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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놈의 ‘영어 울렁증’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 생활을 하기로 한 2000년에 영어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래도 영어 원서를 보며 의학 공부를 했으니 남들보다 낫겠거니 싶었는데, 학원 레벨 테스트에서 초급반에 배정되는 ‘굴욕’을 당한다.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2년이 지난 후 미국의사시험 접수를 위해 미국인과 전화 통화를 하다 ‘date’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해 진땀을 흘리고 2002년 말 미국 병원 입사를 위해 면접을 보다 미리 외워온 예상 질문이 아닌 다른 질문이 나오자 당황해 쩔쩔맨 경험.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연찮게 읽은 ‘뉴욕의사의 백신 영어’(고수민 씀. 은행나무)는 그렇게 10년 전 나의 영어 체험기와 오버랩되며 다가왔다.
캠브리지 효과를 경험하다
10년 전 쯤(정확히는 7년 전)에 어학연수를 핑계삼아 아일랜드에 놀러간 적이 있다. 생존영어라는 바디랭귀지정도만 알던 내게 무턱대고 떠난 외국은 만만찮았다. 더욱이 놀러 간 거지만 그래도 공부라는 대명제가 있었기에 학원 등록을 하고 어영부영 시간낭비를 하던 시절이다. 영어에 워낙 문외한이라 뭐부터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냥 학생들이 무엇으로 공부를 하는지 살펴본 적이 있는데, 한국 학생들은 대부분 비슷한 책을 한권씩 가지고 있었다. ‘그래머 인 유즈: Grammar in use(캠브리지 출판). 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책이었다. 지금은 초․중급 학습자들이 흥미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문법 관련 삽화도 많고, 답지 부분도 책 뒷부분에 함께 수록됐으며, 중요한 문장을 녹음한 테이프도 따로 나와 듣기 학습도 병행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냥 달랑 빈 칸만 가득한 책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국학생들은 물론 많은 (아일랜드)학원에 교재로 채택되어 있었다. 중학교 때 영어를 처음 접하고 고등학교 때까지 6년을 영어라는 과목을 통해서 접해왔어도, 문법에 대한 개념 정리가 부족하고, 체계적으로 잡혀있지 않았던 필자에게 대충 짐작으로 독해정도만 하던 실력은 결국 수능에서도 문법에 관한 문제는 거의 찍었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머인유즈’를 접하면서 ‘문법이라는게 이렇구나’를 느낄 수 있었지만 아쉬움도 적지 않았다. 왜 한국에는 이런 책이 없을까?
한국어로 느낀 정통 ‘잉글리시’
그동안 수많은 영어책을 접하며 느꼈던 것은 도대체 뭐가 기본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성문기초영어부터 맨투맨시리즈까지(90년대는 이 정도가 전부였다) 처음엔 쉬웠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어려워지는 그리고 재미없어지는 기본적인 지루함의 패턴은 어쩔 수 없는 영어실력이 되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모두 중요하다고 하니 뭐가 중요한 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시점에서 ‘그래머 인 유즈’는 신선한 충격이자 아쉬움이었다. 특히 오랫동안 영어책을 놨다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서 ‘그래머 인 유즈’는 적잖이 부담됐다. 간만에 들른 서점. 제목이 눈에 띄어 찾았다. ‘이츠낫 그래머 라이트 : It`s Not Grammar Light’(정재영 씀. 타임북스). 문법이 아니라고? 내용은 신선했다. 당연히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 쉽다고 생각해서 잊고 있었던 기본이 원래는 영문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라는 명제를 상기시켜줬다. 언젠간 대학선배가 새로 영어공부를 시작한다며 중학수준의 영어책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웃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그 모습을 배우고 나도 중학교 수준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시간낭비를 하지 않았을텐데...
저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영어를 정말 잘하려면, 지금이라도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본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모르면 다음 단계를 익히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기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냥 쉽게쉽게 넘어가는 성향을 보여왔던 것이다. 기본은 ‘쉬운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 패션 센스가 뛰어난 사람들이 기본 아이템만큼은 좋은 것으로 제대로 갖추듯이, 영문법도 기본을 잘 갖추면 언제 어디서나 세련된 영어 실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부록인 휴대용 연습장으로 ‘이츠 낫 그래머’식 복습까지! 다시 영어공부가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익살맞은 일러스트로 재미까지 더한 이 책은 가히 한국판 ‘그래머 인 유즈’라고 할 만하다.
기본은 바뀌지 않더라
얼마 전 한 외부 수업을 들었을 때다. 첫 수업인데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였다. 자신감과 적극성을 보는 자리였는데 학생들의 영어 말하기가 가관이었다. 기본적인 문법은 물론 발음, 단어 선택 등을 차치하고라도 영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간단한 발표임에도 나선 사람은 단 4명이었다. 30여명의 인원 중에서. 영어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강해지고 대다수 기업들이 영어를 중요하게 본다고 한지가 10여년이 넘었는데 학생들의 영어실력은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왜 해마다 어학연수는 더 많이 나가고 영어교재는 더 많이 쏟아지는데 예나 지금이나 영어실력은 별반 차이가 없을까? 이유는 하나다. 기본부터 차근차근하지 않은데다가 노력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기 위해 뒤늦게 영어 공부를 시작한 이후 숱한 시행착오와 어려움 끝에 미국 고학력자들과 어려움 없이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고수민씨(뉴욕의사의 백신 영어 저자)도 ‘우직하게 공부하기’와 ‘제대로 공부하기’라는 두 가지 원칙을 강조한다. 단기간에 효과를 보려 하지 말고 ‘우직하게’, 가장 효율적인 영어 공부법을 택하여 ‘제대로’ 공부하자는 것이다.
Montefiore Medical Center에서 재활의학과 의사로 근무 중인 고수민씨는 ‘뉴욕에서 의사하기(ko.usmlelibrary.com)’라는 블로그로도 유명하다. 블로그를 통해 전공인 건강 관련 이야기, 영어 공부, 자동차, 미국에서의 일상생활, 그리고 미국의사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시험 정보 등을 알려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영어 학습법에 대한 글이 네티즌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효과가 있는 영어 공부법을 완성, ‘원어민과 비교하여 70% 수준’의 영어로도 뉴욕에서 의사 생활을 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음을 몸소 보여준 그의 이야기는 매일 평균 3000명 이상이 방문하는 파워블로그다.
모두가 영어를 잘하기를 원하지만 누구나 원어민만큼 잘할 수 없고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영어와 한국어는 구조나 문법 면에서 극단의 언어인 만큼 한국인에게 영어 학습은 유독 어렵고 또한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다. 고수민씨는 “영어를 어느 정도 수준에 올리기 위해 투자되는 시간과 돈, 개인적인 노력의 양을 다른 데에 투자한다면 인생에서 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 어떤가? 영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나에게 영어가 정말 절실하게 필요한가’를 자문해보고 자신이 달성해야 할 현실적인 목표를 세워야하지 않을까. 영어는 살아있다. 기본이 되지 않는다면 절대 다가설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