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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2011년 2월 14일 월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창세기4,1-15.25 마르코8,11-13
“어찌하여 이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에 보여줄 징조는 하나도 없다”<마르8,11-13)
내 이웃은 어디에? /김찬선신부님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너 어디에 있냐고 물으시는 하느님은 이제
네 아우, 네 이웃은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물으십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죄 중에 있을 때,
나는 하느님 밖에 있고
내 이웃은 내 밖에 있습니다.
죄란 사랑이신 하느님 거부이고,
그러니 사랑의 거부이고 관계의 거부이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중심인 내가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 모두를 거부하고,
오직 내 안에 틀어박혀 있기에
모두 관계 밖에 있는 것입니다.
요즘 최 고은이라는 분의 서러운 죽음 때문에
많은 분들이 마음 아파합니다.
먹는 것이 지천이서서 마구 버리는 이때에 굶어 죽다니.
그가 그렇게 배고프고 굶주려 죽을 때 나는 무엇을 했나?
이런 자성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무언가 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아름답고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름답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 편 씁쓰레합니다.
왜 씁쓰레합니까?
서러운 죽음이 어디 최 고은이라는 분, 그 한 분뿐이겠습니까?
서울 역 노숙자들,
결손 가정의 아이들,
자식 없는 노인들,
북한의 우리 형제들과 멀리는 아프리카의 수많은 아이들.
그들이 외로이 죽어갈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가 배가 불러 죽겠다고 할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가 배를 두드리며 너무 배가 불러 죽겠다고 할 때
굶는 사람이 있다고 누군가가 우리에게 얘기를 해주면
오늘 카인처럼
“나는 그를 모릅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저는 우리라고 했습니다.
저를 빼놓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분명 몰랐습니다.
신문에서 보기 전에는 최 고은이라는 분을 전혀 몰랐습니다.
어떻게 제가 모든 사람의 처지를 다 알고 헤아립니까?
그러므로 제가 카인처럼 모른다고 하는 것은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들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은 모름이고,
내 기억에서 밀어낸 모름이고,
내 관심에서 밀어낸 모름이고,
내 사랑에서 밀어낸 모름입니다.
내 안으로 밀고 들어와 성가시게 굴려는 그를,
나에게서 부모의 유산을 빼앗아가려는 그를,
부모의 사랑을 놓고 나와 경쟁하는 그를,
나는 알고 싶지 않고 끌어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그를 지키는 사람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저는 오늘도 카인처럼 이렇게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이재학 신부님
오래전에 상영된 영화 <기적>이 있다. 그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난 수녀를 대신해 수녀원의 성모상이
그 수녀로 변해 돌아올 때까지 대신 수도 생활을 한다는 내용이다.
수녀가 돌아오자 성모상이 있던 자리로 스윽 올라가는
성모님의 그림자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중학교 때 그 영화를 처음 보았던 것 같은데, 그때는
성모상이 수녀로 변신해서 오랜 시간을 그 수녀로 살았던 일이 기적이고,
영화 제목도 그래서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영화를 보고, 생각해 보니 그런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기적이 아니라
주인공 데레사 수녀가 방황 속에서 다시 하느님의 사랑을 찾고,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깨달아 본래 자리로 돌아와 무릎 꿇는 것,
그녀 스스로 하느님의 사람으로 먼 길을
돌아온 것이 진정한 기적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은 기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자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한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을 보아야 믿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태도가 영 잘못되었다고 질책하신다. 기적의 본모습을
알아봐야지 그림자만 쳐다보려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 끝만 보아서는 안 된다.
어디서 성모상이 눈물을 흘린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신기해 쫓아다니는 것은 그림자를 부여잡으려는 바보짓과 같다.
신기한 일만 붙잡을 것이 아니라 그 뜻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사랑과 일치를 주시는 분이시다.
