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북쪽의 항구 근처에서 지난 12일 바라본 대규모 빌딩 건설 현장. 아이슬란드는 지난 몇년간 부동산 거품을 타고 주택과 빌딩 신축이 활발했으나 국가부도 직전까지 내몰리면서 곳곳에서 공사가 중단된 건물을 쉽게 볼 수 있다. <레이캬비크(아이슬란드) | 김재중기자>
1. 공포로 변해버린 ‘금융허브의 꿈’
지난 7일 자정 무렵 아이슬란드 유일의 국제공항 케플라비크 공항에 도착한 기자를 차에 태운 현지 가이드는 “상황이 어떠냐”는 첫 질문에 “엉망이죠”라고 짧게 답하고 시동을 걸었다. 수도 레이캬비크로 향하는 왕복 4차선 고속도로는 부슬비에 젖어 가로등 불빛을 튕겨내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 외신을 통해 아이슬란드 주민들이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선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취재일정 중 그런 곳을 찾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가이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환율이 폭등하면서 물가가 엄청나게 뛰었지만 아직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외국 돈을 빌려 집을 산 사람들과 부동산 업자들은 다 죽게 생겼습니다.”
레이캬비크 외곽지역의 한 쇼핑몰에서 전자제품 액세서리 가게를 하고 있는 피욜라(37·여).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남편과 그는 지난 4월 큰 맘먹고 2400만 크로나(당시 환율로 약 4억8000만원)를 대출 받아 집을 샀다.
실제로는 크로나화가 아닌 미국 달러, 일본 엔, 스위스 프랑, 유로 등 네가지 외국 돈을 섞어서 받았다. “1년 전부터 집 살 돈을 빌리기 위해 은행을 찾아가 상담을 하기 시작했는데 외국 돈을 빌리는 것이 훨씬 더 저렴하다고 조언을 해줬어요. 크로나화는 금리가 무척 비쌌지만 이자율이 싼 외국 돈들을 소개해줬죠.”
대화 도중 손님이 찾아오자 상냥한 미소로 맞이하던 그녀는 손님이 나가자 이내 심각해졌다. “그런데 지금 집을 판다고 해도 처음 대출 받았던 금액은 그대로 남아요.” 두딸을 키우고 있는 피욜라가 갚아야 할 대출금은 현재 4100만 크로나로 부풀었다. 거의 두배가 된 것이다. 매달 상환할 대출금도 두배가 됐다. 그러나 4000만 크로나에 산 집의 가격은 40% 가까이 떨어졌다. “일단 생활비를 4분의 1로 줄이기로 했어요. 처음엔 될까 했는데 어떻게 살아지긴 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북유럽 민족 특유의 회색 섞인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환율! 환율!
금융위기 이후 아이슬란드는 순식간에 반토막이 돼 버린 크로나화 가치의 공포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누구든지 몇마디만 나누면 환율과 통화 이야기부터 했다. 금융위기 이전 1달러 당 65크로나 정도 하던 환율이 순식간에 137크로나로 폭등했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중앙은행에 따르면 2008년 4월 현재 아이슬란드 가계부채의 23~24%가 외환대출이다. 금융위기 이전 2100억 크로나이던 아이슬란드 전체 가계의 외환대출 규모도 현재 3300억~3500억 크로나가 됐다.
금융위기전 아이슬란드에서는 집값의 100%까지 가능했던 은행돈을 빌려 새 집을 짓거나 사는 게 유행이었다. 레이캬비크 외곽의 경우 고급주택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부촌’으로 지도가 바뀌었고, 시내 중심가 곳곳에는 사무용 빌딩 신축 붐이 일었다. 레이캬비크에서 3개의 호텔을 경영하고 있다는 올라브르 토르파손(57)은 “당시 20년도 안 된 집을 허물고 더 고급스러운 집을 짓는 게 유행이었어요. 미친 짓이었죠”라고 말했다. “하기야 당시엔 그게 미친 짓이 아니었어요. 2004년부터 레이캬비크의 주택가격은 매년 20~30%씩 뛰어올랐으니까요.” 주택뿐 아니다. 대학이나 동네마다 있는 실내체육관 건물도 지어진 지 2~3년밖에 되지 않은 새 건물 냄새가 났다.
아이슬란드 중앙은행 이사인 에르나 지슬라도티르는 “건설업계는 모두 끝났고, 다른 기업들도 절반이 살아남는다면 천만다행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시내 곳곳에는 타워크레인이 우뚝한 건물 신축 현장이 쉽게 눈에 띄었다. 물론 대부분 공사를 중단한 상태다.
10일 초저녁 레이캬비크 중심가 레이가베구르 거리의 한 레스토랑 앞에서 독일인 모녀 관광객 2명이 메뉴판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이슬란딕 퓨전 메뉴’라는 부제가 달린 메뉴판을 꼼꼼히 살펴보던 이들은 “생각보다 가격이 너무 비싸다”며 어깨를 으쓱인 뒤 길 반대편 레스토랑 쪽으로 사라졌다. “크로나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관광객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는 하지만, 지금 전세계가 위기인 상황이라 그리 만만할 것 같지는 않다”라는 토르파손의 말이 생각났다.
전통적으로 실업률이 1%대에 머물던 아이슬란드에서 실업의 공포는 서서히 검은 심연을 드러내고 있다.
시장점유율 12%의 자동차 수입회사 ‘비앤엘(B&L)’의 현대차 담당 매니저 브자르니 시구르드손을 11일 만났다.
그는 컴퓨터 마우스를 몇번 클릭하더니 모니터를 보여줬다. 현대차 판매 추이였다. 모니터 중간쯤에 그어졌던 선이 10월을 기점으로 곤두박질쳤다. “현대차를 한달에 60~100대가량 팔았지만 지난달엔 겨우 16대가 나갔습니다. 회사는 40% 감원계획을 세웠습니다.”
회사를 그만둔 사람들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시구르드손은 대답 대신 사무실 유리창 너머 번쩍이는 새차들로 가득차 있는 매장으로 시선을 보내며 잠시 침묵에 잠겼다. “우리와 비슷한 규모의 회사 80여곳에서만 모두 3000명을 감원한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노동인구가 아닌) 아이슬란드 전체 인구의 1%가 거의 동시에 실업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슬란드 노동법은 해고전 3개월의 여유를 주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나 내년 초쯤 되면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란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의 사무실을 나오자 지난달 국유화된 글리트니르 은행의 지점이 눈에 띄었다. 창구에 있는 중년의 여직원에게 은행 내부 사진을 찍을 수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상냥했던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노”라는 답이 돌아왔다. 일주일 내내 은행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매번 이런 식이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들 기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한때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은행과 은행 경영진들, 정치인들은 금융위기를 불러온 주범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중앙은행의 지슬라도티르 이사가 말했다. “금융은 아이슬란드의 문화를 바꿔 놓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비린내 나는 수산업을 과소평가하는 대신 높은 임금을 주고 깨끗한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는 은행들을 칭송했죠. 이제는 사고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이 깨달음이 한발 늦기는 했지만요.”
