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와 주역(周易)
글 德田 이응철(수필가)
건 곤 둔 몽 수송사비(乾坤屯蒙 需訟師比)
소축 리 태 비 동인 대유 겸(小畜履泰否 同人大有謙)
예 수 보 임 관 서학 비(豫隨簠臨 觀噬嚯奰)
박복우망 대축이 대과감리(剝復尤妄 大畜頤大過 坎離)
주역 상경(上經) 30개를 겨우 통달해야만 했던 그날,
세상의 변화와 움직이는 이치를 알려주는 괘(卦)를 혼자 중얼거릴 때였다.
-아니, 德田이 벌써 하늘과 땅의 이치를 배워나가고 있네!
-아닙니다. 허공에 뜬구름 잡는 격이지요. 통 모르겠어요!
-그래, 빨리 배워서 내가 언제 죽을 것인가 한번 꼽아보라고?
-아니 선배님! 무슨 언필칭 그런 생뚱맞은 제언을
-주역은 음양의 이론이야, 난 배우다가 골치 아파서 때려치웠지만...
-불안한 미래를 헤쳐 나가기 위해 어쩌다 접하긴 했지만 그 경지까지는 아직 ㅎㅎ
괜히 걱정이야, 주역을 배워 德田이 깡통이나 하나들고 거리에 나앉아 태극이 어떻고, 봄의 기운이 어찌 하다며 고도의 사기꾼이 될까봐! 푸하하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
도란 무엇인가? 음양이 다르지만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도에서 그 변화는 일정한 법칙을 따른다. 요즘 한창 무쇠 대문을 비집고 주역의 문을 열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64괘를 중얼대던 참에 선배를 만난 것은 언제인가! 연잎 숲이 한창이고 생각이 날로 똘방똘방해져 몸을 뒤척이며 이소(移巢)할 무렵이다,
선배 문인도 교육계의 대선배시며 강원문학의 선구자시다.
어느 여류작가가 왜 그 선배와 친하냐고 물었더니 문학적으로 좋아해서라고 했다. 선배는 벌써 17집을 출간하기 위해 용서와 포용, 연민과 자비, 그리고 해탈의 경지에 주변을 서성인다.
선배는 극히 인간적이다. 호탕하시다. 서민적이시다. 세심한 배려가 늘 그의 인품에 차돌박이처럼 박혀있다. 먼저 데스크로 향한다. 수장으로 카리스마 또한 화려했던 지난날을 회억(回憶)한다, 운이 좋아 문화. 예술부문에 상을 수상했다는 전갈을 듣고 단숨에 달려오실 때도 축하 케익을 챙겨오신 게 아닌가!
선배의 문학노트를 뒤적인다. 벌써 십여 년 전에 누렇게 색이 바랜 메모장엔 주옥같은 그의 문장들이 살아있다.
-풀빛에 물이 들 것 같은 하늘이 쏟아지던 아파트
-저만치 서 있던 신기루 그건 내게 허상이었을까!
-삼악산을 타고 앉은 노을도 눈물을 삼킨다.
-산도 한꺼풀씩 허물을 벗으며 마음에 둥지를 튼다.
-마음이 열릴 뱃길이 누구에게나 주워진다.
-미련을 버린 숲, 집착을 버린 강변, 그 자리를 채운 소양강
-달빛이 아장아장 걸어와 옆 의자에 앉는다.
-농부는 하늘을 나는 새, 오만한 시인은 새장에 갇힌 새
-잡초 밭에서 시어들을 경작한다.
-삶이란 차고 기울고 기울고 차고 그걸 쉼 없이 반복하는 달이다.
-비오는 날 꽃밭에 물을 주던 정박아들, 그 순박함에 눈물이 난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경전처럼 수불석권(手不釋卷)하며 그의 글을 열어본다, 소독(素讀)이 진정 실핏줄까지 저며온다. 선배 체취를 느낄 정도니 내겐 얼마나 다행인가! 그는 대가이다. 불모 강원문학 초창기 멤버로 앞서서 석전(石田)을 옥토로 경작한 장본인이라면 누가 부인하겠는가?
강원수필문학상을 수상할 때였다. 초청받아 작가에 대한 차원 높은 가치를 봄비처럼 맞으며 경청한 가족 모두 심연의 감흥을 불러온 장본인이시다. 대의를 품은 자들을 보라! 어찌 한 인간임을 선언하며 감동의 울림이 크지 않겠는가! 연대지필(椽大之筆)로 그의 인간미를 만천하에 방을 붙이고 싶다.
산수(傘壽)로 치닫는 급행열차에 몸을 실어서가 아니다. 눈물주머니가 메마르지 않는다. 주름진 타인의 눈물을 닦아준다. 인색하지 않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줄 꿈의 향낭(香囊)인 명문이 수두룩하다. 그는 천 번 이즈러져도 본질이 남아있는 달(月)이다.
천박한 애련(愛戀) 때문이 아니다. 많은 시련에 달초(撻楚)를 맞을수록 그의 문향은 더욱 곱고 드높다. 내세와 현세의 고뇌, 그리고 반추, 용서들이 수없이 번득일수록 탐스러운 꽃송이가 된다. 누구보다 그를 대변하고 싶다고 후배의 소의(素意)임을 밝힌다.
-사형(詞兄)께선 백수(白壽)는 족히 넘으실 것 같네요.
-아니야! 모친께서 83세에 천상에 달하셨으니 나도 그러하겠지
-천부당 만부당이십니다. 문학의 50주년을 타작하실 준비나 하세요.
기계가 아닌 인간임을 리버스토리에서 그에게 천명했다. 허심탄회하게 웃는 표정을 읽으며 서로를 확인한 지난날들은 아름다웠다. 눈으로 주고받는 이심전심이 빈자리가 되어 이젠 뵐 수 없는 선배ㅡ. 가야 할 길을 예비하시며 불경을 흔쾌히 한줄 한줄 읽어나가시던 선배가 지난 해에 거짓말처럼 발자국을 거두시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