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바다
김미자
TV에선 강원도 특집으로 ‘동해안 너울 피해’ 대책에 대해 네 사람의 연사가 나와 토론중이다. 뒤로는 태풍이 쓸고 간 삼척 속초항이 보인다.
나는 고향을 소개할 때 내 고향엔 바다가 있고 부모님이 계신다고 말한다.
객지에 살고 있는 나는 대 소사가 있어 고향에 내려가면 고향집 다음으로 바다를 꼭 둘러보고 온다.
바닷가에 가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해 저문 바닷가에 물새 발자국 지나가던 실바람이 어루만져요... 아~ 세월은 잘 간다 아이 아이~ 야~ 나 살던 곳 그리워라...
노래를 부르고 바닷바람을 쏘이고 나면 가슴이 확 트인다.
향긋한 샛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강아지 마냥 쏘다니던 바닷가
뽐을 뽑아 그 뽀얀 줄기에 단맛을 알고, 불콩을 따 치마 섶에 담고 열구를 실에 꿰어 목에 걸고 다니던 곳.
지나가던 멸치떼도 파도에 쓸려 나오고 가을엔 주먹만한 도루묵 알도 나왔다.
그래서 올해 동창회도 바다가 보이는 “또 거기서 하지 뭐”.
우리는 갯벌을 메꿔 대형 주차장과 건물을 올린 ‘○○프레야’ 에서 모였다.
그런데 갈 때마다 한쪽 옆구리가 씁쓸해지는 것은 왠일인가.
우리가 멱 감고 재잘대며 팬티를 말리던 한적한 곳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찌 된 일인지 바닷가 모래가 있는 곳만 놔두고, 해당화가 피어나던 곳까지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숨 쉬는 곳까지 바싹 방파제를 만들어 해안도로를 만들었다.
내 기억으로 내 인생에 가장 허망했던 일은 1969년, 가을이 끝날 무렵 해일이다.
3일 휴교령이 내렸는데 나는 5일간 학교를 안 가고 멍하니 세상을 바라보았다. 길이란 길은 다 끊어지고 바다 가까이 얼굴 내민 집들은 다 쓸어갔다.
여기서 옛날 얘기처럼 내려오는 큰 너울에 대한 이야기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홍수가 진다 해 바다가 넘치며,
석 달 가뭄이 들었다고 어찌 바닷물이 줄겠는가?
그러나 아버지도 뜰에 나가 서성이며 FTA 같은 한숨을 내 쉬어야 할 때가 있었으리라.
바다도 그의 뜰에 기대어 하얗게 내 뿜는 파도를 본다.
작년 가을 상어도 바다의 뜰에 누워 생을 마감 하였다.
거북이 저어새 도요새도 바다의 뜰이 아니면 어데다 알을 낳겠는가.
어른, 아이 모두 줄 맞춰 나와 한쪽 끝만 바라보던 영진항의 갈매기
점점 사라져 가는 모래.
하지만 파도는 바닷물에 수 억년 씻긴 추억의 모래를 해안도로 넘어서 실어다 놓을 것이다.
그 백사장으로 달이 내 손을 끌면 나도 등을 펴고 따라 나설 것 같아요. 아버지.
119
김미자
싸이렌 소리 퇴근길을 가른다
소방차 아파트 지나 우리집 쪽으로 향하고 있다
길에서 뛰어나온 도나 할머니 ‘아줌마 불났어!’
옷가지 가지러 가느라 겹쳐진 전기 매트 밟은 것이 맘에 걸렸다
고가 사다리 뚫고 통로에 서자
소방관들이 막아선다
불길 앞에서
살아보려고 했던 일들이...
나무등걸같이 서있는 내 가슴이
제발.
대문이 열렸다. 연기가 사라졌다
분명! 백지알 같은 눈들은 윗층을 보고 있었다
나는 풀석 주저앉고 말았다
그림자
김미자
독감이다. 이불을 쓰고 쿨럭이다 누렇게 말라붙은 밥 밀쳐두고 두부를 사러간다
가로등이 긴 목을 빼고 서있다
빈 들판이다.
눈도 못 뜬 사이 구름은 흘러 들어와 목 돌아간
이지러진 달떴다
집
김미자
유리가 집을 지었다
아마 청평에서 서울로 가던 길 그때 였을까
흠 많은 내 팔꿈치에 집을 지었다
그 후 유리와 같이 사는 동안
나는 이사를 세 번이나 다녔다
유리는 내 팔꿈치에서 휴식과
행복한 꿈을 꾸었을까
내가 아파하고
상처에 붕대를 감을 때
유리는 또 다른 자기 집을 걱정하였으리라
대합조개는 모래를 씹을 때 마다
뼈 속에 모래빛 문향을 넣어 집을 지었다는데
내 몸속에 들어와 뼈도 살도 되지 못한 유리 조각은
十자 길을 따라 오늘 집을 떠났다
첫 수확
김미자
오이를 여섯 포기 심었다
며칠 후에 가보니 가느다란 줄기 뻗기 시작했다
꽃 피우고 오이 달려도 오지 않는 비
아침 저녁 생수병에 물을 담아 문안인사해도 가시만 키워간다
오늘 아침 배꼽에 꽃을 달고 있는 손가락만한 오이를 땄다
루루! 싱그러워진 밥상
가운데 놓으며
자랑을 한다
아이, 써
땅이 타들어와 똥끝이 탔나보다
5月, 성산터 아저씨 댁을 찾아서
김미자
5번국도 오른쪽 밤나무 숲길을 오른다
가파른 언덕 삼밭을 돌자 아저씨 집은 보였다
누구랑 계세요
집사람하고
뒤뜰엔 며늘취들이 발발 거리고
서까래 밑에 집을 지은 무당새가 ‘쬬조로리리이’ 나왔다
댓돌 사이로 일가의 신발인 듯 가꾸어 세운 씀바귀 꽃이 환하다
사진첩 사이로 순하디 순한 잎새 같은 기억들이 따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