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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날 남아 있는 것은 고대 도시나 궁전터, 인공호수, 공원, 사원, 승원 또는 조각등에 당시의 " 싱할리" (사자의 뜻)족의 특징 - 상상력, 문화, 철학, 신앙심등이 잘 나타나 있다. 더욱이 수도인 콜롬보에서 출발하면 아무리 먼곳이라도 점심 전에 도착할 수 있으며 도중의 풍경 또한 스리랑카의 매력을 풍부히 지니고 있어 자연의 변화무쌍함을 느낄 수 있다. 녹색의 논과 고무밭, 그리고 길 옆의 늘어선 야자수 나무, 야생 코끼리와 표범이 출몰하는 깊은 정글의 국립 공원, 갑자기 이구아나가 뛰어나오는 고속 도로, 사육사들이 노련하게 조련 하는 코끼리 등을 보노라면 몇시간의 여행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끝나버린다.
싱할리 족들은 기원전 5C경에 북인도로부터 내려온 아리안 족들이 스리랑카 중앙부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점차 수가 늘어 났다. 그들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거대한 인공 호수를 무수히 많이 만들고 정치 기구를 정비 했던 우수한 민족들이었다. 기원전 3C경에는 당시의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의 지명이 멀리 지중해에까지 알려졌었으며, 그로부터 3C후에는 싱할리 교역 대표단이 로마의 시이저에게 신임장을 제정받고 다시 300년 후에는 동쪽으로 중국과 교역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기원전 247년에 스리랑카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일이 발생 하는데, 그것이 인도의 돈독한 불교도였던 아쇼카왕이 그의 아들인 마힌드 왕자를 이 섬에 파견하여 불교를 국교로 정한 것이다. 싱할리 왕은 황실에서부터 일반 시민들에까지 불교에 귀의하게 하여 오늘날까지 불교가 번성 할 수 있게 그 틀을 마련 했다. 그래서 스리랑카 또한 세계적으로 손 꼽히는 불교 성지 중의 하나로 지금도 순례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불교의 유입과 비슷한 시기에, 힌두교도인 드라비다 족들이 침입하기 시작하여 1500여년간에 걸쳐 스리랑카에는 힌두교 문화도 함께 자리를 잡았다.그러나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불교 국임은 변함이 없다. 수차에 걸쳐 반복된 드라비다 족의 침입으로 10C에는 수도를 아누라다푸라에서 폴론나루와로 옮겼으며, 그 후 그루네갈라 근처의 " 바위의 요새" 와 콜롬보 근처의 꼬때등을 거처, 마지막에는 캔디 분지로 옮겼었으나 싱할리 왕조는 이 곳에서 영국의 세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보석이 유명한 스리랑카에는 사파이어, 단백석, 월장석 등이 있어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관광객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쇼핑 코스 이다. 또 스리랑카 특유의 문화가 베어있는 코끼리가 새겨진 흑단, 견직물, 매트리스, 아름다운 수공예 품 등 액세서리, 실내장식품에 이르기까지 살거리가 다양하다. 가격은 대부분 흥정에 따라 결정되며 물품을 구입할 때는 영수증을 받아두는 것이 좋다.
◈ 개 요 o 국 명 :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 (Democratic Socialist Repuplic of Sri Lanka) o 독립일 : 1948년 2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 o 면 적 : 65,610 ㎢(한반도의 1/3) - 남북간 거리 435km, 동서간 거리 225km, 해안선 1,340km - 면적이용 : 경작지:14%, 영구경작지:15%, 영구목초지:7%, 숲과 삼림지:32%, 기타:32%(1993년 통계) o 수 도 : 콜롬보(인구 약 70만) - 수도권(Greater Colombo) 인구는 약 280만 o 인 구 : 1873만명(2001년) o 인 종 : 싱할라족(74%), 타밀족(18%), 무어족(7%), 말레이족, 버거족 등 o 종 교 : 불교(69%), 힌두교(11%), 회교(7.6%), 천주교(7.5%) 등 o 기 후 : 고온다습의 열대성 기온(Colombo 연평균 27도) - 때때로 사이클론과 토네이도의 영향을 받음 o 언 어 : 싱할라 및 타밀(국어), 영어(공용어) o 화폐단위 : 루피 - 환율(2003. 12) : US$1=Rupees96.00
-> 주요 수출품 : 봉제 의류, 완구, 가방, 코코넛, 홍차 -> 주요 수입품 : 기계, 직물 및 봉제 원부자재
◈ 스리랑카 역사 스리랑카의 역사는 북부 인도에서의 아리안계 민족의 유입에서 시작된다. 이 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는 팔리어 역사서[마하완사]에 의하면 기원전 543년 인도 아리안계의 왕자(싱하)의 자손으로 칭하는 윈자야 왕자가 북인도에서 700명의 싱할리인을 거느리고 건너와서 원주민 벳다를 정복하고, 싱할리인에 의한 최초의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싱할리 왕조는 기원전 3세기에는 인도의 불교를 받아들여 독자의 불교문화를 발전 시켰고,상당히 고도화된 생활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의 북부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쌀 생산을 위한 관계용수를 건설했다. 최초의 수도 아누라다푸라 (Anuradhpura)는 1,500년의 장기간에 걸친 불교문화의 중심지와 곡창지대로서 융성함이 극에 달했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남인도의 타밀인의 침입이 잦아지고 싱할리 왕조는 계속되는 내분, 내란으로 점차 흔들려 갔다. 800년에 즉위한 싱할리 왕조의 비자바후 및 그의 아들 파라쿠라마바후는 수도를 폴론나루와로 옮기고 싱할리 왕조 최후의 황금기를 구축하지만 왕의 사후, 계속되는 타밀인의 침입과 내분으로 인해 남부로 또 다시 천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한편 북부에서는 타밀인의 왕국이 성립되고 국내는 분열상태에 들어갔다.
1505년 포르투갈인이 섬에 들어와 연안지대를 차지하고 육계(肉桂)무역 등에 종사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지배 지역에서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로마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장려하는 등 유럽 문명을 스리랑카에 정착시켜 스리랑카의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다. 1640년 무렵부터 스리랑카에 진출한 네덜란드인은 포루투갈을 몰아 내고, 스리랑카 대부분의 국토를 그들의 통치하에 두고 무역을 성행시키는 한편 운하를 건설해 쌀, 코코넛, 육계(肉桂)의 재배를 장려했다. 한편 총독을 두어 식민지 경영을 시작했다.
1796년 네덜란드를 대신한 영국은 180대에 걸쳐 2,300년간 지속되어 온 싱할리 왕조를 멸망시키고 식민지화했다. 영국인들은 1830년대 남인도로부터 타밀인 노동자를 대량으로 이주시키고 산지를 개척하여 커피농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커피농장이 1870년대 병해에 의해 괴멸하자 품종을 홍차로 전환했다. 또 20세기에 들어 고무, 코코넛 나무의 플랜테이션을 시작하고 Mono Culture 경제의 기반을 구축했다. 스리랑카는 영국 통치하에서 점진적으로 정치적인 자치를 획득해왔다. 그 후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자 인도, 파키스탄의 독립과 함께 1948년 2월 4일 英 연방으로부터 독립했다. 이로 인하여 스리랑카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에 의해 계속된 450년간의 식민지 지배에 종지부를 찍고 독립을 회복했다.
1972년 5월 22일 신헌법 제정에 의해 국명을 이 때까지 이어온 실론에서 스리랑카로 변경했다. 정치 체제는대통령제에 의한 공화제(The Republic of Sri Lanka)로 결정됐다. 또 1978년 9월 7일에는 또다시 신헌법을 공포, 국명을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Pepublic of Sri Lanka)으로 개명했다. 스리랑카의 근대화와 함께 수도인 콜롬보(Colombo)가 좁아져 각종 시설의 콜롬보 설치가 곤란해졌다.
