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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홍콩에서의 소년 시절
Kowloon on Map of HongKong
1950년, 내가 퇴학 당한 후 처음 2개월 동안, 아버지는 나를 어떻게 할 지를 몰랐다. 그는 나에게 창피를 주고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체벌을 했다. 나는 신홍콩의 언덕으로 도망갔다.
당시에 10살이었던 나는 형이나 누나들 처럼 집을 나가기를 원했다. 집을 나와 아름다운 산 속을 헤매면서 집을 나가 사는 환상에 사로 잡혔다. 그러나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몰랐다. 집을 나가는 꿈은 그저 아버지가 없는 곳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 된 것이었다. 홍콩 산의 마법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공포가 나를 괴롭혔다. 조금만 심하면 공포증에 걸릴 지경이었다.
어두움은 나를 놀라게 했다. 시골 미신에 의하면 어두운 땅 속에서 귀신이 나오는 데, 전생에 그에게 나쁜 짓을 한 원수를 갚기 위해서 라고 한다. 전설은 말 잘 듣지 않는 사람을 해꼬지 한다고 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쫓겨 났고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었으니, 나는 귀신이 나오기만 하면 나를 제일 먼저 혼낼 것이라고 믿었다.
어둠이 깔리는 저녁 때만 되면, 공포와의 괴로운 싸움이 나를 쇠약하게 했다. 나는 담요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내몸을 단단히 둘둘 감았다. 나는 그렇게 하면 악마로 부터 나를 보호 해 줄 것이라고 생각 했다. “용감 하자, 용감하자” 몸이 떨려서 달달 마주치는 이빨 사이로 나 자신에게 매일 저녁 중얼 거리다가 완전히 지쳐 빠져서 골아 떨어 졌다.
그러나 잠이 들었다고 항상 나를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았다. 잠이들면 악몽이 나를 괴롭혔다. 커다란 바위가 나를 덮치려고 빠른 속도로 굴러 왔다. 니는 죽어라고 도망 갔고 바위가 나를 깔아 뭉게려는 순간 절망에 빠져서 비명을 질렀다. 나자신의 비명에 잠에서 깨어 나면, 나는 땀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잠이 절실하게 필요 했지만 바위가 다시 나타날 까봐 무서워서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썼다.
나는 낮에 산속에서 잤다. 해가 떠 있으면 안전하게 느껴졌다. 귀신도 아버지도 깡패도 없었다. 하이킹은 1950년 대에 아직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에 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홍콩 사람들에게, 산에 가는 것은, 좋게 봐주어도, 어리석고 위험한 짓이었다.
나에게 산은 피난처 였다. 사람에 의해서 훼손 되지 않고 때묻지 않은 식물, 동물, 그리고 산속의 냇물은 더덜하게 흩틀어진 나의 신경을 안정시켜 주고 공포를 가라 앉혔다.
지도에도 없는 골짜기와 산등성이에는 매혹적인 층계 처럼 되어있는 작은 폭포, 높은 데서 물이 떨어져
부딪치는 소리를 내는 폭포, 버널 풀(vernal pools), 쫄쫄 흐르는 냇물, 푹사(자홍색 꽃), 예쁘게 핀 진달래꽃, 주홍색 새들, 열대 물고기들, 좋은 냄새 풍기는 소나무와 깔끔한 대나무 숲이 있었다.
나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연못에서 헤엄 치는 것을 배웠다. 개처럼 팔과 다리를 허우적 거리는 수영에서 개구리 처럼 헤엄치는 평형으로 발전 했다. 물에 들어 가는 데 자신이 생기자, 나는 수심이 깊은 물 구덩이에서 놀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작은 열대어, 검은 왕새우, 딱정벌레 비슷한 곤충이 서식하고 있었다, 열대어는 5,6마리가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면 재빨리 흩어 쳤다.
왕새우는 가는 갈고리발톱을 이용하여 바위사이를 부드럽게 헤엄쳐 나갔다. 그들은 물을 청소 했다. 검은
먹 색갈의 물벌레는 작은 잠수함 처럼 많은 다리를 바삐 움직여 돌아 다녔다. 물 밑은 무섭게 조용 했다. 작은 물 떨어지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숨을 쉬지 않고 견디는 동안, 나는 이곳을 찾아온 거인 처럼 느꼈다.
아버지는 나를 처벌하기 위해서 버릇처럼 굶겠다. 그런 때처럼 산에서도 배가 고퍼지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산딸기를 따 먹었다. 보라색이고 곱슬곱슬한 딸기는 작은 풀나무에 열리는 데 약간 달고 물기가 많았다. 나는 배가 부를 때 까지 이것을 먹고나서 가끔 설사를 했다.
때때로 못견디게 배가 고프면 마을 과수원에 가서 훔쳐 먹었다. 나는 파파야를 선호 했다. 잘익은 노란 파파야를 발견하면 들키지 않으려고 배를 땅바닥에 대고 기어 갔다. 나무 밑에서 일 이분 엎드려 있으면서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 했다. 그러는 동안 땅바닥에 밀착되어 있는 내 가슴속의 심장은 땅바닥을 때리듯 벌떡 벌떡 뛰었다. 맛이있는 것을 곧 먹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오는 흥분과 잡히면 어쩔가 하는 두려움 때문 이었다. 당시에 가난한 농부는 주저없이 도둑놈을 불구로 만들었다. 나는 도둑질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좀 건방졌다. 빈민촌에 산 이래 나는 발이 남다르게 빨랐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자만 때문에 나는 죽을 뻔 한적이 있다. 키가 크지 않은 나무에 파파야가 주렁 주렁 달린 것을 보고 접근하면서 근처 맹고 나무 그늘에 주인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몰랐다. 그가 어두운 그늘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1,2 야드 떨어진 나무 그늘 밑에서, 주인이 칼을 들고 나를 향해서 뛰쳐 나왔다. 나는 큰 파파야를 손에 들고 있어서 빨리 뛰지 못 했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놀란 나는 돌아서서 파파야를 그를 향해서 던졌다. 내가 막 돌아서서 다시 뛰려는 순간 그는 나를 덮쳤다. 그의 칼날이 내 허벅지에 긴 칼자국을 남겼다. 나는 내가 자주 가던 산속 냇물에 가서 상처를 씻었다. 다행히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아서 햇볕에 말릴 수 있었다. 그일로 나는 여러 주 동안 먹을 것을 도둑질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때때로 나는 산에서 약초를 캐러 오는 사람을 만난다. 그는 수풀속을 헤치며 들어오기 때문에 그 소리가 나를 놀라게 한다.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면 둘은 멀리서 멈춰 서서 잠깐 쳐다보고 각자 제길을 갔다. 한번도 말을 주고 받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로 부터 막대기를 하나 가지고 다니는 것을 배웠다. 독사를 쫒고, 수풀이 두껍게 우거져 있는 곳을 찔러 보아 보이지 않는 구멍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산속을 돌아다니면서, 야생 개와 고양이를 너무나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마을 주변에서 찌꺼기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을 알 았다. 그들은 여윈 나의 막연한 친구 였다. 나는 그들을 쓰다듬는 것을 좋아 했다. 그러면 그들은 나를 할 탓다. 그리고 나를 따라 다녔다. 내가 과수원에서 훔칠 때, 그들의 날카로운 감각이 나를 보호해 주었다. 그들은 가까이 오고 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내가 알기 훨씬 전에 몸짓으로 나에게 알려주어 내가 필요하면 도망 갈 수 있었다. 야생 개와 고양이에서 시작 해서, 나는 스르르 미끄러져 가는 파충류가 아니면, 다 좋아하게 되었다. 밤에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어두움과 귀신이 나를 무척 놀라게 했지만, 나는 밖으로 나가 봐야 했다.