아이리쿠르 다그비아르트손(43)은 레이캬비크 남서쪽에 있는 조그만 수산도시 그린다빅에서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수산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이 회사는 아이슬란드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 그는 6년 전까지 선장으로 배를 탔었다. “수산업계는 지난 10~15년간 작은 업체들을 사들이며 외국 돈을 빌려다 썼고 그 결과 우리의 재무구조도 은행과 비슷해졌습니다.”
12일 퇴근길에 대형매장 ‘보누스’를 찾은 오타 오스프 욘스도티르(40·여)는 두바퀴째 돌았는데도 쇼핑 카트에는 우유만 두 팩뿐이다. 그는 과일 코너를 가리키더니 “두 달 전까지만 해도 1㎏에 150크로나였던 사과가 359크로나, 159크로나였던 바나나가 268크로나가 됐어요”라며 도리질을 했다. 그를 따라 매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계란, 통조림, 밀가루 등 순식간에 올라버린 식료품 값에 대한 ‘증언’이 계속됐다. 그는 268크로나 하는 밀가루 봉지를 보더니 “저게 전에는 100크로나였어요”라고 말했다. 현재 아이슬란드 물가는 연초 대비 15~20% 올랐지만 중앙은행은 최대 30%까지 뛸 것으로 보고 있다.
골프용품점을 운영하는 시구르 기슬리(57)는 매장 뒤편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 요청에 “그 재미난 얘기를 들으러 왔습니까”라고 농담을 하더니 커피를 권했다. 그의 둘째 아들은 노르웨이의 대학에서 유학중이다. “한달에 9만크로나를 부치고 있는데 내가 보내는 돈은 그대로이지만 애가 받는 돈은 반토막이 됐습니다. 애가 일자리를 구해본다고 하는데, 안되면 잠시 들어와 있으라고 할 생각입니다.”
기슬리는 점원 야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 친구 주장처럼 이제 자본주의가 끝난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련 공산주의가 끝나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나는 자유시장경제가 맞다고 봐요. 그렇지만 이전과 같은 모습은 안됩니다. 뭐랄까, ‘규제되는 자본주의’여야 한다는 거죠”라고 말했다.
아이슬란드를 떠나기 전날인 13일 기자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구드문드손은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아이슬란드의 온천이나 자연경관에 대한 사진이 필요하면 언제든 e메일로 요청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명예한국총영사다. 관광지 사진 얘기를 몇차례 더 하기에 “취재목적이 관광지 소개가 아닌 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는 밍크고래 고기 한 조각을 집으며 말했다. “잘 압니다. 하지만 당장 아이슬란드가 기댈 곳은 수산업과 관광산업입니다.” 이것이 금융 허브의 신기루가 사라진 아이슬란드의 알몸이었다.
아이슬란드 경제의 몰락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이슬란드 경제학자들은 감시·감독 없는 금융의 과대성장을 경제붕괴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들은 “이 위기가 언제 끝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환율·금리 정책실패가 위기의 원인”
■ 토르올브르 마티아손 아이슬란드 국립대 경제학과 교수
-위기의 시발점은 어디인가.
“1996~2003년 은행들이 차례로 민영화됐다. 2001년엔 변동환율제로 전환했다. 중앙은행은 물가가 목표치보다 높을 경우 이자율을 올렸다. 이자율이 오르자 일본 엔화를 비롯한 외국 자본들이 몰려왔고 크로나화가 강세를 띤 게 위기의 시작이다.”
- 현재 외환시장 상황은 어떤가.
“외환거래가 매우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다. 금융허브로 불리던 아이슬란드가 외환거래에 있어 북한과 비슷한 처지가 돼버린 것이다.”
-한국 정부도 금융허브를 지향하고 있다.
“한국이 자국 통화 대신 일본 엔화를 선택할 수 있겠나. 그게 아니라면, 엄청나게 많은 외환을 축적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금융허브를 시도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 규모의 통화를 가지고 금융부문이 과대성장하면 결국 붕괴한다.”
“이 위기는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몰라”
■ 올라브르 이슬레이프손 레이캬비크 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 왜 은행을 민영화했나.
“정부가 은행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에서는 은행이 민영화될 당시 큰 비난을 받았다. 정치권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에게 은행이 넘어갔고, 은행 경영이 전문성이 없는 젊은 사람들에게 맡겨졌기 때문이다.”
-과도한 금융자유화가 문제라고 지적되고 있다.
“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특히 은행소유주와 관련이 있는 기업들에 많은 돈이 대출되면서 은행을 약화시켰다.”
- 위기가 언제 끝날까.
“반대로 내가 물어보자. 세계적인 위기가 언제 끝날 것인가. 현재로선 세계적인 위기가 언제 끝날 지 전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지 않은가. 아이슬란드도 오히려 위기가 심화되는 조짐만 보이는 상황이다.”
-금융허브의 꿈은 살아날 수 있을까.
“금융허브의 꿈은 악몽으로 끝났다. 그 대가는 비싸다.”
2.“뭐든 대출로 살수 있었다 이젠 평생 빚갚아야 할판”
국가부도 위기 아이슬란드 - 보험판매원 올라프스도티르
잉기비요르크 올라프스도티르(49·여)는 요즘 시간이 나는 대로 전에 일하던 레스토랑 몇 곳에 전화를 걸어본다. 주말 파트타임 자리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보험판매원인 그는 최근 남편이 다니던 건설회사의 부도로 실직하자 생계 유지를 위해 일을 하나 더 찾기로 결심했다. 지난 12일 자신이 일하는 보험회사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올라프스도티르는 “한달 수입이 약 65만크로나(금융위기 전 환율로 1200만원가량)였는데 남편이 얼마전 일자리를 잃으면서 약 30만크로나(현 환율로 300만원가량)로 줄었다”고 말했다.
아이슬란드에 무슨 일이 있었나. 아이슬란드는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만달러를 넘는 유럽의 금융허브였다. 지난해 유엔 설문에서 가장 살고 싶은 나라로 꼽힌 ‘지상의 천국’이었다. 올라프스도티르는 이 꿈의 나라의 전형적인 중산층이었다. “금융위기 전만 해도 뭐든지 대출로 살 수 있었어요. 저 역시 외국 돈을 빌려 집을 샀죠. 차도 대출받아 산 거예요.”
방 4개가 딸린 110㎡ 아파트에 사는 그는 부부가 각각 4륜구동 SUV를 굴리고 있다. 최근 몇년간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오면 가족들과 함께 런던으로 쇼핑여행을 갔었다. “전에도 크리스마스 쇼핑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5년 전쯤부터 해외여행이 흔해졌어요. 우리는 소비를 즐겼죠. 아이슬란드 크로나화가 강세였고 돈이 넘쳐났으니까요.”
