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수군을 관할했던 통영 통제영 중영관아·옥터서 김기량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순교
그런데 정2품 무관인 병마절도사(약칭 병사)가 관장하던 병영보다 품계가 한 단계 낮은 정3품 외관 수군절도사(수사)의 군영인 수영 순교지가 더 많다는 점이 이채롭다.
이어 1869년에도 부산 동래 수영 출신 신자 8명이 통제영에 끌려와 참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1887년 경상우수영이 있던 거제에 신앙의 씨앗을 뿌려 ‘거제의 사도’가 된 윤봉문(요셉, 1852∼1888)이 거제에서 잡혀 통제영에서 문초를 받고 이듬해 2월 진주진영으로 이송돼 순교했다.
이처럼 1895년 폐영되기까지 기록이 남아 있는 순교자만 9명이 피를 흘렸고 더 많은 신자가 잡혀 와 혹독한 문초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증거한 통제영은, 한국 교회의 빛나는 순교성지가 됐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음에도 여느 때처럼 무역하러 동료들과 함께 통영 바다에 나갔다가 그곳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된다.
통영 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음에도 굳게 신앙을 지켰고, 통영 관장은 대구 경상 감사에게 이 같은 사실을 보고한다.
경상 감사는 “김기량 일행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일행은 관아 포졸들에게 혹독한 매질을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목숨을 부지하자 관장은 이들을 모두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한다.
이날이 1867년 1월로, 관장은 특히 김기량에겐 교수형을 집행한 뒤 가슴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예향답게 소박하고도 운치 넘치는 항구 통영의 동피랑 벽화 골목을 지나 세병로로 들어서니 언덕배기에 그 유명한 ‘통제영’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헐려 2013년까지 13년에 걸친 복원공사 끝에 겨우 3분의 1밖에 되살리지 못했다고 하는데도 세병관을 중심으로 좌우에 운주당과 경무당, 병고, 주전소, 열두 공방 등 관아와 부속 시설이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면적만 4만 6638㎡에 이른다.
복원이 잘못 이뤄져 중영청 앞 담장 축대 바로 밑에 세워져야 할 건물이 위에 지어져 버렸다. 옛 통영세무서 자리로, 지금의 통영시 간창골1길 64다.
지금의 통영시 향토 역사관 아래에 있는 통제영 관리사무소 앞 공터와 길 주변인데, 그 정확한 위치는 통영시 세병로 111로 고증되고 있다.
또한 증거 터나 순교 터에 대한 표석 설치나 증거자나 순교자에 대한 현양 운동 또한 필요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기획은 평화신문 창립 26주년을 맞아 시복을 앞둔 124위의 신앙과 삶을 순교 현장에서 체험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취지에서 이뤄졌다.
윤의병(바오로, 1889~1950?) 신부의 박해 소설 「은화」(隱花)처럼 ‘숨은 꽃’이 드러났고,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들이 살아간 행적과 올곧은 믿음 살이, 순교 비화, 새로운 순교ㆍ증거 터도 밝혀졌다.
물론 신앙을 버린 배교자도 있었고, 가혹했던 박해자들의 행적도 낱낱이 드러났다. 그랬기에 마치 ‘꽃과도 같은’ 순교 사화를 하나하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취재 여정은 특별한 눈물, 특별한 감동을 안겼다.
124위의 시복이 단순한 시복으로만 끝난다면, 시복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순교자들의 거룩한 삶과 영웅적 성덕, 믿음의 모범을 본받아 내면화하고 그 덕행을 실천하는 순교 신심 현양이 선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124위 복자들의 삶과 덕행은 고스란히 묻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시복은 복자가 되는 당사자들을 위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오세택ㆍ백슬기 기자 |
출처: 평화와 착함 원문보기 글쓴이: 착한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