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만한 함박눈이 펑펑 역대급으로 쏟아지던 어느 새하얀 날에....
그 날 오후에...
파마삼매경에 빠져있을 때였겠다.
트위스트파마...
케이블티비에선 나도 그 아줌마손님도 좋아라하는 드라마, 사랑과전쟁이 방영되고 있었다.
일에 몰두해야할 상황임에도 드라마는 남편이 아내 민지영의 불륜현장인 모텔을 급습하려는 절정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어, 손은 파마를 말고 있으면서도 눈은 힐끔힐끔 티비 화면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남편이 모텔문을 열어젖힐 무렵에...
하필이면 그 때에...
미용실문이 열리는 것이었다.
내가 혐오스러워하여 오는 것을 늘 탐탁지 않게 여기는 乞女(걸녀-거지여자)였다.
걸녀가 우리집과 인연을 맺은 것은 벌써 10년이 넘었다.
어느 더운 여름 그녀는 두꺼운 누더기옷을 입고 우리묭실을 방문하였다.
나는 구걸을 하러 온 줄 알고 1000원짜리 한 장 줘서 돌려보낼 생각을 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난 돈도 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낼 생각을 했다.
전에 구걸하러 오는 인간들에게 시달린 안 좋은 경험들때문에 더 이상 구걸하러 오는 인간들이
우리묭실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녀는 돈을 달라하진 않았고, 커피를 한잔 달라고 했다.
까짓거 커피한잔쯤이야....
그런데 그녀가 나가고 난 뒤 남겨진 잔향은 정말 대단했다. 살다살다 그런 찌릉내는 정말이지...
그 이후로 그녀는 심심하면 들러 커피를 받아갔다.
맥심모카골드믹스커피...
여자라고 손톱에 매니큐어는 꼭 바르고 다녔다.
그것도 빨간색으로...
집이 있는 것인지...
가족은 있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아, 한 번 물은 적이 있었다.
"집은 있슈?"
자존심은 있는지,
"물어보지 마요" 했다.
사실 걸녀가 늘 커피만 타간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어디서 얻은 것인지 1000원짜리 한 장을 들고 와서는,
"앞머리 잘라주세요"
하였다.
하지만, 첨에 어떤 식으로든 한 번 엮이면 계속 엮이게 될까봐,
"아아아 안 되요, 지금 가위가 고장 났어요"
하고 거부 하였는데,
그랬더니 이후로 한 번도 머리 잘라달라고 하는 적이 없었다.
내가 참 판단을 잘한 것 같았다.
그 것 말고...
어쩌다 한번씩,
"메니큐어 발라도 돼요?"
하고서는 메니큐어 바르고 가는 것 밖에는 그리 싫어할 짓은 하지 않았다.
아 참 근래에, 어느 날에 화장실을 한 번 쓰더니, 그때부터
커피타러 들르면 반드시 똥을 싸고 갔는데,
너무 자꾸 그러니까 나도 짜증이 나서,
어느 때부턴,
"화장실좀 써도 돼요" 하면,
"안돼요, 지금 사람 있어요"
"안돼요, 지금 물 얼어서 못써요"
이렇게 갖은 변명을 붙여서 화장실을 못 쓰게 했다.
사실 그 때 이후로 걸녀는 한동안 우리 미용실에 자취를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을 못 쓰게 해서 걸녀가 상당히 삐졌나보다, 거짓말을 한 것을
걸녀도 눈치 챈 것이 틀림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비해 하도 들르질 않으니 소식이 궁금한데다 미안한 생각조차 들었다.
그렇게 안 오다가 거의 한 달 만에 첨으로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었다.
사실 그녀는 우리미용실에 들어오면- 내가 그렇게 하도록 하도 주의를 줘버릇 해서 생긴 습관인데-
내가 무슨 다른 말을 하지 않는 한 문 앞에 서서 기다리도록 되어있다.
그렇게 기다리다 내가 커피를 타주면 잔을 받고 나가도록 되어 있고,
내가 즉시로 커피를 주는 기색이 없으면,
쭈뼛쭈뼛하다가 내게,
"커피한잔 주세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날은 좀 달랐다.
주먹만한 함박눈이 펑펑 역대급으로 쏟아졌던 새하얀날 오후에....
새까만 연탄같은 걸녀가 평소처럼 문을 열고 문 앞에 서 있질 않고,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이었다.
눈이 가득 묻은 신발로...
이곳에서 22년을 경영했던 촉으로 비추어봤을 때,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저벅 저벅 저벅, 걸녀가 여나무 발자욱을 걸어 나를 향해 걸어오는 그 순간에는
나는 트위스트 꼬는 것도 , 민지영이 남편한테 뒤지게 맞아 터졌는지 어쨋는지도 관심사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내가 멍해 있는데,
그녀는 왼손에 든 두 개의 검은 비닐봉다리 중 훨씬 더 두툼한 봉다리 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미는 것이었다.
그건 다섯개들이 호떡빵이었다.
슈퍼에서 파는 그...
"먹어요"
헐...
난 도무지 이게 무슨 영문인지 빨리 분별이 안됐다.
"됐어요"
하며 난 그녀에게 다시 빵을 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가져요"
하며, 다시 내게 빵을 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도 질새라 고무장갑을 벗고, 잽싸게 걸녀를 쫓아나갔다.
그 짧은 시간에도 내 뇌리엔 오만가지 생각이 다 스쳐갔다.
그동안 커피 얻어마신게 고마워서 보답하고 싶었나...
내가 화장실 못 가게 해서 이따위 치사한 방법으로 앙갚음하는 것인가...
아니면, 날 흠모했었나...
사랑했었나...
"이봐요, 됐어요, 내 먹은 걸로 할테니 가져가 먹어요"
그러나 걸녀는 손을 저으며 거부했다.
나도 지지 않으려,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빵을 되돌려주려는 수단으로
걸녀가 들고있는 봉다리를 열어젖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봉다리 안에는 한 3일은 먹어도 다 못 먹을 만큼의 먹을거리들이 작은 종이봉지마다 잔뜩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나는 손님이 모두 가고 없는 저녁에 미용실에 앉아 조용히 걸녀의 일을 생각해보았다.
걸녀는 커피 얻어먹은 은혜를 갚고자,
화장실 못가게 한 것을 앙갚음하기 위해,
내게 빵을 준것이 아니었다.
나를 흠모해서 사랑해서 빵을 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날 먹을거리가 넘쳐나 처치곤란 지경이다 보니, 질적인 면에서 상대적으로 저급하다 생각되는 공장빵을,
내게 떠넘기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었을텐데 굳이 나를 선택해서 적선(積善-선을쌓음)을 베푼 것은 그래도 지금까지 나와 쌓은
의리를 저버리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다.
그냥 빵을 받을 것을...
걸녀는 그래도 맘을 쓴답시고 한 행위였는데, 그 선의를 거부하였으니 얼마나 맘이 상하였을고...
다음에 오면 화장실을 내어주고 이 덜 닦인 분변같은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을 말끔히 씻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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