사랑과 일치에 어긋난다면 그 신기한 일은 기적도, 참된 것도
아니다. 표징만을 쫓는 바리사이는 되지 말아야 한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하루하루가 표징 /양승국신부님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정말
변화되지 않는 바리사이들 앞에
깊이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탄식’은 어떤 때 나오는 것입니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때, 정말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 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 때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과 함께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탄식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종착지가 바로 코앞인데, 구원이 바로 눈앞인데,
영원한 생명이 이렇게 자기들 가까이 있고, 금방 손에
넣을 수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거부하고,
발로 차버리는 바리사이들 앞에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터져 나온 탄식이었습니다.
그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준 기적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간 예수님의 손으로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빠져나간 악령들, 죽음에서 되살아난 사람들...그 모든
하늘의 표징들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확인했던 바리사이들이었건만,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메시아의 능력을 자신들의 눈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승복하여 예수님께
돌아서기 위해서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저 호기심에, 그저 장난삼아,
애초부터 신앙의 눈이 아니라 적개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눈으로 예수님에게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의 모습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감과 실망감을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극에 달한 바리사이들의 불신과 적대감,
꽉 막힘 앞에서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는 가슴 아프셨겠지만
그들에게서 기대와 희망을 접습니다.
그들을 남겨두고 떠나십니다. 영혼의 눈이 먼
그들이었기에, 바로 자기들 눈앞에 다가온 구원을 놓치는
일생일대의 과오를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
주변을 곰곰이 살펴보면 일상의 모든 흐름들이 표징입니다.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눈을 부릅뜨고 기적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회심하면,
우리가 제대로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주변의 모든 것이 다 경이로움의 대상이요,
매 순간 순간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랜 투병생활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한 형제의 간절한 바람이 아직도 제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그 간절한 바람이란 것이 평범한 우리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그렇게 간절했나 봅니다.
“시원한 물 한 컵만 벌컥벌컥 들이 마셔봤으면...”
어떻게 보면 지극히 평범한 것 같은
우리의 작고 소소한 일상들은
기적과 표징의 연속이 분명합니다
표징 /이정호신부님
신학생이던 시절에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인가를 고민하면서
하느님께 분명하게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 끝에 ‘성직자의 길이 제가 가야 할 길이라면 알기 쉽게 표징을
보여주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어떤
표징을 주신다면 신학교에 남고 그렇지 않으면 짐을 싸겠습니다’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구한 표징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저는
하느님께서는 내가 성직의 길을 걷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나보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요구한 우연한 표징 하나에 제 인생을
건다는 것이 참으로 미련스럽게 여겨져 죄송한 마음에 다시 한 번 기도하고
마음을 다잡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표징을
보고 싶어하지만 표징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표징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한 표징도 있겠지만 하느님의 일을 믿고
신뢰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표징이요 그러기에 또 다른 표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표징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징표는? /박성태 신부님
독일의 한 남작이 자신의 거대한 집에 있는 양쪽 굴뚝에
여러 갈래의 철사줄을 연결하면서 어떤 철사줄은 강하게, 어떤 철사줄은 약하게 연결시켜
그 줄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일컬어 거대한 바람 하프라고 불렀습니다.
이 거대한 바람 하프는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내는데, 어떤 소리는 솔솔부는 봄바람소리요,
어떤 소리는 시원한 여름 바람소리요, 또 어떤 소리는 한겨울의 강풍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바람 하프가 내는 소리 중에서 가장 우렁차고
아름다운 것은 남작의 집 골짜기를 가득 메우는 한 겨울의 강풍소리였습니다.
한겨울의 강풍이 휘몰아칠 때 여러 갈래의 철사줄은 참으로 우렁차고 힘있게 소리를 냈습니다.
