경력을 거쳐, 1653년 숙천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1654년 만포첨사, 이듬해 영흥부사를 거쳐 그 뒤 장단방어사?충청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회령부사에 제수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한흥군(韓興君)에 봉해졌다. 회령은 북방의 거진(巨鎭 : 진관체제에서 절제사?첨절제사가 있는 진. 중요한 군사 거점지로서 주변의 諸鎭을 통할했음)으로서 야인들과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거래하는 시장이 있었는데, 그들의 왕래에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아 피해가 많았다.
이 때 그가 부임해 출입 인원을 320명 이내로, 체류 일수를 20일 이내로 규정하는 등 엄격한 통제를 가해 많은 피해를 덜었다. 1660년(현종 1) 삼도통제사에 이어 함경도병마절도사?훈련도정?포도대장, 공조?병조의 참판 등을 지내고,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서는 성을 수축하고 병기를 정비하며 군사들에게 사예(射藝)를 훈련시켜 북방 수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 뒤 훈련대장 이완(李浣)이 면직되자 상국(相國) 정태화(鄭太和)의 천거로 후임이 되었으며 이어 어영대장, 한성부의 좌윤?우윤?비변사제조?포도대장?총융사?수원부사 등을 지내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과묵해 웃는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한다. 하지만 사졸을 따뜻이 위무하고 여러 장교들에게 예의로 대했으므로 덕을 우러러 그에게 충실했다 한다. 정태화?여성재(呂聖齋) 등과 가까이 지냈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 이 연(李 演)
본은 전주. 집의 소생(韶生)의 아들, 성종 때 안주목사(安州牧使) 역임. 묘는 신양면 농문리에 있다.
■ 이영록(李永綠)
자는 경선(景善), 본은 전주. 임영대군의 증손자로 돈용교위(敦勇校尉). 선대의 유언에 따라 대흥면 대율리에 은거.
■ 이유달(李維達)
벼슬이 첨지(僉知)에 오르다.
■ 이 익(李 木益 )
자는 중섭(仲涉), 본은 전주. 어모장군 해(海)의 아들. 관은 은성부사, 좌승지 역임. 묘는 대흥면 갈산리.
■ 이 인(李 仁) 1465(세조 11)~1507(중종2).
조선 중기의 종실. 자는 자정(子靜). 아버지는 세종의 9남 영해군(寧海君) 당(揆)이며, 어머니는 신윤동(申允童)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영춘군(永春君)에 봉하여졌으며,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를 지냈다. 연산군 때 아들 기(祺)의 사건에 연좌되어 부자?형제가 모두 유배당하였으며, 이인은 남해에 정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복직되고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이 되었다.
■ 이인환(李寅煥) 1633(인조 11)~1699(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문백(文伯), 호는 생곡(生谷). 대건(大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서 시발(時發)이고, 아버지는 경휘(慶徽)이며, 어머니는 심대복(沈大復)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정언?수찬 등을 지냈다. 지평?부수찬을 거쳐 1675년(숙종 1) 암행어사가 되었으며, 1680년 사간?집의, 1681년 응교?승지, 1684년 대사간이 되었다. 1685년 이이(李珥)의 신원(伸寃 : 원통함을 풀어버림)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대사성?경기도관찰사?개성부유수를 거쳐 1697년 도승지를 역임하고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 이존술(李存述)
고려 호장(戶長). 덕산 이씨 시조.
■ 이종병(李宗秉)
자는 조자(朝子), 호는 채정(菜亭), 본은 한산. 광교(廣敎)의 아들. 헌종 원년 문과 급제 후 병조참판에 이름. 대술 상항 태생.
■ 이 증(李 增)
본 전주. 대사헌 만(曼)의 아들, 문과급제 후 의주부윤 역임. 묘는 응봉면 평촌리에 있다.
■ 이지익(李之翼) 1625(인조 3)~1694(숙종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여휘(汝輝), 호는 계촌(桂村). 할아버지는 감사 춘원(春元)이고, 아버지는 초로(楚老)이며, 어머니는 변제원(卞悌元)의 딸이다.
1652년(효종 3) 진사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언으로 있을 때 한 대신의 뇌물문제를 탄핵하여 호남의 막좌(幕佐)로 쫓겨나 있다가 남구만(南九萬)의 구론(救論)으로 다시 대직(臺職)에 돌아왔으며, 서해도의 감사로 내려가 크게 치적을 올렸다. 1674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다시 예론이 일어나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처벌문제가 일어났는데, 대사헌으로서 그는 송시열의 예론을 반대하였으나 처벌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사임하고, 이듬해 다시 대사간에 복직되어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6년에는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어 대사헌?참찬?지중추부사를 거쳐 형조판서로 십여건의 큰 사건을 신속, 정확하게 해결하였다. 1678년 판서?형조판서가 되고, 개성유수?한성판윤?함경감사?전라감사?비변사당상?평안감사 등을 역임하고, 원접사(遠接使)로 네 차례나 의주를 왕래하였으며, 지돈녕부사가 되었다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조정에 있는 40년 동안 정국이 몇 번 바뀌었으나 시세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자기 신념대로 시종일관하였다.
■ 이 직(李 稷)
벼슬이 부장(部將)에 오르다.
■ 이진국(李鎭國)
자는 자정(子鼎), 본은 전주. 비인(庇仁) 현감 역임. 묘는 신양면 서계양리.
■ 이진수(李眞洙) 1684(숙종 10)~1732(영조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연(子淵), 호는 서간(西澗). 경직(景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기영(起英)이고, 아버지는 충청도관찰사 덕성(德成)이며, 어머니는 홍유구(洪有龜)의 딸이다.
1713년(숙종 39) 생원시에 합격하고,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설서(說書)?정언(正言)?부사과?지평(持平)을 지냈다. 1724년 수찬이 되어 형벌을 너그럽고 공평하게 하였으며, 첨설된 서원을 철폐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해백목사(海伯牧使)가 되었으며, 1725년(영조 1) 붕당의 폐해를 고치기 위하여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인들을 죄줄 때, 김일경(金一鏡)의 당으로 지목되어 선천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어머니의 병환으로 풀려나 1729년 승지가 되고 뒤에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작품으로는 〈기자궁구기비문 箕子宮舊基碑文〉이 남아 있다.
■ 이진순(李眞淳) 1679(숙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후(子厚), 호는 하서(荷西). 경직(景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기영(起英)이고, 아버지는 덕성(德成)이며, 어머니는 홍유구(洪有龜)의 딸이다.
1708년(숙종 34) 사마시에 합격하고 하급 관직을 거쳐, 1722년(경종 2) 신천군수로 재직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정언?헌납?사간 등을 역임하면서 소론으로서 노론을 제거하는 신임사화에 가담하였고, 이어 보덕?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할 때 잠시 승지로 있었으나, 노론파가 집권하면서 삭직, 귀양갔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풀려나왔다. 그 뒤 형조참판?대사성?한성부좌윤?대사간?경기도관찰사?한성부우윤?도승지?대사헌 등을 역임한 뒤 1738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임소에서 죽었다.
그는 서예에 뛰어나 중화의 〈삼진충의비 三陣忠義碑〉?〈사간박동현표 司諫朴東賢表〉?〈금백이덕성갈 錦伯李德成碣〉과 공주의 〈목사박병갈 牧使朴炳碣〉 등이 있다.
■ 이재위(李載威)
호는 시헌(?軒), 본은 여주. 실학자로 부 이희환(李囍煥)과 함께 물보(物譜)를 저술하였다.
■ 이창복(李昶馥)
본은 한산. 서울지방 관세청장 역임.
■ 이창세(李昌世)
자는 공수(公壽), 호는 준강(俊江), 본은 전의. 선정을 베풀다.
