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양동수 사람을 죽이고 1심 2심 사형
-사형수 양동수씨의 어머니 김장순의 애절한 사연
-대구교도소 인근에 골방을 얻어 3년간 불공
-양동수 팔순 노모 김장순은 아들이 교수형에 처하면 자결 결심
-팔순노모 김장순의 간절한 불공으로 양동수 무기로 감형.
박삼중 스님(1942.9.25.-)
1942년 9월 25일(음력 8월 15일), 일제강점기 조선의 경성부에서 태어나 1950년대 후반 10대의 어린 나이에 해인사에 출가했다. 이후 불국사 등 여러 절을 거쳐 1961년 전남 구례 화엄사 주지, 1967년 경북 달성군 용연사 주지를 역임했다. 이후 부산에서 자비사 주지를 오랫동안 맡았으며 1967년부터 2007년까지 약 40여년간을 교도소 교화 활동에 힘썼다. 특히 사형수들을 구제하고 교화하는데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조성애 쟌 마르코 수녀, 개신교의 문장식 목사와 앞장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 2020년 11월 12일 방송분에서 인터뷰 대상으로 출연, 여태까지 만난 사형수 중 서진 룸살롱 집단 살인 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고금석의 죽음이 가장 안타까웠다고 회고하면서 그가 남긴 염주를 지금도 오른손에 차고 다닌다고 밝혔다.
모친의 지극정성이 극진했던 사형수 양동수의 감형을 탄원하여 결국 무기수로 감형하고 가석방으로 출소하게끔 하였다. 이때 아들의 감형을 위해 매일 면회를 온 모친의 지극정성 일화는 상당히 유명하며, 법무부장관과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까지 돌렸다고 한다. 삼중스님도 그 정성에 감동했다고. 한편 양동수는 출소 후 불교에 귀의하여 법사가 되었다.
---나무위키---
사형수 아들 살린 지극한 ‘母情佛心’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그래서 그 모정이라는 것은 종종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 나의 어머니가 그랬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그렇다. 이번에 이야기하고 싶은 인연의 주인공은 바로 ‘어머니’다. 1977년 사형수가 되었던 양동수의 노모 김장순 씨다.
1975년 12월 24일, 양동수(당시 26세) 씨는 크리스마스로 들뜬 기분에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취기가 오른 그는 변심한 여자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찾아간 여자 친구는 없고, 가정부가 자고 있었다. 양 씨는 순간적인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가정부를 추행하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소식을 접한 양 씨의 노모 김장순 씨는 기가 막혔다.
아들 죄 자신의 죄로 받아들인 모정 진심과 정성이 상상못한 기적 만들어
법무장관, 대통령까지 마음 움직여
사형수에서 감형, 가석방으로 출소
1심 사형, 2심 사형, 대법원 상고 기각으로 1977년 2월 양 씨의 사형이 확정됐다. 김장순 씨의 길고도 눈물겨운 모정의 여정은 시작됐다. 청천벽력이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것이 자식 아닌가. 그런 아들이 그 끔찍한 죄를 저지르고 사형수가 된 것이다. 김장순 씨는 자식이 지은 죄와 그로 인한 희생자와 유족들의 아픔, 두 가지를 모두 떠안고 함께 겪기로 결심했다.
김장순 씨는 대구로 이감된 아들을 따라 진주서 대구로 이사했다. 그는 교도소 옆에 한 평 반, 월세 5천 원짜리 방을 얻었다. 아들을 매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들의 죄가 바로 자신의 죄라고 생각한 김장순 씨는 아들을 매일 면회하면서 아들과 함께 옥살이를 한 것이다. 독실한 불자인 김장순 씨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 3시에 일어나 인근에 있는 화장사를 찾아 예불을 올렸다.