이미 1987년에 1인당 GDP가 2만달러를 넘었지만, 대체로 검소하게 살던 아이슬란드인들은 2000년대 들면서 금융자유화의 바람을 타고 국민소득이 수직상승하자 씀씀이가 커졌다. 금융 중심의 팽창을 거듭하면서 비린내 나는 ‘수산대국’이란 별명 대신 ‘금융허브’라는 근사한 이름을 얻었다. 외국 돈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돈을 누구나 싸게 빌릴 수 있었다. “보통사람들도 전엔 럭셔리카라고 불리던 차들을 탈 수 있게 됐어요. 저만해도 중고차를 주로 탔는데 2004년 제너럴모터스의 신차를 샀으니까요.”
그러나 실물 경제의 기반없이 빚더미 위에 세워진 ‘북유럽 강소국’이라는 아이슬란드의 명성은 미국 금융위기에 가장 빨리, 가장 쉽게 무너져 내렸다.
지난 7~14일 방문한 아이슬란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신들이 디디고 있는 땅이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를 뼈를 깎는 고통과 함께 깨닫고 있었다. 크로나화는 10월에 전년 대비 82.7%까지 폭락,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은 10월 이후에만 80%가 사라졌다. 한때 1% 정도였던 실업률은 내년 5.7%로 급등할 것이라고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내년 성장률 전망치는 마이너스 9.6%이다. 결국 국가부도 위기를 맞은 아이슬란드는 지난 20일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IMF로부터 21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차를 살 때 200만크로나를 대출받았는데 4년 뒤인 지금 380만크로나로 늘어났습니다. 전에는 은행에 월 5만크로나를 냈는데 지금은 9만크로나가 넘어요.”
그는 이것이 고통의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고 했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가 어마어마한 빚을 갚는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다음 세대는 평생을 살면서 빚을 갚아야 할 겁니다.”
올해 크리스마스 해외여행은 엄두도 못낸다. 남편의 실직으로 수입이 절반 이하로 준 것도 그렇지만,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의류비·식비 등 생활비를 절반 정도 줄여야 한다.
“우리도 언제부턴가 거품이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고, 꺼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처럼 파국적일 줄 몰랐어요. 우리는 생선처럼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 증권과 종이 위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3. 아이슬란드가 문제? 제어할 시스템 부재로 몰락
미국식 금융자본주의 모델의 모범생 아이슬란드는 한때 그 놀라운 성장으로, 이제는 붕괴의 깊이와 속도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이슬란드는 지난해에도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4위를 기록하고, 유엔 주도 설문에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꼽히면서 부러움 섞인 시선을 받았지만 이번은 사정이 다르다. 아이슬란드는 ‘1976년 영국 이후 최초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서방국가’라는 치욕적인 ‘가시 면류관’을 쓰게 됐다.
아이슬란드의 급속한 도약, 그 도약보다 더 급속한 추락은 지난 30여년간 ‘시대정신’으로 군림해오다 그 지위를 도전받고 있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위험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이처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찾기 어렵다. 아이슬란드는 수산자원과 전력자원, 온천과 간헐천, 빙하를 중심으로 한 관광자원 외엔 이렇다할 자원이 없는 나라였다. 대부분의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물가상승이 항상 골칫거리였고, 정부는 금융을 철저히 통제해 왔다.
그러나 90년대 다비드 오드손 총리 주도의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현재 아이슬란드 중앙은행장인 그는 91년부터 14년 동안 총리로 재임하면서 공격적인 금융 자유화를 추진했다.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각종 규제를 완화했다. 법인세도 순차적으로 내려 90년대까지 50%였던 법인소득세율이 현재는 18%다. 97년부터는 정부 소유 대규모 은행의 지분매각이 시작됐다. 총리실이 진두지휘한 주요 은행들의 민영화는 2003년 완료됐다. 세계 각지에서 높은 이자율을 쫓아 돈이 몰려들었다. 외국자본이 넘쳐났고, 아이슬란드 크로나화는 강세를 보였다.
민영화된 은행들은 아이슬란드 내부 시장이 너무 작아 성장에 한계를 느끼자 영국·네덜란드·노르웨이 등 유럽으로 나가 몸집을 키워나갔다. 정부는 사실상 투기에 가까운 은행들의 영업행태를 용인했다. 카우프싱·란츠방키·글리트니르 등 3대 은행의 자산규모는 아이슬란드 국내총생산(GDP)의 12배가량에 달했다. 그러나 이 중 70%는 해외 자산이었다.
하지만 국내 제조업 기반이 낮은 아이슬란드는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 따르면 아이슬란드의 2008년 2·4분기 대외채무는 약 1205억달러로 GDP의 7.3배를 기록했으나 외환보유액은 36억7000만달러(9월말 기준)에 불과했다.
결국 아이슬란드 은행들은 자신들이 복제했던 미국의 금융기관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자 자금 회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한순간에 무너졌다. 토르올브르 마티아손 아이슬란드 국립대학 교수는 “아이슬란드 위기는 금융 자유화에 따른 은행의 과잉성장과 그것을 제어할 시스템의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1부 - (2) 금융위기 진원지 월가,LA를 가다> 뉴욕·LA | 유희진기자
ㆍ금융인·서민 ‘몰락의 두 얼굴’ ㆍ월가 구직시장 썰렁해도 “아직 버틸만”…LA선 집 가압류 사태속 ‘빈털터리’ 증가
1. 금융인, 서민 '몰락의 두 얼굴' 뉴욕 월가와 로스앤젤레스는 신자유주의의 황혼에 물들어가는 2008년 11월의 미국을 상징한다.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폭주기관차의 운전대를 잡은 월가 금융인의 추락, 그 자본의 놀음에 이용당한 서민의 절망을 말하기 위해서는 두 도시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뉴욕 맨해튼의 99센트숍은 13일 밤 늦게까지 손님들로 북적였다. 금융위기가 시작된 이후 고가의 상품을 파는 백화점 매출은 줄었지만 반대로 99센트숍의 손님은 두배 이상 늘었다. 뉴욕 | 유희진기자
두 도시는 대륙의 동과 서로 떨어져 있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대출)’라는 폭탄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2000년 초반에 시작됐던 빚잔치를 끝내가고 있었다. 그 파티에는 너나 없이 초대받았고, 모두 힘들어졌다. 그러나 이 파멸의 기획자와 피해자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7년 가까이 월가에서 모기지 채권 파생상품 판매를 담당하던 코그네티(33)는 금융위기가 시작되던 올 초 구조조정으로 자기 부서가 없어지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전같으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는 순간부터 헤드헌터들이 일자리 제의를 하며 몰려들었을 테지만, 이번엔 썰렁하다. 그래도 그는 매를 먼저 맞아 나은 경우였다. 비교적 일찍 해고됨으로써 구직 시장이 달아오르기 전에 부동산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회사에서도 경제위기로 끊임없이 해고 위협을 받는 상황이라 이 자리도 그렇게 안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아직은 버틸 만하다.
100년 동안 세계 금융의 심장이었던 월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세계 경제 대국 미국에서도 명실상부한 상류층을 차지하고 있다. 미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내 금융산업 종사자 중 평균 소득 수준이 가장 높은 곳은 이 월가가 위치한 뉴욕주였다. 뉴욕주 금융업계 종사자의 평균 임금은 13만1660달러(약 1억5000만원)에 달했다.