■ 이철수(李喆秀)
자는 군성(君成), 호는 일산(一山), 본은 전주. 재명(才名)이 높고, 문학이 독실하고, 시부에 뛰어나다. 인재를 길러 문운을 진작했고, 한글강습소를 열어 신양국민학교의 모태를 이룩하였다.
■ 이초로(李楚老)
벼슬이 도정(都正)에 오르다.
■ 이춘원(李春元) 1571(선조 4)~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평(咸平). 초명은 신원(信元)?입지(立之). 자는 원길(元吉), 호는 구원(九飯). 증좌통례 세달(世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윤우(允宇)이고, 아버지는 증좌찬성 창(隧)이며, 어머니는 부마인 능창위(綾昌尉) 구한(具澣)의 딸이다.
일찍이 남양의 홍지성(洪至誠)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박순(朴淳)이 영의정을 그만두고 영평(永平)에 은거할 때 그를 찾아가 다시 배우니 단연 학문에 두각를 나타내었다. 20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등용되고 이듬해인 1597년에는 광양현감으로 남원을 포위한 왜군과 싸웠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좌승지에 이르렀을 때인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 항론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승지로 복직되었다가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 1617년 충청도관찰사로서 권신들이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하고 대비에 대한 모든 의식을 없애려고 하자 이에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1620년 지돈녕부사가 되어 명나라의 사신을 안주까지 나가서 맞이하였는데 갑자기 중풍에 걸려 사직하고 돌아왔다. 1623년 인조가 반정하여 구신들을 많이 등용할 때 한직을 맡겨 정양하게 하려 하였으나 사퇴하였다. 저서로 ≪구원집≫이 있다.
■ 이 칭(李 秤)
벼슬이 부장(部將)에 오르다.
■ 이택로(李澤魯)
본 전의. 덕산면 복당리 출신, 홍성?청양?예산군수 역임시 청렴으로 이름 있음.
■ 이현직(李玄稙)
자는 일선(日善), 호는 해석(海石), 본 한산. 승모(承謨)의 아들. 관은 임피군수를 지냈다.
■ 이 형(李 珩)
벼슬이 현감에 오르다.
■ 이 호(李 ?)
본 전의. 인조 7년 문과급제 후 정 3품 부사(府使).
■ 이호직(李浩稙)
자는 경순(敬淳), 본 한산. 종병(宗秉)의 아들. 벼슬이 내무협판에 오르다.
■ 이효영(李孝榮)
본은 전주. 의평군 원생(元生)의 아들, 정종의 왕손. 창선대부아인부정(彰善大夫阿仁副正).
묘 대술면 이티리.
■ 이흥준(李興畯)
벼슬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르고, 좌찬성에 증직되고 한양군(漢陽君)을 봉하다. 삽교읍 이리에 낙향, 들을 개간함.
■ 이희상(李喜相)
벼슬이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오르다.
■ 인삼석
본은 교동. 벼슬은 어모장군수의부위(禦侮將軍修義副尉) 역임. 삽교 넓은 들을 택하여 정착, 농경지로 발전시킴. 묘는 삽교읍 용동 2구.
■ 인중배(印重倍)
본은 교동(喬洞). 1907년 생, 보통고시합격 후 예산군수?천안군수 역임. 1986년 사망. 묘 대전 공원묘지.
■ 인태면(印泰冕)
본은 교동. 1980년 생, 천안세무서장 역임, 1976년 사망.
■ 인태명(印泰明)
봉는 교동. 1931년 생,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국장 역임, 예산모현사업회 회원.
■ 인태욱(印泰旭)
본은 교동. 1924년 생, 충남 잠업과장 역임. 1986년 사망, 천안 공원묘지.
■ 임명호(任命鎬)
본은 풍천(豊川). 오가면장으로 선정을 베풀고, 인근에게 베푼 바 많아 면민들이 기념비를 오가면 역탑리에 세웠다.
■ 임숙재(任叔宰)
오가 출신으로 숙명여자 대학교 총장 역임.
■ 장구환(張龜煥)
본은 인동. 무과 급제 후 오위장(五衛將) 역임.
■ 장기창(張基昌)
자는 덕민(德敏), 본은 인동. 무과급제 후 내금위장(內禁衛將), 진해현감, 혜산진 첨사 역임.
■ 장용환(張龍煥)
자는 보혁(輔赫). 무과급제 후 진해현감, 비인현감 역임.
■ 장운환(張雲煥)
자는 보익(輔翊), 본은 인동. 문과급제 후 단양현감 역임.
■ 장윤식(張胤植)
자는 성도(聖道), 본은 인동. 효자 진급(眞汲)의 아들. 철종 때 생원으로 예산현감, 예산군청사 신축하여 불망비(不忘碑)가 섰고, 청하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 불망비가 섰다. 돈영부도정 역임. 내부협판을 증직받았으며, 효자정문이 삽교읍 월산리에 있다. 묘는 광시면 신흥리.
■ 장정식(張亭植)
자는 순여(順汝), 본은 인동. 효자 진급(眞汲)의 아들, 무과급제 후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衛將) 역임. 효행이 뛰어나 정려가 광시면 신흥리에 있다.
■ 전승개(田承漑)
본 예산. 중종 12년 문과급제 후 예빈사정(禮賓寺正).
■ 정금모(鄭兢謨) 1914~1980.
군인. 충청남도 예산 출생. 1933년 진해에 있는 고등해원양성소를 졸업하고, 1934년 일본 대판고등해원학교(大阪高等海員學校)를 졸업한 뒤 광복될 때까지 기선회사의 선박기관사로 있었다. 귀국 후 1945년 11월 해군에 입대, 이듬해 2월 해군 중위로 임관되었으며, 묵호?인천?목포에 있는 해군경비부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6?25 이후에는 진해통제부 사령관으로 활약하였으며, 1954년 11월 제3대 해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참모총장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전투함정의 확보, 지원능력 향상에 주력하여 해군의 전력증강에 공헌하였다. 1959년 2월 해군 중장으로 예편하였으며, 그뒤 참의원, 해운회사 회장, 한?인도네시아 협회장 등의 공직을 지냈다.
■ 정낙용(鄭洛鎔) (순조 27)~1914.
조선 말기의 문신?친일파.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경구(景龜). 방어사 인기(寅基)의 아들이다. 1855년(철종 6) 4월 무과에 급제, 1857년 6월 선전관, 이듬해 12월 사복내승(司僕內乘), 1861년 수안군수, 이어 1863년에는 태안군수를 지냈으며, 1865년(고종 2) 6월 치적에 의해서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에 올랐다.
이듬해 같은 군의 부사에, 1867년 5월 전라도좌수사에 전임, 10월에는 우부승지, 1868년 10월 죽산부사, 1870년 9월 전라도수사, 1874년 남양부사로 전임되었으며, 1878년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에 올랐다. 1879년 1월 통제사, 1882년 6월 부총관, 이듬해 4월 병조참판, 1885년 7월 좌포장(左捕將), 8월에는 후영사(後營使), 이어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역임, 1886년 2월 전환국총판(典珤局總辦)이 되고, 이로써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에 올랐으며, 3월에는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87년 9월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에 올랐고, 12월에 형조판서, 1888년 강화유수, 1894년 5월 한성판윤, 1896년 5월 중추원의관의장대변(中樞院議官議長代辨), 1897년 7월 시종원경(侍從院卿), 10월에 농상공부대신, 11월에는 탁지부대신서리를 지냈고, 12월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올랐다.