지 리 스리랑카는 인도의 동남단, 북위 5도 50분에서 9도 50분, 동경 70도 40분에서 81도 50분 사이에 있는 인도양 상의 섬나라이다. 인도와는 29km의 포크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고, 스리랑카에서 남서 방향으로 600km 지점에는 몰디브 공화국의 섬들이 산재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면적은 65,607㎢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430km, 동서의 폭은 약 220km이다. 섬의 지형은 서양의 배(梨)와 같은 모양 을 하고 있다. 섬의 북반부가 대체로 평지인데 반해 남반부는 해발 1,000m∼2,500m의 산악지대와 이를 둘러싼 해안 평야 지대로 되어 있다. 스리랑카의 최고봉은 해발 2,527m의 피도루타라가라봉이고 불교의 유적으로 이름높은 영봉(靈峰) 아다무스피쿠(시리 파다)는 해발 2,237m이며 스리랑카에서 여섯번째의 고봉이다. 주된 하천은 산악지대에 근원을 두고 방사선 형으로 흐르고 있다. 수량은 풍부하지만 선박의 항해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 최장의 하천은 330km의 마하베리 강이다. 섬의 북부 및 북동부는 강우량이 적어, 소위 건조 지대로 불린다. 남서부쪽은 이와 반대로 평균 강우량이 많기 때문에 식물이 번성하고 녹음이 풍부한 습윤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산악지에서는 최 양질의 홍차가 생산되고 그보다 낮은 지대에서는 천연 고무가, 또 해안 지대에서는 코코넛이 재배되고 있다.
두문학의 고전이자 세계 최장편 서사시인 '라마야나(Ramayana)'에서 찾아볼수 있다. 라마가 스크랑카섬에 끌려간 아내를 구하기 위해 구축한 거대한 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기 후 스리랑카는 인도대륙의 남동쪽 끝으로부터 약 30km의 인도양 상에 위치한 섬나라 이다. 스리랑카란 '아름다운 섬'이란 뜻이며, 그 의미처럼 섬 전체가 초록색의 야자수 나무로 덮혀 있고, 쪽빛의 바다로 둘러쌓인 아름다운 섬이다. 섬의 남부에는 페도로타라산(2,538m)이 솟아 있고, 이 산악을 중심으로한 지세의 남부에 대치하듯 북반부는 평야지대가 넓게 펼쳐저 있다. 기후는 고온다습한 열대성이고 5월∼9월과 12월∼2월 두차례 몬순이 온다. 일반적으로 섬의 북부와 북동부는 건조한 기후이지만 남서부는 습윤지대로 초목이 대단히 번성하고 있다. 콜롬보의 연평균 기온은 섭씨 27℃, 고지와 산악지대에서는 온도에 적응해 살기가 양호하고 해발 500m 지역에는약 24℃이며, 피서지로 유명한 누와라앨리야는 해발 1,900m에 위치하면서 16℃ 정도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다. 몬순인 5월∼ 9월은 남서몬순 계절이고 남서부의 평야와 산악부에서 다량의 강우가 초래되고 있다. 10월∼1월까지의 북동몬순 계절에는 강우량은 그다지 많지않지만. 때때로 북동부에 한발이 덮쳐 벼농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도한다.
스리랑카 민족
종교, 풍속, 법규, 관습상의 유의사항
실론 티 (Ceylon tea)의 나라 스리랑카 - 스리랑카 홍차 (실론 티)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인들이 즐겨 마시는 홍차(紅茶)인 `실론티(Ceylon tea)의 나라 스리랑카. 차(茶) 수출이 전체 수출량의 3위를 차지할 정도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차(茶)재배를 육성하고 있다.
스리랑카 주요 도시
네곰보 (NEGOMBO) 네곰보는 콜롬보에서 북쪽으로 약 35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 스리랑카 최대의 어항을 지닌 도시이다. 국제 공항이 가깝기 때문에 최근 트랜짓 승객을 위한 리조트 호텔들이 도시 북구에 여러 개 세워져 리조트 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네곰보의 원래 모습은 어디까지나 어민들의 도시이다. 콜롬보나 갈레와 마찬가지로 항구로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랍 상인들의 시나몬 무역 기지로 사용된 이후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이어진 식민지시대에서도 지배의 중심으로서 중요한 항구였다. 이러한 역사는 지금의 네곰보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형체가 남아 있는 것은 성채와 운하이다. 성채는 네곰보를 항구로 키워온 거대한 만의 입구에서 서서 도시를 지켜보고 있고 운하는 도시 중앙을 가로질러 흐른다. 이 운하는 길이가 129km에 이르며, 지금도 사람들의 생활 물자를 운송하는 동맥으로 사용되고 있다.
네곰보 주민들의 생활을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이다. 포르투갈인이 이곳에 와서 전도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주민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인 이다. 때문에 도시 곳곳에서 멋진 교회를 볼 수 있다. 네곰보의 참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른 아침 해안에 늘어서는 어시장에 가보아야 한다. 쌍동선이 뭍에 닿을 때마다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해안은 사람과 배.생선 그리고 생선을 노리는 까마귀로 뒤덮인다. 이른 아침 해안을 찾는 사람들에게 아침 시사를 파는 천막들까지 들어와서 법석 거리는 모습은 점심때까지 계속된다. 한편 리조트 지역은 서구화된 멋진 비치 로드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조금도 신기하지 않고, 여행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쾌적한 설비가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진짜 네곰보를 느끼고 싶다면, 저녁에 일찍 햇볕에 그을린 몸을 일찍 쉬게 하고 아침에 서둘러 해안의 어시장으로 나가보는 것이 좋다.
마운트 라비니아 (Mt. LAVINIA)
집들은 넓은 간격을 두고 평화로운 길이 이어져 있으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없다. 이곳은 콜롬보 수도권의 일부가 된 지금도 피서지로서의 한적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조용함과 빛나는 태양, 식민지시대의 위용을 보이는 고풍스러운 호텔이 예전의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해준다. 이곳에는 한 총독과 아름다운 처녀의 로맨스가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향을 떠나 머나먼 이곳의 남쪽 섬에 오게 된 영국인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아가씨를 사랑한 전설의 무대로 이곳만큼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이다.
곶으로 나가 그곳에 서서 바닷가를 한눈에 조망해 보면 아득한 북쪽 바다 위에 역시 인도양을 향해 솟아나온 콜롬보 포트의 빌딩들이 마치 신기루처럼 떠 있는 것이 보인다. 도시의 소란함 대신에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그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해서 한 동안 말을 잊게 한다. 최근 스리랑카에는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휴양지가 해안선을 따라 여러 군데 생겨났다.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조용히 휴식을 취하기 위한 휴양지로서는 스리랑카에서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은 없을 것이다.
