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성기 소리가 내무반 막사 안에까지 울렸다.
“고향이 경북 영천인 사병은 지금 즉시 중대본부로 오라” 고 했다. 병사부 백여 명 사병 중에 영천 출신은 나뿐인 줄 아는 나는 곧 바로 CP에 들렸다. 선임하사가 병비과장님(군인이지만 병사구사령부에서는 과장으로 호칭되고 계급은 대위) 께서 삼사관학교에 교육훈련을 받게 되었으니 먼저 내려가서 과장님 하숙집을 정하라 하면서 특별휴가 일 주일을 주었다. 과장님과는 며칠 날 어디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나는 뜻밖의 휴가로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며 설레이는 마음으로 고향에 내려갔다.
삼사관학교 주변을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한 곳을 과장님 하숙집으로 마음 속으로 정하고 약속한 날짜에 과장님을 만났다. 그런데 의외로 과장님은 자신이 정한 데가 있다 하시며 내가 정해놓은 곳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는 좋은 하숙집을 지정했기 때문이라 여기고,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스럽다고 말로만 깍듯이 인사를 치렀다.
나는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부모님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지만, 아버지는 돈 아까운 것만 아셨지 아들이 군대생활에 어떠한 영향이 있을지 아실 리가 없었다.
일주일 간의 특휴를 누리고 마음에는 약간의 끄림직한 체증 같은 것을 느끼며 귀대했다. 선임하사는 내가 귀대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대하자 사정없이 촛대뼈를 세 번이나 까더니 내 하복부를 크게 차는 바람에 나는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서 일어나니 선임하사는 눈을 부릅뜨고
“ 이새끼야 어떻게 했길래 과장님이 전화 상으로 섭섭하다고 하느냐?” 하면서 또 촛대뼈를 깠다. 나는 얼결에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빌었다.
“너 이 새끼 어디가 잘 생겨 무엇이 이쁘다고 특휴를 주었겠느냐, 앞으로 처세를 똑 바로 해라” 고 했다.
나는 맞아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 같으면 고향의 부모에게 편지라도 써서 과장님을 찾아 뵙고 사죄드리고 섭섭하게 여기신 데 대한 상당한 대가라도 보상하도록 할 수 있지만, 그 때는 그런 생각보다는 부모에 대한 자존심 같은 것도 있고 매우 궁색한 짓인 것 같았다.
그 후로 선임하사는 힘든 일만 있으면 내게 시켰고 사역병은 선착순 내게 돌아왔다. 화장실 청소도 내 담당이었다. 내가 거부하든지 싫은 빛을 보이면 선임하사는 “이 자식 공짜 휴가 갔다온 주제에 왠 불만이 많아!” 하며 째려 보았다.
나는 논산 훈련소에서 50 일 간의 고된 훈련을 마친 후, 유달리 추웠던 그 해 겨울 눈보라가 휘날리는 크리스마스 이튿날에 모 사단 병사참모부에 처음으로 배치되었다. 부관 주특기에 맞게 사무직을 맞게 되어 행운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신병들이 모두가 병역기피를 하다가 오일육혁명 바람에 입대한 자들이므로 고참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학벌도 높은 관계 상 선임자들이 군기를 잡는다며 걸핏하면 배트를 휘둘러 군기가 엄했고 분위기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군사훈련이 없고 펜대를 굴리며 책상에 앉아 근무하는 일이 군대생활치고는 특과로서 별 사고만 없으면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에 나의 경우는 심신이 편치 못했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했다. 3개월 후 과장님이 훈련을 마치고 귀대한다면, 심한 미운틀 박힌 며느리 신세가 되어 심충이 하늘을 찌를 두 시어미 밑에서 그 지겨운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하고 골돌히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곳을 빠져나가는 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면 졸병으로서는 마음대로 전출할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탈영 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튿날 초저녁에 철책이 없는 비탈진 골자기에 욱어진 숲 속을 헤치고 영외로 나가 버스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 않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탈영은 제일 쉬운 일이다. 또 과장님이 귀대한 후에 결행해도 되는 일이라는 생각과 함께 번뜩 머리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굼벵이도 궁글 재주가 있다고 하는데 인간으로 태어나 남들이 못하는 기발한 발상으로 멋진 군대생활을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위기를 호기회로 전환하는 계획이 떠올랐다.
나는 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용돈이 필요할 터이므로 주말에 외박증을 끈어서 대구에 있는 누님댁을 찾기로 했다. 원칙으로 외박증 갖고는 사단 구역 외에는 나갈 수 없지만 모험을 시도했다. 야간열차로 자정 무렵 누님댁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자고 이튿날 신사복으로 가라입고 무슨 볼일을 보러 시내로 나갔다. 서성로 네거리에서 수신호하는 교통순경을 미쳐 못 보고 건느다가 마침 단속주간이라 교통법규위반으로 중부경찰서에 끌려갔다. 신분확인을 하던 경찰이 내가 군인인 것을 알고 17 헌병대로 넘겨버렸다. 헌병중사 한 분이 나를 탈영병인 줄 알고 심문하는데, 병장 한 분은 꿀어 앉아 있는 내 허벅지를 배터로 몇 번 내리쳤다. 나는 내 근무처를 대고 탈영할 리가 없다고 하니 백차에다 나를 태우고 누님댁까지 가서 군복으로 가라입히는데 웃옷은 벗기고 마치 죄인 취급을 하며 헌병대에 돌아와 영창에 가둬버렸다. 나는 누님이 동생이 큰 죄나 지은 듯 크게 놀랐을 것이 염려되었다. 교통법규위반과 구역이탈이라는 경범죄이지만 사단에 보고가 올라가면 나는 3개월 간 일체 외출외박은 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직속 상관들의 눈 밖에 나 있는데 빨간 줄까지 오르고 보면 군생활이 더욱 싫어질 것이고 갈수록 태산이라고 생각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깊은 고뇌에 빠져 있는데 나를 심문하던 중사가 와서 홍 아무를 아느냐고 물었다. 내게 자형이 되다고 하니 그 분이 바로 자기의 친형과 한 사무실에 근무하는 동료라면서 형님의 부탁이 간곡하니 내보내줄테니 저녁 8시에 역파견대로 나오라고 했다. 나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것 같았다. 자형에게 사례하고 용돈을 빌린 뒤 저녁 약속시간에 그 헌병중사를 만났다. 그가 건네준 증명서 한 장을 갖고 시간 내에 무사히 귀대할 수 있었다.
