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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지경을 넓히자! 3-옆으로(출32:11~12)
식당에서 묘한 광경을 봤어요. 네 식구가 식사를 기다리면서, 각자 핸드폰만 보는 거예요. 밥이 나오니까, 밥을 먹다가 다 먹은 순서대로 또다시 핸드폰을 보구요.
그런데 슬픈 것은, 그 모습이 특이하기 보다는 일상적인 모습이라는 거예요. 집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죠. TV를 봐도 각자 따로따로에요. 방에서 보고, 응접실에서 보고, 핸드폰으로 보고, 아이패드로 혼자들 봐요.
그래서 생기는 것이 외로움이죠. 외로움이 사회적인 병, 고질적인 병이 되었어요. 사실 소통은 훨씬 쉬워졌고, 빨라졌는데, 그런데 외로움은 더 깊어졌어요.
제가 살던 고향은 제가 중학교 때 까지 전화가 동장님 집에만 있었어요. 그래서 전화 오면 동장님이 방송을 하시죠. “신준우씨댁 현식이 전화왔습니다.” 그럼 뛰어가서, 기다렸다가 전화 받아요. 소통이 느렸고 어려웠죠. 그렇지만 지금처럼 우울증이 많지 않았고 자살도 많지 않았어요.
요즘 TV에 먹방 프로그램이 많은데, 시청률을 올려주는 대부분은,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이라죠. 먹방을 보면서 밥을 먹으면 혼자 먹는 것 같지 않고 외롭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전체 가구 수의 1/3이 1인가구가 되어가는 통계만 봐도 납득이 돼요. 그래서 요즘은 식당에도 혼자 먹는 테이블이 따로 있을 정도에요.
이럴 때 교회의 사명이 생겨요. 교회가 가족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교회 덕분에 외로움을 잊고, 성도들 덕분에 우울증을 이겨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떻게 그것이 가능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우리 모두가 기도의 지경을 한 뼘씩 넓히는 것이라 생각해요.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것이 자신들의 신이라며 섬겼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셨죠.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 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32:10a, 새번역)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진노하실 때, 모세만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세요.(32절) “다른 사람들은 망해도, 모세 너는 더 잘 될 거고, 더 크게 되고 편해 질 것이야” 하세요.
이 소식을 접한 모세가 어떻게 하나요? 기도해요. 나로 큰 민족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꼭 지켜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에요.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해요. 저 사람이 망하면 나면 나는 더 잘 된 건데, 기다리기만 하면 될 텐데, 망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요. 하나님이 “나를 말리지 말아라.” 하시는데도 감히 기도로 말려요.
이것이 기도의 지경이 넓혀지는 모습이에요. 나 잘 살자고만 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죠. 난 괜찮다고 기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힘드니까 기도하는 것이에요.
매년마다 수능 시험을 볼 때, 당일 날 학생들을 위해서 부모와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해요. 시험시간에 맞춰서 하루 종일 기도하는데 대단히 고단한 일이죠. 그런데 몇 해 전에, 수능학생의 부모님들이 한 분도 없을 때가 있었어요. 출근을 해야 했 고,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죠. 시험 보는 자식을 위한 기도의 자리에 오지 못하는 그 마음이 오죽 했겠어요?
그런데 그날 기도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내 자식은 수능을 보지 않지만, 남의 자식을 위해서, 부모의 마음을 대신해서 하루 종일 기도해 주셨어요. 바로 이것이 지경 넓은 옆으로의 기도죠.
이렇게 지경이 넓은 옆으로의 기도를 매 주마다 하는 모임도 있어요. 목요일 오전에 모여서 하는 중보기도에요.
또 하나가 있는데 주일 오후에 모이는 목장 모임이죠. 목장 모임에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 삶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요. 목장은 바로 이런 곳이에요. 가르치는 곳이 아니고, 충고하는 곳은 더욱 아니고, 판단하고 욕하는 곳은 더더욱 아니에요. 내 삶을 고백하고 남 삶을 기도해 주는 곳이에요.
롬 12;15절의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말씀에 따라 상호간에 기도하고, 사랑하고 섬기면서, 함께 힘을 얻는 곳이에요.
집사님 한 분이 제게 긴 문자를 보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목사님, 말씀으로, 기도로 힘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지금 겪는 고난이 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특별히 좋은 목원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원들 기도 힘으로 견딥니다. 아들이 사는 것도 기적이고, 제 몸에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초음파를 찍었는데 보름 전에 7cm의 난소 낭종이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 분이 있는 목장은, 우리 교회에서 가장 길게 모임을 해요. 고백들이 정직하고 내용이 많죠. 그러다보니 기도제목이 많고 간증도 많아요.
제가 며칠 전에, 집사람한테 “내가 이러고도 사는 게 기적이야.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쓰러졌을 텐데...” 그랬더니, “당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기도를 많이 받아서 그래!” 하더군요. 사실이었어요.
지경 넓혀진 성도님들의 기도가 저를 살리고, 우리 모두를 살리는 힘이 되고 있어요. 더 많은 지경 넓은 기도가 더 많은 성도님들을 일으키길 축원해요.
그런데 모세의 기도에 특이한 것이 있어요.
12절을 볼까요?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그들의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님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새번역)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진멸시키시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겠냐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행으로 봐서 하나님이 화내시는 것도 마땅하고, 멸망시키시려는 것도 당연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기도했어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기도해요. 백성들이 죽느냐 사느냐 문제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를 받고 조롱당하는 것을 먼저 생각했어요. 벌 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을 더 괴로워했어요.