◈ 마운트 라비니아 여행 마운트 라비니아는 대체로 조용한 도시 지만 버스터미널 주변은 상당히 번잡하다. 교통량도 많고 갈레 로드의 보도에는 야채 따위를 파는 가게가 줄지어 늘어서 있어 많은 사람들이 오가기 때문이다. 또 바로 남쪽에는 쇼핑 센터도 있어 이 부근은 마운트 라비니아지만 그래도 버스 터미널 주변은 상당히 번잡하다. 교통량도 많고 갈레 로드의 보도에는 야채 따위를 파는 가게가 줄지어 늘어서 있어 많은 사람들이 오가기 때문이다. 또 바로 남쪽에는 쇼핑 센터도 있어 이 부근은 마운트 라비니아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이 근처가 도시 기분이 나는 유일한 곳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곳을 제외하면 마운트 라비니아의 다른 곳은 조용한 주택가이다. 여기서 해안 쪽을 향해 스테이션 로드가 갈라져 나간다. 이 길을 걸어가면 오른쪽에 우체국이 있고 그 앞에는 게스트 하우스와 작은 호텔이 있다. 50m 정도 더 걸어가면 에스토릴 비치 리조트 Estoril Beach Resort 건물이 보인다. 이 에스토릴 비치 리조트 앞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바로 직진하면 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은 해안보다 높은 지대에 있어 전망이 상당히 좋다. 특히 석양을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이다. 왼쪽으로 꺾어지는 길은 스테이션 로드가 이어지는 길이다. 계속 가면 완만한 내리막길이 나오는데 구불구불하다. 철도가 보이면 길은 왼쪽으로 굽어진다. 그곳이 마운트 라비니아의 철도 역이다. 버스 터미널에 비하면 이용자가 적어 아주 조용하다. 철로 건너편에는 마운트 라비니아 호텔이 식민지 시대의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역 앞의 육교를 건너면 호텔의 입구 정면이 나타난다. 외국인이라면 숙박 객이 아니더라도 제지 당하지 않으니 로비의 소파에 않아 분위기를 즐기다 나올 수도 있다.
케라니야 (KELANIYA) 스리랑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불교도들은 보름날을 포야 데이라고 부르며 노동과 음주를 금하고 하루를 쉰다. 이 날은 사원에 참배하는 성스러운 날이다. 현재 포야 데이는 이 나라가 정한 법정 공휴일로 되어 있어 이날이 되면 항상 조용하기만 하던 케라니야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콜롬보 근교의 유일한 사원인 라자 마하 비하라에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들기 때문이다. 이날은 음식을 파는 장사꾼에서부터 장기를 자랑하는 거리의 예술가들까지 수 많은 가게와 사람들이 사원 주위를 둘러싼다. 꽃이나 향을 사서 참배를 마친 사람들이 사원 주변을 돌아보며 즐기는 것이다. 걸인들에게도 이날은 특별한 날이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적선을 베풀면서 보다 나은 내세를 기원하기 때문에 계속 내미는 걸인들의 손바닥 위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잔돈을 건네진다.
그렇지만 사원 안으로 한 걸음만 들어가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찬 사원 안에서는 사람들이 꽃을 바치며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다. 경내에는 손에 코코넛 기름이 담긴 작은 접시를 든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있다. 이 날 케라니야에서는 성스럼움과 속됨, 성스러움과 천함이 혼연일체가 되어 나타난다. 라자 마하 비하라는 옛날에 석가모니가 방문한 곳이라는 스리랑카의 세 군데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유유히 흐르는 성스러운 케라니 강 옆에 세워진 사원과 흰 탑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스리랑카 불교 사원 이미지를 충분히 보여 준다. 콜롬보 시내에는 넓직한 불교적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이곳에 와야 불교 국임을 자랑하는 스리랑카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석가모니의 전설이 깃든 성지 라자 마하 비하라(Raja Maha Vihara) 스리랑카 사람들은 예로부터 석가모니가 이 섬을 세 번 방문했다고 믿어왔다. 그 가운데 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설법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기원전 3세기에 지금의 사원 안에 있는 하얀 탑의 원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현재 사원의 기초는 거듭된 전쟁 때문에 파괴와 복구가 계속 되어 비교적 최근인 13세기에 만들어 졌다고 한다. 금세기 초반에 건조된 본당 내부에는 어두컴컴한 상태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프레스코화가 펼쳐져 있다. 방은 4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정면을 향해 오른쪽 방에는 누워 있는 부처의 모습 정면에는 않아 있는 부처상이 금빛 찬란하게 안치되어 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믿는 부처의 상이나 그림 앞에 않아 열심히 기도를 한다. 벽화에는 기하학적인 무늬와 석가모니가 겪은 여러 가지 일들, 그리고 이 사원의 역사가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압권인 것은 왼쪽 방에 그려져 있는 석가모니의 스리랑카 방문 벽화 이다. 이 그림은 명암법을 써서 석가모니의 세 차례에 걸친 방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첫번째 그림은 깨달음을 얻은 지 9개월째 되던 무렵, 명상하는 석가모니의 주변을 둘러싼 찬란한 빛에 원주민 같은 반라의 사내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고, 두 번째 그림은 깨달은 지 5년째 되었을 무렵 제자를 거느리고 찾아온 석가모니에게 이 섬의 왕의 귀의하려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세 번째 그림은 몇 백 명이나 되는 제자를 거느린 석가모니 앞에 왕이 많은 신하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해서 결국 이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석가모니에게 귀의했다고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외벽에는 폴론나루와에 남아 있는 유적 북 원의 것을 모방했다고 하는 해학적인 모습의 난쟁이와 코끼리, 그리고 코브라의 부조가 나란히 있다.
히카두와 (HIKKADWA) 히카두와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리조트 지역이다. 다이빙, 윈드서핑을 비롯해서 해양 스포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히카두와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관광객을 수용하는 능력에 있다. 이곳이 리조트로 발전한 것은 앞바다에 산호초가 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 남서 해안 중 이곳 만큼 산호초가 발달해 있는 해안은 없다. 언제부턴가 이 산호초 때문에 서양의 관광객이 모이게 되었고, 한때는 인도의 고아 지역처럼 누드 비치가 들어선 적도 있다.(현재는 금지.) 계획에 의해 개발된 리조트와는 달리 히카두와는 이런 구미 젊은이의 문화, 즉 히피 문화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이미지는 이 지역이 리조트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히피들은 사라졌지만 마을의 비치 로드에는 지금도 서구화된 레스토랑과 찾집, 토산품점들이 꽤 많이 늘어서 있다. 예전에 비하면 방문하는 사람의 수가 꽤 줄었다고 하지만 이곳에만 머물기 위해 스리랑카를 찾는 유럽인도 적지 않다. 그들은 1~2개월씩 히카두와에서 바캉스를 즐기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아마도 이런 방식이 히카두와의 조용함에 젖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항상 바쁘게 쫓기는 우리지만 여기서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히카두와의 느긋한 정서에 젖어보자. 그렇게 히키두와의 평온함에 색다른 매력을 느낄 것이다. 히카두와는 그 아름다운 바다와 해변 때문에 스리랑카에서도 손꼽히는 리조트 지역으로 유명하다. 시가지의 기능을 하는 지역은 아주 좁은 범위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는 해변으로 통하는 갈레 로드를 따라 호텔이나 레스토랑, 액티비티 오피스, 토산품점 등이 약 3Km에 걸쳐 이어져 있어 리조트 타운의 모습을 잘 형성하고 있다. 히카두와 시가지에서 여행객들이 첫발을 딛게 되는 역이나 버스 터미널은 마을 북단 끝에 있다. 역이나 버스 터미널 주변은 이른바 히카두와 상업지구로 실론 은행, 커미셜 은행, 피플즈 은행과 우체국, 잡화상 등이 늘어서 있어 시가지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역에서 갈레로드를 건너면 모래사장에 시장이 있다. 이 시장에서는 바로 앞바다에서 금방 잡아올린 신선한 어패류를 팔고 있다. 호텔 투숙객에게 맛있는 해물 요리를 제공하기 위해 매일 아침 호텔 직원이 시장을 보러 나온다.
