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 한국수필 12월호 / 강현자

[강현자]

태풍

강현자

"누굴 찾는다고?"

"요 아랫집 김〇〇이요."

"김〇◇?"

"네."

치아가 드뭇한 노인의 애매한 발음이지만 나는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 사람 죽었잖어."

이 무슨 황당한 말씀이신가? 온몸에서 맥이 쭉 빠져나갔다. 그럴 리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태풍 카눈의 위력이 역대 사상 최대라기에 온종일 긴장된 마음을 늦출 수가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 마당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비설거지는 해두었지만 마치 디스코팡팡이 흔들리듯 마당 주변의 크고 작은 나무며 풀잎들이 모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린다. 전선 위까지 키를 세운 은행나무마저 몸서리치고 앞산의 초록이 통째로 비틀거린다.

이튿날 아침 일찍 텃밭으로 나갔다. 세상에 맙소사! 내 사랑 텃밭 바라미들이 처참하다. 서리태가 나자빠지고 훤칠한 옥수수는 허리가 꺾이고 말았다. 새벽마다 풀을 뽑고 일일이 손으로 벌레를 잡으며 눈도장을 찍지 않았던가. 처참하다. 진작부터 왜 세심하게 대비하지 못했을까. 어디서부터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줘야 할지 막막하다. 달콤한 과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카눈’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나의 바라미들에게 미안했다.

낙심은 텃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르신의 발음이 잘못되었길 바라면서 그를 좀 더 찾아보기로 했다. 언제부턴가 전화를 해도 답이 없고 어제 보낸 카톡도 여태 빨간 숫자가 지워지지 않았다.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머님의 병환으로 힘든 상황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연락까지 끊을 게 무에 있냐 말이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궁금증이 숙성되면 걱정이 된다. 그래서 나선 길이었다.

그의 하우스로 향했다. 문이 활짝 열린 채 주변은 모두가 정지 모드다. 밭둑을 덮어버린 호박 넝쿨이며 옥수숫대를 칭칭 감고 올라간 넝쿨콩 잎도 모두 움직임이 없다. 밖에 우두커니 세워둔 냉장고와 간이 테이블은 물론,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전에 왔을 때 손수 타주던 봉지 커피도 주전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하우스 안을 들여다보았다. 파릇한 미래는 보이지 않고 세워놓은 깻단만 줄지어있다. 늘어놓은 작업 도구들은 주인을 잊은 듯하고 깻단을 향한 선풍기만 정적 가운데 목숨줄을 겨우 이어낸다. 덜컥 겁이 났다. "왔슈?" 하며 미소 띤 그가 다가올 것 같은데 벌건 대낮이 무서우리만치 조용하다. 저 혼자 돌아가는 선풍기에 희망을 기대어 보기로 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나의 바라미들을 그대로 둘 순 없다. 후두둑…. 떨구어내지 못한 빗방울이 어깨 위로 쏟아진다. 버팀목을 세우고 허리쯤에 줄을 맸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연한 줄기가 속절없이 부러진다. 옥수수가 수분(受粉)을 제대로 마치기나 한 건지…. 이번 추석에 먹으려고 심은 늦옥수수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이미 고랑에 누워버린 서리태도 헛일이 되어버렸다. 망연자실 힘이 쭉 빠진다.

이틀이 지나고 허망하여 외면하던 텃밭에 다시 눈이 갔다. 누워있던 서리태도 옥수수도 조금씩 하늘을 향해 일어서고 있었다. 모종을 심을 때 맞추었던 줄이 이리저리 흐트러지긴 했어도 그들은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일으켜 세운다고 여린 줄기를 오히려 부러뜨린 것이 후회되었다. 차라리 그냥 둘 것을. 지나친 관심이었을까? 나의 손길이 아니어도 저들은 알아서 제 살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하우스에서 나와 천천히 발길을 돌리려는데 눈에 익은 그의 차가 내 앞에서 선다. 나의 눈이 커졌다. 어르신의 말씀이 빗나갔음에 안도했다. 까무잡잡 야윈 얼굴로 그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너스레를 떨었다.

"아유~~ 죽었는 줄 알았잖아요. 사람이 왜 그래요?"

"……"

계면쩍게 웃는 그의 표정이 그간의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나중에…. 지금은, 아무하고도 연락하고 싶지 않아요. 나중에 내가 연락할게요."

그는 바쁘다면서 볼일을 보고는 바로 차를 다시 돌렸다. 더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바쁘다니 안심이다. 그에게도 태풍은 예외가 아니었나 보다.

누구의 관심도 지금 그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걸 안다. 내 텃밭의 바라미들이 스스로 일어서듯이 어떻게든 그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일어서고 있는 중일 것이다. 기다려주는 것, 그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

태풍 뒤의 초록이 더욱 진하다.

[이호윤]

태풍 뒤 초록이 더욱 진하듯 그분도 더욱 밝게, 활기 찬 모습으로 돌아오시겠지요.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속으로만 응원해도 그 기운이 선한 영향을 끼칠거라고 저는 믿는답니다. 그런 응원을 저도 전에 받았었고 또 지금도 받고 있다고 짐작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공유,감사합니다~

[강현자]

자연이든 사람이든 고난을 이겨내는 방법이 비슷하다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분도 지금은 초록이 더 진해졌을 겁니다.

[느림보이방주]

이 글은 태풍이라는 자연적 현상을 우리네 살림이나 살아내기에 부는 태풍으로 표현하는 유비구조로 작품성이 돋보입니다.
짧고 쉬운 말로도 얼마든지 살아내기의 힘겨움을 형상화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강현자]

교차구성을 시도해봤는데 행여 독자가 어수선하게 느끼지는 않을는지 걱정입니다.

[조정순]

어찌 이리 간단명료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수 있는지요

[강현자]

고맙습니다. 말로 하라면 더 못 했을 걸요? ㅎㅎ

[민은숙]

정제된 글 잘 보았습니다.

[綠雲 김정옥]

태풍이 지나간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긴박한 상황을 실감나게 표현한 점이 참 좋아요,
역시 우수 작품상 타실 才媛이십니다.

[강현자]

하이쿠 재원이라니요?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