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중국우슈산타왕쟁패(武術 散打王) 원문보기 글쓴이: 질주
# 1
산타의 시초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 그리고 소련(러시아)와의 연합 산하로
1924년 광주시 황포구 장주도에 설립된 육군사관학교(황포군관학교)에서 중공군의
교과 과목으로 탄생했다. 발생년도에 대해서는 (1924~1927)사이로 추정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1924년 말부터 소련의 지원이 시작된것으로 기록되어있어
(1924 말~1925 초)로 보고있다.
이 당시 산타,산수라는 표현등이 쓰이기 이전의 각가지 표기법들인
(마수/섬타/백타/뇌퇴/박격/대타/단병) 등의 통일화 이전의 명칭들이 쓰였다고
기록된것 이외에 <중화 신 군사술> 로 통합되어 기록되어있는 부분도 있다. 이렇듯 교관들로 하여금 기존 무도의 전통적인 방법의 학문에 근거해서
스포츠 의학과 훈련 방법론등을 병합시켜 일본에 대응하기위한 백병전의 우위 선점과
국토방위의 수호를 위한 현대식 투기로써 고안되었다.
당시 소련의 군사고문단으로부터 사관 생도들을 훈련시켰고 이들은 군벌을 타도하는
주력부대가 되기도 하였다.
1923년 1월 중국은 소련과 전략적인 동맹을 형성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요구 받고있던 연합국의 형세였기에 당시의 육군사관학교는 군 인사부의 규율,
정치적인 사상주입 그리고 군사 훈련을 확립하는데 있어 소련의 방법등을 활용하였다.
또한 미하일 마코비치 보로딘 수장 이외에 많은 소련의 군 수뇌부들은 군사 요원의 해당 분야,
정치적 순화 교육 그리고 군사훈련을 돕기 위하여 중국으로부터 초빙되었다.
(사진 : 사관학교의 전경)
소련은 러 일 전쟁(1904~1905) 에서 크게 패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CQC: 근접거리에서의 백병전 기술) 을 발전시키려 노력했고 이것은 훗날에
소연방(CPSU)의 공산당 지도력하에 1917년 10월, 그들의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오늘날 "삼보"라 불리우는 군 격투술의 교육과정으로써 시초가 되었다.
중국보다 앞선 군 격투술의 선진국으로써 소련 고문관의 지도 아래, 중국군은
(CQC)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소련의 군사 격투술과 유사한 방법을 창조하는것에 주력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중국의 산타 교육과정은 크게 4가지로 분류되었다.
1. (Striking) 권(주먹), 장(손바닥) , 팔꿈치, 손가락, 박치기
2. (Kicking) 차기, 밟기 ,무릎치기
3. (Throw) 레슬링
4. (Seizing) 서브미션
등의 과목들이 정식 교과로 들어가게 되었고 현재 중국 공안들의 필수 과목으로
실무교육을 받고있으며 산타 교범으로 출시되는 서적에도 예전 그대로 방식이 이어져 오고있다.
현재의 공안국의 산타는 독자적인 클럽을 형성해 선수들을 양성하고 있다.
그 당시에 산타의 제작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프로젝트 단계에서 중국보다 한발 앞서
군대의 격투술을 전문화시키려 노력한 소련은 중국 사관학교의 주체로써
매니지먼트였고 연구 단계에 있어서 어드바이스를 해주었기에 여러가지 학설등을 조합해보면
"소련의 삼보가 지금의 산타를 좌우했을 것이다" 라는 설 에 무게가 실린다.
