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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
샘실 집을 나서 고개를 넘으면 산위 마을이다. 오록 장터를 거슬러 내성천 다리를 건너면 학교가 보인다. 벌써 6학년으로 우측에서 좌로 해마다 옮기다가 마지막 교실로 들어가는 박성수이다. 1, 2학년 때는 한 교실에서 북적였는데 3, 4학년부턴가 두 반이 됐다.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많다. 앞뒤 반으로 갈라지면서 60명 넘게 오글보글했다.
덩치가 큰가 하면 자그마한 아이들로 들쑥날쑥하다. 나이가 네댓쯤 벌어져도 함께 어울렸다. 걸걸하고 부드러워서 어리둥절한 갓 들어온 전학생들을 잘 다독거려 함께 지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반장이다. 큼직해서 마치 담임선생처럼 설치고 다닌다. 모두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야 했다. 그러다 나뉘어 복도에서 장난치며 얘기하고, 운동장에선 자치기나 범 구멍 넣기, 딱지치기, 줄 넘기를 했다.
마치고 교문을 나서면 기다렸던 동생 순길, 귀여운 여동생 순옥, 주영이가 우 몰려 학교 문을 나선다. 책보에 도시락통이 들어 불룩한 걸 등에 메거나 가슴에 안고서 한 떼거리 길을 메웠다. 장터가 볼만하다. 골짝 골짝에서 장작과 산나물, 버섯, 곡물을 지고 이고 나와 소리치며 어서 팔려는 산골 5일 장날이다.
또 한쪽에는 소와 염소, 개를 파는 시장이다. 강아지가 깜찍하게 귀여워서 만져봤다. 고양이도 팔려는가 품에 안고 있다. 수탉이 머리를 쳐들고 두리번거리며 여기 왜 왔나 지나는 장꾼들을 바라다본다. 돼지는 꿀꿀거리는 말이
“누가 사 가든 먹을 것 많이 주세요.”
찐빵 하나씩 입에 물고 고개를 넘어 두문으로 내려간다. 오록은 빙 둘러 여러 리로 갈려 장터와 소란, 거렁골, 너다리, 불기로 불린다. 두문도 구미와 두룩, 샘실, 판이라 이름한다. 오전도 한배재 아래는 곰직과 밤마, 배골, 생달, 쑥밭, 옻밭, 죽터이다. 이곳 물야면의 고을 이름이 도드라졌다. 문수산 밑은 개단과 무양, 월계, 절단이라 지었다. 만석산과 천석산도 가평과 도사리, 산위, 서리, 아치, 옹기 등 알록달록한 이름들이다.
땡땡 쉴 때 마당에 모여
“야, 송장기야”
부르면
“어, 압동이가”
“재기와 사골은 어딨나.”
하고 마을 이름을 둘러댄다.
같은 마을과 이웃 아이들이 떼를 지어 산윗골을 올라 넘어가노라면 한 무리로 그럴싸하다. 기러기 떼처럼 앞엔 성수가 이끌어 뛰거나 이리저리 비틀비틀 기다랗게 걷는다. 갑자기 골짜기는 아이들 등쌀로 왁자지껄하다. 고개에 이르러 노래를 곱디곱게 부르며 쉬어간다. 봄에는 진달래 가을엔 들국화를 가슴과 머리에 꽂고서 한바탕 돌아친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혼자 어둑어둑해서 고개를 넘어갔다. 가구점 목공소에서 자잘한 나무토막을 겹쳐 이것저것 만들었다. 느닷없이 저물어서 그때야 부랴부랴 나섰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일하게 됐다. 심부름을 잘하고 손재주가 있어 보여 주인이 나오라 해서이다. 몇은 내성과 부석, 영주중학교에 들어가 다니면서 교복에 모자 쓰고 가방 든 게 부러웠지만 어쩔 수 있나.
도회지 상급학교에 다니는 반 아이들은 열에 하나쯤일까 드물다. 빈둥빈둥 나무나 하면서 지냈는데 하릴없던 차에 잘 됐다. 그러잖아도 판자때기를 겹쳐 무엇을 만드는 게 재밌었다. 앞만 보고 나무를 맞춰 공작에만 온 마음을 쏟는다. 농짝과 밥상, 제사상, 찬장, 찻상, 책상, 책장 등 온갖 것을 만드는 가구점이다. 하고 싶었던 일을 배운다. 손수 깎고 대패질로 반듯하게 해내니 이리 잘하나 놀라웠다. 앞이 툭 튀어나온 버스에서 내려 지나는데
“신석아 반갑데이 오랜만이다.”
부르기에 멈칫 돌아보니 성수다.
“오, 박 반장 여긴 웬일이냐.”
벼룻돌 집을 다듬고 있었다. 벼루와 먹, 붓, 물병을 넣는 통이다. 네모 상자에 뚜껑 덮개를 손질하다 말고 지나는 나를 보곤 소리쳤다.
소나무를 갈라 송판과 각목을 덧대어 요리조리 멋지게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갈 때마다 옆에 우두커니 서 있어도 모른 채 일만 해댔다. 너무 바쁘게 손을 움직여서 부르거나 찝쩍대어 건드리면 놀랄까 머뭇거려진다. 손놀림이 남달라서인가 빠르게 늘어만 갔다. 주말에 나들면서 성수 일하는 가구점을 거쳐 갔다. 영주 보름골에서 밥 짓자면 먹을 것과 장작을 자잘하게 갈라 배낭에 가득 넣어가야 한다.