그래서 어느 도시, 어느 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팔고 사는 흥정이 시끌시끌하게 이루어 진다. 리조트 타운인 히카두와에서 시가지의 활기, 삶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 시장을 찾아가 보자. 히카두와의 시가지에서 갈레 로드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 내려가 보자. 도로의 바다 쪽으로 작은 레스토랑과 토산품 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리조트의 냄새를 풍기는 곳에 들어선 것이다. 기분 탓인지 내리쬐는 태양도 더 밝아서 리조트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슈뇌르켈과 바닥이 유리로 된 보트는 산호초가 많은 이 지역의 필 수 관광코스 이다. 스리랑카의 다른 마을에서는 그리 볼 수 없는 이런 광경이 여기서는 당연한 모습으로 느껴진다. 미묘한 색의 변화를 보이던 산호초 바다도 여기서부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파도는 점점 거세지고 파도 사이로 보이는 바다거북이 이곳의 명물로 꼽힌다. 운이 좋으면 2~3m나 되는 거대한 바다 거북을 몇 마리나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스리랑카를 소개하는 미디어에 반드시 등장하는 스틸트 피싱도 계절에 따라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모래사장은 더 넓어지고 바다는 인도양의 거친 파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이 서핑의 메카로 알려진 나리가마 해변이다. 이 해변에는 아침 일찍부터 밤 늦도록 서핑 보드를 타는 젊은이들이 기세 좋게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한낮에는 수영복만 입은 서양 여성들이 문고판 책을 읽으며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도 보이고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비치를 돌아다니는 스리랑카인 판매상도 눈에 뛴다. 어딘지 모르게 잘 어울리지 않지만, 리조트 지역 히카두와의 현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생각보다 작은 갈레의 철도역을 나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적갈색의 석조 시계탑과 높은 벽으로 구시가를 둘러싼 성채이다. 이 성채를 구경하기에는 해질녘이 가장 좋다. 성채에 둘러싸인 구시가는 인도양으로 튀어나온 반도로 되어 있어 석양은 이 반도의 서쪽으로 진다. 저녁노을이 성벽에 비치면 마을 전체가 오렌지빛으로 물들며 반도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등대만 희미하게 빛난다. 이 시간이 되면 식민지시대의 흔적을 간직한 집들에서는 저녁식사를 짓는 코코넛 기름의 달콤한 향기가 피어나면서 하나 둘 불이 켜진다. 이섬을 오래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성채는 이제 이곳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생활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된 듯하다.
이렇다 할 만한 구경거리는 없지만 낡은 호텔에 여장을 풀고 느긋하게 마음을 열며 머무르고 싶은 매력 있는 마을이다. 갈레는 크게 반도를 둘러싼 성채 안에 있는 구시가와 그 북측 간선도로 주변에 있는 신시가로 나뉜다. 구경거리나 숙박 시설은 대부분이 구시가에 있지만 시장과 식당은 신시가에 있다. 그리고 갈레의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기능은 대개 신시가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철도나 버스 등 교통 기관의 터미널도 신시가에 있지만 그것들은 성채 출구에서 이어지는 길이 간선 도로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별로 불편하지 않다. 원래 갈레 자체가 그리 크지 않으므로 시가지 구경은 도보로도 충분하다. 시계탑이 있는 성문을 중심으로 역, 시장, 곶에 있는 등대 등은 모두 걸어서 15분 이내의 거리에 있다.
갈레에 도착하면 우선 성 위를 걸으며 반도를 일주하는게 좋다. 아름다운 인도양의 수평선이 보이고 식민지적인 분위기가 있는 길은 걷는 것도 꽤 기분 좋은 일이다.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 개가 있는데, 우선은 시계탑이 있는 현재의 메인 게이트를 기점으로 해서 걸어 보자.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정면에 실론 은행이 있고 오른쪽에는 테니스 코트가 있다. 이 테니스 코트 옆으로 난 오르막길을 오르면 시계탑으로 통하는 길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탑에는 올라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성채로 오르면 아까 보다 덩 웅대하게 펼쳐지는 인도양의 수평선 멀리로 거대한 유조선이 천천히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옛날에 부산했던 바다의 실크 로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이곳을 지나는 유조선의 탱크가 우리나라까지 오간다는 생각을 하면 세계가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실감나다. 이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곶의 끄트머리에 있는 등대로, 높이가18m나 된다.
이 앞의 오로라 요새에서 성채 위를 걸을 수는 없게 되어 있어 되돌아 내려오지 않으면 안된다. 거기서 재판소와 작은 시장을 지나면 성채의 또 다른 출입구인 올드 게이트가 있다.지금은 이용하는 사람이 적지만 이곳이 원래 성채의 정문이다. 이끼가 무성한 윗 부분에는 네덜란드 통치시대의 동인도 회사 마크인 VOC가 새겨져 있다. 이곳을 빠져 나오면 오른쪽이 어항인데 아침나절에 나오면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는 어선들의 분주한 모습을 볼 수있다. 계속 걷다 보면 너무나도 식민지적인 그레이트 교회가 나타나고 바로 옆에는 뉴 오리엔탈 호텔이 있다. 그리고 철도 역을 향해 들판을 가로지르면 작은 강 하구에 버터플라이 브리지라 불리는 이상한 모양의 목제 다리가 걸려 있다. 이곳을 건너면 빅토리아 공원이다. 넓지는 않지만 그네와 미끄럼틀 등이 있어 남녀노소가 즐겨 찾는 휴식처이다. 여기를 똑바로 지나면 철도 역 앞의 간선 도로가 나온다. 이 길의 서쪽 방향으로는 보석 상점이 늘어서 있는데 가게 앞에서 은세공을 하고 있는 모습도 불 수 있어 흥미롭다. 동쪽으로 가면 철도 역에 인접하여 버스 터미널, 은행, 경찰서 등이 있다. 하루종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갈레의 중심지이다.
◈ 갈레의 유물을 전시한 갈레 국립박물관 (Galle National Museum) : 뉴 오리엔탈 호텔 옆, 조금 높은 지대에 있는 조촐하고 아담한 건물이 갈레 국립박물관이다.콜롬보의 박물관에 비하면 훨씬 작고 협소하지만 오히려 갈레에는 아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관내에 진열하고 있는 것은 도기와 식민지시대의 화폐, 가구 등으로 특별히 가치가 있는 것은 없어 보이지만 동전을 잘 들여다 보면 옛 통치 국의 것 말고도 아랍이나 중국 것도 있어 화려한 무역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두침침 한 관내는 썰렁하지만 지금은 조용한 마을이 되어버린 갈레와 잘 어울린다.
마타라 (MATARA) 종착역의 마을인 마타라는 콜롬보에서 남쪽으로 160km 내려간 지점에 있다. 여기서 스리랑카 최남단인 돈드라 곶까지는 약 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 때문인지 갈레보다 한층 남국의 정취가 강해 느긋한 느낌을 받는다. 닐왈라 강이 인도양으로 들어가는 하구에 펼쳐진 이 마을은 식민지 시대에는 다른 해안 지역 마을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 사람들에 의해 성이 세워지고 항구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그 잔해로, 오래된 가로수와 강을 사이에 둔 양쪽에는 각각 두개의 성채가 남아 있다. 그러나 왠지 식민지적인 인상이 그다지 강하게 풍겨오지는 않는다. 콜롬보나 갈레처럼 강력한 정책 아래 지배 받지는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은 열대에 사는 자기들의 생활 페이스를 아주 자연스럽게 지속해 나가고 있다. 외국인에게 지배 받은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덕을 볼 것도 없고, 모두 하루하루의 생활을 충실히 꾸려나가고 있다. 식민지시대의 건물에 사는 사람과 허술하고 소박한 집에 사는 사람 등 이런 여러 계급과 스타일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고 있는 것이다. 작은 시골 마을이니까 오히려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마타라다운 모습을 이루어낸 것이다.