그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주저앉게 됐지만, 그동안 자기가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위험이 있었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액 연봉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의 교육을 받았고 똑똑한 사람들이다. 코그네티처럼 인생에서 한번 실패를 맛보았다 해도 새로운 길을 찾아 갈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그러나 저소득층은 아무 것도 몰랐고, 그리고 가진 것을 다 잃었다. 금융 자본은 마리사츠 루세로(37·여) 같은 가난한 자를 위험한 돈놀이 게임에 끌어들여 엄청난 이윤을 챙기고는 빚쟁이로 전락시켜 길거리로 내팽개쳤다. 이제 다 끝난 마당인데 돈이 없어도 내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미끼에 걸려든 루세로의 고통을 누가 알아주기나 할 것인가.
LA카운티 남부 란초카문가시에 사는 루세로는 생애 처음 가졌던 집에서 단 4년을 살고난 후 은행의 가압류에 밀려 쫓겨났다. 2004년 100%의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가 상환액을 4개월 밀리면서 신용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함께 죽을 고생을 하면서 모았던 금쪽 같은 그 모든 돈들이 집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미국에서 루세로처럼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집을 샀다가 가압류당한 주택은 2007년 한해 동안만 100만채가 넘는다. 가압류 주택의 수는 올해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남편과 맞벌이를 해서 월 2500달러 정도를 벌고 있는데 한달에 월세로 1300달러를 내고 있어요. 남은 돈으로 다섯 식구가 먹고 사는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죠.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길거리에 나앉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그는 왜 이렇게 됐는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금까지 밤낮으로 일하며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걸까요. 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2. 이래저래 회사 눈치…“붙어 있어야죠”
ㆍ재취업한 코그네티 ‘침체기의 지혜’ 강조 ㆍ뒷모습 촬영도 거절…연신 찬물 들이켜
코그네티를 만난 곳은 뉴욕 42번가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시간은 오후 5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정신이 멍할 정도였다. 사람들 틈을 뚫고 터미널 한구석에 위치한 미니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얀 얼굴에 갈색 머리, 푸른 빛이 감도는 눈동자의 그는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다”며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코그네티를 소개해 준 지인에게서 “너무 개인적인 것들에 대해 물어보면 안 된다”고 사전에 주의를 받아뒀던 터였다. 그로부터 듣고 싶은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모든 정보를 가려줄 것을 당부했다. 뒷모습이라도 찍으면 안 되겠냐는 요청에 그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회사에서 모든 언론과의 접촉을 하지 않겠다는 계약서에 서명을 했거든요. 누가 알아보면 어떡해요. 혹시라도 문제될 수 있는 것은 안하고 싶네요. 한 번 해고된 것에 대한 후유증이 큰가봐요. 너무 소심해졌어요.”
경기가 어려울 때 재취업을 했기 때문에 이래저래 회사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뿐이에요. 이 침체기가 길어질 것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침체기를 사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이 회사에서 절대 해고되지 않는 것이 그 지혜 가운데 하나겠죠.”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는 연방 속이 타는지 계속해서 찬물을 들이켰다. 블랙베리(휴대전화)를 꼭 움켜진 손은 마치 중요한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 연락올 데가 있나봐요”라고 묻는 기자에게 그는 검정색 블랙베리폰을 들여다보이며 “한때 월가에서 세일즈를 할 때는 블랙베리로 e메일을 확인하는 게 정말 중요한 일이었거든요. 언제, 어디에 있든 수시로 확인을 했어요. 그 습관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이 직업병도 사라지지 않겠어요?”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 맞는 최악의 경제위기 한가운데 있는 코그네티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 중이었다.
3. 파생상품 판매인 코그네티의 증언
ㆍ“전 세계가 탐욕에 눈멀어 빚잔치를 벌였다” ㆍ과도한 차입 의존 투자방식이 화근…“시스템의 위기” ㆍ사무실 대출 등 터질 문제 많아…‘L자형 침체’ 예상
월가 생활 7년의 코그네티(37)는 서브프라임 문제가 터지기 직전까지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미 국내 최대 규모로 꼽히는 은행의 판매부서가 그의 자리였다. 부서 내의 트레이더들이 주택저당증권(MBS)을 사들여 그것을 섞고 짜깁기해(구조화) 상품을 만들면, 그 상품을 투자자들에게 팔았다. 모기지 부실이 드러나며 일하던 회사의 부서가 구조조정돼 없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월가를 나와 새출발을 한 그는 적응이 쉽지 않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온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금융위기의 진원지를 미국과 월가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부채담보부증권(CDO)의 경우만 해도 그렇죠. 월가에서 이것을 만들고 팔았지만, 누가 사갔습니까. 전 세계 사람들이 사갔거든요. 그들도 이게 위험자산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월가 사람들처럼 많은 돈을 벌고 싶어했습니다. 그런 욕심이 모이다 보니 전 세계에서 위험한 금융자산의 비율은 점점 더 커져간 거죠.”
이번 금융위기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탐욕에 빠진 결과라고 그는 강조했다. “월가 밖의 사람들도 빚을 내서 투자를 하는 것에 대해 겁을 내지 않았습니다. 만약 월가 사람들의 탐욕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저 역시 세계 각지의 사람들도 탐욕스러웠다고 말하고 싶네요.”
“그동안 월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벌었죠. 저 역시도 1년에 20만달러 이상의 돈을 받는 것에 대해 한번도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특권을 누리고 살았어요. 하지만 월가의 금융회사는 살아남기 힘들 정도로 치열했어요.”
월가에 켜진 ‘빨간불’ 지난 14일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 있는 횡단보도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 있다. 세계 금융의 심장부로 호황을 누리던 월스트리트는 전 세계 금융위기의 진원지로 전락하면서 금융기관들이 연이어 파산하고 있다. 뉴욕 | 유희진기자
밥먹을 틈도 없이 일했던 당시의 상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서로 경쟁하면서 많은 수익을 내려고 하다보니 스트레스가 심했죠. 저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곤 했죠. 개인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제가 겪은 월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이 위기를 초래한 것은 월가 사람이라기보다 시스템이라고 생각해요. 과도한 레버리지(leverage·차입)에 의존한 투자방식이 문제였죠.”
그는 위험하게 질주하는 월가를 보며 “언젠가는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동안의 월가는 돈 놓고 돈 먹는 카지노 판이나 다름없었어요. 수익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레버리지를 활용해 공격적으로 투자했죠. 월가에서는 레버리지로 돈을 버는 게 투자의 정석처럼 여겨지고 있었어요. 너도 나도 빚잔치에 뛰어들었습니다. 심지어 자본력이 약한 사람들조차 빚을 내서 돈을 벌려고 했어요.”