“못난 어미가 먼저 눈 감을 때까지 제 아들의 목숨만은 꼭 지켜주십시오”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예불을 마친 김장순 씨는 어김없이 아들을 만나기 위해 교도소로 달려갔다. 아직 살아있는 아들을 만나면 그는 그제야 작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렇게 김장순 씨는 3년을 살았다. 김장순 씨는 자신도 공범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병이 나도 약조차 먹지 않았다. 그리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들의 사형이 집행되면 내 손으로 화장할 겁니다. 꿀을 섞어 산에다 뿌릴 겁니다. 아들의 마지막 시신을 산짐승들에게라도 주어야 그나마 저와 제 아들의 죄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그로부터 그 말을 들은 박삼중스님은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교화활동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그때처럼 가슴이 먹먹한 적은 또 없었다. 내가 양 씨의 어머니를 알 게 된 것은 다른 사형수였던 방 씨 때문이었다. 나는 양 씨를 교화하기 전에 같은 사형수인 방 씨를 교화하고 있었다. 방 씨는 나에게 “저는 죽음으로 죄 값을 치르고 싶습니다. 제가 더 큰 죄를 지었으니, 저 보다는 양 씨를 위해 노력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양 씨의 어머니를 알 게 된 것이다. 김장순 씨의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과 또 피해자를 생각하는 마음을 하루하루 보면서 내 마음 역시 견딜 수가 없었다. 양 씨의 죄를 어쩔 수는 없지만 한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이라도 알려 그의 말대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형 집행을 미룰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는 서명운동을 벌였고, 1만여 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들고 법무장관을 찾았다. 당시 이선중 장관은 처음엔 당치 않는 소리라고 외면했지만 양 씨 어머니의 눈물겨운 사연을 들려주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모두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그들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장관의 마음이 움직이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이 눈물겨운 사연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8년 12월 27일, 양 씨는 무기수로 감형된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다 형언 할 수 없다. 양 씨의 노모가 만세를 부르며 얼싸안고 울던 모습은 지금도 진한 감동으로 어제 일 같이 생생하다. 출가자의 몸이기 이전에 사바의 같은 중생으로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아들을 구사일생으로 살려낸 노모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아들의 죄 값을 함께 치르겠다던 그였다. 그래서였을까. 김장순 씨는 얼마 후 백내장에 걸려 앞을 보지 못하게 됐다. 여러 해 병마와 싸우던 양 씨의 어머니 김장순 씨는 결국 1992년 고단한 생을 마감했다.
1996년, 양 씨는 사형수로 확정된 지 21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리고 출소와는 상관없이 늘 죄인으로 속죄하면서 살겠다고 했다. 결국 김장순 씨는 아들의 석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양 씨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교도소 안에서 법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양 씨는 출소 후 법사로 살면서 어려운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등 많은 이타행으로 속죄하는 삶을 살고 있다. 비록 한 순간의 어긋남으로 여러 사람이 슬픔에 들었지만, 또한 한 사람의 헌신으로 인해 삶의 소중함이 더욱 고결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법은 매 순간 우리 곁에 있었다.
정리=박재완 기자
박삼중 스님 감동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모든 생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속성, 생명이 아닐까.
죄가 있든 없든 생명 그 자체는 소 중하다. 하지만 한 순간의 잘못으로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고 자신마저 위험에 빠트린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사형수’라 부른다. 이들을 위해 40년간 전국 교도소를 돌며 지금까지 300여 명의 사형수를 교화시키고, 탄원서를 제출해 7명의 사형수를 구했으며, 일본 야쿠자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살던 권희로 씨를 영구귀국 시키기도 한 부 산 연제구 거제동 자비사 박삼중 주지스님. ‘사형수의 대부’로 불리며 전국 교도소 재소자 교화 후원회 회장을 맡고 있는 삼중 스님은 인터뷰 내내‘그놈들’이라고 부르는 ‘사형수’들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어머니
“스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제가 죽거든,
그 뼈를 곱게 갈아 꿀과 밥풀을 묻혀 까치밥으로 만들어 주세요!”
‘사형수의 대부’라 불리는 삼중 스님은 잠시 옛 추억에 잠기 는 듯 눈을 감고는 아직도 한 사형수 어머니의 절규가 생생히 떠오른다며 말문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 한 사형수의 팔순 노모가 대구교도소 앞에서 3 년 동안 정성으로 아들을 옥바라지 했죠. 그 모습에 감복한 저 는 각계 인사 5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 당시 법무장관을 설득, 박정희 대통령에게 탄원해 사형수를 사면 시킬 수 있었습니 다. 지금부터 가슴 시린 사형수 양동수의 어머니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978년 엄동설한이 휘몰아치던 어느 추운 겨울날. 삼중 스님 은 교도소 문 앞에서 한 사형수 노모를 만난다. 노모는 스님에 게 자신의 아들을 살려달라며 절규한다. 한참만에 울음을 그 친 노모는 자신의 잘못으로 아들이 죄를 지었으니 아들이 죽 으면 자신도 따라 죽을거라며, 자신의 몸뚱이를 화장해 까치 밥으로 보시 해 달라고 스님에게 부탁한다.
