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윈윈포럼 원문보기 글쓴이: winwinsong
소공자 지음
제1법칙 성공은 자기로부터 시작된다
제1조> 성공의 지름길 성공의 객관적 의미 : 자기의 뜻이나 원했던 것이 세상에 실현되는 것 성공의 주관적 의미 : 자신이 원하던 대로 인생을 산다.
제2조> 비교해서 얻은 마음은 지름길이 아니다. “누구와 비교해서 누구보다 잘 하겠다”, “필요하니까 해야 한다“ 라는 식의 비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상대가 변할 수도 있고 자신이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기준>을 삼아 먼저 <절대적인 자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와 같은 절대적인 자기를 지존(至尊)이라 한다.
제3조> 외유내강 - 지존과 겸허 외유내강(外柔內剛) : 단지 겉은 부드럽고 속은 강하다는 뜻이 아니라 강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부드럽게 움직여야 한다. 겸허(謙虛)가 외유(外柔)라면 지존(至尊)은 내강(內剛)이다. 성공인의 생활 태도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포용하지만, 때로는 차가울 정도의 냉정함을 지니는 석도 바로 지존과 겸허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자존심(自尊心) : 단지 자기를 강하게 내세울 뿐, 원하는 것을 되게끔 하기 위한 작용이 없다. 즉 지존에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지존이 없는 상태, 즉 열등의식에서 표현된 것이다.
제2법칙 세상과 하나가 되라
제1조> 현실에 눈을 떠라 지존(至尊)이 지신의 뜻을 현실세계에 창조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현실을 바로 알기 때문에 겸허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자존심은 현실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주장하고 반발한다. 이렇게 자신과 상관없이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실존(實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공은 진정한 의미의 수양이다. 진정한 의미의 수양이란,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며 성공이란 실존을 터득해야만 비로소 가능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앨바 에디슨은 초등학교 4학년 과정밖에 마치지 못하였지만 그는 현실을 바로 보는 실존의 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발명왕이 될 수 있었으며, 그 당시 많은 물리학자들은 많은 공부를 해서 많은 지식은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현실을 바로 보는 실존의 눈을 갖고 있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현실을 바로 볼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세상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쉽게 말하면 평소 세상 사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엇인지, 저런 일은 왜 벌어졌는지, 결과는 어떻게 되어 가는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남의일도 자신 일처럼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필요할 때 무엇이 소용되는 것인지,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모르게 된다.
제2조> 상황을 바꾸는 승리의 분기점 세상일은 어느 한 순간에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해 버리는 분기점이 있다 (물-->얼음, 물-->수증기) 또한 그 분기점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언가 필요한 핵심(分岐點)이 있다. 큰 회사를 이끌어 가는 사장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픈 일은 바로 이 분기점에서 어떻게 결정내릴 것인가에 대한 결단력을 발휘하는 것과 분기점을 만들기 위한 핵심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기점을 바로 알고 취하면 다른 사람 눈에 행운이 찾아오는 사람처럼 보이고, 분기점을 잡을 줄 모르면 마치 재수없는 불행한 사람처럼 보인다. 대체로 현실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현재 자신의 욕심에만 사로잡혀 욕심과 상관없으면 흘려보내고 욕심만으로 취하면 문제가 되어 설상가상으로 더욱 재수 없는 묘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분기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여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이 분기점을 취하고 또 분기점을 만드는 것이다.
제3조> 세상 모든 일은 용서하되 결코 자신만은 용서하지 말라 -- 비전 이 세상에는 경제적으로 잘 사는 사람보다는 못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못사는 사람들이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은 결과적으로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는 죽어도 살 수 없다>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면 틀림없이 비전이 실현되었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만픔 자기 분노가 있으면 비전은 반드시 실현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모두 받아들이고 용서하라. 왜냐하면 도의적인 일이든 어처구니 없는 일이든 일어 날 수 있는 일이니까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좋은 여건을 갖추지 못하고 원하는 것을 실현하지 못한 자기 자신은 결코 용서하지 말라. 진정한 분노는 비전을 실현시키고 상황을 바꾸는 막강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 분노가 없이 그저 바라만 보는 비전이라면 그것은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텔레비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제4조> 높은 눈을 가진 자만이 인내할 수 있다. 높은 눈을 가져라. 진정한 부자는 돈이 많아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높은 눈을 통해 갑진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다. 때문에 높은 눈을 가져야만 향상된 목표를 갖는다. 높은 눈이 <죽어도 낮은 곳에서는 살수 없다>는 자기 분노를 갖는다. 결국 높은 눈이, 실현되기 위한 고통을 참고 인내한다. 왜냐하면 실현되기 위한 고통이 참지 못할 분노보다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낮은 눈은 자존심이 되어 세상을 원망하지만, 높은 눈은 실현이 그 목적이기 때문에 실현을 위한 고통을 물러서지 않고 이겨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인내(忍耐)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장애와 난관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 목표가 확고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 그 분명한 목표라는 것이 높은 눈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감정에서 일어난 가짜이기 때문이다.