가끔 호랑이가 산에 나타 났다. 외딴 산속 마을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는 반쯤 먹힌 물소는 호랑이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 였다. 나는 이 소식을 들으면 무척 흥분하여 물소 시체가 발견된 산속으로 가서 호랑이를 찾았다. 호랑이는 내 친구가 될것이라고 자신 했고, 그러면 세상에 아무것도 누구도 무서워 하지 않을 것이 라고 생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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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학 당한지 몇달 후 아버지는 나보고 나머지 학년을 집에서 공부하라고 했다. 어느 날 저녁 때 내가 잠자러 들어가기 전, 아버지는 “지금부터 너는 매주 내가 준 수필이나 책을 공부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공부한 과제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 라고 나에게 말했다.
잠시 후, 그는 “네 어머니가 영어를 가르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나는 집에서 공부하게 되어 무척 좋았다. 아버지가 나로 하여금 정원에서 공부 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쯤, 아버지는 좁은 집안에 내가 없는 것에 익숙해 져서, 내가 숙제를 하는 한 내가 어디 있는 지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착하게 행동 해도, 오랜시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나는 귀찮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는 내가 참고 가만히 앉아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혼자 공부하고 쓰는 학습 방법을 선택 했을 것이다.나는 참을성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에 30분 이상 계속해서 집중 하기 어려워 했다. 나는 항상 서서 움직이며, 가능한 한 많은 자극을 찾았다. 당시에 주의결핍증이 알려 졌다면, 나는 중증 진단을 받았을 것이고 여러가지 안정제를 먹어서 정신병에 걸렸을 지도 모른다.
정원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나의 불안정과 과도한 에너지의 가장 좋은 치료 법이 되었다. 거기서는 공부하다가 개미 행렬을 따라가서 사마귀가 개미를 잡아먹는 것을 보거나, 거대한 열대식물의 잎을 만져 보거나, 꽃의 감미로운 냄새를 맡으며 동양 마그놀리아 나무가지 위해서 낮잠을 자고 있어도 나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공부가 가끔 중단 되었다고 해서 학습의 질이 떨어지거나 기억하는 양이 적어지지는 않았다.
정원에서 혼자 공부 했을 뿐만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감탄하게 할 만큼 잘 했다.
1950-1951, 홍콩에 온 첫해에는 다른 아이들과 거의 접촉이 없었다. 첫째 말이 통하지 않았다. 캔톤말을 배운 후에도 새 환경에 다시 적응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아웃사이더(문외한)로 남아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나를 그들 중의 하나로 받아 들이지 않았다. 캔톤 말을 그 지방 사람처럼 해도 외지인 취급을 받았다. 나에게는 그 지방 사람 처럼 폴리네시안 같은 특징이 없었기 때문 이었다. 나는 건드릴 수 없는 외국악마, 즉 영국사람들 보다 조금 나을 뿐 이었다. 영국 사람들은 털이 많고 핑크 색깔의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고약한 몸냄새를 풍 겼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그들을 “악마”라고 했다.
나와 동네 아이들의 다른 점을 말할 때, 아무도 북중국과 남중국 사람들이 서로 크게 다른 점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북쪽 사람들은 천년 동안 중국 원주민과 북쪽 평원에 사는 유목민의 피가 섞여서 몽골 사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남쪽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남쪽 원주민을 만나 결혼 하는 일이 수세기 동안 계속 되어 폴리네시안, 몬-크메어, 타이-카다이, 흐몽-미엔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동네 아이들과 나를 갈라놓는 나의 북방인 특징외에, 아버지도 내가 이곳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데 원인 제공을 했다. 그는 자기와 자신의 가족은 “키가 작고 검은 피부 색깔을 가지고 있는 홍콩 촌놈들” 보다 우월하다고 생각 했다. 내가 동네 아이들과 같이 있는 것을 볼때 마다, 아버지는 마치, “세상에 어떻게 그런 천한 아이들과 놀수가 있느 냐?” 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고, 당황한 마음에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물론 누구도 집에 데리고 올 수 없었고, 다른 아이와 같이 아무데도 갈 수 없었다.
그 학년이 끝나갈 무렵, 집에서 공부 한지 9개월 만에 아버지는 나를 정규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 했다. 새 학년이 시작 되자 아버지는 나를 7 학년에 보냈다. 내가 거의 12살 먹었을 때였다.
학교는 나에게 맞지 않았다. 나에게는, 공부하기에 정원이 더 좋았다. 나는 식물과 동물이 학교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좋았다. 식물과 동물은 학교의 선생님과 학우들 처럼 요구하고 판단하고 나를 비참하게 만들려고 계획하지 않았다.