모세의 기도는 늘 이랬어요. 민 14장에서도 그랬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10명 정탐꾼들의 절망적인 보고를 듣고는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이번에도 백성들을 전염병으로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2)
이번에도 “너는 더 크고 강하게 축복할게” 하시는데, 모세는 또 기도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값을 받는 것은 당연한데,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이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능함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떠벌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 백성을 살려 주십시오“(민14:15, 16) 모세의 소원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었어요.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냐고 물을 때 주기도문을 말씀하셨죠. 그런데 그 첫 번째 기도가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였어요.
아무리 기도할 것이 말고, 긴급한 기도가 있어도,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그 뒤에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모세의 기도에,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응답이 있었어요. 백성들을 살려 주셨고, 가나안까지 주셨으니까요.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립시다. “하나님, 당신의 명예를 위해서 우리 교회 성도님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우리 청년들을 인도해 주시고, 우리 목장 식구들을 복 주옵소서”
그래서 ‘더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해 지길 축원해요.
그리고 모세는 “내 것을 희생하는 기도”를 드렸어요.
32:32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기도해요.
만일 하나님이 내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 버려 달라고 말해요. 백성들의 죄 사함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기도해요.
마음으로만, 입으로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희생 있는 기도를 드려요. 이것이 바로 지경이 넓혀진 기도에요. 끊임없이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던 자들인데도, 심지어는 모세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던 자들인데도, 섬기는 기도를 드려요.
사도 바울도 그랬죠. 자기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유대인들인데, 내가 대신 저주를 받고 그들은 살려 달라고 기도했어요.(롬9:3)
자식을 위해서 이런 기도를 자주해요. “하나님, 제가 대신 고난 받겠습니다. 더 아파도 괜찮고, 덜 살아도 괜찮습니다. 대신 제 딸, 제 아들을 살펴 주십시오.”
그런데 성도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런 기도를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모세와 바울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 수 있지요. 두 분의 기도에서 중요한 두 가지를 깨달아요.
하나는, 그들의 기도가 주님을 생각나게 하고, 주님을 보여 주고 있다는 거예요. 자신에게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못으로 박고 창으로 찌르고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기도하신 주님을 생각나게 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복 주신다는 거예요. 모세를 최고의 지도자, 바울을 최고의 선교사로 만들어 주셨어요. 롯을 위해 기도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준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자로 만들어 주셨어요. 욥이 자신을 비판하던 친구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을 위해 기도할 때, 갑절의 복을 주셨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낫지 않던 몸이 나았고, 잃었던 자식과 재물을 다시 찾았어요.
결국 지경 넓은 옆으로의 기도는 나를 위한 축복이에요. 그러니 모세와 바울처럼 목숨 걸고 기도하지는 못해도, 작은 것이라도 섬기면서, 내 것을 희생하면서, 기도해야 하겠죠.
주님께서 마 10:42절에서 약속하세요.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커피 한 잔이라도 섬길 때, 주님이 결단코 잊지 않고 상을 주세요.
목장 중에, 목원 식구들 한 사람씩 만나면서 식사대접을 하시는 목자가 있어요. 돈이 많아서가 아니에요. 빚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그래도 비싸고 좋은 것을 사지는 못하지만, 사랑으로 섬겨요.
이런 목자도 있어요. 초등학교 입학하는 목원의 딸에게 학용품을 사 주고, 직장을 찾아가서 위로도 하고, 대소사를 챙기고 돌봐요. 뭘 바라고 한 것이 아니지만, 주님의 약속,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이 복이 있을 줄 믿어요.
한국교회에 “야베스” 열풍이 불었었죠. 지금도 그 열풍은 식지 않았어요. 집집마다 혹은 사업체 마다, “야베스의 기도” 액자를 달아 두는 것이 유행이 되었어요. 대상 4:10절이죠.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그런데 저는 이 기도에 대해서 별로 호감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기도가 너무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요. 수준 낮은 기도같아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에 크게 응답을 하셨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오늘 설교 주제와 관련된 것도 한 가지 이유에요. 대상 4:9절에.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기록해요.
“귀중한 자”는 “נכבד”(니크바드)인데, “영화롭다, 존귀하다”는 뜻이에요. 야베스는 단순히 땅 많고 돈 많은 부자가 아니라, “영화롭고 존귀한 자”였어요.
왜 일까요? 받은 복으로 사람들을 섬겼기 때문이에요. 얼마나 섬겼던지, 이스라엘에 야베스라는 지명도 생겼어요. 야베스라는 뜻은 “고통”이라는 뜻으로 좋지 않은 이름이에요. 그런데, 왜 그 이름을 동네 이름으로 했을까요? 야베스에게 고마워서에요. 야베스가 가난한 서기관들을 위해 땅을 내 주었거든요.
그랬기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어요. 기도의 지경을 넓혔더니, 고통과 시련의 운명을 타고났지만, 복의 지경을 크게 넓혀 주셨어요.
야베스를 보면, 사도행전의 고넬료가 생각나요.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10:4) 고넬료도 야베스처럼 자기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어요. 구제를 위해 기도했어요. 섬기기 위해서요.
그러자 고넬료는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사람이 되었죠. 사람을 섬겼는데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래서 “너만은 복 줘야 겠구나.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고 남는 넉넉한 복을 줘야 하겠구나.” 하시고 복 주신 거지요.
기도의 지경을 넓히니까, 복의 지경을 넓혀 주셨어요. 우리 한길 식구들이 올 한해, 기도의 지경을 넓혀서 복의 지경도 넓혀지기를 축원해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