제5조> 자유롭되 분명한 원칙을 가져라. 성공하는 사람들이 특별해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은 대체로 일정한 틀에 구속되어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룰을 무시해 버린다. 주어진 현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목표를 지표로 삼는다. 그래서 마치 무계획으로 들쑥날쑥 사는 것처럼 보이거나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반드시 자기 원칙이 있으며 자기 페이스를 갖고 있다. 비전을 성취시키는 사람들은 무언가 반드시 특별한 원칙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운전함에 있어서도 여기저기 어디라도 <잘 달린다> 보다는 어느 순간 언제 어디서라도 <멈출 수 있도록 한다>는 것 같은 원칙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불안한 것은 무의식이 자신감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원칙을 지키고 실현시키기 위해 초인적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제3법칙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라.
제1조> 완성되기 전에는 그 자리를 뜨지 말라. 자기 자신이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은 외부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좋지 않은 여러 가지 장애와 난관이 당장에는 장애며 난관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 그와 같은 것들이 성공의 영양제인 것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도 처음에는 좋아 보이지만, 얼마 안 있으면 또 장애와 난관이 틀림없이 찾아오게 된다. 눈물겨운 난관과 장애는 후에 반드시 자기 원칙의 일부가 되어 인생을 복되게 만들어 준다. 일을 함에 있어서도 주어진 일을 반드시 일단 끝내놓고 다음 일을 해야 한다. 하다가 힘들다고 집어치우고 또 다른 일을 찾는다면, 결국 다른 일을 잦는 것이 일이 되어 버릴 것이다. 한가지라도 분명히 완수할 수 있어야만 후에 동시에 여러 일을 한꺼번에 완성 시킬수 있다. 무엇을 먼저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자주 오는 사람은 틀림없이 평소에 한 가지 일도 완벽하게 하지 못하고, 하다가 안 되면 또 다른 일을 찾았던 사람이다. 무엇을 <한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완성 시킨다>가 중요한 것이다. 또 <일>이란 평소부터 잘해 오던 것을 <하는 것>이 일이 아니고,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난관을 해결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일인 것이다. 평소에 잘해 오던 일은 단지 노동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 어렵다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사람은 이제 자기 사업을 가졌을 때 경영자로서의 영양분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망하고 마는 것이다. 사업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유지되며 이익을 만들어 내는 업무이기 때문이다.
제2조> 해결의 답은 지금 그곳에 있다. 진정한 의미의 일은 <노동>이 아니라 <완성>이다. 그리고 그 완성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 나머지는 무엇이 되었든 간에 모두 완성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사소한 일 하나를 하는데 있어서도 무엇이 필요하다 무엇이 필요하다 하면서 내내 필요한 것을 찾아 다니는 사람이 있다. 물론 보다 잘되게 하려면, 그리고 시간과 노동을 단축하려면 여러 가지 소품이나 도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국 완성을 위한 것일 뿐 그 자체가 완성은 아닌 것이다. 속담에 <이 대신 잇몸>이라는 말이 있다. 이로 씹어야 할 것을 이가 없으면 일단 잇몸으로라도 씹어서 먹으면 된다는 말이다. 물론 잇몸이 이보다 잘 씹을 수야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고픈 매를 채운다>라는 완성인 것이다. 결코 <씹는다>라는 일아 아닌 것이다. 때문에 이가 없다고 해서 치과에 가서 틀니를 만들어 끼운다면 그 때는 이미 굶어 죽어 있을 것이다. 마음자세가 완성에 있으면 그 주변에 반드시 완성을 위한 도구가 있다. 아니, 이 세상 모두가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완성을 멀리 두고 완성을 향해 가려고 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장애일 뿐이다. 있는 그 자리에서 해결하라. 해결의 답은 바로 그곳에 있다.