그러나 음식이 나를 학교에 다니게 했고 공부도 잘하게 했다. 그때 쯤엔, 내가 집에서 공부 하면서 아버지가 원하는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정식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는 배고파서 괴로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학교 성적 경쟁에서 동료들을 이기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비뚤어진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승리를 원했고 좋아했지만 동급생의 패배를 보는것을 더 좋아 했다. 나에게는 학교에 가는 즐거움은 배움 보다는 학교라는 전선에서 벌어지는 상상의 전투 중에 적에게 패배를 안겨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냈다. 아버지는 나에게 매주 읽기와 쓰기 숙제를 내주어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수학과 과학은 너무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서 그자체가 내 뇌속으로 녹아 들어 갔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영국에 살때 배운 완벽한 영어를 구사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영어를 잘 가르쳐 주었다. 학교 수업시간에 영어 선생님의 엉터리 영어 발음과 잘못된 영어 문장을 고쳐 주고 싶은 욕망을 겨우 진정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 잘한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지 않았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것은 일종의 직업이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요구 하는 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나의 성과에 대한 자부심으로 기뻐할것을 기대하고 내 성적표를 그에게 가져가 본적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서 칭찬을 기대해 본적도 없고 그는 한번도 그런적이 없다. 그와 나는 계약서에 서명한 적이 없지만 계약을 한것이나 마찬 가지였다. 나는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하고 그는 음식과 실 집을 제공 했다. 그것은 말없는 합의 였다. 그것은 우리 관계의 기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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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인생의 3년을 이렇게 지냈다. 나는 계속 해서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냈고 주말에는 산속의 야생으로 도망 갔다. 아버지와 나는 친밀하지 않은 계약관계를 유지 했다. 형과 네번째 누나가 집을 나갔기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 집에 밖에 없었다. 3년동안의 내 기억은 외로움으로 꽉차 있었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서도 별로 대화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날 오후, 어머니가 나를 혼낼 일이 없는 데,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내방에 들어 왔을 때, 깜작 놀랐다. 아버지는 아직 집에 들어 오지 않았다.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고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의 눈은 부드럽고 슬프게 보였다. 이것은 더욱 나에게 예삿일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다. 보통 어머니가 나에게 말할 때는 아버지의 명령이나 거절을 전달하거나 강조 했다. 속마음을 잘들어내지 않고 말이 없는 어머니는 어떤사람과 생기있는 대화를 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물론 내색을 하지 않는 어머니에게도 예외는 있었다. 빈민촌에서 힘들게 살 때, 어머니는 우리에게 날카롭게 말한 적이 있고, 때때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큰소리로 말다툼을 하다가 심하게 싸우기도 했다. 이런일은 1950년 내가 홍콩에서 그들과 같이 사는 동안 심심치 않게 일어 났다. 한번은 그들이 싸우는 동안, 아버지가 어머니를 주먹으로 때리려고 해서 내가 말린 적이 있다. 나는 거의 등지고 사는 것처럼 부모님과 멀게 느껴지고 싸울 때 어느 쪽 편도 들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의 화난 대화는 나를 당황하게 했고 속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너에게 할말이 있다.”고 할 때, 그말 자체가 나를 당황하게 한것이 아니고 그녀의 말투와 표정이었다.
그 구슬픈 눈! 그 두눈은 내가 거의 경험해 보지 못했던 보살핌과 슬픔의 감정을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예, 어머니,” 나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대답 했다.
어머니는 문 앞에 조심스럽게 정돈되어 있는 신발과 테이블위의 책을 처다 보며, 조금씩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내 침대에 앉아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그녀의 강렬한 눈초리에 다시한번 깜짝 놀랐다.
“나는 네 아버지를 떠나기로 했다. 이 집을 나가기로 했다. 나는 내 인생 30년을 뒤로 하고 떠나기로 했다.” 그녀는 아무런 전제 없이 말했다. “나는 새 출발을 하기로 했다. 네 생각은 어떠 냐?” 그녀의 솔직한 표현은 그녀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 가를 나에게 알려 주 었다.
나는 부모가 하고 싶은 일에 반대하는 것은 내 권한 밖이라고 생각 했다. 또한 나는 그녀의 말 뜻을 완전히 이해 하지 못 했다.
그렇다. 그녀는 집을 나간다. 그것은 분명 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나는 감히 그것에 대해서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물어 볼 것이고,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거나 반응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이라고 말 할 것인 가? 그녀는 나를 그녀의 머릿 속에서 지워 버릴 수는 없을 것이고, 나는 아버지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잠깐 침묵이 흐른 다음, 나는 머뭇거리며 말 했다. “아니요, 반대 안해요….. 어떻게 하실 거에요?”
“나는 클론에 있는 신학원에 들어갈 거다. 그 다음에 내가 뭐하느냐는 신에 달려 있다.”
어머니는 산동 시골의 신앙심 깊은 예수교 집안 사람이다. 그녀의 부모는 미국 선교사에 의해서 개종 했고 동료 농부들에게 전도 하며 일생을 보냈다. 이것이 나를 상하이에서 1947년 부터 1950년 까지 돌보았던 어머니의 누이동생 헬렌 이모가 일생동안 신앙 생활을 한 연유 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울 때, 아버지는 서너번 어머니의 부모를 “외국 악마를 따라 뛰는 개”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와같이, 어머니의 발표가 폭탄처럼 굴러 나왔지만, 종교를 추구 하겠다는 그녀의 결정이 나를 놀라게 한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떠난다는 사실이 나를 혼돈 되게 하고 많은 의문을 남겠다. 하필 나한테 그말을 하려고 온 것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떠남은 아버지와의 이혼을 뜻하는 것일 까? 나는 어머니를 더이상 보지못 하는 것일 까? 아버지는 “호랑이 다리”라는 감옥에 들어 갈 때, 진짜 떠났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신학원에 자진해서 들어 간다. 그녀는 감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와 나와 사이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내 마음 속에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 났다. 아무리 지워 버리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쓸데 없고 대답 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나의 절망과 무력함을 더 심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녀의 발표를 아직 끝내지 않았다. “나는 이제까지 너의 좋은 어머니가 못 되었다. 앞으로 너에게 못다한 것을 갚아 주겠다.” 고 말을 이었다.