남작은 이 소리를 들으며 ‘인생에 있어서도 강풍이 휘몰아칠 때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베에토벤은 귀머거리가 되었을 때 불후의 명곡을 남겼고,
에디슨은 모든 시험에서 낙방하여 둔재 소리를 들었지만 가장 위대한 발명을 하였고,
헬렌 켈리도 맹인이요 귀머거리였지만 불후의 명작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다가오는데 마음들이 깨끗하지 않는,
예수님을 시험하고픈 마음으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면서 그들에게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그들의 교만한 콧대를
확 꺽었으면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올바른 모습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접근한 그들에게
어떤 기적이 있어도 그들은 쉽게 수긍을 하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기적의 뜻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그들에게는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기적은 어떤 것일까요? 혹 우리는
마치 마슬사가 마술을 부려 사람의 마음을 혹하게 만들듯이 그런 유형들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것들을 쫓아 계속 헤메는 것은 아닌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 기적은 사람과 동떨어진 어떤 것을
찾아서는 안 되리라 여깁니다. 거기에는 환상만 있을 따름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표징을 보여 주셨는데,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고쳐 주시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소외된 이들을
가까이 불러 주시는 이런 모습이 오늘날 신앙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세라 여깁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아무 어려움 없이 아니 어려움을 피해가면서 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표징이 아니고, 삶에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수록
그것을 이겨나가고자 애쓰는 모습이 이 시대에 진정한 표징이라 생각합니다.
사목생활을 하다보면 가정형편상 여러 모습으로 어려움들이 있는데,
그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잘 이겨나가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그분들이 바로 이 시대에 참다운
신앙적인 표징을 보여주고 있기에 마음이 기쁩니다.
반면에 가진것이 남보다 있으면서 많은 불만과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오늘 복음의 바라사이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나를 생각해 봅니다.
또한 기도해 봅니다. 나 또한 바라사이 모습은 없는지? 아니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는 이 시대 신앙의 표징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사목자가 되길 은혜를 청해 봅니다. 또한 모든 분들이
오늘 하루도 은혜로운 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적같이 환한 미소 /양승국신부님
환자 한분이 영성체하기를 간곡히 바라고 있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여기는 원목실도 없을뿐더러, 저희는 지방에서 올라왔습니다. 바쁘시겠지만 꼭 좀 와주세요."
부랴부랴 달려갔더니 환자분의 안색은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병세가 위중해보였습니다. 침대에서 제대로 일어날 기력도 없어보였기에, 그냥
누워계시라 해도 겨우겨우 일어나 앉아 깍듯이 예의를 갖추셨습니다.
간단한 기도를 바친 후에 모시고 간 성체를 영해드렸습니다.
그 형제님의 성체를 영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제 신앙이 참으로 부끄러워졌습니다.
마치도 보물이라도 건네받듯이 조심스럽고 경건한 태도로 성체를 받아모시던
형제님의 얼굴에는 너무도 황공해하고 감사하는 느낌이 씌여있었습니다.
시간도 늦었고 피곤하니 봉성체 끝내고 빨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저는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성체를 받아모신 그분은 얼마나
오랬동안 감사의 기도를 드리던지요. 간병중이던 따님의 말에
따르면 며칠 내내 신부님 오기만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이윽고 기도를 끝낸 그분은 마치 기적과도 같이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제게 의자를 권했습니다. 그리고 따님을 시켜 제게 음료수를 건냈습니다
또 늦은 시간에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를 하셨습니다.
주변에 같이 서있던 가족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오후내내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셨던 분인데, 식사를 제대로 못하셔서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던 분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하며 다들 놀랐습니다.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힘으로, 성체의 힘으로
그 고통을 이려내려는 형제분의 신앙이 참으로 눈물겨워보였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고통을 해결
해나가려는 형제분의 신앙이 놀라워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 표시로 한번 기적을 보여달라"고 시비를 겁니다.
기적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마음 한편에는 씁쓸함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발길을 내딪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다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몰려든 군중들은 대부분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을 안고 몰려들었지요.
기적을 베푸신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 권능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결국 기적을 통해서 백성들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몰지각한 사람들은 그저 흥미거리로, 때로 심심풀이로,
너무도 이기적인 바램을 안고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려러니 하셨겠지만 너무도 실망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기적도 하지 않으시고 군중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피하십니다.
우리 역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은
아닌지요? 호기심에서 또는 심심풀이로 그게 아니면 우리의
이 극단적 이기심의 성취를 위해서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은 아닌지요?
이 시대 기적은 고통과 실패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는 일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순간에도 하느님을 포기
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꿋꿋이 견뎌내는 삶이 곧 기적입니다.