제3조> 완성의 지름길 완성이 목표라면 성공은 그 결과이다. 이런 의미에서 <완성은 곧 성공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완성을 시킬 줄 아는 사람만이 인생의 여유를 가질수 있는 것이다. <피하고 싶은 고난, 거기에 가라. 외면하고 싶은 벽, 거기에 머물라. 바로 그곳에 완성의 열쇠가 있다.> 처음에는 무섭고 힘들겠지만, 몇 번 통과하고 나면 나름대로 다룰 줄 아는 기술이 생긴다. 때문에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 말을 명심하라. <벗은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결국 고난은 우리에게 크나큰 지혜를 주며, 그 지혜를 통해 우리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제4조> 땅으로 인해 넘어진 자는 땅을 딛고 일어서라. 우리 인생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통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작용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다. 이른바 습관이란 것이 그것이다. 한번 어렵다고 피하면 다음에 그와 같은 어려움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피한다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고뇌할망정 고된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와 같은 어려움이 언제라도 다시 올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동시에 거기에 대비하는 습관도 몸에 갖추게 되는 것이다. 에디슨은 <나는 무수히 실패한 것이 아니라, 되지 않는 수많은 방법을 발견한 것뿐이다> 보통 무언가 잘 안 되 때 <나는 왜 안 되는 것일까?> 하며 자기를 탓하는 사람이 있다. 툰을 자기 안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푸념이 생기는 것이다. 그럴 때 넘어진 땅을 다시 보라. 무언가 넘어질 요소가 있기 때문에 넘어진 것이다. 넘어진 그곳에서 다시 일어서라. 핵심이 보일 것이다. 성공산 사람들이 근면해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을은 분기점을 보고, 핵심을 통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수월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제4법칙 끝에서부터 시작하라.
제1조> 결과가 확실하지 않으면 시작하지 말라. 실패의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는, 가야 할 뚜렷한 결과가 없이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다. 일단 시작하고 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으로 시작하면 이미 반은 망한 것이다. 결과를 설정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형편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장사를 시작하면, 그 성공의 최대 한계점은 <먹고 사는 것>정도 밖에 안 된다. 생각을 바꾸어서 사업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 정치를 해서 먹고 살것인가, 아니면 예술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를 먼저 결정해야 된다는 말이다. 결과가 분명하게 머릿속에 갖추어지면, 그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가 걱정되게 된다. 시발점에서 결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결승점에서 좋은 시발점을 물색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발점이 결정되면 그 때 <시작>은 이미 반을 완성시킨 것이다. 결과에서 그 완성을 위해 출발점을 찾고 필요한 것을 준비하며, 해야 할 일을 주선하는 것, 이것이 성공의 설계도이다. 성공하는 사람이 오늘 당신을 만나서 당신과 함께 이야기 하고 말한 내용은, 사실 어젯밤에 이미 작성된 시나리오에 의하여 계획되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성공하는 사람이 오늘 여기 저기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다면 이미 그 완성을 위해서 설계된 도면 위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라. 일이란 결과와 완성을 연결시켜 주는 교량이지, 일을 함으로써 자연히 결과가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라.
제2조> 준비는 곧 대비 불행한 사태는 언제나 올 수 있다. 그 사태가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물리칠 수 있도록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는 길밖에 없다.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한다는 자체는 노동에 불과한 것이다. 되어지게끔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불행한 사태는 정해 놓고 일정하게 오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막기 위해서는 여러 각도에서 일고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일을 함에 있어 자기 적성에만 맞는 일을 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불행한 사태는 그 사람 적성에 맞게 찾아오지 않는다. 때문에 세상일이란 여러 각도에서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적성을 운운하며 하고 싶은 것만 고집하는 사람은 아직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다. 왜 안 될까를 탓하기 전에 되어지게끔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먼저 점검하라. 그러면 비로소 그 모든 준비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적성에 맞는 일을 완성시켜 훌륭한 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다.
