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카톡으로 서정시 계열의 시를 보내주는 친구가 있다. 요즘은 거의 매일같이 보내온다. 오늘 아침에는 이정하 시인의 이런 시를 보내왔다.
친구는 연구 분야가 나와 좀 다르지만 크게는 문학으로 같다. 퇴임 교수임도 같다. 그런데 사모님이 몸이 좋지 않아 입원 치료 중이다. 말로 한다고 위로가 될 리 없어 기도만 드리고 있다.
남을 위해 드리는 기도를 흔히 중보기도라 하는데, 그런 걸 중보기도라 하면 안 된다는 사람이 많다.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니 중보기도는 그분만이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든 나는 남을 위한 기도를 조금은 많이 드리는 편이다. 대개는 육신의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분들(어린이도 포함)을 위한 기도이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해오면서 느끼게 된 것이 있다. 기도에 선행(先行)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기도대상의 아픔은 그 생각만으로 나도 아프다. 그러며 빨리 완치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이어진다. 기도는 그런 마음에서 그런 마음으로 드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기도는 어쩌다 생각나면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예기치 않던 일을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 뜨겁고 간절히 드리는 예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런 기도가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아픔 없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지 않는, 그 같은 치유를 위한 기도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기도는 있는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하는 것이다. 하다가 죽게 되면 죽겠다는 각오로 하는 기도도 있다. 그런데 전심전력으로 하지 않고 느슨한 마음으로 적당히 하는 기도도 없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나마나한 말’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마나한 기도이다. 그냥 적당히 하는 기도가 그렇다는 말이다.
시를 보내준 친구에게 역시 카톡으로 회신을 했다. 그 내용에 살을 붙여 소개해 본다. 내친김에 내용에 관련된 평소의 생각을 덧붙여 주절거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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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교수님, 우리네 인생은 슬픔의 눈물을 힘으로 하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고난을 자양분으로 하여 성장해 가는 존재입니다.
이 시는 아시는 대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1, 2연입니다.
국화꽃은 소쩍새가 울어서 핀 것입니다. 소쩍새가 울지 않았다면 피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혹 피었다 하더라도 그토록 예쁘게, 아름답게는 피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을에 피우기 위해 여름보다도 전인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어댄 것입니다.
울어댄 것은 소쩍새뿐만이 아닙니다. 천둥도 그랬습니다. 그것도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어대었습니다. 그래서 국화꽃은 그토록 예쁘게 피었습니다. 소쩍새의 울음소리, 천둥의 울음소리가 찬바람, 찬 서리를 불러와 그렇게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S교수님, 바람이 있어 나무는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
S교수님, 제 인생도 돌아보니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 저를 소몰이가 소를 몰아가듯 여기까지 몰고 오셨음을 봅니다. 전능하시어 지으신 천지를 주재, 운행, 관리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은혜이지요. 은혜입니다. 총총
첫댓글 사랑의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