표징보다는 믿음을 /김미자 수녀님
독선과 우월감으로 가득 찬 바리사이들은
빵의 기적을 비롯해 예수님께서 베푸신 많은 기적을 보고도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가장 똑똑하고 완벽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껏 당신을 믿기에 충분한 징표를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은
더 확실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있고, 눈이 가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설립자 무아 방유룡 신부님은
‘교만하고, 욕심 많고 나만 박학하다고 하는 사람한테는
검은 막을 내려 신비의 빛을 못 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바로 교만하고, 욕심 많고, 자신들이 가장 박학하다고 하는
사람들이어서 하느님의 신비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속 더
확실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며 다가오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 현존하며
우리를 만나고 이끌어 주십니다. 또한 전례와 성사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하여 예수님께 탓을 돌리며,
주님께서 현존하신다는 표징을 보여주시면 믿겠다고 요구합니다.
표징을 요구하기보다는 믿음을 견고히 해주시기를 청하는
살아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시험과 요구에 응답은 없다 /박상대신부님
이방인의 땅에서 4,000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행하신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고 했다.(8,10)
달마누타(Dalmanutha)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갈릴래아 호수
서쪽 포구 막달라일 가능성이 높다. 똑같은 대목에서 마태오복음은
예수께서 마가단(Magadan)으로 배를 타고 가셨다(15,39)고
했는데 이 또한 막달라와 같은 지명이다. 막달라는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이기도 하다.(루가 8,2; 마태 17,56; 요한 19,25)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달마누타(막달라)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께 청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그 이상의 차원인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표가 될만한
기적’이였다. 이는 곧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말하는 것으로서
예수를 메시아로 증명해 줄 것을 의미한다. 당시 유다인들은
종말에 올 메시아가 하느님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이를 증명할만한
놀라운 표징들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구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출애 16,1-36),
해와 달을 멈추게 한 기적(여호 10,12-14),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 예언자의 대결에서
제단 위에 내린 야훼의 불길(1열왕 18,30-40) 등과 같은 하늘에서의
표징으로 예수 자신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묵시문학에서는
하늘로부터의 표징을 ’우주적 이변들’로 표현한다.(묵시 12,1.3; 15,1)
지금까지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이 어디 한 두 개인가?
제자들은 물론이고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도 예수의 수많은
기적들을 목격하였다. 그들이 이제 와서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표징을 청하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데 기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제자들도
아직까지 스승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으니
바리사이들의 불신과 표징을 청하는 무리한 요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이 예수께서 하늘의 표징을 보여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동시에 그들이 ’믿음을 위해서’ 표징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시험하는 것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야훼께서 직접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고 하셨고,
모세도 백성들에게 "야훼를 시험하지 말라"(출애 17,2)고 했다.
예수께서도 ’하느님의 아들임’을 걸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악마의 유혹을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마태 4,7)는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태도에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특히 "나는 분명히 말한다"(12절)는
공관복음 모두가 아주 즐겨 사용하는 예수님의 독창적인 어법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 다음에는 통상 앞에 서술된 내용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 ’확신과 진실성’, ’현저한 대조’, 또는
’더 높은 단계로의 진행’ 등의 말씀이 따른다.
시험과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없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그들을 버려 둔 채 즉시 다른 곳으로 떠나셨다.
표징이란 요구나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사(善射)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은
자기가 믿는다는 하느님께 조건을 걸고 선물을 요구한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해 주신다면, 나도 저렇게 하겠다"는 식의 조건부 다짐이다.
이것은 신앙을 놓고 거래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과도 같다.