나는 그냥 멍 해 졌다. 그녀의 솔직담백한 자기비판과 고치겠다는 약속은 뜻 밖이었다. 내 마음에 폭풍을 일으켰다. 눈에 가득 고이는 눈물을 없애려고 힘드려 삼켰다. 어머니를 꼭 껴안은 팔이 아팠지만 나는 마비되어 그냥 서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무 반응에 대해서, 그랬는 지는 모르지만, 전혀 실망하는 표정을 짖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가 입은 옅은 푸른 색 청삼의 수수한 옷깃을 반드시 한다음 일어서서 나에게 살 짝 웃어 보였다.
“그래, 네가 수녀원으로 날 만나러 오기를 바란다.” 그냥 그렇게 어머니는 떠났다.
30년 동안의 결혼과 여섯명의 자식들을 뒤로 하고, 그녀 명의로 한푼의 돈도 없이, 1954년 그녀는 여행가방 하나를 들고 신홍콩의 아파트를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를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여러해 지난 후, 나는 어머니가 훨씬 전부터 불행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30년 대에 상하이에서 그녀는 자살하려고 집 3층에서 드라이브 웨이로 뛰어 내렸다. 죽지는 않았지만 척추를 다치고 오른쪽 다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후로 그녀는 오른쪽 다리를 절었다. 이 사건은 전국 신문의 머리 기사가 되었다. 당시에 아버지는 중국에서 떠오르는 별이었고, 이기사는 아버지를 몹씨 당황하게 했다.
소문에 의하면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교제를 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살하려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내가 출생하기 전에 일어났다. 이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금기였다. 어머니는 이일을 말한적이 없고 물론 아버지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이 사건을 기억 할 만큼 나이먹은 형제들이 나에게 아주 짧게 대강 줄거리만 말한 적이 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날, 나는 저녁 때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이 나쁜 소식을 전해야 했다.
“어머니는 어디 있냐?” 아버지는 앉아서 구두를 벗으면서 물었다. “집을 떠났어요.” 나는 싱겁게 대답 했다. 아버지는 나를 노려 보며, “떠났 다니” 무슨 소리야” 라고 말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지고, 이 집을 떠나서 아예 신학원으로 가신다고 했어요.”
아버지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라도 죽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화가 나서 일그러진 잿빛 얼굴은 실룩 걸렸고 잔뜩 굳어 있었다. 나는 그의 큰 머리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을 상상 했다. 그날 저녁 나는 빈 속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빵 조각 한두개와 마가린을 주었다. 우리는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 아버지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신홍콩에 있는 이 아피트에서 쿨론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이사 간다고 나에게 말 했다. 사무실은 홍콩과 쿨론 사이의 해협 건너 시가지 한 복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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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무실은 쿨론 통이라고 하는 번화가에 있는 중간크기의 3층짜리 콘도미니엄 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중후아 슈주(중국출판사)의 편집실이었다. 그는 편집장이 었고 4 사람의 편집인을 감독 했다. 그는 내가 홍콩에 온지 일년 되던 해에 그 직책을 맡았다.
편집인 전원이 넓은 2층 방 전부를 썼다. 일하는 시간에는 편집인들이 책상에 구부리고 앉아서 사전을 찾아보고, 사설을 쓰며, 잡지를 편집 했다. 상징적으로 아버지는 방 맨 끝에 놓여 있는 가장 큰 책상에 앉아서 4명의 부하 직원들을 바라보며 감독 했다.
일이 끝나면 그들 중 한명 만이 돌아갈 집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사무실 건물에서 살았다. 3개의 침실이 있었다. 아버지 몫이 하나 있었는 데 어머니가 짐을 나가기 전에는 쓰지 않았다. 아버지 바로 밑의 훌륭한 서예가 인 나이든 분이 하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젊은 직원 둘이 같이 썼다.
아버지가 그들의 상관 이었지만, 어린아이를 사무실의 영구 거주자로 데려온 것은 그의 부하 직원이 타당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처사 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나의 존재를 무시하는 태도로 표현 했다. 피동적인 공격이었다. 나는 불쾌한 마주침을 피하려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건물내의 숨을 곳을 찾아야 했고, 주말에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 했다.
건물 뒤 쪽에 있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조그마한 방은 나에게 놀랄만큼 좋은 피난처 였다. 원래는 두번째 하인의 침실로 사용하려 했으 나 지금은 유교사회의 주류에 속하지 않고, 고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책을 저장 하는 데 쓰이고 있다. 그것들은 소위 대중이 좋아하는 책들이었다. 소설, 우화, 신화, 오페라 줄거리와 가사, 유령이야기, 전설적인 무술가, 여행기, National Geographics and Life 같은 미국 잡지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한번도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라고 한 적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2,300년 전에 공자는 시, 철학, 역사, 교훈적인 수필 이외의 작품들은 천민들의 이야기와 욕설을 담은 것에 불과하다고 선언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그 작은 방에 있는 대중적인 책들은 긴장감 넘치는 변화와 놀라운 정보를 주었다. 그것들은 내마음을 사로 잡았고 나를 즐겁게 했다.
아버지의 사무실에 있는 작은 방에 꽉차 있는 책에 내가 걷어 차이기 전에는 아무도 나에게 읽을 수 있는책과 잡지에 대한 정보를 준적이 없었다. 선생님도, 친구도 그런적이 없고, 더구나 아버지는 정말 그러지 않았다.
이 운좋은 발견전에. 나에게 주어진 독서 과제는 주로 교훈적인 수필과 철학에 관한 고전이었다. 모두 전통적인 한문으로 쓰여 있었다. 그것들은 나같은 10대에게는 무척 피곤한 작업이었다. 나는 고전 원문 한두 페이지를 읽는 데 몇시간을 사전과 싸름 해야 했다. 그래도 내 노력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문이 알파벳이 아니기 때문에 모르는 한자를 사전에서 찾을 려면 글자의 구성요소와 획의 숫자를 알아야 했다. 사전에서 글자를 찾아도 그 발음과 의미를 모르는 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찾은 글자에 대한 설명에 모르는 글자가 있었다. 그러면 그글자를 또 찾아야 했다.
