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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이라는 말은 "힘께 가자.' 또는 '더불어 잘 살자'라는 뜻이다. 국회와 같은 이념적 대립이 많은 곳에서 자주 사용하는, "대승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합시다.'라는 말은 서로 적대시하지 말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호 협조하여 원만하게 일을 해결해 나가자라는 의미이다. 대승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수용하여 함께 세상을 잘 살아가자는 공산주의 이론 같은 것이다. 소승은 이와 반대로 '너 혼자 가냐?' 또는 '너 혼자 잘 사냐?'라는 뜻이다. 자신의 일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고, 자신이 노력한 만큼 자신이 받으며 혼자 즐긴다는 개인주의 또는 자본주의 이론 같은 것이다.
대승불교는 함께 깨달음으로 나아가자는 운동이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수행하고 함께 깨달음을 얻어 함께 붓다가 되자는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가 최고의 목표이다.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보조를 맞추어야 하므로 혼자 수행하면 안 된다. 자신도 공부하고 타인도 이끌어주어야 한다.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한다. 이것은 스포츠에서 축구와 같은 구기종목처럼 혼자 잘 한다고 점수를 내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해서 소승불교는 혼자 머리깎고 출가해서 혼자 수행하여 혼자 깨달음을 얻어 윤회에서 해탈한다. 깨달음은 남이 같이 해줄 수 없는 오직 혼자만의 승부이다. 스포츠에서 오직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육상경기나 골프 같은 개인 종목처럼 기록이 중요하다. 깨달음은 신기록을 세우는 것이다. 물론 국제 신기록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개인으로써는 미지의 세계에 도달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따라서 개인은 오직 자신의 기록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오직 자신의 마음을 잘 조절해서 평상심을 잃지 않고 냉정해야 좋은 기록을 낼 수 있다.
공산주의는 매우 이상적이고 환상적인 이론이다.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함께 잘 살기 위해서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혼자 잘 살려고 하는 소승적인 사고를 가진 부르조아를 제거해야 한다. 그들이 부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공산주의가 실패했을까? 현실을 외면해서 이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외면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인간은 탐욕적인 동물이다. 자신의 것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공산주의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 노력의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적당히 일을 하지 열심히 하지 않는다. 발전의 원동력을 상실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원래 탐욕적이라는 현실을 인정한다. 자신이 일한 만큼 자신의 것이 된다. 물론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이라서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지는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욕망을 인정함으로써 문명은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다 함께 불국토를 만들어서 함께 공부하고 함께 깨달아서 함께 해탈하자는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매우 이상적이고 환상적인 불국토 이론은 극락세계를 만들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을 무시한 이론이다. 깨달음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남이 해줄 수 없는 것이다. 남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이론은 유일신교의 이론이다. 나의 번뇌를 남이 제거해 줄 수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고상하고 아름다운 이론이지만 현실을 무시해서 실패했듯이, 대승불교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이론도 실패한 이론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아주 이기적이고 냉정한 이론이지만 시스템을 보안해가면서 계속 성장하고 있듯이 소승불교도 어찌보면 냉정해보이고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깨달음은 남이 해줄 수 없는 순전히 개인적인 일이라는 현실을 인정한다. 자신이 먼저 깨달아야만 남을 깨닫게 해 줄 수 있으며, 자신이 강을 건너봐야만 남을 건너게 해 줄 수 있다는 인정하며, 이것이 바른 길이라고 천명하는 것이다.
공상주의와 자본주의 이론은 세속의 일이다. 반대로 불교는 정신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세속의 잣대를 정신세계에 대입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다같이 욕망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를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함으로써 실패했지만, 대승불교는 반대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함으로써 실패했다. 모든 대중들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욕망을 제거하라고 하면 중생들은 불교에 등을 돌린다. 그래서 욕망을 그대로 두고도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된 것이다. 사람들은 머리깎고 출가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함께 세속에 살면서 욕망을 누리면서 해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렇게 대승불교는 욕망을 인정함으써 대중들을 포섭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이 화엄경에서 주장하는 이사무애(진리의 세계와 세속의 세계는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다.)이다. 그런데 세속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가? 그릇된 견해는 엉뚱한 결과를 낳는 법이다. 물론 세속에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세속에 살면서도 욕망을 점점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수행을 해야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욕망을 그대로 놔두고 세속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욕망을 즐기면서 함께 살다가 함께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이론은 결국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일 뿐이다. 세속에서 욕망 속에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아미타불을 지극정성으로 부르면 바로 극락세계에 태어난다. 그 극락세계는 또한 온갖 욕망을 충족시키는 즐길거리로 가득 차 있다. 그곳에서 즐기고 행복하게 살다가 바로 해탈한다. 이런 이론은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욕망이 있는 자는 극락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극락세계가 있다면 그곳은 욕망이 사라지고 고요와 평온이 유지되는 깨달은 성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을 곳이다.