해안에 있는 마을이지만 리조트의 흥청거림보다는 리조트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소박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사람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마타라에서는 번잡스러운 버스 터미널 주변과 야자수 정글에 흩어져 있는 촌락들, 내륙 쪽의 논농사지대까지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좋다.
탕갈라 (TANGALLA) 탕갈라는 스리랑카 남해안의 유일한 리조트 지역이다. 이곳의 베스트 시즌은 7월과 10월로 남서해안과 북서해안의 리조트가 높은 파도로 폐장될 때 그 사이를 메우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 그래서 이 해안도 히카두와나 벤토타, 바티칼로아 등을 능가할 만한 특별한 매력은 없다. 바위도 많고 시즌 이외에는 파도가 상당히 높다. 하지만 조용하고 한가로운 리조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자체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평범한 남해안의 마을이지만 그 마을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듬성듬성 야자수가 자라고, 그 해변을 따라 숙소가 늘어서 있다.
탕갈라의 마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버스 터미널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와 그곳에서 동서로 이어진 해안가 도로에 펼쳐진 리조트 지역이다. 리조트라고는 하지만 호텔이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로가에 비교적 작은 호텔과 게스트 하우스가 흩어져 있을 뿐이다. 버스 터미널 옆에는 시장이 있다. 작은 시장이지만 야채나 생선, 이 주변의 특산물인 커드 등을 팔고 있어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탕갈라의 주방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 앞 반대편에는 영화관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큰 창고 같지만 입구에 상영 프로그램 간판이 보인다. 여기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 편으로 가보자.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3분 정도 가면 바다가 나오는데 이 일대 해안의 탕갈라의 어항이다. 방파제로 둘러쳐진 곳에 어민의 작은 보트가 흔들리고 있다. 또 여기 슈뇌르켈에도 아주 좋은 포인트이다. 숙소에서 3점 세트를 빌려 도전해 보는 것도 좋다.
탕갈라는 네덜란드 식민지시대에 성채가 세워진 적도 있는 마을이다. 어항 앞에 있는 탕갈라 레스트 하우스는 그 시대에 세워진 건물로 당시에는 행정부였다고 한다. 입구에는 네덜란드가 남긴 기념비도 있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집들도 대부분 네덜란드식 양옥이다. 레스트 하우스 앞의 두갈래 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보자. 한동안 가면 우체국이 나오고 그 건너편에 저수지가 있다. 이 부근에는 상점 등이 늘어서 있어 수수한 느낌의 탕갈라에서는 보기 드문 번화한 거리이다. 저수지 앞에서 만나게 되는 길을 오른쪽으로 5분 정도 가면 버스 터미널로 되돌아 온다. 이것으로 시내 일주가 끝난다.
◈ 시기리야 록의 축소판 물키리갈라 (Mulkirigala) : 탕갈라 남쪽에 있는 물키리갈라는 마치 문화삼각지대의 시기리야 록을 축소한 듯한 석굴 사원이다. 바위산 기슭에서 계단이 시작되어 바위의 갈라진 틈 같은 석굴로 이어진다. 석굴 안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벽화도 그려져 있어 작은 담불라 사원 같은 느낌이다. 바위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주위를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두드러진 것은 없지만 끝없이 펼쳐진 녹음이 아름답다. 이 곳 사원에서 발견된 고문서는 불교인들이 쓰던 옛날 말로 쓰여진 팔리 경전을 해독 해내는 단서를 마련해줬다.
함반토타 (HAMBANTOTA) 인도양의 동쪽으로 튀어나온 반도에 자리한 마을은 스리랑카의 소금 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함반토타는 본래 이슬람 항구란 뜻인데, 이름대로 14세기 경에 이 지역에 들어온 아랍 상인들이 항구를 열었다. 그 뒤로 이 마을에는 회교도들이 많이 살아 마치 중동의 어느 마을 같은 느낌이 든다. 비탈길을 이슬람의 흰 모자를 쓴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판자비 풍의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가게를 지키고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회교 사원에는 기도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모두가 스리랑카답지 않은 이국적인 정서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곶에 의해 만들어진 만은 파도가 조용하고 활처럼 길게 이어지는 모래사장을 갖고 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느긋하게 어선이 떠 있는 풍경을 바라보면 조용한 시가지와 잘 어울려 왠지 묘하게 편안해진다. 또 최근 들어 마을 동쪽에선 평온한 만과 아름다운 해안선을 이용해 리조트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호텔은 하나뿐이지만 스리랑카에서도 손꼽히는 윈드 서핑 포인트로 불리고 있다. 함반토타는 곶이 만들어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완만한 커브를 그리는 만에 있는 어항에서 내륙을 향해 펼쳐지는 마을이다.
버스터미널 주위에는 작은 공터가 있는데 바다 쪽과 좀 높은 내륙 쪽에 일렬로 상점과 식당이 늘어서 있다. 바다 쪽 상점과의 사이로 난 길이 메인 로드로 이름과는 다르게 꽤 한적한 도로이다. 번화가라 부를 수 있는 곳은 메인 로드에서 내륙 쪽으로 약간 더 들어간 바자르 스트리트 정도이다. 이 거리와 수직으로 교차되는 길 양편에는 잡화점이 늘어서 있고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염전이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해수를 가져 다가 증발시켜 소금을 만드는데 이것은 대단한 중노동이다. 곶으로 가려면 버스 터미널까지 되돌아와 생선 냉동설비가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꺾어진 완만한 비탈길을 올라가야 한다. 곧 모스크가 보이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더 가야 한다. 언덕으로 된 곶 위에는 우체국과 실론 은행, 레스트 하우스 등이 있고 14세기 경에 만들어진 등대와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폐허가 된 탑이 있다. 멀리 피코크 비치가 바라다 보이는 레스트 하우스도 있어 산책 길로 그만이다. 또 이 곶에서 이어지는 마을 최남단의 무르라이 로드는 해변에 반쯤 파묻힌 듯한 길로 소박한 어민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다.
◈ 바다의 또 다른 선물, 염전 (Salt Pans) : 함반토타 마을 북쪽, 육지로 조금 들어선 곳에 거대한 염전이 있다. 함반토타는 유명한 소금의 산지이기도 하다. 해변에서 내륙 쪽으로 1km정도 가면 도로 양쪽에 염전이 펼쳐져 있다. 소금은 굉장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채취되는데, 얇은 접시 모양의 웅덩이에 운반되어 온 바닷물을 넣은 다음 자연건조 시킨다. 이 지방의 강렬한 태양과 건조한 기후 덕분에 생긴 것이라고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이곳은 함반토타의 곶을 목표로 건너온 말레이인이 만든 마을로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이 바다보다는 바닷물과 떨어질래야 떨어 질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렇게 자연건조를 통해 얻어진 소금은 전용 철도로 소금 공장까지 운반되어 제품이 된다.
팃사마하라마 (TISSAMAHARAMA) 덩치 큰 가로수가 늘어선 길, 물을 가득 안고 있는 고대의 저수지, 그 너머로 빛나는 하얀 탑. 동물보호구로 가는 사파리 기지로 유명한 팃사 마하라마는 그런 전원 속에 있다. 마을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어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대에도 팃사에는 이미 왕궁이 있었다. 마을에 흩어져 있는 탑과 저수지가 그 흔적이다. 주위에 펼쳐지는 정글 속에도 고대 유적이 잠든 채로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현재의 팃사 마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고대 도시로서가 아니라 동물의 왕국으로 가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어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습관이 이땅의 많은 자연을 보존 시켜 주었다. 이 작은 섬나라에는 놀랄 정도로 많은 수의 동물이 살고 있다. 이것은 스리랑카 여행의 핵심이 될 수도 있는 매력이다. 전세계에서 많은 관광객이 이 작은 마을에 와서 대자연을 만끽하고 돌아간다. 팃사는 그 한가로운 전원의 모습과는 달리 관광 마을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마을 그 자체는 동물 왕국으로 가는 거점의 역할로만 이용되고 있다.
