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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5 - 카자크인들과 유럽식 개혁을 한 표토르 대제에 예카테리나 여제!
모스크바 대공국은 남쪽으로 달아난 농민들인 카자크에 자치를 인정해 주고 의무를 수행하도록 했으니
카자크는 모스크바 대공국을 위하여 군사력을 제공하는 대신에 세금이나 부역, 농노제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자치 특권은 얼마 가지못해 박탈당했고 농노와 같이 세금을 내고 부역을 하게 됩니다.
불만이 쌓이면서 러시아 제국으로 부터 독립을 위해..... 흐멜니츠키는 자포로제 카자크들을
규합해 스웨덴의 칼 12세와 연합해 러시아에 대항하니 대북방전쟁이지만, 표트르
대제 의 러시아제국에 패하면서 자포로제 카자크들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카자크(코사크)는 1707년 불라빈 난과 1708년 마제파 난 1775년 푸가초프 난이 진압된후 해산
당하는데, 특수 군사 신분으로 러시아 제국의 북방 전쟁, 7년 전쟁, 크림 전쟁, 나폴레옹
전쟁, 코카서스전쟁, 러시아-페르시아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 동원 됩니다
1649년에 포괄적인 회의법전이 제정돼 러시아의 귀족 계급이었던 보야르들은 국가에 예속된
종복이라는 새 엘리트로 편입되고, 국가는 신구 귀족에게 봉사를 요구
했으나 그들의임무는 유목민에게 습격 당하는 서부, 남부의 국경지대를 수비하는 것이었습니다.
1650년대부터 1660년대에 도망친 농민 숫자는 격증했으니 그들의 가장 좋은 피난지 돈강 유역은 돈 코사크가
지배하는 지역이었는데, 이 땅은 1670년부터 1671년에 걸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으니 돈강의 코사크 중
스텐카 라진이 부유한 코사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고 자유와 토지를 요구하는 농노들을 놓아주었습니다.
라잔의 반란은 예상외로 볼가강 유역을 석권하고 수도 모스크바를 위협했으니, 차르의 군대가 반란을
진압하던 때 반란자들은 볼가강 유역의 주요도시 대부분을 점령했고, 그들 반란자의 무용담은
러시아의 사람들을 매료시켜 후대까지 이야기로 전해졌으며 결국 라진은 고문 당하고 처형됩니다.
폴란드군에 종군했음에도 자포리자의 카자크들은 강력하게 독립을 열망했고, 폴란드에 대한 반란을
반복했으니, 1648년 흐멜니츠키 봉기가 일어나자 폴란드 지배하에서 사회적, 종교적 압박에
괴로워하던 우크라이나의 농민들도 여기에 가담했기 때문에 반란은 이전에는 없는 대규모가 되었습니다.
16세기에 오스만 터키 제국이 폴란드를 침략하자 폴란드는 기마족인 코사크(카자크)족과 동맹을 맺고
대항하는데 코사크족의 대장 부리바(율부리너) 는 터키군을 물리치지만, 위기를 넘긴 폴란드는
동맹을 배신하고 코사크족을 공격하니 대장 부리바는 복수를 맹세하며 자기 머리칼을 잘라 버립니다.
부리바는 두 아들을 폴란드로 보내 공부시키니 폴란드에서 멸시와 차별을 견디며 성장해 형인 안드레이
(토니 커티스)는 폴란드 귀족의 딸인 나탈리아(크리스틴 카우프만)와 사랑에 빠지는데,
나탈리아를 사랑하는 알랙스 대위가 시비를 걸어와 알랙스를 죽이게 되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상황을 알지 못한 대장 부리바는 장성한 두 아들을 데리고 폴란드와의 전쟁에 나섰는데
코사크 족장 니콜라스가 폴란드와 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전쟁을 할수 없다고 반대
하지만 부리바는 폴란드군의 드보르성을 쳐들어가는데 견고한 성벽과 대포로 무장한
성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자 부리바는 성을 포위한 채 양식과 물이 떨어질 때 까지 기다립니다.
드보르성에 식량이 떨어져 가고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코사크족에서도내분이 생겨 절반이
전쟁을 포기하고 돌아갔으며 안드레이는 아버지 몰래 성 안으로 숨어 들어가 사랑하는 나탈리아
를 만나지만 들켜 잡히고 분노한 폴란드군은 나탈리아를 화형에 처하기로 하자...... 안드레이는
나탈리아를 살리기 위해 코사크족의 소 떼를 성 안으로 몰고 와서 식량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합니다.