제3조> 성공의 오아시스 - 고생 우주는 풍요롭다. 그 풍요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가난을 보고 눈물을 흘릴 줄 안다면, 우주를 보고 풀요도 느낄줄 알아야 한다. 가난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풍요를 사용하기를 잊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난과 고생은 어리석은 사람의 벗인 것이다. 먼저 풍요를 알라. 그리하면 가난은 되돌아가서는 안 될 세계라는 <자기원칙>이 생길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이 가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풍요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가난을 통해서 풍요를 배운다. 고생을 통해서 안정을 배운다. 행복하게 살면서 고생을 못 보는 사람도 결국 멸망하지만, 가난을 통해서 풍요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끝까지 가난을 고수해야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제4조> 우주경영의 원칙 중국의 5행 물(水) : 겸허하라. 적성을 주장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적응하라. 물은 어떤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숙이며 만물 속에 스며든다. 모든 만물의 어머니 같은 존재이다. 적성은 만물 속에 스며들었을 때, 바로 그 만물을 바탕으로 하여 생명력을 갖게 되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먼저 자신을 낮추고 만물 속에 젖어 들 수 있는 물의 정신을 갖추어야만 한다. 불(火) : 평생을 똑같이 주어진 대로 일만 해서는 결과적으로 별 성과가 없다. 반드시 위로 상승하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불은 위로 치솟는다.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고 항상 위로 치솟는다. 여러분은 생활에서 호시탐탐 레벨업할 기회를 포착하여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눈의 방향을 자기 심정에 두지 말고 항상 세상일에 두어야 한다. 세상을 마음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즉, 세상을 마음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가슴아픈 일이 있다 하더라도 세상에 있는 것이면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 아픈 가슴에서 눈을 떼어야 한다. 행복 속에 파묻혀 있으면 눈을 돌려야 한다. 자기 자신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시는 그와 같은 아픔이 오지 않도록 세상을 살펴야 한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나무(木) : 근원지를 위해서 가고, 근원지를 지키며, 권원지로 되돌아 온다. 나무는 세상(대지)를 바탕으로 하여 꾸준히 상승하면서 자라고(발전하고)있다. 나무의 가지는 항상 그 근원지인 뿌리를 향하여 되감아오고 있다. 비록 무엇을 하더라도 그 결실은 항상 근원지에 비축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근원지가 있음으로써 모든 활동이 가능한 것이며, 그 활동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근원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의 가장 기본적인 근원지가 가정이라면 그 결실은 항상 가정을 위해 되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회사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회사를 차렸으면 그 이익은 먼저 사람 개개인보다는 회사가 쓰러지지 않도록 회사라는 근원지에 모아 두어야 한다. 가지가 서로 자기 주머니만 채우려고 하면 결국 그 나무는 뿌리를 잃고 떨어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열심히 일호고 발전한다 하더라도 되돌아올 결실을 생각하지 않고 뻗어나가는 것은 일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결국 뿌리에서 떨어져 나가기 위한 꼴이 되므로, 반드시 발전을 하되 그 근원지를 지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어야 한다. 금(金) : 서 있는 자기 자리 밑을 보라. 이제는 비대해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내부혁신과 줄기찬 발전을 해야 한다. 톱(Top)은 자기 자신을 경쟁자로 삼아야 하며 뻗어나가되 항상 자기 내부를 주시해야만 한다. 발전한 만큼 비대해진 자신의 무게를 지탱할 수도 있도록 새로운 내부혁신이 필요한 것이다. 흙(土) : 원하면 차지하라. 우주는 자기 자신을 내어준다.
제 5법칙 인간에 의한 인간을 통한, 인간을 위한 결실-- 성공
제1조> 가치 창조의 기준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가장 슬픈 것 중의 하나는,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다”라는 말일 것이다. 또 이말은 사회 경험을 통해서 누구나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정말 크게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바로 이 무서운 사람을 얼마만큼 감동시켜서 내 몸처럼 움직일 수 있는가와, 사람들로부터 얼마만큼 환영받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지킨다면 비록 돈이 없다 하더라도 어떤 상황, 어떤 시기가 온다 하더라도 당신은 우주와 같은 영원한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제2조> 거지 다섯이 모이면 더 이상 거지가 될 수 없다.- 한 방향으로 나아가라. 인간 세계의 모든 가치는 인간에 의해 창조되며, 인간 세계에서의 성공은 인간을 통해서 실현된다. 때문에 인간을 배제한 성공법은 있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공하기 힘든 것은, 바로 가장 근본이 되는 사람을 배제한 채 좋은 제품, 좋은 아이디어, 좋은 기술, 좋은 정책 등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가기가 싫어요. 나 혼자만의 것을 하고 싶어요”하고 말하는 사람은 아예 성공을 포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메뚜기는 인간에 비해 아주 보잘것없는 곤충이다. 그러나 메뚜기가 만 마리 또는 10만 마리가 뭉쳐서 여러분에게 달려온다면 여러분은 아마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메뚜기 무리 중 힘세고, 더 높이, 더 멀리 날고, 통솔력이 뛰어난 메뚜기가 10만 마리의 메뚜기를 지휘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잘난 사람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알고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지혜를 갖춘 사람인 것이다. 즉 메뚜기 10만 마리의 힘을 알고 그 힘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메뚜기 10만 마리를 파괴 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리석은 무리도 뛰어난 통솔력을 가진 사람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한다면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제3조>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제4조> 우주의 파워가 담긴 팔로워십(followership) 서점에 가면 쉽게 눈에 띄는 책 가운데 꼭 한 권쯤 보이는 책이 있는데 그것은 “리더십”에 관한 책이다. 진짜 훌륭한 리더는 바로 그 대중의 힘을 알고, 대중 속에서 대중을 위할 수 있는 사랑과 헌신을 갖추어야 한다.