국립공원이나 보호지역 등 귀중한 자연을 지키기 위한 경계선은 철저하다. 하지만 자연이 그 틀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숲도 동물도 자유롭게 존재하고 있다. 팃사는 인간이 만들어낸 마을이지만 자연의 일부이기도 하다. 짙은 녹음에 둘러싸여 숲속에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저수지에는 물새나 악어가 놀고 그 물가에서 사람들이 세탁이나 목욕을 하고 있다. 자연과 공존하는 마을 팃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아침 일찍 사파리를 즐긴 뒤에는 이 마을 교외를 천천히 걸어 보는 것도 좋다.
카타라가마 (KATARAGAMA) 카타라가마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겐 정신적인 최남단이다. 실제 지리적인 최남단은 100km 이상 서쪽에 떨어져 있는 돈드라 곶이지만, 카타라가마에서 남쪽으로 더 나아가는 도로가 없어 섬의 막바지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최남단이라는 이유는 그것 뿐만이 아니다. 이 곳은 스리 파다와 어깨를 겨루는 스리랑카 제일의 성지이다. 이 땅에 사는 카타라가마 신은 어떤 기도든 들어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신의 인기는 대단하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많고 많은 괴로움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많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모여든다. 카타라가마로 가는 길은 해방의 길로 여겨져 이 열대 섬의 사람들은 카타라가마에 참배하는 것을 통해 해방 감을 얻는 것이다. 요즘 이 지역에는 정부의 주도하에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모든 종교를 초월한, 일대 종교 공원 도시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스리 파다가 불교도에게나 힌두교들에게나 또 그 밖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나 똑같이 성지이듯이 말이다.
◈ 카타라가마 신전의 푸쟈(Pujas) 카타라가마 신은 모든 스리랑카 사람들의 희망이어서 전국에서 순례자가 찾아온다. 그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푸쟈를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아 오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신성하게 여겨지는 의식에 참가하는 것이니 적어도 공물은 가지고 가도록 하자. 하루에 3번 푸쟈의 시간이 되면 격렬한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문이 열린다. 그러면 밖에서 기다리던 순례자들은 줄줄이 안으로 들어가 신전은 금새 꽉 차고 만다. 정면에는 공작을 탄 카타라가마 신상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공물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왼쪽으로 서고 공물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은 오른쪽에 서게 된다. 북소리는 점점 더 크게 울리고 게다가 나팔소리까지 뒤섞여 실내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진다. 이윽고 신관이 나타나 사람들이 가져온 공물을 하나하나 받아 들고는 그 반은 카타라가마 신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성스러운 재를 뿌려 되돌려 준다. 공물을 가지지않은 사람들에게는 손바닥에 다른 신관이 성수를 뿌려준다. 이렇게 해서 참배 의식이 끝난 사람은 오른쪽에 있는 문으로 줄줄이 나간다. 돌려 받은 공물 중에서 조금은 먹고 나머지는 거리의 걸인이나 소에게 나누어 준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재를 눈썹에 발라달라고 하면 푸쟈는 끝이 난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밀도 짙은 사람들의 기도 공간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많을 것이다.
미힌탈레 (MIHINTALE) 미힌탈레는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성지이다. 1934년, 정글 속에서 잠자고 있던 유적군이 발굴된 이래 스리랑카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의 하나로 여겨지며 순례자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특히 불교 전래의 날이라 전해지는 매년 6~7월에 걸친 포야 데이에는 이곳에서 포손 축제가 열려 수천 명의 신자가 각지에서 몰려든다. 그들은 단체로 미힌탈레 산 정상에 있는 바위산에 올라 만월을 향해 절을 올린다. 그러나 평상시의 미힌탈레는 조용한 농촌이다. 시가지라고 불릴 만한 곳도 없고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교차로 주변에 작은 집이 드문드문 세워져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천천히 걷기 시자해 마하세야 대탑으로 난 계단을 오를 때는 플루메리아의 달콤한 향이 난다. 부다 플라워라 불리는 이 꽃이 성지로 향하는 수많은 계단을 오르는 피로를 씻어주는 것이다. 지금도 스리랑카는 불교국이라 자부할 만큼 불교도가 많다. 불교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스며 들어 있고 많은 관습과 금기를 만들어 왔다. 스리랑카 사람들의 온화한 생활 발식도, 여행객에게 친절한 따뜻함도 이곳 미힌탈레에서 시작된다.
마탈레와 아루비하라 (MATALE & ALUVIHARA) 약 2시간 남짓한 산책으로 번화가를 전부 구경할 수 있는 작은 마을 마탈레. 이 마을 사람들은 아직 외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이렇다 할 특색도 없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만이 존재하는 듯한 마을이다. 그러나 마탈레에도 자랑거리가 있다. 이 마을 일대는 스파이스의 산지로서 스리랑카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만이 존재하는 듯한 마을이다.
그러나 마탈레에도 자랑거리가 있다. 이 마을 일대는 스파이스의 산지로서 스리랑카 사람들의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다양한 스파이스가 마탈레의 풍부한 물과 혜택 받은 기후 아래서 자란다. 그리고 마을 북쪽에 있는 석굴 사언 아루비하라는 기원전 88년, 그때까지 구전되어 왔던 석가의 가르침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문자화 되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절이다. 또 하나, 연녹색 산 계곡에서 흰 비단을 펼친 듯 떨어져 내리는 폭포 휴나스 폴. 그 하나하나가 여행객의 마음을 끄는 매력인지도 모른다. 소박한 사람들이 있고 역사나 자연, 산업의 측면에서도 자부심을 가질 만 하기에 참으로 행복한 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리파다 SRI PADA (ADAM’S PEAK) 스리파다는 스리랑카 제일의 성지로서 오늘날 산 정상에 남아 있는 성스러운 족적들은 종파를 초월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맑은 날이면 라트나푸라에서 북동쪽 하늘로 보이는 세 개의 바위산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뾰족한 산이 바로 스리 파다 (아담스 피크)이다. 라트나푸라의 북동쪽, 누와라 엘리야의 남동쪽에 있으며 높이는 2,243m이다. 12~3월이면 해가 져서 어두워질 무렵에 스리 파다는 커다랗게 검은 그림자를 드러내며 그 정상에 관을 씌운 것처럼 조명등의 불빛이 빛난다. 이때 많은 순례자나 여행객이 산에 올라 신의 발자국 앞에서 기도를 드린다.
스리랑카의 불교도는 이 족적을 부처가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남긴 것이라 믿고 있으며 힌두교도는 힌두 신의 것이라 믿고, 또 이슬람교도는 아담이 지상에 내려왔을 때의 것이라고, 그리스도교도는 아담이 낙원에서 추방되어 지상에 내려 왔을 때의 것이거나 남인도에 처음 온 사도 성 토마스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느 민족에게나 각각의 자랑거리가 있고 종교가 있어서 때로는 그것이 충돌, 대립하는 일도 적지 않다. 스리랑카는 다민족 국가로서 각 민족의 종교가 다른 까닭에 대립하는 일도 있지만 이고 스리 파다에서는 성지를 공유하는 종교를 초월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3월의 순례 시즌이 끝날 나비가 무리를 지어 날아오기 때문에 일명 사마날라 칸데(사마날라=나비)라고도 불린다. 무렵이 되면 그 후 바람이 강해지고 구름이 끼기 시작해서 사람들의 순례가 끊어지면, 이번에 동물들이 이 산을 오른다고 스리랑카 사람들은 말한다. 스리 파다는 종파를 초월하여 어떠한 생명에게도 경계선을 긋지 않는 성스러운 산일지도 모른다.