1899년 10월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을 지냈고, 1902년 3월 숭록대부(崇祿大夫) 종1품에 올랐다. 1904년 9월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되자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 정만석(鄭晩錫) 1758(영조 34)~1834(순조 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성보(成甫), 호는 과재(過齋). 하경(夏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신(維新)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기안(基安)이며, 어머니는 김상정(金相鼎)의 딸이다.
1783년(정조 7)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5년 성균관전적?병조참의를 거쳐 1794년에 지평에 이르렀다. 그 해 11월 양근?가평어사가 된 뒤 호남?호서 암행어사로 나가 명성을 떨쳤다. 1798년 영일현감으로 외직에 나갔다.
1801년(순조 1) 교리를 거쳐 하정사(賀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그 뒤 경상우도암행어사를 거쳐 1803년 동래부사 때 뇌물을 받고 대마도(對馬島)와의 통신서계(通信書契)를 위조한 역관을 처벌하였다.
1807년 공충도관찰사를 거쳐,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발생하자 민심 수습을 위해 관서위무사(關西慰撫使)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민심 수습을 위한 호포(戶布) 징수상의 문제와 논공행상의 불철저로 일시 파직되었다가 곧 평안감사가 되었다.
감사로 있으면서 홍경래 관련 죄인들의 문초를 담당해, 이 기록을 ≪관서신미록 關西辛未錄≫이라 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이것은 그가 올린 ≪계첩기략 啓牒記略≫과 함께 조정에서 이용한 홍경래난의 주요한 자료였다.
1815년(순조 15) 한성부판윤 이후 호조판서를 거쳐 1819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나갔다가 다시 경직(京職)으로 돌아와 요직을 역임했고, 1829년 우의정이 되었다.
외직에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로 불렸다 한다. 하지만 중앙에서는 국가 경제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호조판서?선혜청당상이 되어 명성을 떨쳤으나, 번세(煩細)에 얽매여 대체(大體)에 어두웠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현재 전하는 저서로는 ≪관서신미록≫이 있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 정문용(鄭文龍)
수사(水使).
■ 정주영(鄭周永)
본은 연일(延日). 판서 낙용(洛鎔)의 아들,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름. 대술면 시산리 거주.
■ 정현룡(鄭見龍)
본 동래. 무과급제 후 신립(申砬)의 천거로 등용되어 회령부사, 종성부사, 북병사(北兵使)를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에 유공하고, 왜란을 틈타 반하는 육진호족(六鎭胡族)을 토벌한 공이 커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이르렀다. 묘는 봉산면 옥전리에 있다.
■ 조 강(趙 岡)
자는 사옥(士玉), 본 평양. 승태(升泰)의 아들. 삭부부사, 광주중군 역임. 병조판서를 증직받았다. 묘 응봉면 중곡리.
■ 조 계(趙 ○)
자는 사명(士明), 본은 평양. 동복(東復)의 아들, 영조 원년 무과급제 후 경상?평안? 황해 병사(兵使), 경기수사(水使), 통제사 역임. 묘는 응봉면 증곡리.
■ 조경망(趙景望) 1629(인조 7)~1694(숙종 2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운로(雲老), 호는 기와(奇窩). 아버지는 석형(錫馨)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 남항(南行)으로 환로에 들어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고 노론 일파가 몰락하게 되자 관직을 버리고 파주에 은거하였으며, 얼마 뒤 호서(湖西)의 덕산(德山)으로 옮겨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경사(經史)와 제자서(諸子書)에 정통하였고, 전서?예서?해서 등 서도의 각 서체에 두루 정묘하여 당시 서예가로도 이름이 있었다.
■ 조기석(趙祺錫)
본은 양주. 부사 익강(益剛)의 아들, 신양에 거주, 숙종 16년 문과급제 후 강릉부사 역임, 묘 신양.
■ 조 두(趙 ○)
자는 사정(士正), 본은 평양. 원태(元泰)의 아들, 정조 7년 무과급제 후 선천부사. 병조판서를 증직받음.
■ 조명한(趙明漢)
벼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한원군(漢原君)에 봉하다.
■ 조몽양(趙夢陽)
본은 풍양. 정승 조익(趙翼)의 아들. 현감을 역임하였다. 묘는 신양면 신양리.
■ 조백현(趙伯顯) 1900~1994.
본은 평양. 토양학자?농화학자. 호는 화농(華農). 서울 출생. 한말 육군참장(陸軍參將) 조성근(趙性根)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매동(梅洞)초등학교를 거쳐 1916년 보성학교를 졸업한 뒤 수원농림전문학교(뒤에 수원고등농림학교, 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에 진학했으며, 1920년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유학, 구주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농학부 농학과에 입학하였고, 1년 후 신설된 농예화학과로 전과하여 1925년 1회로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모교인 수원고등농립학교에 강사로 부임, 조교수를 거쳐 30세에 교수로 승진했으며, 생화학?토양학?발효학?유기화학 등 농화학 분야의 강의를 담당하였다.
〈토양의 모세관 수분이동 속도 연구〉 외에 〈한국산 야생 식용식물의 식품적 가치 연구〉?〈전통발효식품에 관한 연구〉?〈콩나물 생장중 성분 변화에 관한 연구〉?〈개량메주 제조에 관한 연구〉 등 주로 한국 전통?고유 식품에 대한 생화학적 연구의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수원농림전문학교 교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의 출범과 동시에 농과대학 학장으로 임명되어 1961년까지 15년간 학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우리 나라 농업과학 교육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또한 한국농학회?한국토양비료학회?한국식품과학회 등을 창설하여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현대 농학 연구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한편, 광복 직후 군정청 학무부의 8인 교육위원회 위원으로서 교육제도 개편작업에 참여한 바 있으며, 1965년 원자력위원으로 위촉되어 10년간 활동하면서 원자력의 농학적 이용을 위한 연구기관으로서의 방사선농학연구소를 탄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 현대 농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54년 대한민국 학술원 종신 회원 피선, 1961년 학술원상 수상,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농학박사와 문화훈장 국민장, 1977년 수당과학상을 받았다. 1986년 사재로 화농장학회를 설립하여 1993년 재단법인 화농연학재단으로 발족시켰으며, 이 재단은 매년 농업과학 기초 분야의 우수논문 발표자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묘는 오가면 신장리.
■ 조성한(趙晟漢) 1628(인조 6)~1686(숙종 12).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본초(本初), 호는 동산(東山)?쌍괴당(雙槐堂). 아버지는 호조정랑 극선(克善)이다.
윤선거(尹宣擧)의 문하에 들어가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천거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이어 한성참군(漢城參軍)?의금부도사 등을 거쳐 연천현감에 이르렀는데, 정사(政事)를 간명하고 엄격하게 행하고 폐습을 일소하다가 무고로 파직되었다.
그 뒤 조정에서 대관직에 천거하였으나 영의정 여성제(呂聖齊)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홍주의 녹운동(綠雲洞) 동산촌(東山村)에 은거하면서, 집 앞에 두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으므로 호를 동산 또는 쌍괴당이라 하였다.
송준길(宋浚吉)과 성리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송준길은 그가 현명하고 박식함에도 불구하고 등용되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였다고 한다.
■ 조세걸(趙世傑)
자는 자민(子敏), 호는 고암(孤菴), 본은 평양. 통어사 유(猷)의 아들, 효제학행으로 이름 있었고, 첨지중추부사 역임. 대사헌을 증직받음.
■ 조 수(趙 脩)
자는 선장(善長), 본은 평양. 세걸(世傑)의 아들, 숙종 23년 무과급제 후 철원부사, 황해병사 역임. 평산고을에 선정을 한 치적이 있다.
■ 조 영(趙 嶸)
자는 군랑(君郞) 본은 평양. 포장 진태(鎭泰)의 아들, 영조 39년 무과급제 후 형조좌랑, 위원(渭原)군수, 충주영장 역임.