하느님께서 다짐을 보고 조건을 승낙할 수도 있지만,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오늘복음에서와 같이
하느님께서 영영 나를 떠나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야하는 표징은... /박영진신부님
오늘 마르코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표징 혹은 징표라는 말마디는 ‘어떤 생각을 전달하거나 사물에 대한 견해를 밝힐 때
기호나 상징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사상전달의 수단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성서적 의미로 표징이라고 할 때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나아가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구약시대의 표징이
대체로 기적과 연결된 계약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비해, 신약시대의 표징은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인간들이 행해야 할 바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참조;‘징표’ 가톨릭대사전)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구약의 의미의 표징을 요구하는데 비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표징은 신약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대에 따라 그 시대에 맞는 표징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이 드러내는 시대의 표징을 파악하고, 그것에 포함된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함을 의미’(참조;‘징표’ 가톨릭대사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독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카인과 아벨’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창조주께서 농부인 카인의 제물보다 목동인 아벨의 제물을 굽어보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큰 죄를 지은 카인에게 벌(11-12절)도 내리셨지만,
두려워하는 그를 끝까지 보호 하신다(15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 또 나를 미워하는 사람 역시 있습니다.
특별히 후자의 경우, 우리 대부분은 어떠한 태도를 취합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참조;마태5,44)구요. 그리고 덧붙이십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5,45)라구요.
이 시대 주님의 표징은, 그리고 우리가 살아야하는 표징은 바로
용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용서에 대하여 묵상하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아멘.
기대나 조건 없이 /김홍일 신부님
얼마 전 감기가 심하게 찾아왔습니다.
아침기도도 못 나가고 방에 누워 성경을 읽는데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신 부분에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라는 구절이 가슴에 와 꽂혔습니다.
여러 번 읽은 구절이었지만 그날 그렇게 마음에 다가왔던 것은 감기를 털고 일어서고 싶은
깊은 내 바람에 조응하는 구절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래 구절은 더 이상 읽지도 않고 바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일으켜 달라고.
그런데 기도 중에 마음 한구석에서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치유를 통해 보여 달라는 기도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내 건강을 담보로
하느님을 시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습니다.
요사이 병원 방문을 하며 더 이상 의학적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이웃을 자주 만납니다. 감기에 걸린 내가 이 정도인데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환우들이나 가족들은 오죽하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순간까지도 따뜻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성숙한 믿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표징 없이는 자신의 신앙을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에도
자신의 믿음을 아름답게 익혀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하느님께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우리가 해결하고 싶어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새삼 배우고 있습니다.
감기는 이튿날 나았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담보로 하느님을 시험했던 내 기도에 대한 부끄러움과
후회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믿음은 어떤 기대나 조건 충족과 상관없이
하느님을 향한 무조건적 사랑과 신뢰라는 사실을 새삼 생각합니다.
더욱이 절실하지도 않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일은 믿음을 찾고 구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을 흥정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새삼 생각했습니다.
믿음은 바깥에서 시험하고 관찰하는 일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과 처지에서도 이미 우리에게 와 계신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며 살아가는 일임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기적과 믿음 /전삼용신부님
이태리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의 하나는
세계의 기적들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기적이 일어난 각 지역에 가서
그 사건들을 면밀히 검사하여 보여줍니다.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로마에서 가까운 나폴리였습니다.
나폴리의 가장 유명한 기적은 뭐니 뭐니 해도 성 제나로의 피의 기적입니다.
성 제나로는 초대 교회 베네벤또 지방의 주교였는데 AD 305년경 박해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참수형 당했던 돌에서 피가 흘러나온 것을 하녀가 받아두었다고 합니다.
중세를 지나면서 유리병 속에 응고되어있는 피는 기이하게
일 년에 한두 번 다시 액체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사람의 피가 한 번 응고되면 다시 액체로 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의 축일이 되면 나폴리의 대주교님이 사람들 앞에서 그 병을 흔들어 보이고
그 병에 응고되어있는 피가 점점 액체로 되어 흔들리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한 과학자가 이 현상을 재연하였습니다.
무엇을 섞었는지는 모르나 화학적으로 피를 만들었고 시간이 지나 굳어졌다가
다시 흔드니 액체로 변하였습니다. 마치 케첩이 응고되었다가도
흔들면 다시 액체가 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충분히
현대 과학으로 그런 기적은 하나의 속임수일수도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는지 제가 만나본 이태리 시골 사람들도
나주의 기적을 많이들 알고 있었습니다. 나주가 교회로부터 거짓이라고 단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텔레비전으로 교황님 앞에서 율리아 혀 위에 있던 성체가
피로 변하였다가 다시 성체로 변하는 장면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에 PD수첩에 방영된 것을 보면 나주 율리아가 손에 쥐고 있던 제병을
남들이 안 보는 사이에 위로 뿌리면서 하늘에서 성체가 떨어졌다고 속이는 장면과
심지어는 그녀의 소변을 나누어 마시는 장면까지 나왔습니다.