해가 바뀌어서 봉화역에서 만났다.
“반장 어딜 가나.”
“소천 가네.”
졸업할 때까지 반장을 맡아놓고 했으니 그렇게 불렀다. 장터 목공 일을 그만두고 소천 제재소로 옮겼단다. 그곳 잠자리가 불편해 옷가지와 이부자리를 가지러 왔다며 학교는 잘 다니냐 묻는다. 철길 옆 빈터에 커다란 소나무와 참나무를 산더미처럼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여기 사는 사람들이 매달려 껍질을 벗겨낸다. 불붙여 밥 짓기 좋아서이다. 통나무 등걸에 걸터앉아서 치렁치렁 자자하게 얘기를 늘어놓는다.
기차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한참 주고받다가 올라가고 나는 내려가는 차를 탔다. 석탄 실은 긴 화차 끝에 객차 한두 량을 붙였다. 같은 봉화군으로 태백산 아래 강원도와 사이쯤이다. 여기서 타고 몇 정거장 산골로 들어가야 나온다. 태백산에 우거진 소나무와 전나무, 주목을 베어 내린다. 또 울진 산속에는 송진이 많은 귀한 황장목이 나온다. 금강산에서 찾아내 금강송이라고도 불렸다. 양양과 삼척에 드문드문 보이다가 울진 서면 골짝에 모여있는 걸 찾았다.
원목을 울진항으로 옮겨 일본으로 가져가기 힘 들자 이곳에 제재소를 만들어 켜기 시작했다. 이어 영주에서 갈라진 철길을 놓아 이곳의 나무를 부산항으로 갖고 가 다시 배에 옮겨 실었다. 기찻길을 놓을 때 춘양을 지나니 이곳 사람들은 고즈넉한 산골에 철길과 전깃불 들어오는 것이 싫다며 생떼를 부렸다.
닦는 길에 드러누워서 일 못하게 가로막았다. 어찌하겠나 빙 둘러서 굽게 놨다. 마침내 분천과 현동, 철암, 도계, 삼척을 지나 강릉으로 이어졌다. 험한 산골짝을 뚫었다. 발라야 할 철로가 휘어지게 되자 사달 난 곳을 빗대어
“억지 춘양이다.”
란 말이 생겼고 여기서 실려 감으로 춘양목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거기서 자잘한 일을 거들며 심부름하는 성수다. 몇 살 많아선가 다 커서 청년처럼 어른스럽다. 시골은 너나없이 농사꾼이다. 면사무소나 지서, 우편, 술도가가 직장이다. 가끔 산판을 하면 일없는 겨울철에 한다. 나무 베러 일꾼을 찾는다. 트럭 들어가도록 길 닦는 일과 나무 베 아래로 굴러내려 쌓는 일이다.
기슭에서 꼭대기까지 빽빽한 솔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원 없이 미끈하게 자란 그 큰 나무를 넘어뜨린다. 톱질하다 보면 기우뚱 비실비실 ‘찌지직’ 소리 지르며 기울어진다. 와장창 쓰러지는 게 재미있어 일할 만하다. 차 타는 게 좋아 일없을 땐 산판 차를 타고 따라 골짝으로 들어가 본다. 골짝에서부터 머리 깎듯이 싹둑싹둑 자르면서 올라간다.
두 발 정도 굵은 것을 발로 밀면 덩치 큰 것이 그만 주르르 산 아래로 뚤뚤 굴러가는 게 볼만하다. 여럿이 밧줄로 묶어 등허리에 매고 차에 실어주는 일이다. 차 지붕 위까지 높이 올렸다. 일렁일렁 빠져나가는 지엠씨를 쳐다본다. 굼실굼실 뒤뚱뒤뚱 넘어질 듯이 마을 앞을 지나간다. 뒤를 동네 아이들이 막 따라붙는다. 길쭉이 나온 것에 매달리기도 한다. ‘크르릉’거리며 뿜어나오는 푸르스름 휘발유 냄새가 좋다.
큰 일터는 제재소이다.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나무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마침 이모가 그곳 장터에 살아서 몇 번 찾아가 본 적이 있다. 동갑내기 아들과 냇가에 있는 그곳을 올라가 살폈다. 장터 가구점의 작은 톱만 봤는데 어마어마한 큰 둥근 것이 ‘위-잉’ 돌아가는 게 섬뜩해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서 일한다니 대단하게 여겨졌다.
송판과 각목을 옮기기도 하고 톱밥을 퍼담아 쌓는 일들이다. 아무리 큰 나무도 맥없이 잘려 나가는 게 속 시원하다. 그러다 주일날은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린다. 믿음 좋은 정 장로가 데리러 오거나 종탑 앞에서 기다리니, 그러기 전에 알아서 나가게 된다. 여기 일하는 사람은 거의 그런다. ‘그리하리다.’ 말을 했기 때문이다.