■ 조 유(趙 猷)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헌(汝獻). 아버지는 증좌승지 정익(廷翼)이다. 1644년(인조 2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도총부도사?황해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시 그의 부모가 강화에서 순절하자 사무친 한을 안고 전수(戰守)?비어(備禦)책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영향이 그의 후손들에게 전수되어 정조 대 관방(關防)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고손 익(崩)같은 인물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 조익강(趙益剛)
본은 양주(楊州). 유항(有恒)의 아들, 숙종 원년 문과급제 후 청송부사, 통례(通禮) 역임, 청송에 선정비가 있고, 문집있음. 묘 신양.
■ 조 정(趙 挺) 1551(명종 6)~1629(인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여호(汝豪), 호는 한수(漢馬)?죽천(竹川). 수견(壽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방보(邦喇)이고, 아버지는 충수(忠秀)이며, 어머니는 양윤형(梁允亨)의 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史官)으로 등용되었으며, 1586년 사정으로서 다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예문관?홍문관에 등용되고, 이어 수찬?교리를 거쳐 정언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덕으로 세자를 호종(扈從)하였고, 그 뒤 전적?필선을 거쳐 회양부사?광주목사(廣州牧使)?남양부사?안변부사로 나아갔다. 그 뒤 호조판서?대사간?동부승지?부제학?동지중추부사?대사성, 이조?호조?형조의 참판 및 지의금부사?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01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판윤이 되고, 1609년 형조판서로 또 다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우참찬?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였고, 형난공신(亨難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한천군(漢川君)에 봉해졌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광해군을 가리켜 ?전주(前主)?라 하였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였고, 이어 광해군 때 공신이 되었다는 죄목이 가중되어 1628년 해남에 유배, 풍토병에 시달리다가 이듬해 죽었다. 1675년(숙종 1)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고, 저서로는 ≪동사보유 東史補遺≫가 있다.
■ 조종서(趙鐘緖)
호는 정운(靜雲), 본 한양. 벼슬은 현감에 오르고, 청렴했다.
■ 조창한(趙昌漢)
자는 만종(萬宗), 호는 노포(老圃), 본은 한양. 문목(文穆) 극선(克善)의 아들, 효로 추천되어 의령 현감 역임. 선정(善政)을 베풀어 의령 땅에 거사비(去思碑)가 섰다. 묘는 봉산면 시동리에 있다.
■ 조충수(趙忠秀)
초명 윤충(尹忠), 생원 및 진사로 영의정과 한양부원군을 증직받음. 말년에 신양에 은거. 묘는 신양면 신양리의 곡장묘(曲墻墓).
■ 조태로(趙泰老) 1658(효종 9)~1717(숙종 4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인수(仁?), 호는 지산(地山). 존성(存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계원(啓遠)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사석(師錫)이다. 어머니는 권후(權譽)의 딸이다. 태구(泰?)의 형이다.
1696년(숙종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문학?정언을 거쳐 암행어사로 분견(分遣)되어 각도를 염찰(廉察)하였다. 1699년에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올랐다. 부교리?교리?수찬?헌납?이조좌랑 겸 사선?응교?겸필선?집의를 거쳐 1703년 보덕으로 병 때문에 위소(違召)하여 파직되었다. 1706년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고, 승지로서 암행어사시에 공론(公論)을 채취하여 별단(別單)으로 서계(書啓)하여 국가를 위하여 죽은 전망인(戰亡人)들을 포충(褒忠)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대사성?이조참의?개성유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다. 이 때 관료 선발에 문벌을 중시하고 색목(色目)에 구애되어 편용(偏用)의 풍습이 많으니 이를 고쳐 수재제품(隨才題品)할 것을 건의하였다. 강화유수로 있으면서 강도사절인(江都死節人)을 배향한 충렬사(忠烈祠)의 외영(外楹)을 증수하였다.
통진(通津)을 총융사로부터 강도(江都)에 속하게 하며, 난 후 강화도의 민호(民戶)가 적고 논이 많으나 모민(募民)의 실효가 없으니 목장을 설치하자고 건의하였다. 평안도관찰사로서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부사가 되었으나 서로(西路)의 진사(賑事)가 염려된다는 이유로 그대로 평안감사에 머물렀다.
그리고 도내의 행의탁이(行誼卓異)한 자 중에서 더욱 뛰어난 자는 정려하고 그 다음은 복호(復戶)와 동시에 차등 있게 사물(賜物)하며 당아산성(○峨山城)을 수축해서 양계(粮械)를 쌓아 일별장(一別將)을 보내 방비하도록 하자고 상소하였다.
1717년 평안도관찰사로서 감영에서 죽으니 임금이 담군(擔軍)을 주어 호송하도록 명하였다. 장신풍간(長身豊幹)하고 충후관위(忠厚寬偉)하여 사람들이 장자(長者)라고 칭하였다. 묘는 대흥면 갈신리.
■ 지명대사(知明大師)
신라의 고승(高僧), 신라 최초의 율승(律僧), 수덕사를 서기 599년 창건함.
■ 차희윤(車熙胤)
본은 연안. 경례(敬禮)의 아들, 진사로 중종 20년 문과급제 후 사간원정언, 찰방, 결성현감 역임. 묘 신양면.
■ 최명현(崔命顯)
자는 백삼(伯三), 호는 영운(潁雲), 본은 전주. 순조 신미년 문과급제 후 예조참의, 영해부사, 좌부승지 역임. 묘는 광시면 하장대리.
■ 최영배(崔泳培)
호는 한송(閑松), 본은 경주. 진사, 동지중추부사, 오위장 역임.
■ 최영수(崔泳秀)
본 경주. 병사(兵使) 한홍(漢洪)의 손자, 무과급제 후 훈련원주부, 병조좌랑 역임. 묘 신양면 무봉리.
■ 최윤호(崔允浩(湖))
본은 탐진(耽津), 자는 청여(淸汝), 호는 농은(農隱). 관은 병조참의, 6신사건 후 광시면 은사리로 은거 정착.
■ 최일희(崔日熙)
본은 전주. 좌랑 준언(俊彦)의 아들, 무과급제 후 군수 역임.
■ 최준언(崔俊彦) 1621~1670.
본은 전주. 효종 2년 문과급제, 은산현감, 형조정랑 역임. 묘 광시면 은사리.
■ 최진의(崔振誼)
벼슬이 첨정(僉正)에 오르다.
■ 필몽량(畢夢良)
이조 때 무과급제 후 무관. 대흥 필씨 시조, 후손은 대흥 필(弼)씨로 칭함.
■ 한문준(韓文俊) ?~1190(명종 20).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흥(大興).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장주(長州)?장흥(長興)?남원(南原) 등 3군의 부사와 남경유수(南京留守)를 지내면서 혜정(惠政)을 베풀었다.
명종초에 대부경(大府卿)으로 제배되고 추밀원우승선(樞密院右承宣)에 뽑혀 부사에 승진하였는데, 송유인(宋有仁)에게 거슬려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로 강등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참지정사 보문각대학사 판예부사(參知政事寶文閣大學士判禮部事)가 되고, 이어 정당문학 판병부사(政堂文學判兵部事)가 되었다. 1183년(명종 13)에는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郎平章事判吏部事)가 되어 공정하다는 평을 들었다. 시호는 정의(貞懿)이다.
■ 한유충(韓惟忠) ?~1146(인종 24).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흥(大興). 1133년 이지저(李之泗)와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다가 홍주(洪州)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되돌아왔다.
1135년 예부상서 동수국사(禮部尙書同修國史)를 역임하였고, 이듬해에는 추밀원부사로 당시 묘청(妙淸)의 난을 진압하는 중군병마사가 군무를 방해한다고 상주하여 충주목사로 강등되었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좌복야 추밀원사 판삼사사(左僕射樞密院使判三司事)를 지냈다.