단어를 아는 것 외에 전통적인 한문을 읽는 데 또 다른 장애가 있었다. 문법이 현대의 그것과 너무나 달랐다. 역사적인 시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학생들이 원문의 문법을 알아 차릴 것으로 기대 되었기 때문에, 잘못 해독한 학생에게는 참 안된 일이었다. 선생님은 반학생 전원 앞에서 잘못 해석한 학생을 큰 소리로 모욕적인 훈계를 주어 비웃는 기회를 포착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보물같은 읽을 수 있고 재미있는 수집물을 발견하기 전에, 나는, 내 동급생도 그랬듯이, 책 읽기를 좋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미쳤거나 자신을 괴롭게 하여 쾌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어떤 정상적인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형식과 해독할 수 없는 한자(로고그래프)로 기록된 읽을 수 없는 원문과 씨름을 할까?
대중적인 책으로 어지러워 져 있는 작은 방에서, 나는 그냥 책만 읽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숙제도 하고 벽을 쳐다보며 공상에 잠겨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방안은 책을 빡빡하게 꽂아 놓은 선반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나는 그책을 가끔 씩 빼서 훌터 보았다. 숨막힐 정도로 책들이 쌓여 있어서 남은 공간이 없었지만, 나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꼈다. 마치 책이 생명을 얻어서 내 친구가 된 것처럼, 책이 풍기는 곰팡이 냄새는 이상하게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1940년 내가 상하이에서 헬렌 이모와 같이 살 때, 항구에 있는 배를 보고 어느 머나먼 곳으로 가는 환상을 가져 본적이 있다. 그 어느 먼곳은 나의 희미한 상상 속의 추상적인 것이었지 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다. 지금 나는 책으로 둘러쌓인 상자같은 작은 공간에서 공상에 잠겼다. 공포스러운 중국 서부의 초원지대를 탐험 하고, 오스트렐리아의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에서 다이빙하고, 미국의 거대한 산과 국립공원에서 등산하고, 아프리카의 열대 숲을 트래킹 하고, 신비스러운 아마존 정글을 탐험 하는 것을 상상 했다. 독서는 나의 방랑벽을 만족 시킬수 있는 무엇인가를 주었고 공상을 한없이 즐겁게 했다.
아버지는 그의 사무실에서 내가 무엇을 읽었는 지 무엇을 했는 지 전혀 묻지 않았다. 나의 성적표가 좋으면, 그는 나를 간섭하지 않았다.
저녁때와 주말에 아버지는 자주 외출 했다. 나는 그가 어디 가는 지 무엇을 하는 지 몰랐다. 그가 돌아 올 때, 나는 군대 물건 파는 데면 아무데서나 살수 있는 야전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매일 저녁, 창고에서 침대를 꺼내서 식당에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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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무실에 거주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읽는 재미외에도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을 대단히 능력있고 효율적인 여자 하인이 출판사가 주는 여유있는 예산으로 관리 했다. 그녀는 이곳을 깨끗하게 유지 했고, 마루는 왁스를 바르고, 창문은 흠집하나 없이 닦았다. “시 쿠 슈엔 슈”를 보관하고 있는 유리 상자도 매일 먼지를 털었다. 이 책은 손바느질로 엮은 수백권의 백과사전적인 고전인데 크리스찬에게 바이블 처럼 유학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고전이었다. 그녀는 벌처럼 부지런 했으며 능력과 근면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대단한 음식솜씨는 나의 성장에 더욱 중요 했다. 아침일찍, 후추 뿌린 프라이드 에그,우두둑 깨무는 맛이 있는 소금 친 순무와 다이콘 무, 말린 실처럼 가늘게 찢어놓은 매운 돼지고기, 단 냄새나는 볶은 땅콩,
들기름에 절인 얍게 잘라놓은 오이, 그리고 부드러운 쌀죽이 아침 먹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먹는 것을 이렇게 굉장히 즐겨 본적이 없었다. 식사마다 잔치였다. 나는 내배가 더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때까지 먹었다.
영양보충은 내인생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그중에 하나는 내 머리카락이 마술처럼 변했다. 내 머리카락은 윤기가 없고, 뻣뻣해서, 헝클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고, 옅은 검정색이었다. 머리카락이 마치 각각 의지가 있는 것처럼 머리 여기저기에 서 있어서 나를 꼬마 요정 같은 처럼 보이게 했다. 아무리 빗질을 해도 머리 카락은 내 머리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가지 않았다. 나는 잘사는 집 아이들의 윤기 있는 잘 빗어진 제트블랙헤어를 항상 부러워 했었다. 그것은 그들을 스마트하게 보이게 했다. 나는 운 나쁘게 흉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태어 났다고 생각 했다.
아버지 사무실에서 한두 달 잘 먹고 나니, 내 머리카락은 숱이 많아지고 부드러워져 다. 학교에서 본 영리하게 생긴 아이들의 머리카락 같았다. 그것은 윤기가 나고 더 이상 뻣뻣이 서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떠돌아 다니는 아이들의 머리 모양을 더이상 가지지 않게 되니, 나는 갑자기 나자신에 대해서 훨신 좋게 느꼈다.
드디어 키가 크기 시작 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항상 나이에 비해서 작고 여워 있었다. 북쪽 사람들보다 작은 켄톤 시립들에 비해도 나는 작은 편이었다. 나는 아버지 사무실로 옮긴 이후 4 피트 10 인치에서 6피트로 일년 반만에 커 버렸다.
다른사람을 길거리와 학교에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10학년이 되면서, 나는 체육시간에 농구를 할 때 마다 센터 노릇을 했다. 내가 다른 아이들 보다 컷기 때문에 나는 리바운딩과 쌋 블롴킹을 도 맡았다. 내가 슛을 하려는 반대편 팀 선수 쪽으로 움직일 때 마다 그의 동료 선수는 “저 키큰 놈 잘 봐!” 하고 소리질 렀다.
학교에는 키가 4피트 6인치 밖에 안되는 딩 선생이 있었다. 그는 “꼬마 딩”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입바른 말을 잘 했다. 한번은 2주동안의 겨울방학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 왔을 때, 딩선생이 나를 위아래로 훌터 보더니, “리, 키를 크게하기 위해서 요술부리는 한약 먹은 것 말고, 무슨 못된 짓을 한거야?” 라고 물었다. 모두들 웃었다.
나는 영리하게 응수 했다. “ 작은 키로 사는 인생을 피하려는 나의 천부적인 욕망을 알아내신 기민함에 대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선생님.”
반학생 전체가 함성을 질렀다.