오록 골짝에서부터 그랬다. 마을마다 당산나무와 움막을 짓고선 당신을 섬긴다. 산속 깊은 곳 절에 다니는 이가 많은데, 어느 날 예배를 드린다며 떠들썩했다. 학교 옆 언덕바지 과수원에서 찬송이 울려 퍼졌다. 방에 가득하며 마루에도 차고 넘쳤다. 내성에서 타이를 메고선 삼십 리 길을 타박타박 걸어 온 장로이다. 자리가 비좁아 마루 끝에 까치발을 딛고선 하나님을 부르짖었다.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입가엔 거품이 끼였다.
마치고 떨어진 과일을 주워 먹는 게 즐거웠다. 더러는 그렇게 찾아온 것 같다. 이 골짝 저 마을에 예배소를 만들어 전도한다. 그러면서 곳곳 산판에서 실어 온 나무를 제재소에서 재목으로 만들어 목공소로 보낸다. 산주에게 사서 길 닦고 베내어 실어 나르며, 제재해서 파는 일이다. 밑돈이 많이 들어간다. 여러 갈래로 대고 나머지를 하나님 선교에 바쳤다. 얼마나 설쳤는지 정만수 장로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골짝에 나사렛 예수님이 나타났다.
집 짓자면 목재가 비싸 덥석 내키지 않는다. 산에 흔해 빠진 나무를 막 베와 지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송판이 될 때까지 들어가는 게 엄청나다. 장로는 일본이 마음먹고 만든 제재소인데 해방되자 버리고 떠난 것을 쓸고 닦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오래도록 전도하면서 정들었던 곳인데 남겨두고 부산 북항 우암동으로 내려왔다. 나무 베내어 끌어다가 다듬는 그 어려운 일을 그만두고 외국 원목을 사들여 합판으로 만들었다.
하자마자 일이 잘되어나갔다. 봉화 골짝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성수도 따라 내려갔다. 부산항 한쪽 구석에 자리 잡아 하나둘 공장을 넓혀나갔다. 배로 실어 오면 바다에 풀어 소금물에 띄운다. 끌어올려 갈아 만드는데 처음이어서 접착이 잘 안 붙어 애를 먹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있나. 그럭저럭 헤쳐나와 자리 잡아갔다.
가까스로 수출하게 됐다. 온 마음을 다해 만들었다. 똘똘 뭉쳐서 하나같이 일했다. 밤잠도 설치며 쉬는 날도 없이 나와 일했다. 성수는 여기서도 반장이다. 왼팔에 푸른 띠를 두르고 라인을 돌며 잘 만들어지도록 살폈다.
“내일 합판을 실어 미국으로 보낸답니다.”
외치며 그동안 애썼던 것이 잘 돼 감을 알렸다.
가득 실은 커다란 배가
“뿌-웅”
하며
기적소리를 길게 내곤 굼실굼실 뒷걸음질하다가 돌아서 나간다. 모두 일손을 멈추고 부둣가에서 손뼉을 쳤다. 성수 반장과 사무실 직원들은 미리 영도 높은 곳으로 달려가 배 나올 때를 기다렸다. 이윽고 덩치 큰 배가 항구를 빠져나와 물살을 가르며 드넓은 바다로 들어섰다. 달포나 가야 한다니 샌프란시스코가 멀기만 하다.
태평양 가운데를 지나노라면 거센 물결이 출렁인다. 아무리 큰 배라도 나뭇잎처럼 흔들린다니 마음 놓을 수 없어라. 어떻게 만든 합판인데 탈 없이 가기만을 바란다.
“무슨 일이야 부디 없어라.”
“잘 가거라.”
외쳤다.
가물가물 자취 없이 아스라이 사라질 때까지 마냥 손을 흔들며 바라다봤다. 자릴 떠날 줄 모르는 성수와 간부들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공장을 좌우로 지어나가다가 좀 떨어진 다대포에도 바닷가 땅을 구해 크게 지었다. 성진기업은 날로 번창해 나갔다. 몸담았던 곳에서 새로운 일터 다대포 반도목재로 옮긴 성수 반장이다.
성진기업 회장인 정 장로는 배움의 길을 터줬다.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지어 어려운 사람들을 가르쳤다. 부산과 마산, 양산, 울산 산으로 둘러싸였다. 도심 속 낮은 산을 깎아 부산에서 내로라하는 번듯한 외국어대학도 세웠다. 성수가 열심히 일하는 다대포 회사도 일거리가 날로 늘어났다. 직장으로 한 계급 올라 넓은 작업장 여러 라인을 돌 때 마침 지나던 장로를 만났다.
성수의 손을 잡고 흔들며
“박 직장, 수고하네.”
그러곤
“물야는 언제 가는가.”
묻기에
“다음 달 결혼합니다.”
알렸다.
“오 그래, 주례는 내가 서도 될까.”
예식장을 잡아놓고 주례를 찾던 중이었는데 잘 됐다. 오록 과수원 빈집 마루에서 주일 만나 두 손 잡고 기도해 주던 모습이 새롭다. 소천 제재소에서 각목을 메고 끙끙 져 나를 때 어디서 나타나 함께 들어주던 게 떠오른다. 여기서도 공장을 돌다가 나를 찾아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건넨다. 옆 사람들이 놀라며
“어찌 그 높은 분을 아느냐.”