참지정사 판공부사 겸태자소부(參知政事判工部事兼太子少傅)에 오르고, 판상서예부사 수국사 태자소보(判尙書禮部事修國事太子少保)?중서시랑문하평장사 태자소사(中書侍郎門下平章事太子少師)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144년(인종 22)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관장하기도 하였다.
■ 한 취(韓 就) ?~1177(명종 7).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단주(湍州). 1170년(명종 즉위년) 추밀원사(樞密院使)가 되었고,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장영재(張令才) 등 27인과 명경(明經) 4인을 뽑았다.
1172년 수사공 참지정사(守司空參知政事)가 되었으며, 형부상서(刑部尙書)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어 치사(致仕)하였다. 술수에 능하여 사람의 화복(禍福)을 말하고 또한 지모가 있었다고 한다.
■ 허 섬(許 ?)
본 양천. 자 언진(彦晉), 생원. 서경덕(徐敬德) 문인, 성품이 효우하였고, 벼슬에 뜻이 없어 신례원 지방에 은거하였다.
■ 현극복(玄克福)
본은 창원(昌原). 진사 관(瓘)의 아들, 현감. 묘 덕산면 시량리.
■ 현 민(玄 珉)
본은 창원. 사필(思弼)의 아들, 고성현령. 묘 덕산.
■ 현사숙(玄思肅)
본은 창원. 중종 때 현감. 묘 덕산.
■ 현석린(玄石隣)
군수 건(健)의 아들, 판서 석규(碩圭)의 손자, 덕산현감으로 부임하였다가 정착. 묘는 덕산면 시량리.
■ 현 진(玄 璡)
본은 창원. 사필(思弼)의 아들, 중종 29년 문과급제 후 전적(田籍) 역임. 덕산면 시량리 거주.
■ 혜암선사(惠菴禪師)
속성은 최(崔)씨, 일명 혜암(慧庵). 만공(滿空)의 법통을 이음. 수덕사의 조실(祖室)로 열반에 듬.
■ 혜현대사(惠現大師)
백제 때 고승. 수덕사에서 법화경(法華經)을 강(講하)였고, 삼론(三論)에 정통하였다.
■ 홍처량(洪處亮) 1607(선조 40)~1683(숙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회(子晦), 호는 북정(北汀). 유학 천민(天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용(瑞龍)이고, 아버지는 사재감첨정 명현(命顯)이며, 어머니는 참판 정용(鄭鎔)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163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교?정언을 지내고, 1642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43년 예조정랑, 이듬해 해운판관이 되었다.
164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1647년부터 수찬?헌납?이조좌랑?교서관교리를 지내고, 1649년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1650년(효종 1) 도청(都廳)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그 해 해서지방의 암행어사가 되었다. 1654년부터 보덕?사간?동부승지?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거쳐, 그 뒤 승지?대사성?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68년 예조참판?개성유수, 1670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현종이 죽자 빈전도감제조(嬪殿都監提調)가 되고, 숙종 때 제학?좌참찬?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북정집≫이 있고,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 황언원(黃彦源)
호는 호은(湖隱), 본 창원. 벼슬에 뜻이 없어 응봉면 입침리에 낙향 은거.
■ 황언필(黃彦弼)
고려 첨의정승(首相), 덕산 황씨의 시조.
■ 황주성(黃柱聖)
본은 창원. 대전일보 주필 역임.
제 9절. 분묘(墳墓)
■ 김상려(金尙旅)
본 수원(水原). 태종 때 충청도 병마겸수군절도사(兵馬兼水軍節度使), 수사(水使), 사도병사(四道兵使) 역임. 묘지 신암면 오산리. 자손 대술면 상항리?장복리?화산리?궐곡리에 거주.
■ 김약행(金若行)
자는 자유(子有), 본은 안동.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의 문인. 영조 43년 문과급제 후 좌부승지에 이름. 묘는 신양면 귀곡리.
■ 김이교(金履喬) 1764(영조 40)~1832(순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세(公世), 호는 죽리(竹里). 할아버지는 대사간 시찬(時粲)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방행(方行)이며, 어머니는 심황(沈鐄)의 딸이다.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수찬(修撰)?초계문신(抄啓文臣)?북평사(北評事)를 거쳐, 1800년 겸문학(兼文學)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순조가 즉위하고 대왕대비 김씨(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노론 벽파(僻派)가 정권을 잡고 시파(時派)를 탄압하였다. 이 때 시파로서 벽파에 의해 함경북도 명천에 유배당하고 동생 이재(履載)도 전라남도 고금도에 안치되었다.
1806년(순조 6) 부사과(副司果)의 직첩을 환수받고 동부승지?이조참의?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10년 10월 10일 일본 통신사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호조판서 심상규(沈象圭)를 탄핵하다가 일단 체포되고 통신사도 교체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 16일에 다시 통신사로 재임명되었다.
1811년 2월 12일 통신사의 사명을 띠고 출발해 5월 22일 부사(副使) 이면구(李勉求)와 함께 대마도부중(對馬島府中)의 객관(客館)에서 동무상사(東武上使) 미나모토(源忠岡)와 부사 후지야스(藤安薰)에게 국서전명(國書傳命)을 거행하고 공사예단(公私禮單 : 공적 혹은 사적으로 주는 외교상의 예물 명단)을 전달하였다. 사명을 다하고 같은 해 7월 3일 대마도를 떠나 부산에 도착했고, 7월 26일에 왕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이듬 해에도 대마도에 건너가서 국서를 전달하였다.
그 뒤 대사성?대사헌?도승지?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이조판서?평안도관찰사?병조판서?형조판서?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31년 우의정에 올랐는데, 이 때 영의정과 좌의정이 모두 공석이어서 한 때 국정을 도맡아 수행하였다. 글씨를 잘 썼다. 순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죽리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 대흥.
■ 김흥경(金興慶) 1677(숙종 3)~1750(영조 2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유(子有)?숙기(叔起), 호는 급류정(急流亭). 서산 출생. 황해도관찰사 홍욱(弘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진(世珍)이고, 아버지는 두성(斗星)이며, 어머니는 김영후(金榮後)의 딸이다.
1699년(숙종 2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주서?정언?부교리?집의?승지?대사간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경종 때 한성부우윤으로 신임사화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로 도승지가 되었고, 이듬해 우참찬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한성부판윤에서 쫓겨났다가 이듬해 우참찬으로 복직되었으나,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반대하여 다시 파직되었다. 1730년 좌참찬에 복직되고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영의정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가고, 판중추부사로 치사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정헌(靖獻)이다. 묘소는 신암 용궁리에 있다.
■ 남연군 구(南延君 球) ?~1822(순조 22).
조선 후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구(球). 아버지는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6대손 병원(秉源)이며, 아들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다.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자인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 진(恩信君所)에게 입양하여 남연군에 봉해졌다. 부인은 여흥민씨이다.
1771년(영조 47) 양부 은신군이 김구주(金龜柱) 등의 모함으로 관작을 빼앗기게 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뒤 변사하자 불우한 처지에 놓였으나, 1815년에 수원관(守園官), 1821년에 수릉관(守陵官) 등 말단직을 역임하였다.
죽은 뒤 충청도 덕산(德山)에 묻혔는데, 1868년(고종 5) 묘가 독일인 오페르트(Oppert,E.J.) 등에 의하여 도굴당하자 흥선대원군의 서양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 쇄국정책을 한층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처음 시호는 영희(榮僖), 뒤에 충정(忠正)으로 개시(改諡)되었다.
