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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비평]
충격, 그 썰물 뒤의 고민 -소설문학의 새로운 태동을 꿈꿔본다 정 세 봉
묵주(墨晝) 정세봉(鄭世봉) 프로필
최근 년간 나는 세계문학의 흐름과 세계속의 큰 문학들을 섭렵, 살펴보는데에 많은 시간과 정신을 소모시켰다. 그 과정에 내가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고 그 뜨거운 썰물의 끝은 참담했다. 나는 허허 갯벌에 홀로 던져진 미아(迷兒)와도 같은, 여지 없이 홀딱 벗겨져서 그 천박함과 병신스러움이 낱낱이 드러난, 라신(裸身)으로 된 내 문학의 부끄러운 실체와 매양 슬프게 만나군 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급기야 원점, 어떤 의미에서는 오만하게 잊어버리고 살았던 아득히 먼, 문학 본연의 의미라는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뭔가 새롭게 깨여나고 아프게 눈을 뜨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희망이 없다는, 그런 절박한 모지름과 사변적인 치열함을 수반한 긴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세계문학의 흐름에 대한 간단한 정리 다 아는 바이지만 프랑스대혁명 후 "소설의 19세기"를 활짝 열었던 발자크, 스탕달 시대로부터 20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작가들은 현실과 리상의 궁극적인 일치, 현실세계의 비극적인 본질에 대한 묘사를 통해 합리적 리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이 문학이 성취해야 할 리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그런 자신감은 처참히 붕괴되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유럽의 몰락은 시작된다. 종전 후 작가들은 인간의 삶과 사회에 대한 본질을 묻는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스"를, T.S.엘리오트는 "황무지" 를 분출해 내었던 것이다. 그들은 몽상 속에 갇힌 자신들을 발견했고 서구가 구축해 놓은 질서정연한 합리적 리성의 세계에 대해 회의의 눈초리를 던졌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산업 사회 속에 갇힌, 합리적인 세상은 파괴되고, 다만 욕망의 거친 질주 속에 알몸으로 던져진 자신들을 발견했고 마침내 리얼리즘의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고립, 파괴와 기계의 소음 속에서 사라진 인간 내면의 평화와 고요에 대한 욕망을 표출시키고 현실로부터의 완전한 탈피와 "세계의 해체"(자기 자신에 대한 해체)를 외치기 시작한다. "모더니티"는 그렇게 나왔다. 말하자면 " 모더니즘의 아침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연다." 그것은 또한 프란츠 카프카, 알베르 까뮈,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를 거쳐 서구에서 외치기 시작한 "문학의 위기", "소설의 종말"에까지 이어진다.... 바로 이런 때에 세계문학의 중심에 폭발적으로 떠오른 문학이 중남미 문학이다. 중남미 문학이 주는 충격
이른바 "주변부"에 속하고 정치, 사회, 문화의 후진국들인 중남미에서 세계를 주도하는 문학이 탄생한 것은 미상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알고보면 크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들은 우선 여지껏 세계문학을 선도해 왔던 유럽 중심의 문학을 충분히 소화해 내고서 그 정전(正典)을 거부, 기존의 문학모델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출로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왕패(王牌)를 들고 등장을 한 것이다. 일명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하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정의를 간단명쾌하게 내리긴 어렵지만 그 내면의 치열한 지향이라면 정통 리얼리즘이 갖는 협소한 상상력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리얼리즘과 환상주의 간의 인위적경계를 무너뜨리고 소설을 저 멀리 "상상과 언어의 공동의 땅(카를로스 푸엔테스)"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환상성은 모더니즘처럼 의식적으로 재구성된 추상의 세계가 아니라 타고난 본연의 원시적이고 신화적인 사뭇 신비스런 환상이다. 그것이 그들의 문학에 푹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드는 "마술(魔術)"이기도 하다. 아무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아르헨티나)를 선두주자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 카를로스 푸엔테스(멕시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페루), 환 룰포(멕시코), 훌리오 코르타사르(아르헨티나), 이사벨 아옌데(칠레), 호르헤 볼피(멕시코), 이그나시오 빠디야(멕시코) 등등의 "마술적사실주의 소설가군단"은 그야말로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나래치면서 현실과 력사에 밀착된 허구세계를 치밀한 스토리 전개와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로 온 인류가 공명하는 문학으로 창조해 내었다. 예고된 "소설의 죽음"에 저항해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창출해 낸 그들의 장거(壯擧)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가 없다.
