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소리를 들어라
본격적으로 글을 쓴 지가 올해로 이십여 년째다. 이제 조금 글 쓰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등단 초기에는 글 쓰는 일이 즐거웠다.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가리지 않고 밤을 낮 삼아 글을 써댔다. 많이 쓸 때는 한 달에 열 편 가까이 쓸 때도 있었다. 이렇게 글을 많이 쓰던 시기에는 이 대학 저 대학 돌아다니며 강의도 많이 했고 또 지인들과 술도 많이 마셨다. 지금 되돌아보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내 자신도 의아해할 때가 있다. 나는 종종 지인들에게 ‘대한민국 문단은 이재복이 글을 쓰는 잡지와 쓰지 않는 잡지로 나누어진다.’고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나의 이런 행태에 대해 걱정과 두려움을 표하는 지인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러나 기세등등하던 나의 호기도 차츰 꺾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다. 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은 은화처럼 맑은데 육체는 흐느적거리는, 의식은 이것 해라 저것 해라 명령을 내리는데 몸은 그것을 못 하겠다고 아우성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정신과 몸의 이율배반은 내 삶과 글쓰기를 미궁 속으로 몰고 갔다. 이 과정에서 나는 정신의 비만함이 몸을 허약하게 하여 세계를 왜곡시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이 비만해짐에 따라 몸은 허약해지고, 이것은 그대로 글쓰기의 왜소함을 불러왔다. 비만한 정신은 몸을 통해 드러나는 세계의 부피감과 무게를 온전히 지각할 수 없게 하여 글쓰기 자체를 관념의 덩어리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몸이 아파보고 고파봐야지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몸을 살피고 모시게 되었다. 몸으로 육화된 말이나 글의 진정성과 그것이 드러내는 존재의 견고함을 신뢰하게 되었다. 말이나 글은 단순한 재주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의 육화된 과정을 거친 연후에야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몸의 육화된 과정이 하나의 예술의 형식으로 탄생한 것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시와 소설은 물론 음악, 미술, 영화, 연극, 무용에 이르기까지 몸은 그 가치 평가와 판단에 하나의 준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내가 특히 주목한 예술은 ‘판소리’이다. 판소리 역시 소리의 예술이지만 그것은 여느 소리와는 다른 성격을 드러낸다. 판소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몸을 통한 수련 과정과 그 성취의 정도이다. 판소리의 소리는 맑은 소리(천구성)와 걸쭉하고 탁한 소리(수리성)가 결합된 것으로 이 두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삭힘’의 과정이 전제되어야 하며, 이것은 몸을 통한 신산고초의 과정을 의미한다. 판소리의 소리는 온갖 전자 매체의 소리로 넘쳐나는 ‘지금, 여기’에서 소외와 소멸의 길을 걷고 있지만 존재의 진정성 차원에서 그것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몸이 사라지고 가상 실재의 속성을 지닌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살다보면 그 곳이 가상 세계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이때 그곳이 가상 세계라는 것을 증명해 줄 가장 확실한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몸일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전자 매체에 의해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늘 전송된다. 하지만 몸은 우리가 숨 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전자 시대의 공간 내에는 몸 없는 몸 혹은 가벼운 말이나 글들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 말이나 글들은 몸이 없어 부피감이나 무게감 없이 떠돌 수 있다. 그러한 떠돎이 전자 시대의 운명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어떤 부피감과 무게감 없이 부유하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 불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몸으로 느끼고 또 자각해야 하리라.
이재복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