또 성체가 피가 되게 하는 것은 이미 입속에 있는
상처를 다시 내어서 그렇게 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기적이 있다고 하여 몰려가는 사람들 중 누구는 나폴리로 누구는 나주로 향합니다.
결국 나폴리로 간 사람들은 아직까지 교회에서 인정하는 기적을 보는
사람들이고 나주로 향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매우 창피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나폴리처럼 교회에서 인정하는 기적을 찾아간 사람들이
나주를 찾아간 사람들보다 더 잘 했다는 말일까요? 저는 그들도 한국에 있었다면
나주로 향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어디나 기적을 찾아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텔레비전을 보고는 그 기적이 사실이 아닐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럼 결국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얼마 전에 오상의 비오신부님의 시신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분의 손과 발에는 오상의 자국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시기 10일 전부터 오상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분이 계속 스스로 자해를 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내고
그 분을 치료했던 의사도 그것이 기적이 아니었음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이미 교회에서 성인으로 인정된 분입니다.
결국 어떤 기적들도 우리를 확신시키기엔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아무리 큰 기적이 일어나도 현대 과학으로
다 재현 가능할 것이고 믿지 않을 사람들은 안 믿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믿을만한 확실한 기적이 있다면 그들도 신앙을 갖겠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에서 인정하는 표징을 따르라고 하시지
않고 ‘표징을 요구하는 것 자체를 나무라십니다.’
이는 마치 한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이 친 자식인지 그 ‘증거를
대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DNA 검사를 해보자고
한다면 부모는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자녀는 부모가 평상시에 자신에게 하는 사랑을 보며
그 분이 자신의 부모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증명서가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증명서도 꾸며낸 것이 아니냐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당신이 메시아이심이 확실한데도 끊임없이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하느님께 무례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우리 일상사 안에서도 혹은 조금만 묵상해보면
하느님이 계심을 또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기 싫기 때문에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표징이 있어도 다른 핑계를 댈 것입니다.
어떤 패륜아는 부모의 재산을 빨리 물려받고 싶어서
부모를 살해하고 방화로 위장했다가 발각되었습니다.
또 어떤 패륜아는 보험금을 위해 친구를 시켜 어머니를 차로 치이게 하였습니다.
결국 패륜아가 되는 것은 부모가 사랑을 덜 보여주어서가 아니라
그 사랑에 올바로 응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당신의 사랑을 온갖 방법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데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은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부모 탓만 하는 패륜아와 같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표징도 믿기를 원치 않는 사람에겐 믿음을 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믿으려고 한다면 아주 작은 표징으로도 믿음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또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사랑의 표징을 안 보여
주셨을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믿음이 약하다면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나타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마귀도 예수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시도이지
믿음을 성숙시키지는 못합니다. 결국 믿음은 육체적 표징이 아닌
이성과 마음으로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시적 표징이
아닌 묵상과 깨달음으로 의심할 수 없는 믿음을 쌓아갑시다.
좁은 문 /김성웅신부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표징을 요구받는 것은 그분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을 상기시킵니다(루카 4,1-13 참조).
“악마가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고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13)는 것은 바리사이들의 표징 요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치신 것은
우리의 신앙 여정이 기적이나 표징을 보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좁은 문을 통과하는 사랑의 십자가 여정임을 전해줍니다.
바리사이들의 표징 요구는 사람들의 유아기적인 영적 갈망을 대변합니다.
