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수요성령집회 설교
*본문; 요일 2:7~17
*제목; 요한일서(4)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1. 지난 주 이야기, 구원받은 이후의 삶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받습니다. 그가 의인이든지 죄인이든지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실 모두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첫 번째 특권이 바로 성령님께서 그 안에 좌정하셔서 그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죄악의 쓰레기더미로 여전히 악취를 풍기고 있다면 얼마나 죄송합니까?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내안에 성령님을 모시어 드린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런 흠도 없이 살아가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날마다 “회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죄의 무감각화”을 이기고, 거룩한 사람으로 점점 더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2. 오늘의 이야기, 예수님 사랑하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서로 만나기 시작하면 날짜를 새는 것이 일반적인 습관입니다. 그래서 ‘100일째, 200일째’가 되면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날수가 서로의 깊은 관계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서로를 향한 사랑의 진실성이 드러나는 수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날수가 우리의 거룩성과 믿음을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익숙해진 연인들처럼 관계를 끊을 수는 없으니, 무덤덤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분과 사귐을 가지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표현으로 예수님과 점점 더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런 믿음을 가지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9~11절’입니다.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요일 2:9~11)
예수님은 사랑하게 되면, 빛 가운데 있게 되면, 예수님과 사귐이 있게 되면, 그는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하기에, 그 사랑으로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자가 아니고, 그래서 결국 믿음이 없는 자인 것입니다. ‘11절’의 표현대로 “어둠”(죄)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자입니다.
<감자탕 교회 조현삼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교회를 목양하면서 교인들이 자꾸 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말리니, 그들이 하는 말이 “목사님, 저희들 그냥 두세요. 더 잘하려고 하는 일이예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더 잘 안 해도 됩니다. 아니 못해도 됩니다. 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삽시다.”
맞습니다. 더 잘되면 뭐합니까? 사랑이 없으면 주님과 사귐 없는 주님과 상관없는 교회입니다.
그래도 미운데 어떻합니까? ‘12절’을 봅시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요일 2:12)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주홍 같은 붉은 죄를 예수님으로부터 사함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이 다른 이를 미워한다는 것은 그 고백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미워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 자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힘든 이유는 명백하게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관계를 무너뜨리고,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마귀의 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죄가 너무도 밉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우리 안에 미운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도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고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 6:24’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내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앞집 여인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5~17)
<인도 선교사, 조동욱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국에 장로수련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왔다가 다 마친 이후, 인도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데, 그의 마음에 인도로 돌아가기가 너무도 싫더랍니다.
인도 사역도 환경도 삶도 너무 힘든 가운데, 이번 집회를 인도하기 전에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에 무면허 택시에 치여서 흙바닥에 피를 흘리며 뒹굴었던 경험이 너무도 생생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돌아가기 싫었습니다. 인도에 가족들에게 전화하여 나는 들어가지 않을테니 귀국하라고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이렇게 주저주저 하며 한국에 머물러 있을 때,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너는 인도에 가지 않으려느냐? 그렇지만 나는 인도에 들어갈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이 아직도 인도에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인도를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 음성을 듣고 그는 깨닫습니다. ‘인도에 자신감이나 용기로 인해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사역과 일들 때문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그곳에 계시고, 그곳에서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동욱 선교사님은 사랑하는 주님 때문에 인도에 다시 들어가게 됩니다.
저도 여기서 목회하는 것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기서 사역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상하고 아프고 힘들어도, 다시 사역의 자리에 나아갑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계십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사랑합니까?
첫댓글 믿음이란 주님과 사귐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분이 우리를 먼저 생명다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다른 이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 맡긴 사역을 감당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믿음의 모든 삶을 행해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