선생님은 미소를 띄우면서 받아 넘겼다. “대단히 잘 했다. 리 나! 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나”는 캔톤 말로 “랩”인 데 “멍청이”라는 뜻)을 극복하기 위해서 임기응변을 연마 하고 있었 구나.”
위계질서가 엄격한 우리 학교에서 학생들은 선생님을 항상 존경해야 했다. 그러니 약삭빠른 학생의 응답은, 약간 싸카즘이 가미 되어도, 허락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좋아 했다.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이 끝난 다음 나는 세번째 줄에서 맨뒤로 옮겨 졌다. 그래서 나의 구부정한 등이 더이상 나보다 작은 내 뒷쪽 학생의 시야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
내가 성장하고 신체적인 변화를 하는 동안, 나의 공포증이 사라지기 시작 했다. 우선 공동묘지가 없는 도시에 유령이 나타날리가 없었다. 콘크리트 건물이 줄지어 있는 거리는 밤중 내내 불이 켜져 있어서 밝았다. 유령이 숨을 곳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령은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큰바위가 나를 향해서 굴러 오는 악몽도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나는 매일저녁 낮에 쌓인 피로로 야전침대에 눕자마자 골아 떨어 졌다. 무서워 할 시간이 없었다. 매일 아침 6시에 여자하인이 나를 깨웠다.
나는 식당에서 자고 있었고, 내 침대를 치워야 그녀가 아침을 준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어나면 나를 괴롭히는 꿈은 생각나지 않았다.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것은 장대처럼 깡마른 체격이었다. 나는 삼시 세끼를 게걸스럽게 먹었지만 먹은 것 전부가 나를 길게만 만들었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발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학교에서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특별한 사람들만 다니는 수업료가 비싼 사립학교 였다. 유치원 부터 12학년까지 있는 우리 학교의 주인은 람 씨 였는데, 그는 명목상의 교장 까지 겸했다. 그는 수천명의 학생에게서 걷은 수업료로 새로세운 은행을 운영 했다. 은행은 편리하게 학교 옆에 있었 는 데 교장은 지속적으로 학교와 은행을 왔다 갔다 했다.
매달 첫날, 학부형들은 수업료를 내기 위해서 학교 서무실 앞에 줄을 섰다. 어느 날 나와 같은 반 아이가 람 교장이 가슴을 움켜 잡고 학교에서 은행으로 바쁘게 걸어가는 것을 보 았다.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아, 람 교장 선생님 여기서 또 만나 네요. 우리 수업료로 빨리 커지는 은행 살 찌게 하고 있 지요?”
사캐즘은 그렇다 치고, 나의 관찰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홍콩은 낡고 거치른 식민지에서 영연방의 반 자율적인 자유시장의 본거지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때 교장 람은 학교-은행을 오가는 사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고 홍콩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매달 아버지는 마지못해서 월사금을 냈다. 그때마다, 그것이 대단히 많은 돈이며, 그렇게 비싼 수업료를 냈으니, 가능한 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 시켰다. 그 말은 내가 학교에서 뛰어 난 성적을 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내 머리속에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을 집어 넣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중국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서 얼마를 받는 지 등, 그의 재정 상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우리집 생활정도는 학교 친구들에게도 수수께끼 였다. 이것은 내가 잘사는 집 아이들과 가난한 집 아이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어울리기 힘들게 만들었다.
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가용을 타고 학교에 오는 잘사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당시에는 운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자가용을 가진다는 것은 고용된 운전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 했다.
반면에 나는 학교에 걸어갔다가 걸어서 집에 왔고, 가난에 따르는 모든 행태를 다 가지고 있었다. 나는 옷을 잘입고 다니지 않았고, 용돈이 없었으며, 방과 후에 어떤 사교적 활동에도 참여 하지 않았다. 가장 이상한 것은 우리 가족 아무도 학교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오픈하우스 날에도 부모 환영 날에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더 곤란하게, 학교동무들은, 내가 상하이에 살때 처럼, 가족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 했다. 나는 아이들이 우리 가족에 대해서 물어 보면 대답을 하지 않았고, 일체 자진해서 말하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속속들이 괴짜 였다. 학교동료들이 볼때는, 내가 16세기 중국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신비로운 원숭이 손오공 처럼 바위가 폭발 하면서 태어 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나의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생활 환경에 관계 없이, 나는 나는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가장 불편 했다. 그들의 부유함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교칙으로 학생들은 교복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교복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었다. 부잣집 아이들은 더 좋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교복을 입었다. 패션 감정가가 아니라도 옷감이 윤기가 있고 구겨지지 않는 것은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점심 먹으러 집에 가려고 학생들이 몰려 나올 때, 저질의 교복을 입은 몇명 안되는 학생들이 금방 눈에 들어 왔다.
고급 교복을 입고 다닌 것 외에, 부잣집 아이들은 용돈을 가지고 다녔다. 그들은 군것질(스낵)을 하는 데 그돈을 썼다. 이상하게도 당시에 스낵이 새로운 유행이었다. 대대적인 광고 폭탄으로 코카 콜라가 널리 퍼졌는 데, 그것이 미국산 이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마셨다. 코크는 교내에있는 3개의 음식파는 상점에서 팔았다. 교장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새로 이 상점을 세웠다. 부잣집 아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간식을 사 먹었다. 수업 시작하기 전, 쉬는 시간 중, 수업이 끝난 다음, 마치 굶어죽는 아이들 처럼. 그들은 한 손에는 코카 콜라, 다른 손에는 고기만두를 들고 우리들 앞에서 보란 듯이 맛있게 먹었다. 돈이 하나도 없는 소수에 속하는 아이들은 부러워 하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이 공부에서 진것에 대한 복수로 먹는것을 보여서 약을 올린다고 짐작 했다. 내가 이해 할 수 없는 이유로, 간식을 탐욕하는 아이들은 전형적으로 성적이 상위 구룹에 속하지 못 했다. 우리반에서 내가 3년동안 다니는 동안에 좋은 성적을 내는 학생들은 부잣집 아이들과 가난한 집 아이들이 반반 씩 섞여 있었다. 그 중 아무도 학교에서 지나치게 간식을 하지 않았다.