박이호 아버지와 김양자 어머님 양가 부모를 앞자리에 모셨다. 고향 친인척과 회사 직원, 친구들이 한가득 메운 가운데 동갑내기 봉화 상운 처녀 권희숙양과 혼례를 올렸다. 이모 소개로 알게 되었다. 함께 행복하게 살면서 자녀 낳아 건강히 지나길 바라는 주례 말씀을 남겼다. 두둑한 부조금도 안겨주고 나섰다. 이럴 수 있나. 놀라워서 한동안 멍하니 정 장로 떠나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일 끝나고는 다른 라인 직 반장과 다대포 모래사장을 한 바퀴 돈다. 얕은 물에 들어가 드러누워도 본다. 한참을 나가도 깊지 않아 첨벙첨벙 대며 아이들처럼 물장구치고 논다. 오록 앞 시냇가 봇물에서 헤엄치던 솜씨를 보였다. 고개를 들고 손으로 끌어당기며 발등을 버둥버둥 쳐댔다.
“개구리헤엄이구려.”
하며
“자유형과 접영, 배영을 이참에 따라 해 보게나.”
한다.
1,300리 굽이굽이 흘러 내려온 낙동강이 마지막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다. 장마 때마다 모래를 얼마나 내리쏟는지 백사장이 자꾸만 늘어난다. 신혼집도 회사 가까운 곳에 마련했다. 쉬는 날은 아내와 긴 모래사장을 걷고 이어 붙은 몰운대를 올라 저 끝까지 걸어도 본다. 다대포항 성진공장 반도에 일하는 것이 자랑스럽다.
나무로 무얼 만드는 게 취미였는데 그 길로 걸어간다. 16세에 여길 와서 아버지 같은 장로의 도움으로 원목을 가르고 접착 가공하는 일을 했다. 선반과 용접이며 기계 정비와 제작에도 손을 대봤다. 십여 년 온몸을 던져 일했다. 군대도 어디가 안 좋은지 보충병으로 보내졌다. 방위병으로 2천여 시간이나 근무해서 마쳤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서울로 옮겨갔다. 처남 건축사업을 도와주기로 했다. 목공 일을 계속하고 목재회사에 오래 다닌 경험으로 도와달라 해서이다. 현장 감독으로 몇 해 일하다가 시답잖았는지 두고 서울 중앙으로 갔다. 삼호악기 공무부서 전기와 보일러 기계 일을 관리하다가 성업공사 합판공장 복구 작업장을 돌봤다. 해오던 일이어서 손쉬웠다. 이어 삼호목재 사업부서로 옮겨서 열심히 했다.
오나가나 나무를 만지는데 오래 해서 무엇을 맡겨도 척척 해내니 몸에 익어서이다. 집 짓는 나무와 여러 악기를 만드는데 그중에서 피아노에 들어가는 나무를 다듬었다. 집안에 들이는 네모난 작은 것과 넓은데 차리는 둥그스름 큰 것을 깎아댔다. 솔이나 은행나무는 물러서 걸맞지 않다. 단단하고 비틀어지지 않는 야문 것이어야 좋다. 아세안에서 나는 나무들이다. 저 추운 몽골이나 시베리아 것이 되게 딱딱한 것이라 여겼는데 아니다.
뜨거운 열대 지역의 나무를 가져온다. 무더워서 튼튼하지 못할 것이라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인도네시아 산속에 덩치 큰 오래 묵은 키 큰 나무를 고른다. 배로 싣고 와 켜는데 얼마나 탄탄한 지 톱날이 돌아가지 않는다. 못을 박아도 휘어지고 만다. 그것도 여러 나라에서 가져가다 보니 모자라 일찌감치 산을 사서 키워왔다. 그곳에 머물며 심고 가꾸어나갔다.
더운 나라의 나무가 무른가 했는데 웬걸 이리 딱딱하다. 맨날 땀 흘리고 찌들어 헐떡이며 지낸다. 시원한 가을이나 추운 겨울은 이곳에 없다. 낮은 우리나라 한여름이고 밤은 늘 열대야이다. 그 무거움 속에 산을 오르내리며 악기에 쓸 나무를 살핀다. 꽤 크면 잘라내어 말린 뒤 형태를 깎아 세워 보내는 일이다. 산기슭엔 소나무이고 중턱부턴 참나무가 많은데, 여긴 뜨덤뜨덤 소나무는 보여도 잎 지는 나무는 볼 수 없다.
모두 푸른 상록수로 시도 때도 없이 조금씩 떨어졌다간 돋아난다. 비 오는 것도 찔끔거리며 스콜이 지나가면서 퍼붓는다. 장마처럼 많이 오지 않아 산골짝에 물이 흐르는 곳이 드물다. 가는 곳마다 원숭이가 수다스레 버글거리며 먹을 걸 달란다. 던지면 척 받아 달아나면서 가족을 찾아 나눠 먹는다. 이 나무 저 넝쿨 위를 뛰어다니다가 훌쩍 날아 다른 가지에 매달린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데 그런 게 없다. 모두 깜찍하다.
숲속에 들어가려니 되게 어설프다. 무슨 자잘한 낮은 나무와 넝쿨이 뒤엉켜서 영 다니기 버겁다. 그런 가운데도 높이 자란 것이 있는데 밑동이 몇 아름이나 되고 키는 하늘을 찌를 듯 높다랗다. 에보니 흑단이나 마호가니이다. 검은빛의 무겁고 딱딱한 나무로 피아노 몸체를 이루거나 건반 재료로 쓰인다. 또 붉은 갈색은 겉이나 속 부품에 들어간다.
