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보빵과 어머니 생각
하지가 지난 지 며칠이 안 되는 요즈음, 늘 상 하던 버릇으로 자주 가는 고등어구이 집에서 술 한 잔을 곁들여서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서도 기나긴 여름 햇살이 아파트 담 벽을 하얗게 비추며 서쪽하늘 높이 떠있다.
저녁으로는 공기 밥 한 그릇이 좀 모자란다 생각이 들어 어슬렁거리며 오는 길에 좌대에 빵을 늘어놓고 파는 싸구려 빵집이 눈에 띄기에 단팥빵과 곰보빵 몇 개를 싸 달래서 집으로 왔다.
막상 집에 와서 한 개를 베어 먹으니 술 한 잔, 밥 한 공기에 거나해진 속에서 그 맛좋은 곰보빵도 그다지 달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문득, 곰보빵을 가장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마 내가 중학교 1~2학년쯤이었을 게다.
심한 고뿔에 걸려 앓고 난 다음, 맥없이 누워 있는 나를 측은한 눈길로 내려다보시던 어머니가 물으셨다.
“얘,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그때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곰보빵!”
돈암동에서 제기동까지 걸어서 등하교하던 그 시절, 네거리 빵집의 유리 진열장 속에 기름을 자르르 발라 놓은 단팥빵이나 노르스름하게 고물을 입혀 놓은 곰보빵은 싸구려 찐빵도 호강받침이었던 시절에 그야말로 눈요기만으로도 벅찬 “그림의 떡”이었었다.
그날, 먹고 돌아 서면 곧바로 배가 고플 만큼 한창 자라던 시기의 우리 네 형제가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빵을 사다 주셨지만 아픈 아들을 당신이 직접 건사해 주지 못한다는 안쓰러움과 애잔한 마음이 묻어나는 눈길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어머니는 이불보따리만큼 큰 메리야스 짐을 머리에 이고 다니시면서 장사를 하여 온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계셨던 시절이었다.
직업다운 직업을 가져보지 못하고 골방 샌님으로만 평생을 보내셨던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려운 시절에 그 힘든 일을 하시면서도 자식들에게 힘들다는 내색을 보인 적이 없으셨던 어머니, 늘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시는 태도에 장사도 잘 하셔서 나중에는 조그마하나마 가내공장으로 메리야스 공장도 차릴 수 있었다.
손자들에 대한 할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도움을 받으셨지만 네 아들의 어머니로서, 그러면서도 5대째 내려오는 장손의 며느리로서, 지아비의 아내로서도 한 치 소홀하셨던 점을 나는 기억할 수 없다.
내가 태어난 해가 1943년이니까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이태전이다.
내가 세 살 때였다니까 아마 해방 후에 한창 어렵고 혼란하고 가난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태어나서 젖먹이였을 때까지 튼실하게 자라던 내가 아우를 보고 나서 할머니 품으로 옮겨질 무렵이었다고 한다.
무얼 잘 못 먹었는지 먹는 대로 좍좍 몇 날 며칠을 설사를 해대더니 나중에는 꼬치꼬치 마르고 눈만 쾡하니 커져서 요즘으로 치면 아프리카의 굶주린 어린이 모습이 되어 버리더란다.
요새야 배앓이쯤은 항생제나 다른 좋은 약으로 쉽사리 치료할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뒤떨어지고 귀하던 그 시절에는 그저 “용한 의사”선생님을 찾아다니며 의지할 수밖에 없던 때인지라 우리가 살던 돈암동에서 어머니의 친정 동네인 영등포 신길동까지 그 먼 길을 다 죽어가는 아들을 들쳐 업고 마땅한 교통수단도 없으니 허위단심 걸어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열심히 치료를 받았건만 차도가 보이지 않으니 “내가 과연 이 아이를 살려 낼 수가 있을까?”하는 자신 없는 마음으로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 호되게 넘어지셨단다.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서 아픔을 참고 있는데 그 때까지 죽은 듯이 등에 업혀 있던 아이가 “엄마! 많이 아파?”하고 묻더란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면서 “어찌 내가 이 아이를 포기할 수 있으랴?”하는 결심이 서면서 끝까지 치료를 받았고 마침내 회복이 되었지만 그때부터 허약 체질이 되었노라고, 훗날 말씀하실 때마다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리고 덧붙이시기를 “네가 그 때 그렇게 똥질을 해대면서도 먹는 것은 그래도 다 찾아 먹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아마 죽었을 거야.”하시면서 웃으셨다.