사형수의 이름은 양동수. 노모의 부탁으로 스님이 만나본 양 씨는 효심이 깊은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어 머니를 위해 자살로 마지막 효도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 이 빨리 죽어야만 늙은 어머니가 고향으로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님은 그런 양 씨를 달래도 보고 꾸짖어도 보았으나, 그대로 두었다간 무슨 일이라도 금방 벌어질 것만 같았다. 하는 수 없 이 자살을 막기 위해 그의 어머니를 설득하기로 했다.
“보따리를 싸십시오. 고향으로 내려 가십시오.”
노모는 엄동설한을 교도소 담장 밑 움막에서 지냈다. 발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할 조그만 움막 냉골에서 3년째 불 한번 지피지 않고 지낸 것이다. 스님은 노모가 안타까워 연탄을 사주려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자식은 차가운 바닥에서 추위에 떠는데 어찌 어미가 따뜻한 방에서 발을 뻗고 잘 수가 있겠어요. 아들을 죄인으로 만든 나도 죄인이니 자식과 함께 감방에 들어가고 싶어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교도소 담장 밑에서 자식과 똑같이 생활하는 것 밖에 없네요. 이곳에서 지내면서 자식의 죄 값을 조금이라도 치러 죽은 자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스님은 할머니의 말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졌다. 하지만 양 씨 의 자살을 막기 위해서는 노모를 고향으로 보내야만 했다.
“할머니, 보따리를 싸십시오.
고향으로 내려 가십시오! 그렇 지 않으면 아들은 죽습니다.”
하지만 노모는 아무리 부처님 말씀이라도 그 말씀만은 지킬 수 없다고 말했다.
“내 새끼가 죽으면 그 시신을 내 손으로 받아 부처님의 법으로 화장할 겁니다. 그 후 뼈를 곱게 갈아 꿀과 밥풀을 묻혀 까치밥 으로 보시할 것입니다. 짐승이라도 내 자식의 몸을 먹어줘야 그 놈의 업보를 조금 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놈이 죽으면 나 또한 이곳에서 죽을 것입니다. 스님이 이 늙은 이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스님 손으로 화장해 주십시오. 그리 고 내 몸도 아들과 똑같이 동물들에게 보시로 써 주십시오.”
노모는 항상 새벽 3시면 일어나 양 씨가 있는 교도소 담을 향 해 기도한 후, 교도소 인근 암자에서 부처님께 108배 기도를 올렸다. 노모는 뼈가 으스러져도 좋다는 각오로 자식만을 살 려달라고 부처님께 매달렸다. 날이 밝아오면 빗자루를 들고 자식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동네 거리를 구석구석 청소했다. 노모는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교도소에 있는 아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일등으로 면회를 신청했다.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에 감동한 삼중스님은 노모를 살리고자 했 다. 노모가 계속해 아들 옥바라지를 하다가는 쓰러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양 씨를 살리는 것이 바로 노모를 살리는 것이었다. “나는 사형수를 살리고자 하는게 아닙니다. 그저 아들을 사랑 하는 한 어머니를 살리고자 함입니다. 노환인 노모가 살아봤자 얼마나 더 살겠어요. 그저 집행을 유예해 달라는 것입니다.”
삼중 스님은 양씨의 재심 요청서에 노모의 자식 사랑을 감동 스럽게 써서 제출했다. 그래서일까.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이 무거운 재판부의 손을 들게 했다.
양 씨는 결국 어머니의 뜻대로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 게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노모는 스님에게‘내 아들을 중으로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출감 후 어 머니의 말씀에 따라 스님이 됐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형무소 담 뒤가 제 고향입 니다. 1942년에 태어나 여덟 살 때까지 형무소 담 밑에서 동네 아이들과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죠. 그 후에도 내 삶은 줄곧 이곳을 떠나질 못했네요.”
아마 삼중 스님과 사형수와의 만남은 필연적 인연의 만남이 아니었을까.
“대여섯 살 때쯤 똑같은 푸른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총을 멘 사람들의 감시 아래 일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에게 왜 그런 가를 물었더니 그들이 죄를 지어서라고 했습니다. 저의 눈에 참으로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죠. 언젠가 그들을 위한 일을 하겠다고.”