우리나라 산속에 가끔 보이는 박달나무가 있지만 메이플 단풍나무를 끼운다. 쇠줄을 소리 나게 두드리거나 다른 곳에 넣는데, 이곳 흑단 나무를 많이 깎아 쓴다. 심고 키우며 베내어 현지 공장으로 가져간다. 쓸 모습으로 다듬어낸다. 베고 실어 나르는 일이 쉽지 않다. 갔다 꼽으면 되도록 해서 보내니 한결 손쉽다.
“할랄 음식에 돼지고기가 안 보여.”
옆 직원의 말에
“술도 없던데.”
다른 이가 거든다.
모슬렘이 이슬람 율법에 따라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을 할랄이라 이른다. 소고기와 양고기, 닭고기가 나오고 생선과 채소는 거의 다 나온다. 못 오르는 것을 하람이라 말한다. 동남아시아 적도 바로 아래로 일만 칠천 개나 된다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섬으로 이뤄진 나라다. 어마어마하다. 섬마다 사람도 많아 모두 일억이 넘는다니 중국과 인도, 일본과 같이 넘치는 인구다. 천주교인도 있지만 회교도가 많은 나라다.
“뜸 들인 밥에 김치를 곁들이면 잘 넘어간다.”
는 성수 말에
“된장찌개만 있어도 그만이다.”
옆 사람의 대답이다. 늘 먹던 길들은 입맛이 그리워서이다.
여기 보내진 수백 명 직원 중 마음 맞는 친구들과 낚시도 다닌다. 쉬는 날은 챙겨서 바다로 가 던진다. 자카르타에 내려 한두 시간 걸리는 곳이다. 적도 아래여서 찜통인가 했는데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부니 견딜만하다. 다랑어와 방어, 삼치, 상어 같은 큰 고기가 잡힐까 했는데 아니 잔챙이가 물려 올라온다. 언어에 밝은 이는 이곳 말을 익혀 가무잡잡한 사람들과 짧은 말도 한다. 가게나 길을 갈 때 묻는 게 남다르다. 배우려 해도 도시 입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것도 타고난 재주인가 보다. 그래도 자녀들은 잘하니
“누굴 닮았을까.”
아들 양춘이 다닌 미국 학교에 둘째 상춘이도 들어갔다. 딸 현옥이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학업을 이어간다는 기쁜 소식이다. 외국어가 쉽나. 배워 말하기까지 얼마나 숱한 노력을 들여야 하는지 모른다. 영어와 일본어를 그리 잘한다니 놀라운 내 새끼들이다. 한국 유학생 여자를 친구로 사귀고 딸은 따르는 일본 남자가 있단다.
몇 해 지나니 집이 그립고 가족이 눈에 삼삼하다. 사흘이 멀다고 전화하지만 부대끼는 것만 못하다. 그럴 때는 술을 마신다. 고향 갔다 올 때 누룩을 가져와 된밥에 넣어 물 붓고 삭혀 만들어 넘긴다. 맛이 뛰어난 게 날씨 탓인지 빨리 새콤달콤 익어서이다. 이곳에 보내진 직원이 많아서 그런대로 어울려 지낸다.
“가겠다 해서 왔지만, 우리 언제까지 있을까.”
고된가 벌목 반장의 말이다.
“편한데, 가긴 어딜 가.”
성수 직장이 어깃장을 놓는다.
여러 수당이 붙어 월급이 서울보다 낫다. 자고 먹는 거며, 입는 옷까지 그냥 지낸다. 가고 오는 비행기도 지원한다. 아무리 좋아도 집과 떨어진 게 이리 힘들 줄 몰랐다. 새끼들이 눈에 밟혀 참을 수 없다. 막 뛰어와 가슴에 안기던 지난날 어린 것들의 재롱이 얼마나 살가운가 어른거려온다. 외롭게 지내봐야 안다.
미국 워싱턴 맏이 집이다. 어영부영 느닷없이 흘러간 세월이다. 트럭을 몰며 화물을 나르는 양춘이다. 손주들의 귀여움이 날 새고 지는 줄 모르게 한다. 아내 희숙은 교회 권사로 이곳 교민들과 어울려 봉사활동을 펴고 다닌다. 나가면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지내다 조금씩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무슨 말을 하는지 통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귀에 들어와 익어간다. 그러니 한인 교회에 나가 어울려 다니면 구경도 하고 자꾸 듣다 보니 따라 하게 된다.
푹푹 쪄대는 섬나라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일하는데 아들 내외가 손주 보러 오란다. 휴가를 내어 열 몇 시간을 날아 찾아왔다. 수십 년 열심히 일한 인도네시아 더위로 찌들은 피로도 풀 겸 떠나왔다. 미국 수도이니 그런대로 사는 줄 알았다. 변두리 외진 곳 삼간집이다. 꼬박꼬박 보낸 월급으로 유학을 마치고 그곳 짝을 만났다. 형제는 미국에 머물고 딸은 일본 사람과 살림을 차렸다.
