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로 오는 발해유민들의 숫자는 최대 30만명가량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대략 짚어볼때말이죠. 그 이상 가능성을 볼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고려에서는 이 발해출신들을 같은민족으로서 우대했고 왕족과 귀족출신들도 우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고려에서는 발해의 역사서를 제대로 편찬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발해출신 귀족이나 왕족들이 고려의 귀족세력으로 성장하지도 못하죠. 그덕에 고려의 문벌귀족색을 보면 신라계승적 모습을 강하게 내비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고구려 계승적 모습보다는요. 그결과로 발해출신들이 나중에는 조선시대에는 천민으로 전락하는 경우까지 나타나거나 발해인 세력이 사실상 고려에서 소멸되는 결과를 보이면서 발해에 대한 역사서 인식에 대해서 고려가 제대로 하지를 않는다는 점입니다.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시점에서도 발해에 대해서 역사서를 편찬하지 않았다는 건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이 이걸 저자한 이유도 우리역사를 제대로 알리기 위함이라고 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발해를 우리민족이라고 생각한 고려에서 발해에 대해서 역사기록을 아예 기록하지 않는 태도를 취합니다.
왜 고려에서는 발해왕족들과 귀족출신들을 우대했으면서도 발해출신들은 한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일까요?
첫댓글 아무래도 삼한계(?) 라 불리는 반도세력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통일전쟁의 결승전인 일리천 전투에 고려의 10만대군 중 흑수말갈계를 포함한 4만 이상의 병력이 발해계열로 알고 있습니다. 후백제에 비해 인구면에서 열세에 처했던 통일이전 고려에게 발해유민들은 한 마디로 하늘에서 떨어진 엄청난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구 신라계든 구 후백제계든간에 일단 삼한내에 있던 세력의 입장에서 언제든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이를 제거하려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란제국과의 3차전에 걸친 20여년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발해계 세력이 대거 전투에 동원되었을 겁니다. 안융진성의 성주이던 중랑장 대도수를 비롯한 발해계가 이 전쟁에서 선두에 섰을 것은 당연합니다. 일단 거란제국은 발해제국을 멸망시킨 원수니 이를 갚으려 들 테고요. 그리고 2차전에서 적어도 20만 이상의 포로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중 상당수가 발해계였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발해계 세력 자체가 기초부터 박살이 나 버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대를 해도 워낙 수적으로 열세다 보니 점차 소수파로 전락하다가 하층계급으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고요전쟁에서 육체적소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네요...
말씀감사합니다. 하지만 양조의 공격이라든지등을 보면 포로들을 구출하는 모습을 보이잖습니까? 상당수 말이죠? 아닌가요?
그래도 포로의 수가 너무 많아요. 적어도 20만입니다. 아무리 구해도 5만 이상은 어렵습니다.
으흠.. 그렇습니까? 고려-거란전쟁에 대해서 좀더 한번 알아봐야겠군요. 이 포로문제에 대해서 말이죠.
고려사의 초기 기사들이 거란침입 당시 소실되어 남아 있는 사료가 부실하다는 사실은 모두 아는 상식입니다. 그러므로 고려사에 남아 있는 발해유민의 고려내투 수보다 훨씬 많았을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대략 30만정도로 추산한 것은 합리적인 추산으로 여겨집니다. 고려시대 동번과 서번으로 인식되는 여진족 내에는 분명히 발해유민 집단들이 여전히 번인이라 불리며 여진족과 공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30만을 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조선 세종때 사군육진 개척을 통해 함경도를 완전히 접수하면서 흡수된 여진족까지 합산하면 50만~80만 정도로 추산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한민족을 형성함에 있어 신라와백제계가 절반이라면 고구려발해여진계가 절반을 차지했을 것입니다.
고려에서 발해계가 세력권을 형성하지 못한 이유는 발해 멸망 이후 유민들이 시기를 달리하여 산발적으로 고려에 내투함으로써 고려내 거주지가 달랐을 것이며 그 결과 연대성이 희박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고려조정 내 신라백제계의 견제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거든요. 그리고 고려내 신라백제계의 배타적인 발상들이 발해유민들의 기반을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한편으로는 사료에 드러난 것 보다는 발해계의 입김이 강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김창현씨에 의하면 광종정권을 뒷받침하고 칭제건원케 한 세력이 발해계와 후백제계였고 성종 숙종 예종으로 이어지는 북진책을 뒷받침한 한 세력도 발해계가 아니였나 싶네요.
이런 상상도 가능하지 않나요? 발해계=서경세력, 개경계=신라,후백제.... 어쩌며 서경천도운동에서 정치적 육체적으로 괴멸되었을 수도 있죠. 뭐이건 순전 저 혼자만의 생각이지만요.
쉽게 생각해서.... 당시 고려 조정이 원하는 인재상이 발해인들에겐 없었다는 정도로 생각할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엄연히 따로 존재하던 국가다 보니 사상도 다를테고 일반 국민들의 사고방식도 다를 텐데, 전세계에서 분단이후 통일된 국가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사고방식 차이로 인한 분란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고려 조정에선 어쩌면 그러한 부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웠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근거지를 잃고 쫓겨온 사람들' 이라는 한계도 무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고려 초기의 권력구조는 호족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신라와 (후)백제계 호족들은 그 근거지를 갖고 상당한 힘을 발휘하였으나, 발해계는 자신의 영토를 잃고 고려로 넘어온 케이스에 해당하므로 근거지가 있을 리 없지요. 고려왕의 토지하사나 토지구매 등으로 일정한 땅을 얻더라도 해당 지역의 기존 호족들이 발해계가 힘을 키우는 것을 쉽게 용납하진 않았을 테니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과거 위만이 내투했을 때, 그를 '변방을 지키는 장수' 로 삼은 것처럼 귀순한 귀족을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 삼아 그 세력을 일종의 방패막이로
삼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발해 유민의 경우도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도수의 경우 고려 서북지역 최전선을 지키는 장수였으니까요. 이는 성법맨님 지적처럼 거란의 수차례 침입으로 발해출신자의 인적 손실은 물론 상당한 재산상 손실도 가져왔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점도 발해계가 힘을 키우지 못하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겁니다.
무었보다도 미주가효님의 주장이 가장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자신들의 부분적인 세력이나 근거를 가지고 이미 뿌리를 내린 신라, (후)백제 호족들과는 달리 나라를 잃고 근거와 세력이 없는 발해유민들은 근본적으로 동등하게 대우를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것 같군요..발해유민들끼리 뭉쳐지는 것 조차도 근본적으로 와해시키고 견제를 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기본적으로 고려의 기반자체는 구 고구려계라고 봐야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핵심에서의 분활자체는 신라-백제계라는 점도있지만 저는 고구려계의 존재라는 3각구도 형립이라는 게 맞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