제 6법칙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제 1조> 우주의 파워가 갖추어지기 위한 길 어떻게 하면 대중의 세계를 파악하여 대중을 움직이며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가? 리더십은 먼저 따라주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ㅡ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끔 팔로워십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분기점은 무엇인가? 그 답은 바로 신뢰이다. 신뢰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많은 돈을 써 가며 단합 대회를 한다 해도 진정한 단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진 사회는 신뢰가 있고, 후진 사회는 신뢰가 없다. 훌륭한 리더는 부하와 신뢰로 연결되어 있다. 신뢰를 통해 리더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부하가 따라주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지키기 위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 자기 구심점을 잃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 구심점을 지키기 위해 하기 싫은 단합대회도 참가하는 것이며, 회사가 망하면 최소한 자기 중심(구심점)을 잃지 않기 위해 그 회사를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므로 결코 그 사람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신뢰가 형성되면 그 사람의 구심점은 신뢰를 통해 리더의 쪽으로 옮겨지게 된다. 사람 개개인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리더를 중심으로 하여 개개인은 신뢰의 파이프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파워 이다. 또한 개개인은 큰 구심점을 지키기 위해 그 때부터 자신을 희생하게 되는 것이다. 구심점이 자신에게 있을 때는 희생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팔로워십이다.
제2조> 이성을 통해 상대의 감정을 컨트롤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중심 (軸) 사람의 내부를 크게 나누면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사리를 판단하는 이성(理性)이고, 또 하나는, 기분을 좌우하는 감성(感性)이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감정을 자극하면 상대는 돌아서 버린다. 또 기분이 좋으면 아무리 그런 일이라 다더라도 그르다고 느끼지 않는다. 때문에 옳고 그른 사리를 분별하는 이성보다는 먼저 감성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해야만 한다. 행동 또는 논리에 따른 결과라기보다는 감정의 결과라는 사실도 깊게 주지 해야만 한다. 나쁜 줄 알면서 청소년들이 나쁜 일에 빠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평소에 극기를 많이 수양한 사람은 반대로 이성이 감성보다 크게 작용한다. 이렇게 수양이 되어 있는 리더는 절대로 감성을 통해 사람을 다루지 않는다. 이성은 감성을 컨트롤 할 수 있기 때문에 부하 직원의 마음도 컨트롤해 가며 야단을 쳐야 한다. 사리에 어긋나는 사항은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하고, 그래도 기분 나빠할 것 같으면 그 마음도 풀어줄 줄 알아야 한다. 리더가 내는 화는, 상대가 반성할 마음을 갖지 않고 강하게 자신을 주장할 때 그 강한 마음을 누르기 위한 기술이어야지 결코 감정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감정은 직접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에, 감정충돌이 생기게 되면 신뢰의 파이프는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이성을 잦춘 자가 상대편의 감정을 컨트롤하면 상대의 구심점은 자연히 이성을 갖춘 자 쪽으로 넘어오게 된다. 쉽게 말하면, 자신도 처리하기 힘든 자신의 마음을 상대편에서 해결해 주니까 결국 감격(感激)이라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감격을 통해 신뢰라는 끈이 엮어지게 된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리더는 항상 이성을 통해 사람을 상대하되 그 사람의 감정을 언제나 흡수 해야 하는 것이다. 신뢰를 통해 여러사람이 자신을 구심점으로 삼으면, 이제 리더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구축된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막강한 파워를 내재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언제라도 리더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리더가 대중을 향해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을 축(軸)이라고 한다. 지구의 중심과 같은 역할이 리더(구심점)이라면, 만물을 움직이듯 사람을 움직여 쓸 수 있는 이념이 곧 축(軸)인 것이다. 지구의 지축과 같은 것, 이것이 곧 정치가의 정치이념이요, 회사의 기업이념인 것이다. 이더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축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게 되는 것이며, 사람들(소비자)은 축을 믿고 거기에 호응하는 것이다. 리더는 바로 이 축의 중심이 되는 것이며 축을 통해 단결과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축 없는 단결은 죽도록 해봐야 죽음만이 남게 된다.