한번 화물을 싣고 나가면 며칠씩 걸린단다. 어떨 땐 보름 넘게 다니다 온다. 동서와 남북이 멀어서이다. 가끔 캐나다를 지나 북쪽 알래스카를 갔다 오면 그리 여러 날 걸리는가 보다. 거기뿐만 아니라 남쪽 멕시코를 지나 아르헨티나와 칠레 그 먼 곳도 다닌다. 그러면 달포 걸릴 때도 있는데 먹고 자는 걸 어찌할까. 젊으니까 잘 해내는 것 같다. 돈 버는 일이 거칠고 힘들지만 한 편으론 즐겁기도 하다. 멀수록 떼돈이 생긴다.
가다가 눈꺼풀이 쓸려 내리면 주유소나 쉼터, 갈라지는 길 가 숲 그늘에 대고 눈을 붙인다. 뒷좌석이 잠자리다. 그렇게 공간을 만들어놨다. 거긴 냄비와 버너도 있고 먹거리가 냉장고에 들앉았다. 때 되어 배고프면 우르르 끊인다. 여럿이 모이면 함께 지껄이고 체스도 하며 밤을 보낸다. 그런 쏠쏠한 재미에 힘이 난다.
가도 가도 끝없는 휑한 곧은 길이 질리게 한다. 흥얼흥얼 노래도 하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자는가 싶어 며느리의 전화를 수시로 받는다.
“어디쯤이오.”
“시카고를 막 지났어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 저녁은”
“그래 양념 갈비를 맛있게 들었다.”
맏이 사는 걸 도와줘야겠다는 맘이 들어 그만 눌러앉기로 했다. 저리 멀리 나다니는 걸 보고 어찌 발걸음이 떨어지겠나. 스멀스멀 졸려 맞부딪칠 듯하고 낭떠러지를 비켜 가는 게 걸려서 두고 떠날 수 없다. 진흙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잠자는 사이 도둑을 만날 수 있다. 실은 물건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그런 낭패가 어딨나. 혼자 다니다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다른 차가 중앙선을 넘어오면 이 일을 어쩌나.
그때 가족이 있어야 도와줄 수 있다. 이점 저점 있어야겠다고 굳혔다. 아이들을 두고 며느리가 어디로 달려가겠나. 가는 길이나 알겠나. 차를 몰 줄 아니 내가 도움이 될 것이다. ‘다니러 오세요.’ 한 게 그냥 한 소리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사업을 하고 싶었던 게다. 친구가 몰다가 다른 일을 하면서 가져가란다. 몇 대를 갖고 운수업을 하려면 배차를 잘해야 한다. 화물 주문받는 홍보와 운전자 관리며 회계가 필요하다. 사고가 났을 때 긴급 처리하는 수완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 어머니 도움이 있어야겠기에
“다녀가세요.”
“오세요.”
911을 쳤다.
다른 일하던 둘째 상춘이도 형 화물 운수에 함께 하기로 했다. 가족회사가 발족했다. 지긋한 아버지가 기사와 거래처를 관리하니 한결 수월하다. 언행이 곧이곧대로여서 믿음이 뚝뚝 떨어지는 아버지 사장이다. 말씀이 믿을 수 있어서 따르게 된다. 바르게 살아가는 곧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아버지다. 그래도 교포들의 물품을 나르는 일이어서 쉬운 편이다. 옆에선 양춘이 상담하거나 전화를 받으며 가까이 맴돌았다. 오래 비울 수 없어 가까운 곳은 동생 상춘이 나르고 먼 곳은 다른 운전자들을 시켰다.
그러다가 차량 수가 자꾸 늘어나면서 사무실을 넓혀나가야 했다. 아버지와 아들 형제가 바삐 움직였다. 며느리도 나와 회계를 도왔다. 아내 권희숙 권사는 학교에 가고 오는 아이들을 토닥거리면서 집안을 보살폈다. 목공으로 살아왔는데, 이제 세상을 내려다보는 우두머리 미국 수도에서 운송업을 벌였다.
짭짤하게 수입이 괜찮았다. 사무실과 넓은 주차장 임대료를 내고 임금과 세금, 협회 분담금 납부며 차량 유류와 부품교체, 고장 수리, 교통 범칙금 등 비용을 다 대고도 남았다. 사장과 두 아들, 며느리 급료를 주고 아내 잡비까지 안겼다. 쪼들림 없이 괜찮게 지날 수 있으니 더 바랄 게 없다.
급하게 나갈 돈이 생길 수 있어 은행에 다달이 얼마씩 부어 쌓아둔다. 이 모든 걸 사장인 아버지 성수가 하나하나 챙겨나갔다. 사장 말이면 아들과 며느리는 왕명으로 떠받들 듯 모신다. 그러니 기사들과 다른 직원도 따라서 고분고분해질 수밖에 없다. 일없을 땐 마음 편히 쉴 수 있도록 사무실 옆에다 당구와 탁구대를 놓았다. 또 다른 방에도 바둑, 장기 등 오락 시설을 갖춰놓고 기다린다.
그도 저도 싫으면 역사와 경제, 정치, 문학책을 비치했다. 시와 수필, 소설집을 쌓아서 독서를 하게 차려 뒀다. 눈치 보지 않아도 되게끔 누워서 멍하게 있거나 잠들 수 있도록 욕실과 폭신한 침대도 마련했다. 때 되면 식당에서 먹음새 따라 가려서 들 수 있도록 음식을 장만해 뒀다. 운송비 입금이 잘 되니 아쉬울 게 없어라.
