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이향숙
입맛에 맞춘다. 입맛에 맞추고 조금씩 바꾼다는 것은 서로 맞추어 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서로 달랐다. 남편은 시금치를 좋아하고 나는 고사리와 콩나물을 좋아한다. 두 사람의 입맛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궁리해 낸 것이 좋아하는 재료들을 모두 같이 섞었다. 어떠한 재료든 함께 섞으면 어우러져 감칠맛을 낸다. 음식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남남이 만난 두 사람도 화합하면 새로운 시너지가 생성된다.
사람에게는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이 있다. 사람의 성격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을 평가하려면 먼저 부모를 보았다. 좋은 가문에서는 바르게 자라기 마련이라며 집안 내력을 보고 혼사를 결정했다. 각기 다른 가문에서 자라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서로를 위하는 존중과 배려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잘못해서가 아니라 기대에 어긋나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 만난 우리는 티격태격 많이도 삐걱거렸다. 조금만 양보하면 될 것을 서로 맞서며 외줄 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중요한 것은 인내와 기다림이었다. 비빔밥 속 다양한 재료들이 각각의 맛을 하나로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도 각자의 개성과 성격을 존중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비빔밥을 함께 먹는 일은 단순히 식사를 나누는 것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과정이었다. 처음엔 서로의 입맛 차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가끔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재료가 더 많이 들어가기도 했고, 때로는 남편이 덜 좋아하는 재료가 더해지기도 했다.
그는 육 남매의 막내로 어려움을 몰랐고 나는 육 남매의 장녀로서 책임감이 강한 편이었다. 그가 수목원의 나무라면 나는 길가의 질경이였다. 막내로서 경제관념이 부족하고 부모에게 의지하며 세상사 급한 것이 없었다. 매사 적극적이던 나와는 너무도 달랐다. 어느 날 다니던 회사에서 본사로 발령이 났다. 동료들은 경사라고 축하했다. 그때 우리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있었다. 연세 높은 시부모님도 같이 객지로 나가야 할 형편이니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라고 했다. 시부모님이 섭섭할까 봐 그 뜻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남편은 어머님의 권유로 사업을 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한 사업이 서울에 있는 D 시장의 포목 도매였다. 사회는 그가 생각한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이곳이 얼마나 무서운 장돌뱅이들이 모인 곳 인가,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곳이었다. 물건을 받기 위해 공장으로 송금한 돈이 잘못되어 물건이 오지 않았다. 송금을 분명히 확인했는데 어찌 된 일인가. 남을 너무 믿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 시작한 사업이 잘못되면서 많이도 애를 태웠다. 또 다른 사업을 선택해야 하는데 이 건이래서 못하고 저건 저래서 못한다. 마음에 꼭 맞는 것을 고르고 또 고르며 언제나 느긋하다.
아이들도 자라고 마냥 시간만 보낼 수는 없다고 걱정하면 “어떻게 되겠지 나는 어떻게 살까, 고민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지켜보는 나만 애간장이 탔다. 궁여지책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처음 시작한 것이 백화점 식당가 매장이었다. 집에서 살림만 하던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몸으로 뛰어야 하는 일이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삼 남매가 한창 공부할 때라 그만둘 수도 없었다. 새벽에는 시장에서 재료를 구해오고 낮에는 손님 응대를 해야 했다.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모든 것이 서툴렀다. 그래도 음식 만드는 일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루 종일 서 있으니, 처음에는 발바닥이 땅에 있는지 하늘을 나는지 아무 감각이 없었다. 밤이면 발바닥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아파 걸을 수가 없어도 영업은 해야 하니 하루도 쉴 수가 없다. 시장 보는 일이라도 대신해 주면 좋으련만 혼자서는 물건 하나 살 줄 모른다. 십 년을 넘게 내가 앞에 서고 뒤에서 보조하는 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경제 활동을 마무리했다.
세월이 흐르고 삼 남매가 제자리를 찾은 지금, 가장의 자리가 아쉽지 않지만, 때때로 마음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속마음을 독백처럼 토해내곤 했다. 어느새 성숙해진 막내가 "모든 사람은 완벽할 수 없으니, 좋은 면만 보라"고 다독여 주었다. 그 말을 되새기며 남편의 좋은 점을 바라보게 되었다. 바쁜 나를 대신해 밥도 챙겨주고 때로는 친구도 되어주는 살뜰한 아빠였다.
모든 걸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가끔은 작은 오해가 생기기도 했고, 그로 인해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해 보니 섭섭했던 일도 조금씩 삭아진다. 언제나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으니, 그의 자리가 얼마나 불편했을까. 가장의 무게에 더해 심리적 불편을 가중했다. 상대에 대한 배려도 없이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었을까. 긴 시간 다투며 쌓인 감정들도 헛된 것은 아니었다. 티격태격했던 불협화음들이 어느새 제자리를 찾아 편하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조금씩 양보하는 법을 배웠다. 티격태격하던 다툼 속에서도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나갔다. 마침내 모든 재료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듯,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하나로 어우러지는 관계가 만들어졌다. 양보는 전진의 바탕이 되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각자의 가치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뭉쳐져 비로소 진심을 마주할 수 있었다.
처음엔 맞지 않았던 부분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보완해주는 요소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면서도 함께 성장해 가는 길을 찾아갔다. 시간이 쌓일수록 감정도 마치 햇살 아래 잘 익어가는 열매처럼 점점 단단해졌다. 어느새 황금빛 저녁노을을 함께 바라보며,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을 맞이했다. 입맛에 맞게 만든 비빔밥처럼, 매운 고추장과 고소한 참기름을 버무리듯 우리의 감정도 깊이 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