돈은 부잣집 아이들이 공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우수한 성적을 내게 하지는 못했지만, 수학이나 과학 같은 어려운 과목의 낙제를 면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우리 학교는 아주 높은 기준성적을 요구 했다. 선생님은 매일 학생들이 소화 할 수 있는 최대의 숙제를 냈고, 학생들을 골탕먹이기 위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시험 문제를 만들어 냈다. 역사와 작문 시험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서 주어진 시간안에 끝낼 수 없게 했다. 20%의 수학이나 과학 문제는 자주 선생님도 쉽게 풀 수 없을 정도로 어려 웠다. 시험은 전쟁 같았다. 학생들은 몇 안되는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해서 싸웠다. 낙제 점수인 60점 밑을 맞는 것은 학생들에게
절망적인 것이었다. 낙제한 학생과 가족들에게 가해진 모욕과 오명은 십대들이 견디기에 너무 힘들었다.
전쟁 터 같은 교육 환경은 선생님 집에서 하는 “방과 후 과외” 라는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냈다. 학생들에게는 돈드는 일이었지만, 선생님들에게는 혜택이었다. 학교 주인에게 착취 당하여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하던 선생님들은 이 과외를 통해서 수입을 늘일 수 있었다. 학교가 오후 4:30분에 끝나면, 부자 낙제생들은 7:30 까지 이 선생님 집에서 저 선생님 집으로 옮겨 다니며 여러 과목 과외를 받았다. 과외 시간에 학생들의 숙제를 도왔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 시험에 나올 문제에 대한 팁과 힌트를 주었다. 부잣집 아이들은 시험장에 들어오기 전에 답의 2/3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낙제하기를 원해도 그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제도가 완전히 망가진것은 아니었다. 가장 욕심많은 선생님이라도 공정함과 돈벌이 사이의 균형을 유지 했다. 그들은 팁과 힌트를 낙제점수를 면할 정도만 주었다. 잘해 봐야 60점과 70점 사이였다. 다시 말해서 합격 점수는 살 수 있어도 “수”는 살 수 없었다.
상위 1,2%안에 들려면 학생은 믿을 수 없는 추진력, 절제, 그리고 스테미너가 있어야 했다. 우리반에서 일등하던 학생은 우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공대에 들어간 후 4년만에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등은 프린스턴 대학 교수가 되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3등은 케임브리지, 마사스츄세트에서 유명한 신경외과 의사가 되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5시 쯤 집에와서 매일 저녁 6시간 씩 공부 했다. 30분 저녁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6시간동안, 색다른 책들로 꽉찬 방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앉아 있거나 서서성거리거나 안절부절 했다. 11시 쯤에 보통 다 포기하고 잤다. 주말과 공휴일에만 책읽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었다.
시험기간동안에는 더욱 빡빡한 스케줄을 강행 했다. 시험 시작하기 2주전 부터 시험기간동안 나는 내눈이 흐리게 보일 때 까지 공부 했다. 그래도 나는 눈을 비벼 가면서 계속 하려 했다. 그렇게 노력 했는 데도, 3년 동안에 한번도 6등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나는 상당히 공부 잘하는 편이었지만 별처럼 빛나는 학생은 아니었다. 나는 항상 뛰어 난 학생들의 변두리에서 맴돌았다.
학교 성적순서는 비밀도 아니고 개인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성적 순서는 아무나 다 알 았다. 선생님과 학교 당국은 성적순서를 전교 학생들이 다 알게 했다.
어느 학생 성적이 몇단계 올라가면, 새학기 시작 할 때 반에서 축하해 주었다. 반면에 성적이 가파르게 떨어지면, 그는 선생님의 모욕적인 사카즘에 곤혹을 치루어야 했다. 모든 선생님은 이 지독한 의식을 통해서
패자를 골라 내는 일을 즐겼다. 한번은 난쟁이 딩 역사 선생이 새 학기 첫날에 반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우리는 양 해젠 씨가 30등에서 40등으로 떨어져서 참 안됐다고 생각 한다. 우리는 그가 다음학기에는 뱀이 아닌 용처럼 바다를 흔들기를 바란다.” 고.
양의 이름 해젠은 “바다를 흔들다” 라는 뜻이었다. 용은 고상함을 상징 했고 뱀은 비천함을 상징 했다. 선생님의 양을 파고드는 재치는 우리반 전체를 웃음 바다로 만들었다.
모두 다 선생님과 동료들의 놀림에 무표정하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 졌다. 그저 그런 학생들은 웃음거리의 대상이 되는 데서 오는 정신적인 피해를 감추고 하급순위와 목표 달성에 부족함을 받아들였다.
보통 고등학교 때 바닥에 속했던 학생들은 좀 더 넓은 사회에서 졸업 후의 인생을 똑 같은 지위로 보낼 것으로 기대 할 수 있었다. 학교성적순위 제도는 학생들의 머리속에 못난놈으로 태어 났다는 사실을 두들겨 넣었다! 운명으로 받아들인 학생은 선생님이 준 대중앞에서의 창피에 대해서 눈물을 보이거나 당황해 하는 적은 거의 없었다. 그는 모두들 자기를 향해서 웃고 있는 데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다.
내 동기는 160명이었다. 4반으로 나누어 각반이 한 교실을 썼다. 4반중 두반은 이과였고 다른 두반은 문과였다. 이과와 문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다른 교실, 다른 선생, 다른 학생, 다른 교과과정이었다.