나탈리아는 안드레이에게 조국의 배반자고 되지 말라고 애원하지만 안드레이는 폴란드군 옷을 입고 성 밖으로
나가 소 떼를 성안으로 몰고 오다가 코사크족의 경비병에 들켜 부리바와 마주치니 부리바는 격노하는데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었듯이 이제 네 생명을 내가 거두겠다." 부리바는 아들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깁니다.
폴란드군은 코사크족의 숫자가 절반으로 줄고 기세가 별거 아니라고 판단하자 성안의 모든 병사
를 동원해 성을 나와 코사크족을 공격하니 열세에 몰린 부리바는 후퇴하자 폴란드군은
추격해 오는데 그러나 초원으로 돌아간 줄만 알았던 코사크족의 다른 족장들이
다시 힘을 합쳐 폴란드군을 포위해 전멸시키니...... 전쟁은 코사크족 대장 부리바가 승리합니다.
풀려난 나탈리아는 그녀의 사랑을 찾아 초원으로 달려 나왔으나 이미 안드레이는 대답 없는 주검이
되었으니 그녀는 오열하는데 동생 오스텝이 형을 고향 초원으로 데리고 가서 묻겠다고
하자.... 부리바는 이제 이 드보르의 초원도 나의 조국이니 안드레이를 여기에 묻겠다고 말합니다.
토니 커티스와 크리스틴 카우프만은 저 (타라스 불리바) 라는 영화를 찍으면서 그만
실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토니 커티스는 12년간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19세가 된 크리스틴 카우프만과 재혼하지만 5년후 1968년에 이혼합니다.
그 해 1968년에 또 결혼을 한 커티스는 이혼과 결혼을 반복하며 6번의 결혼을 하는
바람둥이로 이름을 날렸고, 크리스틴 카우프만도 이후 3번의 결혼을 더 했으며
정식 결혼 외에도 워렌 비티와 에릭 클랩튼과 같은 유명 스타들과의 염문도 뿌립니다.
또 우크라이나인들은 크림 칸국과 동맹해 폴란드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그후 크림 칸국이 폴란드로 돌아서자 독립을 지키기
어려운 우크라이나인들은 타국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할 필요에 직면합니다.
러시아는 17세기에 영역 확대를 지속했으니 남서부에서 그때 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하에 있던 우크라이나를 획득했는데, 자포리자 카자크 코사크들은
군단을 조직해 폴란드, 크림 칸국, 러시아가 국경을 접한 변경 지역에 밀집해 있었습니다
1654년 우크라이나의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러시아의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에게 우크라이나에 대한
보호를 요청했고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이 발효되어 폴란드와 러시아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일으키게 했는데 우크라이나를 드네프르강 유역에 따라 2개로 분할해 서부지역을 폴란드령
으로 되돌려주고, 동부지역을 카자크 추장의 자치령으로 분리해 러시아 차르의 종주권하에 귀속시킵니다.
러시아에 있어 남 서부지역의 확대, 특히 동부 우크라이나의 병합은 예기치 않은 결과였으니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은 정교회 신자였으나, 그들은 로마 가톨릭 및 폴란드의
반종교개혁과 깊이 관련되어 그런 경험이 그들에게 서구의 지적 교류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키예프 아카데미로 러시아는 폴란드 및 중앙 유럽의 나라들, 정교회 세계와 교류를 갖게 되었는데 우크라이나
가 갖는 교류는 러시아의 문화적 창조력을 자극하고 러시아의 전통적인 종교실천 및 문화를 해쳤으니
러시아 정교회는 자신들의 의례서 및 종교실천이 다르게 변화한게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분리라고 보았습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 니콘은 러시아 정교회의 예식을 그리스식과 일치시키기로 하니 다수의 러시아인에게서
항의를 받았고 1667년 라스콜(교회분열) 을 낳았으니 개혁을 받아들여 수용하지 않는 사람은 구신도
곧 고의식파라고 불렸고, 그들은 니콘파의 교회와 국가로부터 이단으로 단죄되어 가혹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차르의 궁정도 우크라이나 및 서구의 영향에서 피하지 못했으니 1631년 우크라이나는 수석대주교
페트로 모힐라가 창설한 아카데미를 통해 새로운 지식 및 사상의 전달장치의 역할을
해냈으니 새로운 지식의 유입은 바로크 스타일의 건축양식, 문학, 성상 제작 등으로 결실을 맺습니다.