또 하나의 다른 설의 대립은
"중국의 교관들중 뛰어난 이가 재구성하거나 흡수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그것은 새로운 개척이 되었을것이다. 러시아의 격투 기숙사 학교등지에도
이미 예전부터 산타를 하나의 과목으로써 채택해 가르치는 곳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러 국가에서 학설의 복잡한 대립이 있는 부분이기에 전문적으로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이상은 각자의 개인적인 생각들을 대입해보고 유추하는것으로
만족해야하는 한계가 있는것과 역사의 한계라는 벽에 부딪혀 더이상
나아갈 수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과거의 맥락 속에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정체를 확인해봐야 하지만
파편적인 정보나 단편적인 지식이라는것 마져도 정보는 한정되어있어
더이상의 이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에 대한 공시적이고 총체적인 서술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각기 독자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산타의 정형화된 기본적인 기술과 속성의 발달이 필요했기때문에 산타의 스포츠 버전
선택은 필수였다.
1928년 11월 1일, 1933년 10월 20일 2번의 이경림관장의 주관으로 난징 중앙국술관에서
열린 국술국고 고사 단병 종목에서 오늘날의 스포츠 산타와 가장흡사한 룰과 방식을
채택한 경기가 벌어졌다. 이러한 시합등에서 "산수" 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시합은 3라운드, 각 라운드마다 2~3분을 주었고 룰은 현대의
스탠딩 발리투도에 가까운 것을 채택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이후에 점차 국제적인 흐름에 맞추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팔꿈치와 무릎을 제외한 기본적인 타격과 그래플링만이 허용되었다.
오늘날의 근대화된 스포츠 형식의 산타의 시발점이라 할 수있다.
이 당시에는 '뇌대'(로프가 없고 단차가있는 사각의 폼) 이라고
칭한 경기장에서 시합이 진행되었고 오늘날에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스포츠화된 산타의 경기는 1963~1979년까지 국제적으로 발돋움 하기위해 준비단계를
거쳤고 때를 맞추어 중국의 각종 무술학교에서도 국제규격에 맞추어진 산타를 편성시켜
국제적인 경쟁을 시작했다.
좀더 세부적으로 1979년의 3월 중국의 행정부와 3개의 기관
(저장성의 스포츠 훈련소, 북경 체육 학회, 우한 체육대)에서 실험을 해 나가면서
산타의 국제화 스포츠 작업을 시작하지만 공식적인 후원의 부족 때문에 시기를
정하는것에 있어서도 다소 늦은감이 없지않아 있었고 기술이나 훈련 방법, 그리고
규칙 역시 표준화하지 못했다.
(사진 : 일본의 산타 투용비새)
이러한 적지않은 시행착오끝에 최종적으로 틀이 잡힌 스포츠 산타를 시범경기로써
선보이게 된다. 1979년의 5월, 연구 기관은 광시성 남령에 이것을 소개하고 이때에
도시지명이나 지방의 지명을 딴 팀이 개설된다.
1979년 10월에 저장성 팀, 북경체육대학 팀 및 하북성 팀이 선정되었다.
1980년 5월까지, 3개의 산타팀이외에, 섬서성에도 설치되었다.
그 사이에 북경 체육 대학과 우한 체육 대학은 자신의 운동선수를 위한 실험적인 이득을
얻기 위하여 시합을 자주 열었다.
계획적이고 단계적인 대외 보급 업무를 시작한다. 각 지방의 코치들과 전문가들을
외국으로 파견해 강의를 하기도 했다.
1988년 중국북경에서 세계우슈연합회가 창립되면서 1990년 제12회 북경아시안게임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더 나아가서는 2008북경 올림픽 유치에 힘을 쏟고있다.
어찌보면 스포츠화 시켜 대중적으로 퍼지기까지 다소 늦은 출발이라고도 볼 수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30년 전부터 기획하고있었던 단계였지만 그 당시 중국의 정치적인
불안정성 때문이라고 밝히는 이들도 있다.
그 이후 1990년대 들어서 각종 아시아권과 유럽 그리고 미국등에서 대중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입식에서의 레슬링 기술이 허용되는 산타의 룰로 인해 호쾌한
던지기 장면이 연출이되어 빠르게 인기를 얻어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