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의 내용은 김창석 저 《삼국과 통일신라의 유통체계 연구》에서 발췌한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경주 황남동 출토 목간
국가 주도 교역체계와 관시의 형성
국가 주도의 교역체계가 성립되는 과정인 시(市)의 성격과 기능의 변화 과정, 그리고 관상(官商)의 출현 배경을 통해서 살필 수 있었다. 원래 시는 구조선의 신시(神市)에서 보듯이 최고 신성처로서 정무기능과 제의기능을 함께 가진 정교(政敎)의 중심 구역이었다. 이와 함께 범죄자의 은닉과 재판, 처형과 사면, 창고와 재분배기능 등이 시의 원초적인 기능이었다.
따라서 제의 장소로서 출발한 신성공간에서 상업 같은 세속적인 활동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 세속왕권과 관계(官階) 조직이 성장하고 정비되어 가면서 전통적인 신성처에서 분리된 조정(朝廷)이 성립한다. 그리고 고대국가 성립 과정에서 포섭한 지역집단의 수장, 무격들을 편제해갔다. 이에 따라 종래의 신성처들도 대대적인 개편 과정을 거치면서 왕실 중심의 제사체계에 새롭게 편성되었다.
그리고 제수용품이나 위신재의 조달과 재분배 과정에서 교환 행위가 발생하고, 신성처의 외곽에서도 상품 생산, 물자 유통이 진전되면서 각지에서 상거래가 성장하게 되었다. 이를 국가질서 내로 편입시킨 것이 삼국의 관시(官市) 설치였다. 집권체제 성립 이후 대외교역을 독점한 고대왕권은 관상-전치체제를 통해 국내 상업 부문까지 관장함으로써 교역의 양대 부문을 장악하게 되었다.
관시체제와 관상
한국 고대의 관시는 국가가 주도하여 왕경과 주요 지방 도시에 설립한 시장으로서 강력한 국가 통제하에 운영되었다. 여기에 소속되어 상업에 종사하던 관상(官商)은, 시와 같은 신성처에서 활도하던 샤먼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샤먼들 가운데 종래 제물 조달을 위해 특수 물품의 구입까지 감행했던 이들이나 그 대리인들이 점차 상업에 종사하게 되고, 이후 시사(市肆)와 관시 같은 상업시설이 설치되면서 이에 흡수되어 관상으로 전신하게 되었다.
삼국이 이렇게 관설 시장을 설치하고 전잠 부서까지 두어 관리한 것은, 무엇보다도 세속왕권이 성립하면서 신성처와 샤먼층을 왕권 중심의 국가질서로 재편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작용한 결과다. 하지만 종래의 시(市)가 상업기구로 정착한 후에는 중앙 관부와 관영 수공업장의 물품 수요를 충당하고 지배자 집단의 도시 생활을 보장하는 유통기능을 수행했다.
왕실이나 각급 관부는 자체의 방대한 수공업기구와 관영 수공업장을 통해 기본적인 용품 조달이 가능했지만, 부족한 물품은 왕경과 지방 도시에 설치된 관시를 이용하여 해결했다. 사영 공방을 운영할 수 있는 고위 귀족을 제외한 중하위 관인들도 자체 생산기반이 불비했으므로 관시에 대한 의존도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통일신라 초의 녹읍(祿邑) 폐지와 축년사조(逐年賜租) 지급은 관시 중심의 유통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관상은 관시의 상가 건물에 입주하여, 왕실 수공업장과 관청 소속 공방에서 제작한 일부 수공업품과 가축류, 민간 장인들이 만든 수공업품과 전국 각지에서 취합된 농·수·축산물을 판매했다.