제3조>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분기점 핵(核) 중심은 어떤 물건, 어떤 상황에서도 단 하나밖에 없다. 전체 모두를 제압할 수 있는 분기점, 그것이 곧 핵심(核心)이다. 리더의 업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하는 결단력이다. 리더의 결단력 하나에 수많은 부하와 회사의 존망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리더는 보통 사람과 달라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 숙일 수 있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리더의 결정이 자꾸 실패를 만든다면, 그때 부하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정확한 판단, 그것은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정확한 핵심 파악을 하지 못하면 쓸데없는 노력만 커지게 되는 것이다. 사물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결코 주관적인 눈으로 사물을 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리더는 이성의 눈으로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지혜를 갖춰야겠지만, 사물의 핵심은 객관적 안목을 통해서 보아야만 바로 보이는 것이다. 일이 성취되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될 일을 해야만 된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방법이다. 되지 않을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축으로 사람을 움직이고, 핵으로 세상을 움직인다 리더가 핵심을 파악했을 때 같은 축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핵심을 볼 수가 없다. 리더가 어디인가를 가고 있다면 부하들은 무엇을 향해서 리더가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바쁜 시간에 일일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축이 같으면 바라보는 시야도 같아진다. 축이 다르면 한 곳을 바라보아도 서로 다른 곳을 보게 된다. 축이 같은 사람끼리는 행복도 같고 즐거움도 같지만, 축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어딘가 불편하고 신경이 거슬리게 된다. 그것은 추구하는 핵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축이 같은 사람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것은 행복의 원천이 같은 핵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때문에 변함없이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제4조>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 그릇 - 격 사람을 많이 거느려 본 사람은 “인물은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받아온다.”라고 흔히 말한다. 생각 없이 액면 그대로 이 말을 들으면 잘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노력할 필요조차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늘로부터 타고난 사람은 남들이 즐겁게 놀러 다닐 때 인생을 생각하고, 남들이 즐거운 시간을 만들 때 미래와 현재를 보다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즉. 하늘로부터 타고났다 하여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받아온 자기를 찾아서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어 있는 시체의 큰 차이점은, 결론적으로 말해, 호흡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호흡을 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생명이 우주와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호흡을 통해 만물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즉 생명은 우주와 한 몸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곧 우주와의 단절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자기 몸 안의 자기만을 의식할 뿐 우주의 존재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우주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만물도 자기 몸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남도 자기처럼 연민심을 갖고 대한다. 자기라고 하는 범주가 몸 밖에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범주를 느끼는 상태를 보통 “그릇“이라고 표현한다. ”저 사람은 그릇이 크다“라고 말할 때의 ”그릇“이 바로 이것이다. 그릇이 작은 사람은 자신만을 생각한다. 범주가 자기 자신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제외한 다른 세계에는 별 관심이 없다. 높은 산 위에 올라가면 밑의 세계가 넓게 보이지만, 낮은 곳세 있으면 눈 앞의 물체가 모두 커 보여, 보이는 세계 또한 좁다. 결국 모든 사람은 평등해 보이지만, 보고 생각하는 범주가 높으냐 낮으냐 하는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범주가 그릇의 크기라고 말한다면, 넓게 보느냐 좁게 보느냐 하는 시선의 관점은 높으냐 낮으냐로 구별될 수 있다. 이 높낮이를 격(格)이라고 한다. 결국 그릇은 격의 범주인 것이다. 인간은 평등해도 보는 세계는 다른 것이다. 격이 낮은 사람은 자신만 보지만, 격이 높은 사람은 보이는 세계가 크다. 즉 주관해야 할 세계가 다른 것이다. 자기 한 몸만 아는 사람에서부터 가정, 사회, 국가, 전 인류까지 생각하는 사람까지 이렇게 그릇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끊임없이 많이 일어난다. 장애도 많다. 장애에 부딪혀 좌절하는 사람은 그만큼 그릇이 장애보다 작기 때문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격(格)이 낮은 사람)은 눈앞에 물체가 모두 커 보이고, 높은 곳에 있는 사람(격(格)이 높은 사람)은 모든 물체가 작아 보이듯이, 장애 또한 크고 작게 느껴지는 것은 격의 차이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큰 그릇을 타고났다면 장애에 부딪힐 때마다 격은 향상된다. 격은 상황과 타협하지 않는다. 선택할 뿐이다. 받아들이고 묵과할 뿐 어떤 상황이라도 머무르지 않는다. 격은 지고의 범주이며 우주의 주인이다. 때문에 최고의 격은 나라고 하는 에고가 없다. 에네르기 그자체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지존이다. 따라서 “생활이 어렵다고 밑바닥 생활로 내려가지 말라” ==> 격이 갈길을 선택한다==> 격에 의해 비전이 일어난다 나는 죽어도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하는 가슴속에서 외쳐 대는 장본인은 바로 격인 것이다. 제5조> 세상을 움직이는 파동적 “나”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는 이른바 몸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도 또한 몸을 갖고 있다. 이른바 “나”라고 할 때는 먼저 몸을 가리킨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몸안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마음이라는 것은 에네르기체로서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하게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음은 호흡을 통해서 몸 밖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만약 죽었을 경우에는 호흡이 끊기는 동시에, 몸은 존재해도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마음은 몸을 통해서 외부세계를 느끼거나 영향을 주기도 한다. 