막상 문제가 터지자 정신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고, 나에게 이렇게 빨리 그 불똥이 튈 줄은 더더욱 몰랐다”고 했다. “올해 초 회사에서 근무하던 부서가 구조조정으로 없어지고, 최종적으로는 그 거대한 금융회사가 다른 회사로 넘어가는 것까지 보면서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어요. 넋놓고 며칠을 보내다가 어떻게든 다시 직장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올해 3월 그는 부동산 관련 회사에 다시 직장을 잡았다. 그는 “지금도 사실 적응 중이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별 수 있나요. 이제는 일한 만큼 버는 것에 익숙해지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는 지금의 경제 상황에 대해 낙관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직도 터질 게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모기지 관련 파생상품을 직접 팔았고, 또 그 규모가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도 잘 알고 있어요. 내가 취급했던 그 상품들이 다 드러났나 하고 생각해보면 아직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주택 외에도 사무실 대출이 남아 있다는 것도 알아야죠.”
한창 이야기를 하던 그는 갑자기 손가락으로 공중에 영어 알파벳 L자를 그렸다. “보통 U자형을 이야기하죠. 바닥을 찍었다가 회복세를 보인다고. 하지만 저는 이번 위기는 L자형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해요. 물론 대공황까지의 위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주 긴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진행이 될 것으로 봅니다.”
4. 가난한 자의 꿈을 이용한 ‘약탈적 머니게임’
ㆍLA서민 마리사츠 이야기
# 빚내서 산 집들, 화재로 타 버려
로스앤젤레스의 국제공항에 도착했던 15일 밤 9시. 백발의 택시 운전기사는 “좋지 않은 시기에 LA를 찾았다”며 “경제도 좋지 않은데 북쪽 지역에 큰 불이 나서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화재 소식부터 전했다.
플로리다, 네바다주 등과 더불어 미국 전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이 가장 많았던 곳으로 꼽히는 캘리포니아주. 뉴욕 월가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기반으로 한 복잡한 파생상품을 만들어 돈을 버는 동안 이곳의 많은 가난한 이들은 다른 꿈을 키웠다. 돈이 별로 없어도 내집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것이다. 그러나 월가가 몰락하자 그 알량한 집은 빚더미로 변했고, 길거리로 쫓겨나야 할 판이 되었다.
한인타운까지 가는 약 15분 동안 택시 기사는 “불이 난 지 벌써 3일째인데 불길이 쉬이 잡히지 않고 오히려 번져가고 있다”며 뉴스를 전해주었다. 속수무책으로 가치가 하락해 주인들의 가슴을 까맣게 태우던 집들. 그 집들이 화마로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압류’ 딱지 붙은 채 방치 미국 로스앤젤레스 외곽 신도시 란초쿠카몬가의 한 주택이 지난 17일 은행의 ‘압류’ 간판이 세워진 채 방치돼 있다. 이 지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을 받아 주택을 구입했던 사람들이 대출금을 갚지 못한 채 떠나면서 빈집들이 속출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 유희진기자>
# 저소득층 거주지가 바로 금융자본의 표적
16일 ‘뉴 스타’ 부동산의 중개인을 만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피해 현장을 묻자 몇군데를 꼽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인한 부실은 복잡한 파생상품 시장 구조와 맞물리며 전세계에 금융 위기를 몰고 온 근원으로 지목됐지만 피해 지역은 제한적이었다.
뉴 스타의 남문기 회장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자체가 소득이 적고 신용이 나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대출이지 않았느냐”며 “예외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저소득층들이 특히 많이 모여 살던 지역에서 문제가 됐다”고 설명했다.
17일 찾은 캘리포니아 남부에 위치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란초카문가(Rancho Cucamonga)시.
이곳은 남문기 회장이 지적한 ‘저소득층이 많이 살았던 지역 중의 하나’이자 일본의 저널리스트 쓰쓰미미카가 그의 책 <빈곤대국 아메리카>에서 말한 ‘과격한 시장 원리로 경제적 약자가 희생당한 지역’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뜨고 지는 동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집을 지켰지만, 경제적 약자들은 3~4년의 단꿈 끝에 영원히 희망을 잃었다.
# 희망이 꺾인 자리, 황량한 ‘신도시’
동네 입구 쪽에 위치한 2층 집 앞 잔디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누렇게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나무들은 제멋대로 뻗었다. 시들어버린 잔디밭 위로 솟은 집 세일 광고판만이 바람에 흔들리며 빈집을 지키고 있었다. 광고판에는 은행의 전화번호가 선명했다. 주디 현 에이전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집을 샀던 사람이 은행에 대출금을 내지 못해 압류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집을 포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집에 살고 있던 사람이 포기를 선언하면, 집은 대출을 해줬던 은행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이 동네에 이런 식으로 ‘은행 소유 집’(REO·Real estate owned proerty)’이 매물로 나와있는 게 약 7개 중 하나 꼴이었다. 그는 “은행집으로 나와있는 빈집이 이 동네에만 무려 250개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빈집이 많은 동네는 사람 냄새보다는 냉기가 돌았다. 동네를 돌아보는 동안 5분 단위로 집을 내놓은 은행의 광고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집들은 전부 빈집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새집 냄새가 채 빠지지 않은 집의 유리창이 깨져 있기도 했다. 그는 “비싸게 산 집을 뺏기고 나가니까 화가 난 사람들이 분을 삭이지 못해 유리창을 깨거나 집을 부수고 나간다”고 설명했다.
# 말 한 마디 걸기 힘든 냉랭한 동네
오가는 사람들은 말 한 마디 걸어보기 힘들 정도로 냉랭했다. 겨우 한마디 나눌 수 있었던 동네 주민 얄루(43·여)는 “지나가다가 잔디가 죽어서 누렇게 된 집을 보면 자연스럽게 저 집도 버티지 못하고 어디론가 쫓겨났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며 “이 집도 은행집, 저 집도 은행집, 이렇게 늘어나는 은행집들을 보다보면 서브프라임 대상이 아닌데도 대출을 끼고 집을 산 나까지 불안해진다”고 말했다.
빈집 내부는 더욱 엉망이었다. 벽면 가득 써 있는 알아보기 힘든 낙서들. 주먹으로 몇번이나 내려쳤는지 우그러져 있는 곳곳의 벽면. 이사가는 사람들이 붙박이 형태로 되어 있는 에어컨과 가스 오븐레인지를 억지로 떼어가 칠이 벗겨진 벽도 흉하게 드러났다.
란초쿠카몬가는 본격적으로 주택 공급이 시작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신도시다. 로스앤젤레스 도심부에서 약 한 시간가량 떨어져 있어 도심에 비해 집값이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됐다. 게다가 대량으로 주택이 한꺼번에 공급되자 이 주변의 집들은 30만달러에서 50만달러 사이의 비교적 저렴한 수준에서 거래가 이루어졌다.
한창 미국 주택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던 2004년. 은행은 앞다투어 사람들에게 이 집들을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이용해 팔았다. 란초쿠카몬가뿐만이 아니었다. 로스앤젤레스 외곽 지역의 팜데일·코로나·폰타나 등의 신도시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주택들이 완공되어 매물로 나왔다. 은행은 주택 공급은 계속되는데 집을 살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중산층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자 자연히 집 없는 저소득층을 향해 공격적인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민자와 저소득층 미국 시민들은 생애 첫 주택의 꿈을 이곳에서 이뤘다. 이들은 저소득층이 밀집해 살던 도시를 탈출해 이 신도시에 새 집을 얻었고, 안전을 얻고, 자녀들의 좋은 학군을 얻었다. 한때나마 신도시들은 환희가 가득하던 땅이었다.