하지만 삼중 스님의 유년기는 순탄치 않았다. 스님이 태어난 지 1년 만에 아버지는 22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뒤 이어 어머니가 재혼했다. 스님은 17세가 되던 해 어머니 곁에 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껴 친가를 찾았다. 하지만 그곳 집안 어른들과 재산 문제로 불화가 생겼다. 억울하고 화가 난 마음에 죽기를 결심하고 수면제를 삼켰다.
“그래 죽자! 의지할 데 없는 이 신세, 그냥 죽어버리자!”
그런데 그냥 죽기에는 억울했다. 정신은 없지만 유서라도 남 기기 위해 벽에 있는 달력을 잡아당겼다. 오락가락하는 정신에 글씨 크기는 주먹만 해졌다.
‘죽음은 고통의 종점에 이르는 것이고, 행복의 문으로 들어가 는 길이다. 나는 이 세상이 더러워서 죽는다. 절대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스님은 다행히 살아났 지만, 가족들은 그가 쇼를 하고 있다고 생각 했다. 어린 마음에 또 한 번 상처를 입었고, 복수심만 타올랐다. 그 뒤 스님은 무작정 대구로 떠난다. 그냥 대구에 도착하면 좋 은 일이 기다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도 그를 반겨주는 이 는 없었다.
스님은 우연히 한 소년에게서 병원에 피를 주면 돈을 준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찾는다. 하지만 의사는 어린 소년의 건강을 걱정하며 만류한다.
“선생님 저는 죽어도 좋아요. 피를 빼서 죽나, 굶어서 죽나 마 찬가지 아닌가요. 차라리 피를 빼서 생긴 돈으로 먹다가 죽는 편이 낳지 않을까요?
스님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의사를 보 며‘피를 나눈 사람보다 남이 나를 더 걱정하는구나’는 생각에 눈물만 흘렀다.
“그래,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 이 되자. 복수하는 길은 바로 그 길뿐 이다. 어렸을 적 보았던 스님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다. 그들 에게 복수하는 길은 스님이 되는 길 뿐이다. 나는 가장 착한 스님으로 살고, 저 나쁜 사람들은 악한 사람으로 살면 그게 복수인 것이다.”
영원한 인생을 찾아서~
“학생은 뭐 하러 여기 왔나?”
“저는 중이 되고자 주지스님을 찾아 왔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대구에서 200리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중이 되려고 하느냐?”
“영원한 인생을 찾아서 해인사로 왔습니다.”
“영원한 인생을 찾으려 중이 된다고?
그래! 해인사에서 중이 되어라. 영원한 인생, 참 좋은 말이다!”
17살 소년은 해인사 주지 스님의 면접을 무사히 마치고 행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스님은 6개월 행자로서의 수련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세월은 흘러 1967년 석가탄신일을 앞둔 어느 날이다.
“대구 보현사에 포교사로 있을 때였어요.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대구교도소에서 법문할 스님이 없다고 연락이 왔죠. 교도소 운동장에는 천여 명의 재소자들이 있었는데 이들 이 부른 우렁찬 찬불가 소리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어요.”
이들에게 감동한 스님은 법회의 말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여러분과 나는 닮았습니다.
우선 머리 깎은 것이 닮았지요, 옷이 칙칙한 것이 닮았지요.
그리고 신발도 닮았습니다.”
그러자 모두들“와!”하고 웃음을 터 트린다. 계속해서 스님의 말은 이어 진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법회가 끝나면 나는 밖으로 나갑니 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그럴 수 없 습니다. 그렇다고 사방이 막힌 곳 만이 감옥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 관리를 못하면 그곳이 바로 감옥입니다. 몸은 비록 자유롭다 하더라도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그게 바로 감옥생활인 것이죠. 여러분~ 마음만은 자유롭게 가지시기 바 랍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그 후 스님은 틈만 나면 교도소를 찾았다. 그게 벌써 40년째 다. 하지만 지금은 재소자들을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배우러 간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이들은 나의 스승이요 부처입니다. 교도소가 없었으면 저는 할 일이 없었을 겁니다.”
사형수들이 감옥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죄를 저질렀으며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삼중 스님에게는 중요 하지 않다.
다만 이들이 마지막 여생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스님은 자신의 사명이라 말한다.
“우리는 재소자를 꺼려합니다. 하지만 누가 이들을 범법자로 만들었습니까. 바로 이웃인 우리입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야 할 때입니다. 언젠가 출소자들이 일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저의 숙명이라 믿습니 다. 제 꿈이, 나아가 재소자들의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