■ 박효성(朴孝誠)
본 밀양. 전주부윤 역임. 묘 대흥면 탄방리.
■ 명빈박씨(○嬪朴氏)
본 밀성(密城). 숙종의 후궁, 연영군(延齡君)의 모(母). 묘는 덕산면 옥계리에 있다.
■ 서 한(徐 閑)
고려 군기소윤(軍器小尹). 대구(達城) 서씨 시조, 묘소 대흥면 하탄방리에 있음.
■ 연영군 훤(延齡君 ?)
숙종의 제 6왕자, 이름은 훤(?). 관 도총관, 21세에 사망. 시호는 효헌공(孝憲公). 묘는 덕산면 옥계리. 묘 명빈(○嬪)묘 옆.
■ 이 목(李 ?)
본은 전주. 이세량(李世亮)의 아들, 문과급제 후 서장관 역임. 묘가 응봉면 평촌리에 있다.
■ 이산해(李山海) 1539(중종 34)~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장윤(長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穉)이고,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지번(之蕃)이며, 어머니는 남수(南脩)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지함(之旅)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듬 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썼다. 이어 부수찬이 되고 1564년 병조좌랑?수찬, 이듬 해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명나라 조사(詔使)를 맞이한 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부교리를 역임하고, 직제학이 되어 지제교를 겸하였다. 이어 교리?응교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마친 뒤 1570년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577년 이조?예조?형조?공조의 참의를 차례로 지내고 대사성?도승지가 되었다.
1578년 대사간이 되어 서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윤현(尹晛) 등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다음 해 대사헌으로 승진하고 1580년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듬 해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오르고, 다시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제학?대제학?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겸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 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 해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 : 명나라 《태조실록》과《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아성부원군 (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듬 해 정철(鄭澈)이 건저(建儲 : 세자 책봉) 문제를 일으키자 아들 경전(慶全)을 시켜 김공량(金公諒 : 仁嬪의 오빠)에게 정철이 인빈과 신성군(信誠君)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전해 물의를 빚었으며, 아들로 하여금 정철을 탄핵시켜 강계로 유배시켰다. 한편 이와 관련해 호조판서 윤두수, 우찬성 윤근수와 백유성(白惟成)?유공진(柳拱辰)?이춘영(李春英)?황혁(黃赫) 등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 또는 귀양보내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해 개성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양사(兩司 :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어 백의(白衣)로 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평해(平海)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1595년 풀려나서 영돈녕부사로 복직되고 대제학을 겸하였다. 북인이 다시 분당 때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홍여순(洪汝諄) 등과 대북파가 되어 영수로서 1599년 재차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 해 파직되었다가 1601년 부원군(府院君)으로 환배(還拜 : 복직되어 제수됨)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선조조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한다. 서화도 잘해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으며, 용인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와 안강의 이언적묘비(李彦迪墓碑)를 썼다. 이이(李珥)?정철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 뒤로는 멀어졌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이 서(李 嘲) 1662(현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징지(徵之), 호는 옥동(玉洞)?옥금산인(玉琴散人). 아버지는 대사헌 하진(夏鎭)이며, 이익(李瀷)의 형이다. 관직은 찰방에 그쳤다.
충주에 살고 있던 그가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던 것은 1694년(숙종 20)에 당시 좌의정이었던 박세채(朴世采)의 천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글씨를 잘 썼는데, 진체(晉體)의 필법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필법을 계발하여, ≪성재집 性齋集≫에서 이르기를 ?동국(東國)의 진체(眞體)는 옥동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하였다 한다. 묘는 고덕 상장리에 모셔 있었다.
■ 이양성(李養性)
본 전의. 선경(先慶)의 아들, 길주목사. 묘 대술면 시산리.
■이재긍(李載兢) ?~1881.
조선 말기 문신. 이최응(李最應 : 興仁君)의 아들이다. 1871년 선파유생전시(璿派儒生殿試)에서 합격하여 어가의 호위를 맡고 직부(直赴)로서 별입직(別入直)하였다. 1873년에 병환이었을 때 고종이 보낸 약재를 받았다.
그 후 1874년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 1876년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부제학, 1877년 이조참의, 1878년 규장각 직제학과 홍문관 부제학, 1880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와 이조참판과 예조참판, 1881년 통리기무아문 선어학당상(統理機務衙門 選語學堂上)과 예조판서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헌간(獻簡)이고, 1899년 완영군(完永君)에 추봉되었다. 묘지는 예산읍 향천리(향천사 뒷산).
■ 이종생(李從生) 1423(세종 5)~1495(연산군 1).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계지(繼之). 사헌부집의 현우(玄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무(監務) 자보(自寶)이고, 아버지는 선략장군호분위호군(宣略將軍虎賁衛護軍)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된 극명(克明)이며, 어머니는 통사랑(通仕郞) 정혼(鄭渾)의 딸이다.
1460년(세조 6) 7월 별시 무과에 을과 제3인에 뽑혀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초수(超授)되었다. 같은 해 10월 북정(北征) 도원수 신숙주(申叔舟)의 군관(軍官)으로 공이 있어 선략장군에 초수되었다. 1461년 5월 도시(都試)에서 1등해 선절장군(宣節將軍)이 되어 수직(守職 : 자신의 품계보다 높은 관직)으로 의흥위대호군(義興衛大護軍)이 되었다.
1464년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어 동관진첨절제사(潼關鎭僉節制使)가 되고, 1466년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북청 만령(蔓嶺)에서 위장(衛將)으로서 선봉에서 적(賊)을 대파한 공으로 개선 후에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되고 함성군(咸城君)에 봉해졌다. 이듬 해 건주위(建州衛) 야인을 친 공으로 영변대도호부사가 되었으며, 1469년(예종 1) 한성좌윤?평안동서중3도절도사(平安東西中三道節度使)가 되었고, 1471년(성종 2) 도총관을 겸하였다.
1473년 내금위장이 되었다가 이어 충청도병사가 되었다. 1479년 윤필상(尹弼商)의 건주위 정벌 때 호분위장(虎賁衛將)으로 출전해 선봉으로 싸워 공을 세우고 부상을 입었다. 1481년 영안남도병사 겸 북청도호부사, 1485년 경상우병사, 1491년 겸사복장(兼司僕將)이 되었고, 1495년(연산군 1) 부총관을 겸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정직하고 관후하며, 직무를 이행함에 있어 대세를 따르고, 사람을 대하는 데 화기애애했다 한다. 명장으로 주덕(酒德)을 겸했다는 평을 들었다. 시호는 장양(莊襄)이다.
■ 이창응(李昌應)
이씨 왕족, 흥선대원군의 아들. 흥녕군(興寧君), 영의정을 증직받았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 묘는 덕산면 옥계리.
■ 이 후(李 厚) 1585(선조 18)~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후(子厚), 호는 주봉(酒峯). 지번(之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산해(山海)이고, 아버지는 경전(慶全)이며, 어머니는 김첨(金瞻)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조정랑을 역임하였고 호당(湖堂 : 독서당의 다른 이름)에 선입되었으나 28세 때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문장이 능하여 당대를 풍미하였다. ?주봉?은 동생 부(阜)의 호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묘 대술면 방산리.
■ 이희선(李羲先)
본은 한산. 우의정 경재(景在)의 부(父). 덕행이 있었고, 직산현감 역임. 증 영의정, 묘는 예산읍 산성리 산성에 있음.
■ 이희손(李希孫)
본은 전주. 호산군 현(鉉)의 손자, 문과급제 후 한림학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 오위장 역임. 묘가 응봉면 평촌리에있다.