학생들이 이과에 속하느냐 문과에 속하느냐는 학생들의 취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입학시험 성적에 따른 것이었다. 입학 할 때 상위 50%에 속하면 이과로 분류되었고 하위 50%는 문과에 속했다. 문과 학생은 이과 학생보다 한시간 일찍 학교가 끝났다. 왜냐면 이과 학생은 수학과 과학을 일주일에 11시간 했던 반면에 문과학생은 5시간 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6일 학교에 갔는 데 토요일은 12시에 학교가 끝났다. 이과에 속해 있다가 성적이 표준치 밑으로 떨어지면 문과로 밀려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문과에서 성적이 좋아져서 이과로 옮기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두분야의 학생들은 서로 다른 성적 순위 평가를 받았다. 문과 학생들은 자동적으로 일생동안 2등 국민으로 낙인이 찍혔다. 일반적으로, 적어도 우리 학교에서는 , 문과 학생들은 온순하고 착 했고 평범한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선생님에게 도전하는, 특히 새디스틱 하고 싸캐스틱 한 학생들은 모두 이과에 속했다. 그들 중 많은 학생들이 야망을 품었고 졸업 후 크게 성공 했다.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특별 취급 했던 현상은 왜 이차대전 후 중국 유학생들의 대다수가 과학과 공학 분야에서 공부 했는 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2차대전 전에는 고등학교에서 문과 학생들을 제도적으로 차별하지 않았다. 아버지 세대는 유럽과 미국 대학 장학금을 얻는 유학생 중 인문학/사회학 전공 학생과 과학/공학 전공 유학생이 반반이었다. 이차대전 후에는 대부분의 중국사람들이 나라나 개인이 잘 되려면 과학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 믿음이 너무나 널리 퍼지고 확고 해 져서, 개인의 취향에 관계없이 우수한 학생들을 무조건 과학과 공학을 전공하게 하는 교육제도가 만들어 졌다. 아버지는 내가 정치하기를 은근히 바랐고 과학이나 공학에 아주 작은 관심도 보인적이 없었지만, 이와 같은 편견에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내가 이과에 속한 것을 기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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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이 되면 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때 마다 나는 사무실을 나가서 동네를 돌아 다녔다. 그가 알았어도 아마 말리지 않았겠지만, 그가 화를 낼 까봐 그가 없을 때를 택 했다.
불행하게도 아버지 사무실 주위 상류층 주거지는 내가 좋아하는 아무것도 없었다. 걸어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집들은 담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내가 문앞에서 천천히 걸어 가면 안에서 지키고 있던 개가 나를 향해서 달려오며 악랄하게 짖어 댔다. 신홍콩 산에서 민난 내가 아는 야생개와는 달리 이 개는 나를 놀라게 하기 위해서 짖었다. 나는 이 집의 주인도 이 개 처럼 거치를 것이라고 생각 했다. 내가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는 한 멀리 아무 목적 없이 걸었다. 좀 색다른 곳이 있었는데, 메리놀 이라고 하는 가톨릭 여자 학교 였다. 꽃, 나무, 새, 곤충이 있는 학교 마당은 너무 단조로운 아스팔트 포장도로와 걸어 들어가는 집만 있는 동네로 부터의 피난처 였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즐겨 찾았던 신홍콩의 산과 골짜기에 있었던 약간의 자연과 일종의 공원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나는 내가 산속을 휘졌고 다닐 때와 같이, 아버지 사무실 주위의 거주지를 돌아다니면서, 자신감에 넘쳐 본적이 없다. 조심스럽고 소심한 나는, 더 이상, 중국 내전 중의 상하이 길거리에서 못된 짓을 찾아 하거나, 난징 빈민촌에서 동무들과 같이 신나는 일을 하려고 하는 소년이 아니었다. 빈민촌의 내친구들은 나를 “용감한 악마” 라고 불렀다. 내가 항상 거친 모험과 용감한 행동을 제안 했기 때문이었다. 상하이에서 헬렌 이모는
내가 상하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문제를 일키려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순함과 소심함이 미덕이라는 것을 나에게 설교 했다. “순한 사람은 축복을 받아, 땅을 물려 받을 지니라.” 그녀는 성경 매튜에 나오는 말을 인용 했다. “오늘 날, 사람들은 살인하기 위해서 새 기술을 쓴다. 그들은 죽는 자에게 주는 피해를 느끼지 못 한다. 그래서 뉘우치지 못한다. 조심에는 한계가 없다!”
그때 나는 그녀가 무슨말을 하는 지 잘 몰랐고 그녀의 경고에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그러나 학교동료들의 냉혹함과 아버지의 거치른 취급을 경험 한 후 부터 나는 아주 많은 두려움을 가지기 시작 했다. 요지음,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네에 위치한 아버지의 편집 사무실에 살면서, 집을 나와서 돌아 다닐 때 항상 불안 한 것을 보면, 내가 헬렌 이모의 설교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아버지가 나에게 전혀 용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버스비가 없어서 쿨론이나 홍콩 에 있는 상가에 갈 수 없었다. 영화관에 간다거나, 간식을 사먹거나, 친구집에 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안전하게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곳이 있었는 데, 바로 어머니가 계시는 신학교 였다.
나는 아버지 한테 말하지 않고 어머니를 일주일에 한번씩 찾아 갔다. 그는 어머니가 떠난 다음, 그녀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가 내가 어머니를 방문 했다는 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나는 그가 어머니가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를 압도 했던 격노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 했다. 그가 자란 산동 마을의 전통에 의하면 여자, 특히 돈도 없고 먹고살 능력이 없는 늙은 여자들은 남편을 절대로 떠나지 않았다. 아마 그는 가까운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면 어머니에 대해서 욕을 하거나 큰소리로 떠들어 댔을 것이다. 신홍콩에 있는 수수한 아파트에 살때 처럼 가끔 아버지가 친구들을 초대하여
어울리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정말 그랬는 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내가 그의 사무실에서 기거 하게 된 이래, 그는 그의 모든 친교를 사무실겸 주거지 밖에서 했다. 그와 나 사이의
일상에서, 어머니는 언제 있었 냐는 듯이,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신학교에서 어머니는 건강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 내가 가면 그녀는 응접실로 나와 나를 만났다. 나는 어머니가 하루 종일 무엇을 하는 지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공부 했을 것이라고 짐작 했다. 왜냐면 신학원의 학원(슈유안)은 “배우는 곳” 이라는 뜻 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방문하는 동안 우리들의 대화는 자주 끊겼다. 나는 무슨말을 해야 할 지 모르고 그녀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동아시아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잠간동안의 침묵은 걱정스럽거나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내가 서로 이야기하지 않을 때, 나는 신학원의 엄숙하고 검소한 응접실에서 내 발을 처다 보고 있었고 어머니는 마치 내가 얼마나 컷는 지를 알아보려는 듯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보통 학교공부에 대해서 물었고 나의 성적 향상에 대단히 만족한다고 했다.
나와 어머니의 면회는 결코 길지 않았지만 우리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발달하기 시작 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 면회가 끝나고 내가 신학원을 걸어 나올 때,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얻는 태도는 집에서 그녀로 부터 경험해 보지 못한 느낌을 나에게 주었다. 보살핌과 애정이 말보다는 몸짓과 얼굴 표정으로 전달 되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는 것을 마음속 깊이 즐겼고 그녀의 애정을 보물처럼 간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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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