“뭐든 해 주고 싶다.”
아버지 박 사장의 명령이다.
“남기려 애쓰지 말라.”
이만한 게 어디냐며 가족들에게 당부한다.
기사들도 무턱대고 빨리 갔다가 오려 과속하지 않는다. 쉴 때 음주로 운전대를 잡는 일 없이 정성을 기울이는 것 같다. 밤잠을 설치지 않고 편하게 자 둬서 졸리거나 피곤이 없도록 애쓴다는 말을 듣기 좋게 한다. 빈말이 아니기를 바란다.
“철아, 청소 좀 해라.”
둘이 하던 사무실 여자 미화원 외에 남자 몇을 뒀다. 마당 둘레 화단 정리와 청소 일을 시켰는데 알뜰히도 잘 해냈다. 무거운 것을 움직이거나 옮길 때는 남자가 좋았다. 그러다가 들어온 차량에 센 바람을 불어넣는다. 운전석과 뒤 적재함의 쓰레기와 먼지를 싹쓸이 날려버렸다. 소방수로 불 끄듯 물을 뿌려 소낙비 맞듯 씻어내고 닦는다.
차 안을 깨끗이 닦아냈다. 보닛을 열어서 엔진도 훔치고 나사를 조여준다. 윤활유도 치고 창 닦이 물을 보충하며 엔진과 브레이크 기름도 탁하면 빼고 새것으로 갈아 넣는다. 바퀴를 발로 툭툭 차서 어디 이상한 데가 있나 살핀다. 커브를 급히 돌다 보면 바퀴가 빠져 뒹굴뒹굴 벗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 때가 있다.
바람이 빠진 데는 이내 넣어 불룩하게 채운다. 여러 등불이 말 잘 듣는지 켰다 껐다 해 본다. 눈이 하나 빠져도 모르고 다닐 때가 있어서이다. 몰다 며칠이고 내버려 뒀다가 지저분한 차를 몰고 나가면 아무렇게 다루려는 마음이 생긴다. 말끔하면 상긋한 차에 마음이 쏠려 사랑하는 맘으로 느긋이 달리게 된다.
그럭저럭 또 수십 년이 느닷없이 흘러갔다. 어기여차 하는 사이에 팔순이 되고 말았다. 이제 아들들에게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눈과 귀가 침침하고 어두워져 그만둘 때가 됐다. 거기다 기억도 흐려져 금방 들은 말을 잊어버려서
“시방 뭔 말을 했더라.”
어정쩡할 때가 있다.
샘실 박이호와 김양자 부모 묘소 옆으로 가야 하는데 다른 데로 갔다. 잊지 못할 곳은 정만수 회장의 성진기업에 오래 몸담았던 자회사 반도목재가 있는 다대포를 찾았다. 언덕 위의 아파트를 얻어들었다. 내려가면서 보고 오르면서 뒤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직장을 맡아 여러 라인을 돌보던 그 시절이 두고두고 되살아나서이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오자마자 코로나로 엉망진창을 겪는다. 걸리면 죽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댄다. 정말 그런가 싶어 한동안 기죽어 지냈다. 나가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온 세상이 그리 야단법석을 떠니 어쩌겠나. 교회도 못 가게 해서 대여섯 달이나 꼼짝없이 들앉아 있었다. 모기 잡으러 칼 빼고 빈대 잡으려 초가집 지질까 조바심으로 보낸다.
지금은 뜯겨 흔적이 없다. 공원으로 바뀌었는지 놀이터가 여럿 보인다. 이리저리 쫓아다니면서 또래 아내와 아들딸을 어찌 키웠는지 정신없이 살아왔다. 이제 다 커 제 갈 길로 갔으니 편히 쉬면서 못다 한 얘기를 오순도순 나누련다.
“여보, 부산과 서울, 워싱턴 좋다는 곳은 다 살아봤네.”
남편 말에
“아들딸이 다 잘 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아내의 말이다.
다대포해수욕장 백사장을 자박자박 밟으며 지난날 젊었을 때 걷던 그 시절을 떠올렸다. 그땐 모래가 넓지 않았는데 지금은 저 멀리 나갔다. 백사장이 자꾸만 바다 쪽으로 뻗어나가 도로에서 한참 들어가야 찰랑찰랑 바닷물이다. 지난날 해수욕장이던 자리에 분수대를 차렸다.
치솟아 오르는 물줄기와 춤추는 듯 휘어지는 물보라가 장관이다. 기다랗게 모래언덕을 쌓아 올려 소나무 숲을 이루었는데 풍덩거리다 나와 쉴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어쩜 이리 좋을까 그저 그만이다. 드러누우면 솔솔 잠에 까무러지는 한낮이다. 파라솔은 저리 가란다. 물결이 쪼르르 밀려올 때 낙동강 강바람까지 불어온다.
안쪽으론 민물을 끌어들여 흐르도록 했다. 굵은 바윗돌을 평평하게 깔아둬 가다 오다 앉을 수 있다. 바닷물에 들어가도 얕아서 아이들 놀기에 걸맞다.
“여보 이게 뭐요.”
아내 말에
“백합이오.”