창고제와 조세 수취
국내 유통 부문에서 관시체제와 함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것이 조세의 수취와 지출이다. 이는 창고제 성립과 운영을 통해 살펴보았다. 청동기와 초기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각지에서 성립한 지역집단들은 중심 구역에 공용 창고를 갖추고 있었다. 잉여생산물을 보관한 창고를 신성하게 여겼고, 창고 앞의 광장을 제사 공간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속왕권이 출현하고 제수용품을 조달하던 공납제도가 조세 수취로 변질되면서 창고도 그 성격이 변한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공용 창고에서, 수취물 보관을 위한 시설, 즉 왕권 신장을 위한 물적 기반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신라의 경우, 첨해이사금 대 이후 마립간 시기 초까지 어느 시기엔가 샤먼층에서 전신한 품주(稟主)가 제도화되면서 최고의 재정 관부로 등장했다. 그리고 6세기 들어 율령체제가 성립한 후에는 지역집단의 유력한 경제기반이었던 창고시설을 신라 국가의 재정구조 안으로 편입하는 대신 고위 귀족들에게 일정 지역을 식읍, 녹읍으로 설정해주었다.
경주 황남동에서 발견된 목간(木簡)은 이를 작성한 관영 수공업장 혹은 그 관할 관부가 체계적인 창고시설을 갖추고 재고 조사나 출납 상황 기록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다. 이처럼 문서와 기록에 입각한 재정 운영이 가능했던 것은 군현제에 입각한 지방 통치체제와 중아의 창부(倉部)·조부(調府)조직,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통해 미숙하게나마 전국을 포괄하는 유통체계가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현물화폐의 사용
전근대 시기에 금속 화폐의 사용 여부는 상품 생산과 유통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의 하나다. 우리는 통일신라 말까지 금속화폐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유통경제 수준과 함께 수취방식, 재정구조의 특성이 작용하고 있었다.
늦어도 6세기 이래 곡물과 직물은 현물화폐로서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었으며, 국가도 이를 주요한 조세 품목으로 수취했다. 그리고 이를 재원으로 하여 관부와, 녹읍을 받지 못한 관료에게 -녹읍 폐지 후에는 전 귀족과 관료에게 축년사조로서- 소용품과 급여를 지급했다. 이를 이용하여 기본저인 생활물자는 물론 각종 행정 소모품과 생활용품을 관시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관시는 단순한 물자 공급기구에 그치지 않고 전국적인 물자 유통의 촉매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는 관부 운영을 위한 물품과 신료에게 주는 보수로 일정 품목을 지급해도 그 공백을 관시가 메워줄 수 있으므로, 재정 운영의 편의도 꾀할 수 있었다. 여기서 국가 유통 시스템 가운데 조세 수취·지급체계와 관상-관시체계가 현물화폐를 매개로 구조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민간 상업의 발달
관시를 중심으로 한 상업 부문이 활발히 운영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간 생산자들로부터 잉여생산물을 원할하게 조달해야 한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전장(田莊)이 발달하고 직접생산자층이 몰락하여 조세 수취마저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위와 같은 전제조건은 충족되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관상 활동은 위축되지만 대신 몰락 민이 상업에 투신함으로써 민간 상업 부문이 확대된다. 그리고 삼국 초기부터 이어지는 호민층(豪民層)의 상업 활동이 지속되었고, 전업적 상인층이라고 할 수 없지만 진골 귀족과 사찰도 독자적인 생산조직을 갖추고 상업 활동을 벌여 국가 주도의 유통체계를 잠식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대승보살계(大承菩薩戒) 중 상업에 관한 조항을, 재가자(在家者)의 상업 활동을 허용하는 것으로 유연하게 이해한 것도 민간 상업 발달을 촉진하는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민간 부문은 국내 상업에서 영역을 확대해 나갔을 뿐 아니라 중대 말 이후로는 대외교역에도 진출한다. 특히 신라 말에는 장보고의 예에서 보이듯이 지방 출신의 일반 민이 대외교역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는 중대까지 국가 유통 부문이 국내 상업은 물론 대외교역까지 장악하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각지에서 할거하던 지방세력들은 대내외 교역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정치·군사적 기반을 토대로 독자적인 유통망을 형성하고, 지배 영역 내에서는 조세까지 수취함으로써 삼국과 통일신라의 국가 유통체계를 전면적으로 대체해 나갔다.
- 김창석, 《삼국과 통일신라의 유통체계 연구》, 일조각, 2004, 235~2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