기적이나 표징을 찾는 마음에는 어느 모로 좁은 문을 통과하는 십자가의 길을
외면한 채 손쉽고 편안함이 보장된 신앙의 ‘고속도로’를 찾으려는 욕구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 자체가 사랑과 추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추종이 표징을 낳는 다는 것을 전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 길이야말로 우리가 보고 따라야 할
가장 결정적인 표징임을 믿고 그 길을 기꺼이 받아들여 우리 가운데서도
그 사랑의 표징이 드러나면 좋겠습니다.
일단은 /김찬선신부님
“그들을 버려두신 채 가셨다.”
오늘 복음의 이 마지막 말씀을 더 자극적으로 바꿔보면
“그들을 내버리고 가 버리셨다.”
주님은 아무도 버리시지 않는 줄 알았는데
주님도 누구를 버리시는가?
주님도 버리신다면 주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주님이 버리신다면 그래도 우리가 버리는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싫어서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싫어해서 버리시겠습니까?
지혜서 11장이 얘기하듯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것을 싫어하고 미워할 리 없으시고
싫어하고 미워할 것으로 만드실 리 없으실 것입니다.
우리를 싫어하신다면 선이신 당신의 본질에 위배되고
우리를 미워하신다면 사랑이신 당신의 본질에 위배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버리고 가신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일단은 포기이고 일단은 버리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기에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단(一段)은’입니다.
일단은 二段, 三段의 처음 단계입니다.
노력을 해도 안 되고
좋은 것을 주려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이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버림은 움켜잡음의 반대입니다.
움켜잡지 않음이지 싫어서 완전히 버려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흙구덩이에 같이 빠져들지 않음이요
엉킨 실타래에 얽히지 않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사람은
무엇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든지 나쁜 것으로 바꿔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부정의 매카니즘이 그를 지배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나쁜 것으로 만들고
부정의 매카니즘에 빠져들게 하는 교만의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부정의 매카니즘을 깨려하지는 않고
기적을 보여 그것을 깨라고 주님께 생떼를 부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버림을 받습니다.
누구나 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신도 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버림을 받습니다.
이것이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버림을 받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남을 못 받아들이는 자신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가장 큰 기적이자, 가장 확실한 표징 /양승국 신부님
수많은 치유와 구마활동,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을 백성들 앞에서 드러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으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구원의 길이 자신들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때가 한 치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신과 의심,
그릇된 옛 습관을 버리지 않는 가련한
영혼들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선교사 예수님의 장탄식입니다.
죽음을 향해가는 동족들을
향한 슬픔과 괴로움의 탄식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생활 안에서
참된 기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있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란 또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 크신 하느님께서 과분하게도
이토록 작고 연약한 한 인간을 찾아주심,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토록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가 하늘을 찌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사랑의 현존,
그것이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정녕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지만,
신앙 안에서 조금씩 성장해서 언젠가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 그것은
정녕 크나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는 것,
그분께서 내 안에 머무시는 것,
그분의 이끄심대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영성의 대가 아빌라 데레사 성녀께서는
어느 날, 자기 안에 하느님의 현존을 느낀
‘기적 중의 기적’을 체험한
이후 이렇게 고백하셨답니다.
“주님께서 나를 안심시키는 한 단어를 말씀하시는 바로 그 때,
나는 보통 때처럼 두려움 없이 고요와 위로로 충만했다. 예수께서 항상 내 편에 계신 듯이 여겨졌다.
나는 예수님의 형상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매우 분명하게 예수님은 항상
내 오른편에 계셨고 내가 행한 것과 행하지 않고 있는 것의 증인이심을 알았다.
내가 지나치게 산만하지만 않으면, 마음을 집중하고 정신을 가다듬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내 옆에 계신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늘 내 오른편에 자리하시고,
언제나 내 일상생활 전체를 동반하고 계시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자,
가장 확실한 하늘에서 오는 표징입니다.
"죄악의 사슬을, 윤회의 사슬을 끊는 길" /이수철신부님
수녀님들이나 저는 하느님의 기적이며 축복입니다.
우리나라의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끊임없는 내우외환으로 얼마나 무고한 아벨들이 죽었으며,
한 맺힌 삶들은 얼마나 많았는지요?