기타 국제무역의 진전과 외국인의 도래의 증가에 따라 차르 궁정은 서구의 진보한 기술에 흥미를 표시하고
특히 군사부분에서의 혁신에 열심이었으니 17세기가 끝나갈 때까지 우크라이나, 폴란드, 서구의
문화 침투는 상류계급에 있어 러시아의 전통문화로의 고집을 잃고 서구화 개혁으로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동쪽으로의 영역확대는 쉽게 진행되었으니 1581년 상인 출신의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모피 무역에 관심갖고,
코사크 수령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를 고용해 서시베리아로 개척을 했는데 예르마크는 시비르 한국
을 병합하여 러시아의 귀족들과 군인으로 편입시키고 오비강과 이르티시강 서쪽을 러시아령으로 선언합니다.
만가제야를 시작하는 거점으로 상인, 무역업자, 탐험가들이 오비 강, 예니세이강, 레나강에서 태평양 연안
동쪽으로 진출했으니, 1648년 코사크 세묜 디지뇨프는 아메리카와 아시아 사이가 통행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 내었고 17세기 중반 무렵 러시아인은 아무르강과 청나라의 변경지대에 도달합니다.
청나라 정부와의 분쟁을 거치면서 러시아는 1689년 중국과 화평을 맺게 되니,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해 러시아는 아무르강에 대한 요구를
철회하였으나, 바이칼호의 동쪽에 접하는 지역 및 북경 과의 무역 루트를 획득합니다.
18세기 들어서면서 러시아는 고립된 전통적인 국가에서 부분적으로 서구화된 러시아 제국으로 변모했으니...
이 변화의 원인을 표트르 대제의 선견성으로 역사가들은 표트르 개인이 러시아를 변화시켰다는 주장에는
반대했으나 그가 2세기에 걸쳐 지속한 러시아 제국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에서는 일치된 견해를 보입니다.
17세기 말에 차르로 즉위한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러시아는 간신히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을수 있게 되었으며, 표트르 대제가 로마 황제의 칭호인
임페라토르를 러시아 황제의 칭호로 채용하고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라는 국호를 제정합니다.
표트르 대제 시절 러시아는 서유럽화가 진행되었지만, 정작 근대화가 필요한 농촌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았으니 러시아 경제는 농업에 의지하고 있었음에도 1억 4,000만명 러시아의 농촌은 서양의 농지들
보다 한참 생산성이 낮았으니 노예 코로프들을 농노로 만들었고, 세원으로 삼아 재정을 탄탄히 하고자 합니다.
표트르 치세에 러시아는 처음으로 유럽의 대국중 하나로 존재감을 과시했으니 이 시대 러시아는 내외에서 제국이라
불리게 되는데 그러나 19세기에 농노제를 유지한 것은 경제적 발전의 커다란 방해가 되었으니, 18세기 후반
서유럽이 산업혁명에 의한 경제적 성장을 계속할때 러시아는 권력이 속박되어 서서히 쇠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러시아 제국은 1721년 11월에 선포된 이래 1917년 3월 해체될 때까지 북부 유라시아의 대부분에 걸쳐
있는 광대한 제국이었으니 영토는 한반도의 100배인 2,280만km2 에 달했는데, 세계 육지
면적의 6분의 1에 해당하며 대영 제국과 몽골 제국의 뒤를 이은 인류 역사상 3번째로 큰 제국이었습니다.
또한 1799년에서 1867년 사이에는 북미(알래스카) 에서 식민지를 건설하였르며 1897년에
유일하게 실시된 인구 조사에서는 상당한 민족적, 언어적, 종교적,
사회 경제적 다양성을 가진 1억 2,560만 명의 인구가 러시아 제국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부상은 경쟁자들인 스웨덴 제국,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 청나라의 쇠퇴와
동시에 이루어졌으니, 10세기부터 17세기까지 러시아는 보야르라는 귀족 계급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위에는 절대 군주 차르가 있었으니 러시아 제국의 토대는 이반 3세(1462년~1505년) 에 의해 마련되었습니다.