# 그것은 꿈이었을까
마리사츠 루세로(37·여)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팜데일에 처음 집을 사던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녀는 띄엄 띄엄 행복했던 시간을 회상했다. “행복했고…흥분됐고…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죠.”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버거운지 처음 몇분 동안 마리사츠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마리사츠는 1989년 남편과 과테말라에서 이민왔다. 가진 돈이 없었던 그녀는 15년 가까이 월 1500달러에서 2000달러 되는 월세 집을 전전했다. “미국에 이민와서 살면서 내 집을 갖는다는 것은 ‘꿈’ 그 자체였어요. 삶을 살아가는 최종 목표이기도 했죠. 그런데 4년 전에 저처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는 거예요. 나도 가능할까? 은행에 문의를 해봤죠.” 조바심을 냈던 것과 달리 은행에서는 빠르게 서류 작업을 끝냈다. 마침내 35만달러짜리 집을 샀다. “정말 꿈이 이루어지던 순간이었어요.”
# 가난한 자의 꿈을 이용한 약탈적 금융
은행과 모기지 업체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저소득층에게 팔면서 집요하게 그들의 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들이 집을 사는 꿈을 포기할 수 없도록 유혹하기 위해 사려는 집의 담보 가치를 100% 대출을 해주는가 하면 처음 2년 간은 획기적으로 낮은 이자율을 매겼다. 대출 불가능한 요소들은 모두 없앴다. 저소득층을 겨냥한 약탈적 금융 게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달에 1000달러 안팎의 돈을 지불하면 됐어요. 은행에서는 집 값이 오르면 그 오른 돈으로 대출이 가능하니까 제 사업도 더 잘될 거라고 격려했어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마리사츠와 남편은 집을 산 후 수입의 절반을 대출금으로 냈다. 다행히 페인트 칠을 하며 집 리모델링 일을 하던 남편은 주택 경기 붐을 타고 호황을 맞았다. 우편물을 포장해 보내는 일을 하는 마리사츠의 수입도 나쁘지 않았다. 평생 살 내 집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돈을 아끼고 아껴 정원을 꾸미고 아이들 놀이방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7년초부터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2005년 정점을 찍은 집 값은 서서히 하락세를 보였고 늘어난 대출금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 집을 포기하고 사라졌다. 마리사츠도 대출 상환금 압박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집 값이 하락하면서 은행은 기존에 내던 대출금보다 더 많은 돈을 요구했다. “한달간 남편과 벌어들이는 돈을 고스란히 대출금으로 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생활이 불가능해졌어요. 우리도 먹고 살아야 했고, 세 아이들의 교육비도 만만치 않았는데 말이죠.”
# 친철하던 은행이 느닷없이 집을 가압류
주택경기 침체는 남편의 수입에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2008년 1월부터 4개월 동안 대출금을 내지 못했다.
“제일 화가 나는 건 은행의 태도였습니다. 처음 대출을 받을 때는 집값은 계속 오를 테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확신을 심어주었죠. 아무것도 몰랐으니 믿었지요. 아니 믿고 싶었습니다. 수입이 줄어 한달에 1000달러씩 내는 게 힘들다고 하니까 500달러로 낮추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한달에 500달러 지불로 서류 작업까지 끝냈는데 느닷없이 2주 후에 집은 가압류될 테니 나가라고 했어요. 은행은 더 이상 저에게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집을 포기할 수 없었던 마리사츠는 그 때부터 필사적으로 대출금 막기를 시작했다.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며 임시변통을 했다. 카드에서 더 이상 돈을 뺄 수 없을 때가 됐을 때는 삼촌에게 돈을 빌리며 버텼다. 그러나 이미 집은 마리사츠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이 은행에 집을 빼앗기고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빨리 집을 팔려는 은행이 집 가격을 낮춰 급매물로 내놓으면서 동네 집값은 평균적으로 40%나 떨어졌다.
# 눈물로 기도하던 나날들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매일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다섯이나 되는 가족들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더 필사적으로 버텼죠. 남편과 저는 열심히 일했고, 집에도 계속 정성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제편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이 집을 떠나고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면서 동네에 도둑이 들끓었습니다. 한번 도둑 맞았을 때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또 두번째 도둑이 들어 집이 엉망이 됐습니다. 그 때 확실히 알았어요. 이제 집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떠날 때라는 것을.”
그렇게 마리사츠는 올해 초 집에 대한 포기를 선언했다. 집은 은행 소유로 넘어갔다.
전미 모기지은행가협회(MBA)는 2007년 말 기준으로 주택소유자 중 300만명가량이 모기지를 연체 중이며 마리사츠의 경우처럼 주택을 가압류당한 경우는 100만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올해는 전년에 비해 가압류 당한 수가 50%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캘리포니아주는 주택 242가구 가운데 1가구 꼴로 가압류 절차가 진행중이다. 10월20일 발행된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는 이렇게 쫓겨난 이들이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온타리오 텐트촌에서 텐트를 치고 난민처럼 살며 1930년대의 대공황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다른 사람처럼 길거리 쫓겨나지 않아 다행
마리사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가족들을 데리고 나와 사무실에 딸린 방에서 몰래 살고 있을 때 건물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도움을 줬어요. 미국에서는 가족 다섯명이서 한 방에 살 수 없게 금지하고 있거든요. 지금은 외곽 지역에 월 1300달러의 집을 얻어서 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길거리로 나앉지 않았죠. 우리 사랑하는 아이들과 헤어지지도 않았어요. 그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 그러나 앞으로는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이제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다시 집을 살 수는 없겠죠. 제 신용은 이제 엉망이거든요. 하지만 그 건 당장 큰 걱정이 아니에요. 크리스마스가 오고 연말이 오면 제가 하는 우편물 사업은 더 잘 될 텐데 빈털터리가 된 저는 당장 사무실을 얻을 돈도 없네요.”
이야기를 마친 후 마리사츠는 한참을 망설이는 듯하더니 운을 뗐다. “기자님은 한국인이죠. 한국인은 똑똑한 것 같아서 부러워요. 이곳에 이민와서도 다들 좋은 집을 사서 잘 살아요.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은 왜 그렇게 안될까요. 열심히 살아도 안좋은 일만 따라다니네요.”
5. “월가는 오만했고, 똑똑하기보다 비열했다”
ㆍ선진금융의 고향… 자부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금융위기의 진원지 뉴욕.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에 금융폭탄을 터뜨린 뉴욕은 경제위기에 가장 느리게 반응하고 있었다. 막 쇼핑을 끝낸 여성들은 큰 쇼핑백 두세개씩은 들고 다녔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3명 중 한 명꼴로 스타벅스 커피를 손에 들었다. 겉보기에 뉴욕은 여전히 흥청망청이었다. 그러나 뉴욕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구석구석을 돌아다닐수록 뉴욕에도 균열이 시작되고 있음이 감지되었다.