또 낙태로 인해 죽은 생명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래서 연미사, 생미사들을 많이 봉헌하는 가 봅니다.
어느 분들은 조상들의 죄를 용서 받고
후손들이 구원 받고자 하는 애절한 마음에
생각나는 조상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 가계 치유 미사를 청하기도 합니다.
어느 자매의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시집을 와보니 남편의 생활이 문란했고,
거슬러 올라가니 시아버지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저 역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 죄의 사슬을 내 대에서 끊고
자식 대까지 가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에
세례를 받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덕분에 자식들은 반듯하게 자라나
영세 받고 신앙생활에 충실하며 제 몫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와 흡사한 장한 믿음의 어머니들의 고백을 들을 때마다,
죄의 악순환의 사슬을 끊는 길은
회개와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 사람의 수도자로 인해
전 가족이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죄의 사슬은 완전히 끊어진 것입니다.
죄악의 악순환,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이래서 죄의 유전에 대해,
불가에서의 업보에 따른 윤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아담의 원죄도 이런 죄의 유전성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죄는
큰 자식 카인에게 유전되어 살인의 대죄를 짓지 않습니까?
졸지에 카인과 아벨, 두 자식을 잃어버린 아담, 하와 부부입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부전자전이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 이어,
아벨 동생을 죽인 카인도 땅에서 쫓겨나
정처 없는 유랑 길에 오릅니다.
우리의 방랑벽, 아마 여기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릅니다.
고맙게도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복원된 에덴동산, 교회공동체에 우리를 모아 주셨습니다.
죄인들에 대한 놀랍고도 고마운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주신 하느님은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 내심의 아픔과 고통, 실망은 얼마나 컸겠는 지요!
무한한 인내와 연민의 하느님임을 깨닫습니다.
죄보다 강한 하느님 자비의 은총입니다.
우리 자신의 죄를 보면 절망이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보면 희망이 샘솟습니다.
사실 우리가 죄 없어, 잘 살아서 구원 받는 게 아니라,
하느님 자비의 은총으로 구원 받습니다.
죄의 악순환의 고리 사슬을,
윤회의 고리 사슬을,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 사슬을 끊는 길은,
벗어나는 길은,
하느님의 은총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회심과 깨달음뿐입니다.
이래서 매일 수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믿음의 눈, 깨달음의 눈에는 모두가 기적이요,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지금 여기에 살아있음이
기적이요 구원이요 축복이요 행복입니다.
죄의 사슬에 매여 눈먼 이들은
절대로 이런 축복의 현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믿음의 눈 없으면 아무리 표징 보여줘도 보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논쟁의 악순환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논쟁하는 바리사이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바리사이들을 상대하지 않고 버려둔 채
미련 없이 떠나시는 주님이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세대뿐 아니라,
합리적 사고에 눈먼 오늘 날의 불신의 세대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바리사이들에게 화급한 것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 아니라, 회심과 믿음입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회심을, 깨달음을 심화하면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기적과 믿음 /강영구신부님
스승 예수님,
세상 사람들은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인정할 작정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믿음 없는 사람들은 늘
깜짝 놀랄 기적을 보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분께 귀의하기만 하면
지천至賤으로 널려있는 기적을 볼 수 있을 텐데,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탓하지 않고 기적奇蹟 보기만을 원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마태6,26.28.30)
그렇습니다. 예수님!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기적입니다.
하늘에 나는 새들이 큰 기적입니다.
길섶의 들꽃들이 큰 기적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또 지닌 재산이 많아도
어떻게 하늘의 새들을 먹이겠으며, 들꽃들을 아름답게 입히겠습니까?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의 손으로
작은 들꽃을 저토록 아름답게 입힐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의 大慈大悲하신 손길을 감지합니다.
길섶의 들꽃으로 大慈大悲하신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기적 중의 기적은 예수님 바로 당신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당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겠습니까?
당신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3,16)
당신 자신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손길 그 자체입니다.
저희들이 믿음의 눈으로 늘 기적을 보며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一明)
♪ J.S. Bach / 'Bist du bei mir' (If you are near) BWV 508 '당신이 곁에 계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