이반 3세는 몽골- 타타르족 지배에 대항해 러시아 독립을 선언하고 영토를 확장해 중앙집권적 러시아 국민국가를
건설하였으며 손자인 이반 4세(1533년~1584년)는 1547년에 전러시아 황제로 즉위한 최초 러시아 군주가
되었고 영토는 확장을 거듭햇으니 주요 사건은 류리크 왕조의 단절과 시베리아 정복, 표트르 대제의 즉위입니다.
표트르 대제는 차르국을 제국으로 탈바꿈시켰고 수많은 전쟁을 통해 광대한 영토를 얻어
유럽 강국이 되었으니 그는 러시아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으며, 과학적, 합리주의적, 서구 지향적인 체제를 도입하는 문화 혁명을 이끌었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군사적으로도 확장을 꾀했으니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군사적 원정을 벌인 후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니, 북부 지역에 대한 방비가 제대로 되지않던 상황이었는데,
이는 백해의 아르한겔스크 항구를 제외하고는 러시아 북부에 제대로 된 해양기지가 없었던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르한겔스크는 1년에 9개월 동안은 얼어서 사용하지도 못하는 형편이었고, 발트 해로의 출입은
당시 스웨덴 제국에 의해 막힌 상황이었으니 표트르 대제는 이같은 상황을 끝내고자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 덴마크와 연합을 맺어 대북방전쟁을 일으켜 스웨덴 제국을 공격하니
1721년 러시아 승리로 끝났고, 스웨덴은 반강제적으로 러시아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대북방전쟁의 전리품으로 핀란드 만의 동남부에 위치한 4개의 지방들을
얻어냈고, 해상으로 통하는 길목을 열었으니..... 그곳에 오랫동안 러시아의 수도였던
모스크바를 대체하기 위해 네바강 인근에 새로운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웠습니다.
천도에는 러시아를 유럽에 포함시키려는 황제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으니 도시 디자인은 유럽 이탈리아 디자인을
따랐는데, 1722년, 표트르 대제는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가 통치하는 코카서스와 카스피해로 관심을
돌렸으니 아스트라한을 페르시아를 상대로 한 군사본부로 삼았고 1722년에 러시아- 페르시아 전쟁을 벌입니다.
표트르 대제는 정부 조직도 개편했으니 옛 두마를 9명으로 이루어진 의회로 대체했고, 지방
정부도 재편하여 새로운 지방들과 주들로 나누었으며 또 표트르 대제는 의회의 역할이
세금을 제대로 거두는 것이라고 강조했고, 그의 치세동안 러시아의 세입은 3배로 늘어납니다.
또한 모든 종류의 자치 정부는 모조리 폐지되었고 귀족들의 국가에 대한 의무는 상대적으로 크게
강조되었으며, 그는 정교회를 행정 시스템의 일부로 끌어들였는데 이로서 종교를
국가의 하수인으로 삼았으니 주교좌를 해산하고 시노드를 설립하여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합니다.
표트르 대제는 1725년에 죽었고 그의 아내였던 예카테리나 1세의 짧은 통치 이후, 왕관은 안나 이브노브나
(엘리자베타) 여제에게 넘어갔는데, 그녀는 개혁 정책의 속도를 늦추고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성공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로써 러시아의 오래된 숙적이었던 크림 칸국이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여제는 예술과 건축, 과학을 크게 지원했으며, 이때 처음으로 모스크바 대학이 설립
되기도 했으며 딱히 개혁적인 정책들을 실시 하지 않았고, 20여년에
가까운 통치 기간 동안 7년 전쟁의 승리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공과가 없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3세와 결혼한 독일 공주로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은후 그녀는 자기 남편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차지했으며, 표트르 대제 때 크게 실추된 귀족들의 권위를 끌어올리고
국가에 대한 의무는 말소되었으며 지방 자치권등 엄청난 권력을 재부여하며 귀족들의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타르고비차 연맹을 지지하며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을 장악하였는데, 다만 그녀의 치세동안
농노들의 삶은 갈수록 악화되었으니 농노들은 일평생을 주인의 땅을 강제로 경작하며 보냈으니, 토지와
농노를 각기 다른 재산으로 취급하는 법안을 제정한 이후인 1773년에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반란군은 '지주들을 죽이자' 강령을 내걸고 난을 일으켰으며 모스크바를 위협할 정도로 세를 떨쳤는데, 진압된후
예카테리나 2세는 주동자들을 고문하고 모욕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고통없이 죽이라 명령했는데, 법치주의를
러시아 전역에 퍼뜨리기 위해 노력했으니 계몽주의가 유행 중이었던 서구 유럽 사회에서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여제는 귀족들의 지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귀족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농노들과 평민들의 권리들을 다수
박탈하였는데, 다만 예카테리나 2세는 농노제의 부당성과 부도덕성에 대하여 인지했으며, 만인이
평등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귀족들의 극렬한 반대로 인하여 이같은 신념들을 실행시키지는 못합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러시아의 남부 국경
을 흑해까지 확장했고 오스트리아 와 프러시아의 군주들과 협의하여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을 갈라 먹었으며 페르시아인들의 침입을 막아냈습니다.