때때로 어떤 사람은 몸을 똥하지 않고 마음이 직접 물체를 움직이거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느끼기도 한다.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가 보았더니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든가 하는 것도 마음이 멀리 떨어진 곳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은 에네르기체로 우주와 무의식적으로 연결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에네르기는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다. 입자적 성질과 파동적 성질이 있다. 입자는 이른바 단단하게 뭉쳐져 있다는 의미이고, 파동은 전파처럼 훨훨 날아다닌다는 의미이다. 마음이 입자적인 사람, 즉 격이 아주 낮은 사람은 자기 마음이 자기 세계의 전부로서, 범주 또한 자기 마음에 국한되어 있다. 그리고 마음은 입자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있어서 전혀 융통성이 없다. 때문에 상황의 흐름 따위는 아예 보지 못하고 눈앞에 보여야만 비로서 믿는다. 또한 눈앞에 장애가 나타나면 더욱 자신이 견고해져서, 부딪히면 그 충격 또한 상당히 크게 받는다. 자신의 마음이 고체화되어 있기 때문에 장애 또한 많고, 장애를 피해사는 길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사는 범주 또한 매우 작다. 그러나 마음이 파동적인 사람은 그 파동이 흐르는 범주만큼 생각하는 세계 또한 달라진다. 가정에 국한된 사람, 지역사회에 국한된 사람, 나라에 국한된 사람, 세계 전 인류사회에 국한된 사람,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서 우주와 하나가 된 사람, 그 크기는 각각 다르다. 그것이 이른바 그릇(格)이다. 어려움은 사실 누구나 똑같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복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는 상황의 어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격(格)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성공의 실현은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격의 범주(그릇)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타고난 인물, 그것은 곧 범주의 크기, 즉 格을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성공을 원한다면 먼저 성공의 범주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성공의 범주가 갖추어지면 이제 여러분은, 우주라고 하는 엄청난 범주의 세계는 어떤 원리에 의하여 움직이고 실현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우주경영의 원리
제1원리 세상은 모두 에네르기다. “나”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내가 옳다. 상대편 역시 똑같이 자기가 옳다고 말한다. 상대가 강하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할수록 나는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렇게 상대로부터 영향을 받으면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자기라고 하는 입자를 쪼개고 쪼개서 공간과 같은 에네르기 상태가 되면, 상대가 원하는 것, 그 발상의 원인 등 여러 가지를 절대적으로 느낄 수가 있다. 그리하면 오히려 상대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제2원리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만약 물체를 소립자 상태에서 본다면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 뻗어나가려고 하는 원심력이 양(陽)이고, 안으로 응축하려고 하는 구심력이 음(陰)이다. 결국 에네르기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동시에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단지 두 가지 성질 중에서 구심력이 보다 크게 작용하면 입자가 되고 원심력이 보다 크게 작용하면 파동이 된다. 때문에 이 입자와 파동은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니라 결국은 같은 하나이다. 입자의 세계는 뭉치고 뭉쳐서 물체가 되어 우리 눈에 보이지만, 파동의 세계는 우리 감각으로는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 주변에는 무수히 많은 전파가 흘러 다니고 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그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 보거나 느낄 수는 전혀 없는 것이다. 제3원리. 알 수 있는 세계와 알 수 없는 세계 지금 우리 눈 앞에 있는 모든 물체는 강한 음 에네르기에 의해서 응축되어 있는 상태이다. 또한 강하게 응축된 상태는 그 중심이 분명하여 중심을 통해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고 견고해 보이는 물체도 사실은 파동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계속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움직이는 에네르기는 계속되고, 계속 지탱할 수 있는 응축력은 약해져서 어느 시점에 가면 차츰 낡고 망가지는 상태가 되어 무너져 버리게 된다.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립자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모든 기준은 결정적으로 우리 눈에 나타나는 입자의 세계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입자는 최종적으로 우리 눈에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원인을 알 수가 없다. 구심력이 작용하는 입자는 그 크기가 어느 정도 커지게 되면 우리 눈에 나타나는 물체가 되고, 물체가 존재하는 조건 하에서 일정한 법칙이 성립된다. 이 법칙은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이므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그 인식된 지식을 통해 과학이라는 학문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과학은 우리의 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해 주기 위한 문명을 창조해 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알 수 있는 세계이다. 원심력이 작용하는 파동의 세계는 형태도 크기도 없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실존하고 있으나 우리 눈에는 업는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볼 수 없으니 알 수가 없고, 알 수 없으니 어떻게 작용하는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일정한 조건은 없어도 그 움직임은 틀림없이 그 나름대로 어떤 룰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옛 성현들은 생각하였다. 그리고 일단 그 룰을 이치(理致)라고 불렀다. 이렇게 이치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지혜라고 말한다. 지식이 정해진 수치(일정한 조건)에 의해서 계산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지혜는 방향과 움직임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제4원리. 세상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지혜 파동 에네르기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알면 상황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법칙은 일정한 조건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므로 주어진 조건 안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 있으나, 이치는 일정한 조건이 없으므로 터득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다.