10:40 타임스퀘어 두달 전 파산한 리먼 브라더스 본사 건물이 있던 곳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은 길을 묻기 위해 48번가의 조그만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아르바이트생 카마라(29)는 길을 묻는 기자에게 바로 건너편에 있는 745번지를 가리키며 그 날을 떠올렸다. “이 주변은 항상 혼잡하지만 리먼의 마지막 모습을 찍기 위해 전 세계에서 취재진들이 몰려든 그 때의 타임스퀘어 주변은 정말 특히 발디딜 틈도 없을 만큼 붐볐지요.” 본사 정문 앞에 설치된 수많은 언론사의 카메라들은 짐을 싸서 나오는 직원들의 모습을 담았다. 인터뷰를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을 쫓아가 끝내 마이크를 들이대는 모습을 잠시 구경하던 카마라는 그 때 ‘회사 하나 망한 게 그렇게 큰일인가’ 싶어 별 생각 없이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11:30 우리아메리카 은행 맨하튼 지점 맨해튼 중심부인 49번가 745번지. 화려한 3단의 전광판을 앞세운 34층의 고층 빌딩에는 불과 두달 전만 해도 ‘리먼 브라더스’라는 금색의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이제는 ‘바클레이즈 캐피털(BARCLAYS CAPITAL)’로 바뀐 건물을 바라보며 카마라는 “당시에는 취재진들이 모여 짐을 싸서 나가는 리먼 직원들의 모습을 찍어가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즘 내가 해고 걱정으로 잠을 설치면서 그 의미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인근에서는 ‘모건 스탠리’가 그 날의 증시를 전광판에 중계하며 여전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12:30 택시안에서 이병웅 이사는 “우리아메리카은행은 다행히 예금을 초과해 대출을 하지 않아 경제위기 속에서도 큰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뉴욕의 호텔비에 혀를 내두르는 기자에게 “뉴욕의 살인적인 물가는 나이와 경력에 비해 과도하게 돈을 벌어 흥청망청 썼던 월가 사람들의 사치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1년에 억 단위의 보너스를 받는 30대 초반의 월가 금융인들은 보너스를 받을 때마다 아파트의 평수를 늘렸고 고급 식당에서 고급 술을 마셨다. 그들의 씀씀이에 맞추어 고급 호화 식당들이 속속 들어섰고 다른 가게들까지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연히 월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붕괴는 동시에 월가를 겨냥해 만들어진 고급 식당·명품점들에도 직격타였다. 그는 “지금 당장의 뉴욕은 괜찮아 보이지만 월가에 해고 바람이 불고 있는 이상 서서히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뉴욕은 대낮부터 어둠이 짙게 깔렸다. 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던 노숙자들은 비를 피해 건물 사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월가에 가기 위해 올라탄 택시. 택시 운전사 콴(Quan·38)은 “경기침체 취재를 위해 월가에 간다”는 기자의 말에, “나도 경제위기의 피해자”라고 응수했다. 그는 “요즘은 직장에서 해고된 젊은 사람들이 단기 아르바이트 삼아 택시 쪽으로 많이 밀려오고 있다”며 “승용차로 불법 택시 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 전보다 수입이 절반은 줄어들었다”고 불평했다. 차가 막혀 20분 정도 지나서야 택시는 세계 금융위기의 진원지이자 택시 기사의 수입을 절반이나 갉아먹은 월가에 도착했다.
13:00 골드만 삭스 앞 30층은 족히 되어 보이는 붉은색 건물 어디에도 세계 1위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를 상징하는 간판은 없었다. 오가는 직원들을 상대로 취재하려는 기자에게 건물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은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이슈로 어떤 이야기도 나눌 수 없고 사진도 찍을 수 없다”며 모든 취재를 원천봉쇄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비밀 클럽을 연상케 하는 철저한 보안이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경비 태세에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14:40 뉴욕 증권 거래소 폐장시간을 1시간20분 남겨둔 뉴욕 증권거래소 앞에는 불안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선진 금융의 상징이지만 이날따라 그 자부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 한 쪽에 명찰을 단 다섯명의 직원은 따로 떨어져 각각 건물에 기대고 서서 담배를 피웠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들어갔다 싶으면 10분 뒤에 다시 나와 초조한 얼굴로 건물 앞을 서성거렸다. 다음날 뉴욕 타임스는 이날 다우증시가 330포인트의 낙폭을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15:30 JP 모건 체이스 은행 월가로 가는 입구에 위치한 이 은행 직원 4명이 모여 담배를 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름 깊은 얼굴이었다. 넥타이를 풀어 헤친 루이스 도슨(33)은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곧 감원이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은 다들 아침에 30분씩 일찍 출근해 일을 시작한다”며 “모두들 자신이 해고 대상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16:40 월가 피트니스 클럽 월가 모퉁이에 있는 한 피트니스 클럽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중년 남자 1명만이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기를 하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피트니스 클럽의 주인은 “월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건강이나 몸매 관리에도 철저해 주식시장 폐장 시간이나 퇴근 전에 들러 운동을 하고 간다”고 전했다. 그는 “그러나 월가에 해고 바람이 불기 시작한 후에는 회원 수가 30% 이상 줄었다”며 “등록되어 있는 회원들도 시간을 내기 힘든지 뜸하게 오거나 와도 운동하는 것을 즐기지 못한다”고 말했다.
17:30 부동산 에이전트 크리스퍼 김 기자를 만난 김씨는 “월가가 한창 호황일 때는 그들의 수입에 힘입어 맨해튼 주변의 평균 아파트 가격이 11억원에서 13억원대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들 아파트 가격이 월가의 해고 바람으로 조금씩 빠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올해 월가에 보너스 잔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감당하기 힘든 고가의 아파트를 팔고 싼 아파트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6. 파생상품 트레이더 김항주씨의 고백
# 속도에 목숨을 건다
미국 최대 저축은행 워싱턴 뮤추얼에서 일했던 김항주씨(34·사진). 지난 8년간 외환 전문 헤지펀드 QFS, 얼라이언스캐피털, 구겐하임파트너스 등 월가의 여러 회사를 거치며 월가의 흥망성쇠를 경험한 파생상품 트레이더다.
올해 초 워싱턴 뮤추얼에서 근무하고 있던 부서가 없어지면서 월가를 나오게 된 그는 현재 알파리서치캐피털이라는 금융 부티크 회사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요즘 하는 일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예전에는 월가에서 고공행진하는 부동산을 가지고 파생상품을 만들어 장사를 했는데 지금은 가치가 떨어진 부동산을 가지고 거래를 연결해주는 고물 장사를 하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지난 13일 뉴욕 맨해튼 32번가의 한 찻집에서 만난 그는 남방에 편안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분주했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일”이라며 “중간 중간 휴대전화로 거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끊어질 수 있으니 이해해달라”고 양해를 구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국으로 이민오기 전 서울 매봉역 앞 비닐하우스에서 어렵게 살았다는 그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월가에 진출했다고 말했다.