원점- "문학 본연의 의미" 매양 그렇듯이 충격의 썰물이 쭉 빠져나간 뒤면 내 머리속은 온통 하얗게 백지상태처럼 텅 빈다. 그러나 한참 지나노라면 차츰 넋을 잃었던 생각의 포말들이 하나, 둘 깨어나면서 사유의 움직임이 다시 시작 된다. 이 시각에도 나는 두 눈을 감고서 차분히, 내가 뭘 말해야 하는지를 새삼 확인을 해본다. 원점-- 문학 본연의 "의미"라는 구심점에 자꾸만 생각이 모여짐은 웬 일일까? 멕시코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소설은 죽었는가?"라는 물음에 딴전을 부리듯이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그 뜻인즉 시대와 력사앞에, 그 행정에,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소설은 영원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말은 더욱 재밌다. “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 인들의 지엽적인 걱정일 뿐이다. 동구나 중남미 작가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서재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 놓은 채 소설의 죽음에 대해 중얼거릴 수 있다는 말인가?”... 마르케스의 노벨상 수상작인 "백년 동안의 고독"은 현실과 환상이 마술처럼 뒤얽혀 상상이 곧 있는 그대로의 인간 내부의 현실임을 보여준, 조국 콜롬비아에서 일어났던 내전과 유년을 보낸 외가의 신화와 전설을 씨줄과 날줄로, 폭력으로 점철된 20세기, 중남미의 어두운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신화적인 수법으로 풍자한, "마콘도"로 상징되는 인간의 유토피아는 인간 내부의 악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한다는 비극적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인류의 각성을 강력히 촉구한 소설이다. 마르케스는 또 19세기부터 존재해 왔던 중남미의 여러 독재자들의 이미지를 종합하여 독재자의 원형을 그린 "족장의 가을" 등등 많은 소설들을 쏟아냈다. 마르케스뿐이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는 "끝없이 이어지는 두 갈래 길이 있는 정원" 등 탁월한 소설들로 페론정권의 독재에 비판을 가했고 이사벨 아옌데, 카를로스 푸엔테스, 코르타사르 등등의 중남미 작가들 모두가 라틴아메리카의 가혹한 현실을 자신들의 문학에 담았던 것이다. 충격이 크기는 동구권(圈) 작가들의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체코의 밀란 쿤데라, 알바니아의 이스마일 카다레, 헝가리의 임레 케르테스, 루마니아의 이보 안드리치 등등의 거장들을 떠올릴 때 누군들 흥분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스마일 카다레는 "꿈의 궁전"이라는 소설에서 "꿈의 궁전"이 꿈을 꾸지 못하게 하는 궁전임을, 밀란 쿤데라는 소설 "롱담"에서 농담 한마디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이 철저히 파괴되는 참혹한 현실을 그리었고, 임레 케르테스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소설 "운명"에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의 고통의 경험으로 "나 자신이 곧 운명이다"라는 메시지를 외쳤던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성이 말살된 야만적인 사회 구조에서 개인이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지를, 그처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정상적인 일상으로 수용해 내면서 "행복 비슷한 것"을 느꼈다는... 그것은 무서운 저항이다! 그리고 스탈린 시대의 몰락 이후, 기라성(綺羅星) 같이 줄줄이 나타난 파스테르나크("의사 지바고"), 솔제니친("암병동", "수용소 군도"), 에렌부르크("해빙"), 악쇼노프("체화滯貨된 나무통") 등등의 구쏘련(로씨아)의 작가들과 그들의 탁월한 문학에 대해서는 구태여 더 언급을 하지 않으련다. 한 마디로 그들의 문학은 문학의 본질적인 기능과 역할을 망각하지 않았다는 것, 그에 충실했다는 것...말하자면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증언을 했다고 볼 수가 있다. 중남미 문학의 이른바 "환상적 리얼리즘"도 "환상적"은 기법이고 "리얼리즘"에 작가의 치열한 정신, 숨은 뜻이 녹아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곧 "문학 본연의 의미"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들 모두가 "저항작가"라는 사실은 주목할 바이다! 여기에서 작가로서의 김학철선생과 그의 문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살펴보면 김학철선생의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는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과 비슷한 시기에 씌여졌다. 그리고 쏘련작가 에렌부르크의 "해빙"은 정치적인 "해빙"이 바야흐로 되고있는 시기에 쓴 소설이지만 김학철선생의 "20세기의 신화"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가장 엄혹한 시대적상황에서 집필이 되었다. 새삼스런 화제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 이러한 사실을 놓고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난 세기 50~60년대, 그때에도 우리 문단에는 적지 않은 작가들이 있었지만 누가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가? 김학철, 그 한 분 뿐이였다. 오직 김학철선생만이 문학이 뭘 말해야 하는지를, 력사와 시대와 민중의 문학에 대한 요청이 무엇인지를 읽어내고 치열한 필묵으로 원고지를 메워나갔던 것이다. "목을 내 건, 엄청난 일"을 저질렀던 것이었다! 