■ 이 현(李 鉉)
본은 전주. 양영대군의 손자, 호산군(湖山君)을 봉군받았다.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었으므로 부조묘(不?廟)와 묘가 응봉면 평촌리에 있다. 시호는 소평공(紹平公)
■ 정인기(鄭寅基)
본은 연일(延日). 숭정 낙용(洛鎔)의 부(父), 증 참정(參政), 묘는 대술면 산정리.
■ 정 제(鄭 霽)
참의(參議). 묘 예산읍 신례원 2구.(舊 今坪面 堂北里)
■ 조사석(趙師錫) 1632(인조 10)~1693(숙종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공거(公擧), 호는 만회(晩悔) 또는 만휴(晩休)?향산(香山)?나계(蘿溪). 남(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존성(存性)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계원(啓遠)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다. 태구(泰?)의 아버지이다.
1660년(현종 1) 진사가 되고, 166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의 관직과 주서 등을 거쳤다. 1666년 사관(史官)인 검열이 되고, 이어 봉교?겸설서로 승진하였다. 사관으로 있을 때인 1667년 왕이 지난해에 정태화(鄭太和)?홍명하(洪命夏)?허적(許積)을 탄핵한 이숙(李栗)?박증휘(朴增煇) 등 7명의 간관을 유배보내면서 사관들에게 이를 사초(史草)에 기록하지 말도록 명했으나, 왕의 거둥은 반드시 기록해야 하는 것이라며 거절하고 이를 사초에 기록하였다. 이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했으나, 파직의 왕명이 곧 철회됨으로써 복직되었다. 그 뒤 전적?정언?사서?지평 등을 거쳐 1672년 말에 접위관(接慰官)이 되어 동래에서 왜인을 접대하였다. 그 뒤 부교리?헌납?이조정랑 등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675년(숙종 1)에 수원부사를 거쳐 이후 황해도관찰사?예조참의?승지?강원도관찰사?충청도수사?경기도관찰사?이조참판 겸 수어사(守禦使)?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고, 1680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대사헌?호조판서?강화유수?병조판서?판의금부사?우참찬?좌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쳐 1687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그 사이 1683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688년 좌의정이 되었는데, 이 때 인조의 손자인 동평군 항(東平君杭)의 횡포를 논하다가 처벌된 박세채(朴世采)^남구만(南九萬) 등을 변호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다음해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이어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나, 1691년 전 해에 있었던 왕세자책봉하례에 참석하지 않은 죄로 고성(固城)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죽은 뒤인 1694년 갑술환국으로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 조숭지(趙崇智)
본 김제(金堤). 여산군수, 증 호조판서. 평고군(平皐君). 정국공신 원륜(元倫)의 부(父). 묘 대술면 마전리 청룡뿔.
■ 조영중(趙塋中)
본은 풍양, 조익의 부(父), 첨지중추부사, 증 영의정, 묘는 신양면 신양리 백석.
■ 조 익(趙 翼) 1579(선조 12)~1655(효종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淵壤).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존재(存齋). 오위도총부부총관 안국(安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간(侃)이고, 아버지는 중추부첨지사 영중(瑩中)이다. 어머니는 찬성 윤근수(尹根壽)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윤근수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중 음보로 정포만호(井浦萬戶)가 되어 1598년(선조 31) 군량미 23만 석을 운반하는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난 뒤 다시 수학하여 1602 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어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이후 삼사의 관직을 두루 지내던 중, 1611년(광해군 3)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정여창(鄭汝昌) 등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다가 고산도찰방으로 좌천되고, 이어 웅천현감을 역임하였다. 뒤이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는 사태가 빚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광주(廣州)로 은거했다가 충청도 신창으로 옮겨 살았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이조좌랑에 임용되어 신창 도고산 (道高山) 아래 모옥(茅屋)을 떠나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뒤 의정부 검상?사인(舍人)에 임명되고, 이어 응교?직제학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 올랐다.
1631년 어머니가 죽자 잠시 벼슬을 떠났으나, 3년 상을 마친 뒤 곧 관직에 복귀하였다. 한성부우윤?개성부유수?대사간?이조참판?대사성?예조판서?대사헌?공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이원익(李元翼)을 도와 대동법(大同法)을 확대하고 관리하는 일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636년 예조판서로 있을 때 병자호란을 당하자 종묘를 강화도로 옮기고 뒤이어 인조를 호종하려다가, 아들 진양(進陽)에게 강화로 모시게 했던 80세의 아버지가 도중에 실종되어 아버지를 찾느라고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호란이 끝난 뒤 그 죄가 거론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지만, 그 까닭이 효성을 다하고자 한 데 있었고, 또 아버지를 무사히 강화로 도피시킨 뒤 윤계(尹棨)?심지원(沈之源) 등과 함께 경기 지역의 패잔병들을 모아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며 입성하고자 노력한 사실이 참작되어 그 해 12월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3년 뒤에는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으로 조정에 들라는 하명을 받았으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뒤이어 예조판서?이조판서?대사헌의 직이 내려졌지만, 모두 사양하다가 아버지가 죽고 상복을 벗게 되자 1648년 좌참찬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갔다.
이후 1655년 3월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죽기까지 우의정?좌의정과 중추부 판사?영사의 자리를 거듭 역임하였다. 윤방(尹昉)의 시장(諡狀) 사건에 관련되어 몇 개월 동안 삭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대체로 무난하게 벼슬 생활을 하면서 김육(金堉)과 함께 대동법을 확장, 시행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 각종 폐막(弊壟)을 개혁하는 데에도 전념하였다.
한편으로 학문에도 정진, ≪곤지록 困知錄≫?≪중용주해 中庸註解≫?≪대학주해 大學註解≫?≪서경천설 書經淺說≫ 등을 지어 효종에게 바쳤다. 이 저술들은 주자(朱子)의 장구(章句)를 크게 고친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감히 이를 헐뜯지 못했다고 한다.
고향 광주에서 77세로 죽으니 효종은 시호를 내리고, 6월에 대흥(大興) 동화산(東華山) 아래에 장례하기까지 관원을 보내어 치조(致弔)하였다. 뒷날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신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위의 논술 외에 문집으로 ≪포저집≫ 35권 18책이 전하고, ≪역상개략 易象槪略≫은 이름만 전한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에 밝았으며, 경학?병법?복술에도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변함없이 우정을 지켜온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이시백(李時白)과 함께 ?사우(四友)?라 불려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묘 신양면 신양리.
■ 조태구(趙泰?) 1660(현종 1)~1723(경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덕수(德馬), 호는 소헌(素軒)?하곡(霞谷). 존성(存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계원(啓遠)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사석(師錫)이다. 어머니는 권후(權譽)의 딸이다. 태채(泰采)?태억(泰億)의 종형이다.
1683년(숙종 9)에 생원이 되고 1686년 별시문과에 종제 태채와 함께 병과로 급제, 설서?문학?승지를 거쳐, 1702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05년 형조참의?대사성을 지냈다. 그 뒤 우참찬에 오르고, 1720년(경종 즉위년) 복상(卜相) 때 우의정에 올랐다. 당시 영의정은 김창집(金昌集), 좌의정은 이건명(李健命)이었다.
신임사화로 노론4대신을 사사(死賜)하게 한 뒤, 영의정에 올랐다. 1710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소론의 영수로서 노론과 대립하던 중 1721년 정언 이정소(李廷聊)의 건저상소(建儲上疏)와 김창집?조태채?이이명(李蓬命)?이건명 등 노론4대신의 주청에 의해 연잉군(延艀君 : 뒤의 영조)이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유봉휘(柳鳳輝)에게 반대의 소를 올리게 하였다. 이후 세제의 대리청정이 실시되자 최석항(崔錫恒)?조태억?박태항(朴泰恒)?이광좌(李光佐)?한배하(韓配夏)?이조(李肇) 등과 함께 이를 반대, 대리청정의 환수를 청하여 실현시켰다.