그전에 러시아로 귀순한 자포르제 카자크에 대해 예카테리나 2세는 그들 공동체인 세치를 없애면서 러시아 제국의
직할령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흐멜니츠키도 이러한 결말을 예측하고 대홍수 전쟁 말기에 러시아와 손을
끊으려는 시도를 했으나 이루어지기 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자포로제 카자크는 결국 러시아 제국에 종속되게 됩니다.
몇몇 자포로제 카자크들은 돈 카자크, 즉 쿠반 카자크에 흡수되고 러시아군에 종속되어 나폴레옹에 맞선 1812년
조국전쟁 시기 유럽을 휩쓸며 카자크는 두나이를 넘었다 같은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 카자크 민요들이 독일
프랑스와 같은 유럽으로 전파되고 돈 카자크와 서유럽 국가에서 용맹과 잔혹함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돈 카자크에 합류하지 않은 나머지 대부분의 자포로제 카자크들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며 돈 카자크와는 다른
길을 걸어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토대를 마련했으니 시간이 흐르고 우열곡절 과정을 거친
끝에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후에 그들만의 문화를 지켜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로 인한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사태와 동부 우크라이나 무력개입
으로 인한 돈바스 전쟁 등, 우크라이나 중부와 서부의 친서방파 우크라이나인들과
남부와 동부의 친러파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 내의 여론이 서로 분리될 것이라
는 러시아의 생각과는 반대로 서로 같이 분노하고 합심해서 러시아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러시아가 허약했을 때 크림 칸국이 수세기 동안 동유럽을 습격해 수백만명에 달하는 정교회 신도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버리면서 화를 자초한 것도 있었으니 크림 칸국 정복은 타타르의
멍에의 마지막을 잘라내는 것이었으니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 충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도발로 인해 오스만 제국이 맞서게 되니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시작이었는데 하지만
1768년에서 1774년까지 계속된 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니
1774년 러시아와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을 체결하여 카파를 할양하고 크림 칸국의 독립을 인정합니다.
1783년 4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크림 칸국을 무력으로 정복하니 오스만 제국은 조약 위반에 항의했지만,
러시아는 총칼로 답변해 1787년부터 1792년까지 8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벌어지나 오스만이 패배했고,
1792년 이아시 조약을 체결해 러시아의 크림 칸국 병합을 인정하고 추가로 예디산 지역을 러시아에 할양합니다.
크림 칸국의 48대 칸으로 서유럽식 군제 개혁을 시행하는등 개혁에 힘썼던 샤힌 게라이의 최후도 비극적이니
1783년 크림 칸국이 무너지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끌려가 1787년까지 감금당했다가 에디르네로
귀향했지만 러시아군을 끌여들였다는 죄목으로 오스만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로도스에서 처형당합니다.
크림 칸국이 무너진 이후 크림 타타르인들은 러시아 제국 정부와 중간관리자로 파견한 카잔의 볼가
타타르 관리들 사이에서 이중고를 겪으며 19세기에 들어 시베리아나 캅카스, 중앙아시아등
러시아 제국의 변방이나 오스만 제국령인 도브루자로 강제추방 당하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크림 타타르인들이 떠난 자리는 러시아인이 대신해 크림반도를 차지했으며 러시아 혁명후에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기에 위험 민족으로 낙인찍혀 민족 전체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고 이 과정에서 1/4 정도가
굶어죽거나 동사하는 참화를 겪어야 했으며 살아남은 이들중 절반도 열악한 조건하에 강제노역으로 사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