“1992년 조지 소로스가 영국에서 환투기를 해서 1조원을 벌었다는 것을 신문에서 봤어요. 돈을 이렇게도 벌 수 있구나라고 깨달았죠. 새로운 세계가 보였습니다. 그 때 이쪽 분야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인생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흘러갔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스쿨에 진학해 금융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금융을 전공했다. 졸업 후 월가에 첫발을 내디딘 후 2005년 월가의 마지막 직장인 워싱턴 뮤추얼에서 본격적으로 모기지 파생상품 일을 시작했다.
모기지 대출회사에서 주택담보부채권(MBS)을 사들여 그 것을 패키지화하고 구조화하는 작업을 해서 기관투자가들에게 팔았다. 혼자 한 달에 1조달러 규모의 거래를 했다.
# 한달 100만달러 거래는 보통
“월가의 금융회사들은 효율성과 속도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에요. 한 개인에게 1조달러 정도 맡기는 건 예사죠. 안에서 일하다보면 이게 참 모순이 많아요.” 그는 프랑스의 한 투자은행의 사례를 들었다.
“올해 초 프랑스의 한 투자은행이 7조원의 손실을 보았는데 이 손실을 나게 한 장본인은 서른살 먹은 트레이더였어요. 이 사람이 선물시장에서 매도할 것을 매수한 거죠. 이렇게 포지션을 반대로 해서 7조5000억원을 까먹었는데 그 사람 연봉이 3억원에서 5억원 사이에요. 의사 결정 과정이 너무 복잡한 것도 좋지 않지만, 월가는 효율성을 위해 그 많은 과정을 생략하다 보니 이런 일들이 생겨나는 거죠.”
그는 월가 내부의 모습을 묘사하며 시종일관 전쟁터에 비유했다.
“월가에서는 연구원들을 영입해 모델을 개발하게 하죠. 이게 파생상품으로 시장에 나오는 거예요.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는 연구원들을 전쟁터에서 쓸 무기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복잡한 수학 공식이 이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해요. 그런데 이 연구 개발자들이 무기를 만들면서 너무 복잡하게 만들려다보니 한 가지를 빼먹었어요. 계산을 해보면 최종적으로는 이 무기가 아군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한 거죠.” 그는 바로 여기에서 위험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판매자(트레이더)인 저는 그 무기를 받아 들고 옮겨요. 전쟁터에서 저는 그 무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그 무기가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그 사이에 보호장치를 이것 저것 집어 넣습니다. 금융용어로 위험 헤지(방지 혹은 분산)를 한다고 하죠. 구조화를 하고, 묶는 것(패키지)이 바로 이런 작업들이에요. 그런데 여기서도 오류가 났어요.”
# 월가 사람, 능력 과신으로 기차와 함께 추락
연구원들이 아군도 죽일 수 있는 수학식을 만드는 실수를 했다면 트레이더들의 실수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어떤 것도 다 헤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했다.
“부동산시장 전체 가격이 떨어지는 것처럼 시장 전체가 망가지는 위험은 절대 없앨 수 없는 것인데, 없앨 수 있다고 믿은 거예요.”
그는 월가 사람들이 “오만했다”고 평가했다.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인데 집값이 언젠가는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겠어요? 다만 자신의 머리와 능력을 너무 과신해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기 직전까지만 장사를 한 후에 기차에서 뛰어내리겠다고 생각한 거죠. 근데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기차에 탄 채 함께 추락한 겁니다. 심지어 이 떨어지는 기차에 가속도까지 붙었어요.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거죠.”
# 월가 사람들에 대한 편견
그는 월가 사람들이 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건 환상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투자은행 1위인 골드만삭스가 돈 버는 방법을 보면 똑똑한 게 아니라 비열해요. 기름을 잔뜩 사놓고 시장에 소문을 퍼뜨립니다. ‘오일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그럼 시장에서는 소문이 퍼지고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발전해 시장이 반응을 합니다. 상상이 가시죠?” 가격이 오를 때 골드만삭스는 미리 사두었던 기름을 풀어 돈을 번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파워가 있었으니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힘들겠죠.”
월가가 벌여놓은 일들을 풀어나가는 일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것 또한 월가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월가는 인적 자원에 의해 돌아가는 동네예요. 복잡한 파생상품을 만들 줄 아는 고도의 전문직들이 모여 있었죠.” 그는 만화에서 흔히 묘사되는 소림사 무술 배우기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소림사에서 3년 동안 밥하고 빨래 해준 후 무술을 배우면 천하를 제패할 수 있듯이 월가가 그랬어요. 학벌과 실력을 가진 사람이 월가라는 동네에서 3~4년 고생하며 기술을 배워요. 위험을 헤지하는 것, 투자자들 입맛에 맞게 상품을 짜는 것 등을 배우죠. 그러면 세계 금융계를 좌우할 수 있었죠.”
# 월가 안에서만 돌고 도는 금융기술
그렇게 해서 배운 기술들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월가 안에서 돌고 돌았다. 그래서 밖에서는 들여다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만들어 놓았다.
그 대가로 월가 사람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인해 부실이 터져나오기 전까지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월가 생활 10년차를 눈앞에 두고 있던 그는 1년에 약 3억원에서 5억원 정도의 연봉을 받았다. 월가의 관례로 10년차가 넘으면 통상 연봉이 수직 상승한다. 말하자면, 그는 고액 연봉을 코앞에 두고 좌절한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면에서 잘나갔는데 중간에 꺾여버리니까 막막하고 허탈감이 밀려왔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두려움이 밀려왔어요.”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내가 한 일에 비해 너무 많은 돈을 벌고 너무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했다.
“과연 월가는 정당했을까 생각했더니, 아니었어요. 월가는 방종으로 흘렀어요. 사람들 또한 고액 연봉만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질주하며 달렸죠. 1년에 적어도 4번은 호화 해외 여행을 다니고, 별장을 사고, 아이들도 고급 사립학교에 보냈죠. 요즘 그런 사람들 중 해고된 후 잠못이루는 사람 많을 겁니다. 월가는 현재 금융회사의 무덤이 되고 있어요.”
# 투자은행 설립은 망하는 지름길
투자은행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에 “망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의견을 밝혔다. “일단 한국은 투자은행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월가의 투자은행은 의사결정 단계가 매우 짧고 빠르게 움직이죠. 가장 높은 사람까지 가는 데 두 단계밖에 안걸려요. 하지만 한국은 위계질서가 얼마나 분명한가요.” 그는 한국의 최고경영자(CEO)들이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직원들에게 수조원을 다루도록 허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환경도 좋지 않아요. 미국은 처음에 따로 시작했다가 금융상품이 엮이기 시작하면서 위에서 꼬여 상황이 악화됐죠. 한국은 어떤가요. 이미 계열사끼리 얽히고 설켜 있어서 기본부터가 꼬여 있어요. 여기에 금융상품까지 얽히기 시작하면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