홀튼 플레인즈와 월즈 엔드 (HORTON PLAINS & WORLD’S END) 캔디, 누와라 엘리야를 둘러보면 스리랑카의 구릉지대가 맑고 싱그러운 자연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표고 1,000m가 넘는 산들이 이어진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남극의 태양과 풍부한 물의 혜택을 받아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정글도 적지 않다. 구릉지대이면서도 그런 우아함과 색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곳이 월즈 엔드이다. 월즈 엔드는 땅끝이란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수직으로 1,000m이상 되는 낭떠러지 절벽이다. 그 절벽 위에 섰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전망은 그림을 보듯이 아름답지만 바로 아래로 눈을 돌리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깊은 계곡이 현기증을 일으킨다. 또 이곳은 안개로도 유명한 지역인데, 자욱한 안개에 가려 전망조차 보이지 않게 되면 천 애의 절벽 위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공포만이 느껴진다. 또한 이 월즈 엔드 북쪽에 있는 홀튼 프레인즈는 표고 2,000m의 고도에 펼쳐진 초원으로, 세계적으로 독특한 식물이 많아 연구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월즈 엔드와 홀튼 프레인즈, 교통 수단도 잘 되어 있지 않은 구릉지대의 벽지는 아름다움 뿐 아니라 대자연의 위엄을 여행객에게 가르쳐 준다.
하푸탈레 (HAPUTALE) 하푸탈레는 전망이 좋기로 유명한 산간 마을이다. 특별히 볼거리는 없지만 웅대한 산들이 펼치는 절경과 신선한 공기가 매력적이다. 부근의 산들은 푸르름 일색으로 펼쳐진 차 밭으로 유명하다. 하푸탈레는 차의 집산지로도 일 년 중 대부분의 아침나절은 지독한 안개에 싸여 있고, 열대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추위가 느껴지는 곳이다. 그러나 이 안개야말로 좋은 차를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다. 안개는 차나무에 신선하고 깨끗한 수분을 주고, 곧 이어 얼굴을 내미는 태양 아래서 차 잎은 신선하고 깨끗한 수분을 주고, 곧 이어 얼굴을 내미는 태양 아래서 차 잎은 신선하게 호흡한다. 그렇게, 해서 나오는 새 잎만이 최고급 홍차로 쓰이는 것이다. 언덕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상점은 경사진 주도로를 따라 줄지어 있다. 결코 넓은 마을은 아니지만 이 구릉지대 주변의 중심지로 꽤 붐비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으로 모여드는 사람은 신할라인 뿐만 아니라 홍차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인도 타밀인도 많다. 그들이 신봉하는 힌두 사원도 산길 도로변에 몇 채 있다. 안개 속에 떠 있는 힌두의 신들을 모신 사원 지붕은 이상하고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하푸탈레에 오면 꼭 산에서 떠온 맑은 물로 탄 홍차를 마셔보자. 최고급 브랜드 티보다 훨씬 뛰어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반다라웰라 (BANDARAWELA) 널찍한 공동 운동장에서 축구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는 소년들, 한편에서는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운동장 너머로 보이는 영국풍 교회의 웅장한 모습이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다라웰라는 2시간 정도 걸어서 마을 안을 전부 돌아볼 수 잇고, 금방 익숙한 얼굴도 생기는 작은 마을이다. 표고가 1,230m나 되는 번화가에서는 푸르른 산들이 아주 멀리까지 내려다 보인다. 스리랑카 구릉지대의 마을 중에서도 가장 기후가 좋은 반다라웰라는 결국 열대에 사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동경을 갖게 하는 곳이다. 특별히 볼 만한 것이 없어 관광객에게는 매력이 없는 곳일지 모르지만 한가로이 사람들과 만나며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스리랑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오아시스가 된다.
엘라 (ELLA) 엘라는 남해안에서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가 막다른 곳에 있는 조용한 언덕 마을로서 경치가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또 지금은 바둘라, 반다라웰라, 웰라와야, 모나라가라에서 온 4개의 간선 도로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집들은 산과 차밭에 둘러 싸여 있으며, 비교적 편평한 장소를 골라 한적하게 여기저기 서 있다. 교통의 요지라고는 하나 버스를 제외하면 차의 왕래도 적어서 마을 걷고 있으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들린다. 높은 지대인 탓에 기온이 낮아 도저히 열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곳이다. 아침에는 꽤 추워 가디건이 필요하다. 마을에는 유적이나 구경할 만한 곳이 없고 시장도 없지만 편히 지내기에는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산길을 산책하며 새들의 노래를 듣고, 화초를 보며 누와라 엘리야와는 다른 스리랑카풍 피서를 즐겨 보자. 또 이곳은 나비가 많기로 유명하다.
바둘라 (BADULLA) 바둘라는 작은 종착역이 있는 마을로 스리랑카 중앙부에 이어진 산 사이를 흐르는 바둘라 강이 만든 좁은 분지이다. 표고는 약 680km로 평온한 전원 풍경 속에 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자랑은 마을 변두리 푸르른 계곡에 있는 커다란 폭포로 스리랑카 유수의 아름답고 장대한 폭포라고도 한다. 그러나 구릉지대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이 곳까지 여행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식료품점과 일용 잡화점이 대부분인 중심 도로에는 목재를 실은 코끼리가 한가롭게 걸어가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소박한 마을이다. 버스로 언덕길을 몇 번 넘어서, 혹은 기차로 스위치 백을 하며 힘들게 이 산간 벽지 마을에 도착해 보면 의외로 약간 놀라게 된다. 지금까지 거쳐온 마을과는 분명히 다른 도시의 모습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 홍차의 집산지로서 급속히 발전한 이곳 바둘라에는 당시 만들어진 폭 넓은 도로, 세련된 교회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도로변에 있는 상점 간판은 영어는 거의 없이 대부분 신할라 문자이고, 영국인이 세운 교회도 화려 했던 지난날을 잊은 듯 외로이 서 있다. 소박함과 도시적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요소가 공존하는 바둘라의 비밀은 이러한 역사에 있다.
◈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둔힌다 폭포(Dunhinda Falls) 마을 북쪽으로 6km, 시내를 흐르는 바둘라 강이 60m의 낙차를 두고 떨어지는 대폭포이다.폭포 입구에서 버스를 내리면 목재 세공품이나 음료, 간단한 식사를 팔고 있는 작은 가게가 있고, 가게 반대편 좌측의 좁은 길을 1Km 정도 내려간 곳에 폭포가 있다. 산길이지만 찾기가 쉽고, 도중에 음료수를 팔고 있는 작은 오두막도 두 채 정도 있다. 이곳에서 걸어 3분 정도 더 가면 왼쪽 계곡으로 폭포를 볼 수 있다. 울창하고 푸른 나무들 사이로 은색의 두꺼운 천을 두른 듯한 물줄기를 감상하며, 점차 커지는 폭포 소리를 들으며 걷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폭포까지는 내리막길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이다. 용소 앞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으나 아래까지 내려가 보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다. 가까이서 올려다보는 폭포는 건기 일 때도 꽤 많은 수량이 떨어져 실로 호쾌한 모습이다. 용소에서 물놀이를 즐기기엔 너무 차가우니 물가에서 노는 것이 좋다. 자연을 만끽하고 싶은 사람은 도시락을 갖고 가서 근처에서 먹도록 한다. 또 폭포 앞에서 갈라진 길을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천으로 싸 감춘 불상을 동굴에 안치한 승려의 수행장을 견학 할 수 있다.