제5원리. 세상일이 어려워 보이는 이유. 지혜있는 사람과 보통사람과 무엇이 다르며 무엇이 다른가? 첫째. 지혜있는 사람은 편견이 없다. 지혜있는 사람은 “하고자 함”만 있을 뿐, 자기라는 입장이 없다. 둘째. 기(氣)가 강하다. 기(에네르기)는 자기 입장이 없어야 비로소 강해진다. 제6원리. 주체의 변화와 상황변화 성공인은 영향력을 갖추어야 한다. 강력한 자기원칙을 가져야만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 강력한 자기원칙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그 자신은 상황을 움직인다는 뜻이다. 제7원리. 세상을 움직이는 두개의 파워(질량, 속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힘은 단 두 가지뿐이다. 음 에네르기가 뭉쳐서 입자가 되면 입자는 뭉쳐서 질량을 갖는다. 질량은 음 에네르기에 의해 구성된 입자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외부로부터 끌어당겨 오는 구축력을 갖는다. 이것이 인력(引力)이다. 질량이 크면 클수록 인력은 더 크게 작용하고 외부세계에 끼치는 영향도 커진다. 양 에네르기는 퍼져나가는 성질 때문에 항상 움직이며, 그 움직임은 파동이 되어 빠르기를 갖는다. 입자가 질량을 갖는다면 파동은 속도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질량이 끌어당기는 인력(引力)을 갖는다면, 반대로 파동은 양 에네르기이기 때문에 침투력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질량이 인력을 통해 구축력을 갖는다면, 속도는 원심력을 통해 파괴력을 갖는다. 때문에 구축된 질량을 파괴시켜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작은 회사 사람들은 큰회사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하며, 큰 회사가 한치 앞을 내다보면 세 배 이상 먼 곳을 바라보고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회사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에너지는 질량 곱하기 광속도의 자승 이라고 한다. 따라서 두 주먹이 서로 맞부딪치게 된다면 가속도가 빠른 쪽이 비록 질량은 1/2밖에 안된다 하더라도, 상대편을 파괴시켜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질량이 영향력을 갖는다면, 속도는 영향권을 파괴하는 침투력을 갖는다. 때문에 가진 것이 없을 때는 속도로 시작해서 질량으로 안정권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제8원리. 남자의 세계와 여자의 속성 우리는 흔히 여자를 음 에네르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자를 양 에네르기라고 말한다. 여자는 음 에네르기이기 때문에 에네르기가 중심을 향해 집중되어 있다. 때문에 여자들은 일단 자기중심적이다. 반면에 남자는 양 에네르기이기 때문에 퍼져나가려고 하는 활동력을 갖는다. 때문에 남자들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있다. 여자의 세계 속에는 자기 자신이 있고, 남자의 세계 속에는 세상이 있는 셈이다. 남녀의 갈등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는 일단 음 에네르기가 우선하지만, 음 에네르기가 우선 하기 위해서는 사실 그 안에 더 큰 양 에네르기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 양 에네르기를 억누르기 위해 음 에네르기가 강하게 작용하다 보니까 음에네르기 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여자는 남자로부터 음 에네르기가 해소되지 않으면 자기 해소책으로 강하게 표면화 되어 집을 뛰쳐나가게 되고 , 이와 같은 속성을 모르는 남자들은 이런 여자의 행동에 머리를 절레 절레 흔들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남자들은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밖에서 마음대로 하고 다니는 것 같지만, 사실 양 에네르기는 흡수하는 음 에네르기보다 영향력이 약하기 때문에, 여자가 집에서 심통을 부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출근하면 사실 손끝에 일이 잘 잡히지 않고 하루종일 찜찜한 기분이 되어 뒷골이 당기는 것 같은 침통한 상태가 된다. 제9원리. 남자들의 바람기는 당연한 것이다.
제10원리. 기쁨을 주고 보람을 얻는 좋은 제품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문화적 현상이며, 사람의 마음에 신뢰를 구축하는 것은 문명적 현상이다. 때문에 생활 패턴 역시 문화적 생활을 추구하되, 경제구조나 생활양식은 짜임새 있는 기본틀을 갖추어야 한다. 사업역시 이와 같아서 문화적 안목이 없는 소비자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번창하지 못하고, 문명적 관리 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
|
Copyright ⓒ 2001~2004 WnWinClub.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