대승불교는 대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교리를 수정하면서 그 포용력을 넓혀갔다. 계율을 완화하고, 의지의 대상들을 창조하고, 붓다께서 아주 싫어하셨던 기복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상생과 화합, 원융무애를 주장한다. 기복신앙을 받아들인다는 자체가 욕망을 부추기는 행위이다. 욕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욕망의 소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교리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욕망이 크면 깨달음도 크다고 교리를 수정한다(번뇌즉보리). 밀교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욕망을 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용하는 방법까지 등장한다. 남녀의 합일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극단적인 이론까지 등장한 것이다. 대승불교는 포용성이 문제다. 포용의 한계를 넘어서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깨달아도 윤회는 계속된다는 상주론(생사즉 열반)도 그 중 하나이다.
반대로 소승불교는 욕망을 부정한다. 욕망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욕망과 깨달음은 정반대의 길이다. 깨달음으로 나아갈수록 욕망이 점점 줄어든다. 서로 반비례한다. 함께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첫 번째 깨달음은 욕망을 일으키는 주체가 나 자신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유신견이 타파되는 순간이다. 이것이 수다원이다. 두 번째 깨달음은 욕망이 1/2로 줄어들게 한다. 이것이 사다함이다. 세 번째 깨달음은 감각적 욕망이 완전히 소멸되게 한다. 이것이 아나함이다. 네 번째 깨달음은 나머지 미세한 욕망이 완전히 소멸되어 해탈을 성취하게 한다. 이것이 아라한이다. 욕망이 줄어드는 정도에 따라 깨달음의 경지가 올라간다. 욕망이 소멸되는 정도에 따라 해탈이 가까워진다. 즉 욕망의 소멸이 깨달음의 기준이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아주 타당하다. 내가 붙잡고 있는 정도에 따라 욕망의 정도가 강한 것이고, 내가 놓아버리는 정도에 따라 자유의 넓이가 늘어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자유라는 것의 불교적 용어가 해탈이다. 욕망을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해탈을 성취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소승불교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 중에 5가지 장애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의심이다. 감각적 욕망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장애물이다. 감각적 욕망이 크면 번뇌가 크고, 번뇌가 크면 그만큼 마음이 번잡하다.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아야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볼 수 있건만, 마음이 욕망으로 들끓고 있다면 진실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감각적 욕망은 고요와 평온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일어난 고요와 평온이 유지되지 못하게 함으로 장애가 된다.
감각적 욕망은 아나함과에서 제거된다. 그러므로 욕망을 계속 누리면서 깨달음을 길로 가려고 하는 사람은 수다원이나 사다함까지를 목표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욕망의 소멸이라는 지향성을 가지고 수행해야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지, 욕망을 그대로 놔두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소승은 욕망의 소멸이 지상명제이다. 욕망을 일으키는 원인자의 소멸이 최고의 목표이다. 그 원인자는 에고, 자아관념, 유신견, 아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욕망은 그대로 놔두고 원인자만 제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승에서는 에고가 일어나게 하는 모든 것이 금지된다. 물론 이 금지계목은 출가자에만 해당하지만, 그것을 살펴봄으로써 에고(자아관념)가 일어나는 것을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지 마라. 오후에 음식을 먹지 마라. 옷은 한 벌(웃 가사, 아랫 가사, 대 가사)만 소유하라.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마라. 춤추고 노래부르는 것을 보거나 듣지도 마라. 돈을 소유하지 마라(재가자에게는 금은보석으로 몸을 치장하지 마라.) 어떤 돈 버는 행위도 하지 마라, 즉 심부름을 해준다거나, 운명을 봐준다거나(점, 사주, 관상), 선물을 함으로써 신도들의 환심을 하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일체의 행위가 금지된다. 승가는 돈을 버는 일체의 비즈니스를 할 수 없다. 하지만 대승불교에는 어떤가? 절 살림을 위해서 온갖 행사를 만들어 돈을 벌고 있다. 사실 종교가 비즈니스를 하면 그 종교는 생명을 다한 것이다. 종교는 순수해야 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타종교에서는 남이 구원을 해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손잡고 위로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함께 고통을 겪으며 고통의 소용돌이에서 헤매는 것이다. 내 몸의 때는 남이 대신 밀어줄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의 때는 아무리 위대한 스승 붓다라고 해도 대신 제거해 줄 수 없다.
때는 몸에 낀 때만을 말하지 않네.
때는 탐욕의 다른 이름
탐욕이 없는 청정한 나의 교단에서
비구들은 탐욕이라는 마음의 때를 제거하며 살아가네.
때는 몸에 낀 때만을 말하지 않네.
때는 분노의 다른 이름
분노가 없는 청정한 나의 교단에서
비구들은 분노라는 마음의 때를 제거하며 살아가네.
때는 몸에 낀 때만을 말하지 않네.
때는 어리석음의 다른 이름
어리석음이 없는 청정한 나의 교단에서
비구들은 어리석음이라는 마음의 때를 제거하며 살아가네.(법구경이야기 게송25번)
첫댓글 다음은 대승볼교와 소승불교가 현재 어떻게 다른지 미얀마불교와 한국불교를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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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 사두! 사두!
사두 사두 사두
배워짐에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