성수 부부는 손잡고 물결이 휩쓸려 오르고 내리는 가장자리 모래를 자박자박 밟아서 낙동강 쪽으로 거슬러 거닐었다. 손바닥 크기의 백합을 주섬주섬 주워서 두 손에 쥐었다. 모래찜질도 하며 즐거운 한낮을 보낸다. 모래를 파내 아낼 드러눕게 한 다음 다리에서 가슴 목덜미까지 덮었다. 얼굴만 내밀었다. 나도 벌거벗은 뒤 그렇게 누워 뜨거운 모래를 덮어썼다.
서로 얼굴을 보면 깔깔 웃었다. 어떨 땐 몰운대 숲속을 다니며 바닷바람을 쐰다.
“저 섬이 뭐요.”
아내는 궁금한 게 많다.
“저 위의 것은 맹금머리요.”
큰물이 질 때가 있다. 위쪽에서 많은 비가 내려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강가 숲속의 뱀과 개구리, 쥐들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둥둥 떠내려가다가 이곳 섬에 닿게 된다. 갈대숲에 걸려 지나는데 뱀은 먹을 게 많다. 개구리와 쥐를 잡을 수 있다. 그러다 물이 차올라오면 갈대를 타고 기어오른다.
뱀도 여러 개를 감아 머리를 위로 한 채 물이 빠지기를 기다린다. 그때 아미산 솔개가 나타나 곤두박질해 내리꽂힌다. 쥐와 개구리도 낚아채어 하늘로 오른다. 모처럼 풍성한 식탁이다. 그 아래는 백합등으로 조개가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마지막은 도요등이다.
“등이 뭐예요.”
등은 잠겼다 나타났다 하는 섬을 이른다.
시베리아 바이칼이나 몽골 흡수굴, 러시아 동쪽 여러 곳에서 찾아와 여기 한때 머물렀다 남쪽으로 날아가는 철새다. 하와이를 지나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갔다 온다. 봄에 나타나 모래사장을 긴 다리로 빠르게 다니면서 가재를 물어선 흔들어 집게다리를 떼고 먹는다. 태평양을 건너오느라 몸이 반으로 홀쭉 줄어든 고달픈 새다. 태어나고 자란 북쪽을 찾아가는데 잠깐 들리는 곳이어서 그리 붙여졌다. 고니와 청둥오리도 늦가을에서 겨울을 지나 이른 봄까지 있다가 올라간다.
그들은 작은 머리에 내비게이션이 있는가 보다. 어찌 그 먼 곳을 날아 고만고만한 곳을 용케도 찾아 내려앉는다.
“저길 들어가고 싶어라.”
지난날은 멸치를 잡느라 마구 헤매고 다녔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아파트 앞 아미산전망대에 가서 보여주리다.”
멀리 갈 것 없다. 이곳을 두루 다니는 것만 해도 어딘가. 먹거리도 가지가지여서 골라 먹을 수 있다.
“우리 출출한데 조개 칼국수를 할까.”
따뜻한 국물을 마시며 한 올 넣으려는데 전화가 ‘따르릉’ 울렸다. 받으니 딸 현옥이다. 김해공항에 내려서 다대포로 가는 중이란다. 일본 동경에 살면서 자주 찾아온다. 아버지 심장 약을 지어오곤 한다. 언제부턴가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다. 숨 차는 게 나이 들어서 그런가 했는데 심근경색이란다.
목재 일할 때 무거운 나무를 들어 올리고 메어 나르느라 허리도 시큰거린다. 여기저기 탈이 나니 멀리 있는 아들 대신 아버지 어머니를 잘 보살핀다. 어떨 땐 보름이나 있다 간다. 직장을 다니는데 여기서도 노트북으로 재택 업무를 본다나.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을 드나들다가 요즘은 한 주가 멀다고 오란다.
여러 곳이 나쁜가 보다. 향우회와 직장 모임도 모두 그만뒀다. 집에 들앉아서 누워 지낸다. 구십이 내일 모래니 오래 살았다. 예전엔 육십을 넘기기 어려워 회갑 진갑잔치를 온 동네 떠들썩하게 치렀다.
“저기 세 섬을 가 봅시다.”
성수의 말이다.
아내와 같이 집 앞 아미산전망대에 어기적어기적 나왔다. 차를 마시며 동 낙동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내려다본다.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찝찔한 어름에 갈대숲으로 덮인 섬을 살핀다. 다대포 뒷산 아미산 중턱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 여긴 처음이다. 언제 생겼는지 이런 데도 있었나. 한눈에 훤히 다 뵌다. 정말 독수리가 날고 백합이 나와 뒹굴까. 도요새가 먹이를 낚아채는 게 어련히 보이는 듯하다.
아내 희숙은 남편의 고르지 못한 심장 박동이 늘 걱정이다. 더없이 아름다운 다대포 낙동강을 얼마나 함께 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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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수고하셨습니다
첫 줄부터 재미 있을 거라는 느낌이 꽉 옵니다
찬찬히 감상 읽어보겠습니다
대단하십니다 늘 건강하시고 많이 많이 남기세요
가을 날씨가 궂습니다
날 들면 감 밭에 다녀가세요
병석에 누워있는 친구를 얘기했습니다.
86세로 바깥 출입이 어렵습니다.
곧 찾아 가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