웰라와야와 부두루바가라 (WELLAWAYA & BUDURUVAGALA) 불교에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그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스리랑카는 소승불교의 중심지이다. 문화삼각지대인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에 남아 있는 거대한 유적들은 거의 소승불교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스리랑카에도 대승불교가 유행했던 시기가 있었다. 정글 속에 남아 있는 고대의 유적 부두루바가라가 그 증거이다.
기원전 1세기, 불교계에서는 ‘대승불교운동’ 이 일어난다. 단순히 자신만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제하자는 것이 대승불교이다. 대승이란 큰 탈 것 이란 의미이다. 대승불교는 많은 경전과 불상을 만들었으며, 7세기 경에는 밀교가 생겨 났다. 밀교는 중국으로 전해지고 우리 나라를 거쳐 9세기에는 일본으로 건너 갔다. 우리 나라의 불교는 대승불교 이다.
8세기 중반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 시대에 대승불교의 세계적 근거지였던 이 도시에는 중국에서 승려가 찾아와서 많은 경전을 가지고 돌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12세기에는 파라쿠라마 바후 1세에 의해 대승불교운동이 탄압을 받으며 점차 소멸되어 갔다. 아누라다푸라에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은 약간 무너진 다고바(아바야기리 대탑) 하나뿐이다. 이에 비해 부두루바가라에는 지금도 분명한 윤관이 남아 있는 거대한 석불군이 있다. 바위면에 조각된 불상들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던지고 있다. 부두루바가라 석불로 가는 기점이 되는 웰라와야는 간선 도로가 교차되며 생긴 작은 마을로서 도보로 5분 정도면 마을 밖까지 나갈 수 있는 작은 규모이다. 석불은 이곳에서 몇 킬로미터 더 들어간 정글에 있다. 도시와는 거리가 먼, 게다가 인적이 드문 이곳에 어떤 이유로 석불이 잠들어 있는 지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라트나푸라 (RATNAPURA) 보석의 섬으로 유명한 스리랑카에서도 라트나푸라는 가장 대표적인 보석의 산지이다. 라트나는 보석을 푸라는 도시를 뜻한다. 이 지방에 가면 도처에서 채굴 현장을 볼 수 있다. 보석 채굴 현장은 논이나 숲속에 간단하게 만든 오두막 같은 곳인데, 눈에 띄는 것은 물을 뿜어 올리는 펌프뿐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보석을 채굴하는 모든 사람들의 꿈과 욕망이 스며 있다. 라트나푸라는 보석이라는 화려한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남자들의 땀냄새 나는 마을이기도 하다. 스리랑카의 보석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서 이미 기원전 10세기에 솔로몬 왕이 시바의 여왕에게 스리랑카 산 루비를 선물로 보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며,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신밧드가 배를 타고 이곳 라트나푸라로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13세기 중국에서 돌아가는 길에 이 나라에 들른 마르코 폴로도 그의 여행기 동방견문록 안에서 실론 섬의 보석이 얼마나 훌륭하고 귀중한 것인 지를 기록해 놓고 있다. 찰스 황태자가 다이애나 비에게 약혼 반지로 보냈던 스리랑카 산 블루 사파이어는 지금도 유명하다. 스리랑카의 역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보석. 보석을 더듬어 올라가면 그 끝에 라트나푸라가 있다. 라트나푸라에는 비가 많이 온다. 북쪽에 있는 성스러운 산 스리 파다를 중심으로 병렬한 산들이 몬순을 막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산으로 인해 많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지금도 라트나푸라는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쿠루네갈라와 야파후와 (KURUNEGALA & YAPAHUWA) 쿠루네갈라는 1293~1341년, 비록 48년이란 짧은 세월 동안이긴 하지만 신할라 왕국의 수도였던 화려한 역사를 가진 곳이다. 엘레펀트 록 시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고대의 도시는 왕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코끼리 모습의 거대한 바위산이 지금도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 마을의 바로 옆에 우뚝 서 있다. 쿠루네갈라의 도로 교차점에서 북쪽으로 난 푸탈람로드를 거쳐 버스로 약 1시간 반 정도 가면 마호라는 작은 마을에 닿는다. 마을 끄트머리에 중세시대의 돌 요새로서 유명한 야파후와가 있다. 펼쳐진 논길에서 보는 거대한 바위산은 시기리야의 바위산과 아주 흡사하다. 공들여 새긴 돌조각 계단이 바위산으로 이어지고, 그 위에 있는 문을 빠져 나가면 정상까지 길이 나 있다. 급경사의 돌계단 다음에는 큰 바위와 바위의 좁은 틈 뿐이니 맨질 맨질 한 바위를 기어 올라가듯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고생을 하고 나면 역시 이곳이 과거에 요새였다고 실감하게 된다. 이 야파후와의 바위산은 1272~1284년 사이에, 짧기는 해도 왕도의 중심인 왕궁이 있는 바위산으로 세력을 떨쳤던 시대도 있었던 것이다. 교통의 요지로 발전한 마을에 우뚝 선 쿠루네갈라 록과 논과 나무들 사이에 우뚝 선 야파후와. 이 두 옛 도읍을 여행하면 북에서 밀려 온 침입자에게 쫓겨 남하와 천도를 거듭한 신할라 왕조 백 수십 년의 역사가 떠오르게 된다. 그렇지만 지금은 쿠루네갈라나 마호나 마치 그런 시대가 없었다는 듯이 단순한 일상 생활이 펼쳐지는 마을이다. 신기하게 보일 외국인에게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거리를 오가며, 정원을 청소하고, 장사에 열중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면 이 옛 도읍들이 지금은 사람들의 생활 무대로서 조용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프나와 페닌슐라 (JAFFNA & PENINSULA) 스리랑카의 최북단, 작은 지협을 따라 겨우 연결되어 있는 듯한 곳이 페닌슐라이다. 인도와는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불과 100km의 거리이다. 이 해협을 건너 많은 인도 사람들이 이동해 왔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기원전부터 남인도에서 많은 타밀인이 이곳으로 건너와 원주민인 신할라인과 싸움을 반복해 왔다. 그러나 그때의 싸움은 서로 다른 왕조 간의 다툼이었다. 민족간의 갈등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서로 교류를 계속해 왔으며 사실 신할라 왕조의 역사에 남인도에서 온 왕을 맞은 일도 있었다. 페닌슐라가 결코 타밀인만의 땅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페닌슐라의 중앙부에 자후나가 자리잡고 있다. 자프나는 스리랑카 제2의 도시로 스리랑카를 구성하는 민족 중 신할라인 다음으로 많은 타밀인들이 만든 도시이다. 두 민족은 대립하고 있어 스리랑카의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다. 16세기까지 이곳은 타밀인들이 세운 자후나 왕국의 도읍이었다. 힌두 문화의 특색이 강해서 남부의 마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스리랑카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흥미로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지금은 우선 이 땅에 평온한 시대가 돌아오길 바라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
동해안 (EAST COAST BEACHES) 스리랑카의 동해안에는 새로 개발된 비치 리조트가 흩어져 있어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아름다운 바다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지역도 북부와 마찬가지로 타밀인이 대부분을 차지 하고 있다. 큰 도시로는 자후나 다음으로 타밀인이 많은 바티칼로아와 스리랑카에서 가장 긴 강인 마하웨리 강하구에 있는 트링코말리 등이 있다. 또 동해안은 남서해안과는 반대로 5월~9월에 걸쳐 가장 좋은 날씨가 된다. 그 외의 시기에는 파도가 높다. 이 동북 몬순의 영향으로 스리랑카는 1년 내내 최고의 해변 생활을 보낼 수 있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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