이어 같은 해 12월 전 승지 김일경(金一鏡)과 이진유(李眞儒)?윤성시(尹聖時)?박필몽(朴弼夢)?서종하(徐宗廈)?정해(鄭楷)?이명의(李明誼) 등이 상소하여 건저(建儲)를 주장하던 노론4대신을 4흉(凶)으로 몰아 탄핵한 뒤 결국 4대신의 사사(死賜)를 관철시키고, 영의정에 올랐다. 이어 소론 정권을 수립, 최석항?김일경 등과 국론을 주도하였다.
이후 소론은 과격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정책 결정에 논란이 많았는데, 그는 윤순(尹淳)과 함께 온건파의 주장이 되었다. 성격은 온아하고 위풍이 있었으며, 평소 검소한 생활을 하여 여러 번 외직에 나갔어도 재물이 쌓이지 않았다. 다만 강인한 성격이 못 되어 남의 부탁을 잘 받아들였기 때문에 잘 다스렸다는 치성(治聲)은 얻지 못했다고 한다.
1725년(영조 1) 신임사화의 원흉으로 탄핵을 받고 관작이 추탈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산법(算法)에 관계되는 책을 펴냈는데 양전(量田) 등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편서로 ≪주서관견 籌書管見≫이 있고, 글씨로는 〈이충무공고하도유허비 李忠武公高下島遺墟碑〉?〈왕자연령군명비 王子延齡君明碑〉?〈완산백조구석비 完山伯趙龜錫碑〉?〈길성군허유례비 吉城君許惟禮碑〉 등이 있다.
■ 최익현(崔益鉉) 1833(순조 33)~1906.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경기도 포천 출신. 대(岱)의 아들이다. 6세 때 입학해 9세 때 김기현(金琦鉉) 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다.
14세 때 경기도 양근(楊根) 벽계(蘗溪)에 은퇴한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격몽요결 擊蒙要訣≫?≪대학장구 大學章句≫?≪논어집주 論語集註≫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항로의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1855년(철종 6) 명경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던 이후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신창현감 (新昌縣監)?성균관직강?사헌부장령?돈녕부도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70년(고종 7)에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수봉관?지방관?언관으로 재직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해 강직성을 발휘하였다. 특히 1868년에 올린 상소에서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였다. 이 상소는 그의 강직성과 우국애민정신의 발로이며 막혔던 언로를 연 계기가 되었다.
1873년에 올린 〈계유상소 癸酉上疏〉는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그 위세를 몰아 만동묘(萬東廟)를 비롯한 서원의 철폐를 대거 단행하자 그 시정을 건의한 상소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이후 고종의 신임을 받아 호조참판에 제수되어 누적된 시폐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권신들이 반발해 도리어 대원군 하야를 부자이간의 행위로 규탄하였다. 이에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 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려 민씨 일족의 옹폐를 비난했으나 상소의 내용이 과격,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73년부터 3년간의 유배생활을 계기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의 위정척사의 길을 택하였다. 첫 시도로서 1876년 〈병자지부복궐소 丙子持斧伏闕疏〉를 올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하였다. 이 상소로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그 신념과 신조는 꺾이지 않았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 시기는 일본과의 개국 이래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운동?청일전쟁 등 연이어 일어나 국내외 정세가 복잡했던 때이다. 특히 1881년에 신사척사운동이 일어나면서 위정척사사상이 고조되고 있을 때 그가 침묵을 지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그의 위정척사사상은 항일투쟁의 지도이념으로 성숙하였다. 이것은 그의 위정척사사상이 고루하거나 보수적이지 않은 것은 보여준다. 또, 항일정치투쟁방법도 이제까지의 상소라는 언론 수단에 의한 개인적?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집단적?무력적인 방법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위정척사사상도 배외적인 국수주의로부터 민족의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각된 민족주의로 심화되었다. 이러한 그의 항일구국이념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오랫만의 침묵을 깨고 〈청토역복의제소 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이 때 여러 해에 걸쳐 고종으로부터 호조판서?각부군선유대원(各府郡宣諭大員)?경기도관찰사 등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오로지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하였다.
당시 올린 상소는 1896년에 〈선유대원명하후진회대죄소 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疏〉, 1898년 〈사의정부찬정소 辭議政府贊政疏〉와 재소, 〈사궁내부특진관소 辭宮內府特進官疏〉와 재소, 1904년 〈사궁내부특진관소〉의 삼소?사소, 〈수옥헌주차 漱玉軒奏箚〉, 〈궐외대명소 闕外待命疏〉와 재소?삼소?사소 등이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 請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안에서 궐기하였다.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포고팔도사민>을 돌리고 일본 정부에 대한 문죄서 〈기일본정부 寄日本政府〉를 발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우국애민의 정신과 위정척사사상은 한말의 항일의병운동과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다. 위정척사운동에 비해 그이 학문은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그는 성리학에 기본을 둔 이항로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나 이기론(理氣論)과 같은 형이상학보다는 애국의 실천 도덕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는 명분론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기론은 이항로의 심전설(心專說)을 계승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이념은 역사적 현실에 바탕을 둔 실천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구국애국 사상으로, 민족주의 사상으로 승화, 발전할 수 있었다. 여기에 위정척사사상의 역사적 역할과 의의가 있는 것이다.
최익현의 사우관계는 김기현?이항로를 스승으로 성리학을 배웠으나 후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학우관계는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인 이준(李埈)?이박(李裸)?임규직(任圭直)?김평묵(金平?)?박경수(朴慶壽)?유중교(柳重敎) 등으로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다. 저서는 ≪면암집≫ 40권, 속집 4권, 부록 4권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최익현의 대의비인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다. 제향은 모덕사(慕德祠 :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농암리 소재)와 포천?해주?고창?곡성?순화?무안?함평?광산?구례 등에서 봉향되고 있다.
■ 최 길(崔 吉)
본 탐진(耽津), 자 사의(思義), 호 서석(瑞石). 이조참의(吏曹參議) 역임. 묘 광시면 은사리에 있다. 이조판서를 증직 받았다.
제 10절 설단(設壇)
■ 신인기(申仁錡)
본은 평산. 고려 한림학사, 첨의부찬성사. 봉산면 대지리에 설단(設壇).
■ 안처형(安處亨)
본은 순흥(順興). 관은 파주목사. 신양면 여래미리에 설단(設壇).
■ 윤 간(尹 墾)
본은 파평(坡平). 조선 초에 성균관 대사성 역임. 광시면 시목리에 설단(設壇).
■ 윤안비(尹安庇)
본은 파평(坡平). 고려 때 문하시랑찬성사태위(門下侍郞贊成事太尉) 역임. 광시면 시목리에 설단(設壇).
■ 윤인달(尹仁達)
본은 파평(坡平). 고려 때 좌산지상시(左散騎常侍, 正3品) 역임. 광시면 시목리에 설단(設壇).
■ 윤 침(尹 ?)
본은 파평(坡平). 고려 공민왕 때 순성도리익위공신(純誠道理翊衛功臣), 도첨의사평리(都僉議司評理), 영평균(鈴平君). 광시면 시목리에 설단(設壇).
■ 정 대(鄭 帶)
본은 온양(溫陽). 홍주판관, 간양리에 정착. 예산읍 신례원 사동에 설단(設壇).
■ 정 빈(鄭 ○)
본은 온양(溫陽). 무과급제 후 훈련원첨정, 예산읍 신례원 사동에 설단(設壇).
■ 황거직(黃居直)
본은 창원(昌原). 철원부사 역임. 예조참판의 증직을 받음. 시호는 충렬. 응본면 입침리에 설단(設壇: 敬遠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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