큰 작가, 큰 문학은 이렇게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 자성(自省)의 아픔 한 작가의 문학적 력량은 그의 작품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소설의 발상(작가의 "특출한 눈")으로부터 구성 기법,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수능란한 재주,, 마력이 붙은 듯 독자를 매료시키는 현란하고 풍요로운 문장력 등등에서 립증이 된다. 그것은 눈속임 할 수가 없다. 세계속의 큰 작가들의 작품, 그들의 문학 앞에서 경탄을 금할 수 없는 반면에 기가 죽지 않을 수가 없다. 수십년을 집념해 왔다는 내 자신의 (혹은 우리들의) 문학을 떠올려 보면 슬프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다. 인젠 정말 자신의 작품을 어디에다 내어놓기 부끄럽다는 생각이 확고해지고 있다. 하긴 세계 문단의 거장들, 그들의 문학과 굳이 비교를 해서 거론을 하는 자체가 어쩌면 주제 넘고 분수를 모르는 짓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라는 오기도 생긴다. 큰 산 앞에서만이 자신이 얼마나 왜소한가를 깨달을 수가 있다. 자신의 문학이 얼마나 얕고 서툴고 꽉 막혀 있는지를 절감할 수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솔직해 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것은 분명히 아픔이다. 이제서야 발견하고 깨달은, 못난 자아(自我)와의 첫 만남의 장(場)이 그렇게 흥겨울 리가 없다. 못난 자신(문학)에 대한 큰 실의와 쓰라린 렬등감, 느닷없는 혼란스러움과 방황, 자신의 문학적 력량(혹은 천재성)에 대한 새삼스런 회의와 고민...이 모든 것을 맛 보고 감내해야만 하는 질고(疾苦)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문학에 대한 한 차례 깊은 자성(自省), 치열한 고민의 시간이 된다는 의미에서는 대단히 고무적이라는 생각이다. 새롭게 깨어나고 아프게 눈 뜨려는 의지 속에는 뭔가 꿈틀거림이 있다. 나는 늘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 소설문학의 "큰 도약(跳躍)"이 과연 도저히 불가능한, 꿈도 꾸지 말아야 할 사항인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얼마 전에 한국의 어느 한 교수 분이 쓴, 일본문학이 한국문학보다 앞선 리유, 한국문학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는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다. 문학의 발전과 수준도 선진문명국으로부터 후진국으로 내리 흐르는 것임을 어길 수 없다는, 보편성이라는 의미에서는 당연히 옳은 얘기였다. 그러나 중남미 문학을 떠올리면 "가능성"의 희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허튼 생각"이 또 고개를 쳐든다. 위에서 그들의 문학은 유럽 문학, 그 정전(正典)을 거부하고 기존의 문학모델을 파괴하려는 끝없는 노력, 미래지향적인 반항의 결실이라는 점을 언급했지만 특히 충격적인 것은 그들 중남미 작가들은 소설의 구성 기법에서도 답습을 거부, 새로운 창조를 보였다는 점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줄거리는 생략하고 등장 인물들의 중요 행적만을 기록하는 구성법을 선 보였고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과 끝이 연결 되는 원형구조를 실험하여 작품을 성공시키기도 했었다. 또한 호헤르 루이스 보르헤스는 서양의 고전을 구석구석에 녹여내면서도 서술 기법에서 서양 문학사의 전통적인 방식을 해체하여,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의 원조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그들 문학은 독창적인 기법들을 통해서 전통 문학의 테두리를 깨뜨린 것이다. 다음 하나, 이른바 "가능성"에 대한 두번째 "유혹"이라면 김학철선생의 문학이다. 비록 그 분의 전기적인 인생 경력이거나 박식함 및 그 치열한 정신적 경지는 범인凡人들로서는 이를 수 없는 바이지만 여기 연변 땅, 중국조선족 사회라는 풍토에서 나타난 작가라는 점에서는 자부심과 함께 "가능성"이라는 한 줄기 빛을 상상이나마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한국문학의 영향이 크고 배울 점도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문학만 따라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금물이라는 생각도 가져본다. 그것은 어쩌면 "큰 도약 (跳躍)"에의 비전을 스스로 포기하는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역사의 종말"이 예술에 적용되는 경우는 나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이 종말, 나는 그것을 너무나 잘 상상할 수 있다. 오늘날의 소설 생산이 소설사(史)의 장(章)외에 있는 소설들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시대의 종말까지, 끝없이 이어질 소설들,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고, 어떤 미학적 야망도 없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 리해나 소설의 형태에 어떤 변화도 가져다 주지 않는, 서로 비슷한, 아침에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고 저녁에 완벽하게 던져 버릴 수 있는 소설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문학의(예술의) 역사 밖으로의 추락보다 더 끔찍한 일도 없다."
밀란 쿤데라의 이런 엄청난 말을 인용하는 것 역시 우리 한테는 전혀 타당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말의 함의를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음미해 보는 것도 깨달음이 있는 즐거움 이였다. 아픈 자성(自省)과 깊은 사고(思考), 치열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다. 우리 소설문학의 새로운 태동과 큰 도약을 꿈꿔본다. 2007년 정월. "문학과 예술"지 2007년 1호에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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