사단에서 인사권은 부관참모 L소령이 주관하는 줄을 알고 토요일마다 그의 사택 주변을 배회했다. 하루는 부관참모의 자제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건강 때문에 휴학 중인데 나와는 같은 대학 재학 중이었다. 우리는 만나면 복숭아밭이나 외밭의 원두막을 다니면서 놀기도 하고 나의 사사로운 이야기도 그에게 하게 되었다. 한창 공부할 시기인데 시간이 아깝다면서 미군부대에 가서 공부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을 듯해서 부관참모님을 뵙고 부탁 말씀이라도 드려보고 싶다 했더니 그는 내 뜻을 이해하는 듯 협조적이었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미리 말씀을 전하겠다고 했다.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날 것만 같았다. 그러고 그 다음 주말에 들렸더니 마침 참모님이 계셨다. 나는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사정 이얘기를 드렸더니 들어서 알고 있다고 하셨다. 평복을 입고 있는 그는 군인이라기보다 인자한 삼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좋은 학교에 적을 두고 있으니 환경이 좀 나은 데 가서 노력해서 훌륭한 인재가 된다면 국방의 의무와 함께 더 큰 일을 하는 것이라 하며 희망을 갖고 기다려 보라고 하셨다. 나는 구세주를 만난 듯하여 큰절을 올리고 기회를 베풀어주신다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다고 아뢰고 물러나왔다.
그해 가을도 깊어가고 병비과장님의 귀대일자도 가까워졌다. 나는 사단본부에서 하마 연락이 올까 고대하던 어느 날, 일과 후에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부관부에서 빨리 올라오라는 기별이었다. 나는 한달음에 부관참모실에 들렸더니 병장 한 분이 당신이 무슨 수를 써서 참모님의 환심을 삿느냐 하고 무척 부럽다면서 병적기록카드와 카투사 특명인사철을 한꺼번에 내주었다.
나는 그날 저녁에 군용열차를 타고 상경해서 아침 일찍 영등포 제이배출대에 신고하고 다음 날에 부천에 있는 미 팔군수용연대에 입대하였다.
마치 별천지에 온 것 같았다. 여기서 2개 소대 병력이 2주간의 영어공부와 미국식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한국군에서 냄새나는 수도물 밖에 안 먹다가 양키들이 마시는 갖가지 청량음료수와 냉우유를 여러 컵 마신 탓인지 배속이 부글거리고 쏟아지는 소나기 설사를 어쩔 수 없었다. 약을먹고 일 주일이 되어도 멈추지 않았다.
금싸라기 같은 가을 햇살 아래 청량제보다 더 배속까지 시원한 가을바람을 마시며 믹국식 제식훈련을 했다.
핫 포, 드리 포(하나 둘, 셋 넷) 핫 포, 드리 포………… 투드레오 홀(뒤돌아 서), 엣이지(열중쉬어), 댄지 핫(차렷)
차렷 구령이 내렸을 때, 배 속이 사르르 아프면서 설사기가 있어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간신히 참고 있는데 철썩! 조교가 느닷없이 내 뺨을 쳤다. 나는 계속 찌프린 얼굴을 하였더니 이 번에 는 다른 쪽 뺨에 철썩! 백주에 눈에서 번뜩 별이 튀었다. 한국군에서도 맞지 않았던 뺨을 미군부대에 와서 경을 친 셈이다.
2주간 교육이 끝나고 영어시험을 치렀다. 쓸 돈 한푼 없는 주제이고 보니 혼신의 정신을 쏟아 시험을 쳤다. 성적이 괜찮은 듯 7명을 뽑는 헌병대에 맨 먼저 선발되었다. 미국 역사상 12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미제일기갑사단, 545 허병중대에 전속 특명이 내렸다.
내게 뺨을 쳤던 조교가 와서 머리가 땅에 대도록 엎드려 사과를 했다. 나는 부대는 미군부대지만 군인은 한국군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 기념 선물로 여기겠다며 염려말라고 했다.
우리 7명은 해거름에 법원리에 있는 헌병중대에 도착했다.
더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임진강으로부터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가슴 속 깊숙이 파고들어 내 마음은 오색 찬란한 풍선처럼 한없이 뜨서 날아가는 듯했다.
나는 살면서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과 함께 궁즉 통(窮卽 通)이라는 말이 내 인생에 법칙처럼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