내 나이 일흔이 가까운 지금, 당뇨를 걱정하면서도 점심으로 두 공기를 비우지 않으면 서운해서 못 견디는 이 왕성한 식욕은 아마도 그 시절에 이미 형성된 생존 욕구와 맞닿아 있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며 혼자 속으로 웃는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는 참으로 미인이셨다.
누군들 자기 어머니가 못 생긴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만 우리 어머니는 정말 남달리 아름다우셨다.
젊었을 때 찍은 사진을 보면 요즘 한다하는 탤런트들과 비교해서도 못지않은 용모를 지니고 계셨었다.
비록 교육은 초등학교 중퇴로 그치셨지만 형편이 좀 나아졌을 때, 무슨 물건을 사러 가게에 들렀더니 점원이 대학교수 아니시냐고 물었다며 기분이 좋아 하셨을 만큼 기품도 지니셨던 것이다.
그런 어머니는 사람 모이는 것을 좋아 하셨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셨다.
큰 집의 맏며느리로서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친척들이 많이 오는 것을 좋아하셨고 그때마다 남은 음식을 푸짐히 싸주셨다.
메리야스공장을 할 때에는 어쩌다 친척들이 들리면 메리야스 몇 장쯤은, 그것도 아버지 몰래, 으레 싸주시고 일하는 직공들에게도 그 시절로 봐서는 결코 섭섭지 않게 대접해 주신 걸로 기억한다.
그 때 맺은 수양아들, 수양딸들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왕래를 끊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년에는 심한 당뇨로 인하여 많은 고생을 하셨다.
그 당시 줄 곳 원주다 안면도다 하여 지방으로만 떠돌던 나는 한 달에 한 번씩은 아이들과 마누라를 데리고 어머니를 찾아뵙는 것을 일종의 규칙으로 삼고 실천하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당뇨로 인하여 물체의 윤곽만 겨우 구분하실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극도로 저하되셨을 무렵이었다.
찾아 간다고 전화를 드리고 가는 길에 교통이 막혀 예상 시간보다 한 참 후에야 겨우 어머니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창밖만 내다보시며 우리를 기다리시던 어머니는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 어머니를 부를 때에야 겨우 목소리를 알아들으시고는 말 할 수 없이 반색을 하시면서 “이 복잡한데 온다고 하는 것을 내가 막아야 하는 건데 보고 싶으니 어쩌냐? 나는 무슨 사고라도 났는지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당신이 보고 싶어 애타시는 것보다 아들 손자들이 교통에 막혀 고생하는 것을 더 걱정하시던 어머니였다.
참으로,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우리 어머니를 눈시울 뜨거워짐 없이 회상할 수가 없다.
사무치는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살려내신 그런 이유에서라면 너무 타산적이겠고 그냥 어머니의 모습을 하나 하나 회상할 때마다 눈자위가 붉어지는 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그 따뜻하면서도 강인했던 모든 면을 제대로 물려받지 못한, 그러면서 어머니 생각에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어쩔 수 없이 어린아이가 되어버리는 못난이가 된다. (11.7.6.)
첫댓글 어머님에 대한 글을 접할때마다 엄마로서의 내가 얼마나 허술했나를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답니다. 박코프님,오랫만에 글 잘 읽었습니다.
흰구름의 자식사랑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지요. 해주고 또 해주어도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것이 부모들의 마음인걸요.
나 눈 빨개졌니?
잘 읽고 뭉클해져서..
박코프. 잘 지내시쥬?
요 정도의 글을 읽고 눈이 빨개졌다면 틀림없이 눈병이니 빨리 오영환 안과에 가보슈.ㅎ 동창들에겐 돈도 안 받는다더구만.ㅎㅎ 그건 그렇고 이 글을 부고U.S.A.에 좀 옮겨 주면 좋겠슈.내 재주로는 거기를 찾아 갈 수가 없구만.ㅠㅠ
김현숙 선배님, 평안하시지요?
박연우 선배님,
부고USA 웹주소는 http://www.bugoUSA.org 입니다.
박 선배님은 기고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으신데 깜빡 잊으셨군요.
제가 이메일로 로그인 정보를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언제나 읽어도 내 일같구나. 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때문에 감명도 더 큰 것 같구나.
언제나 따뜻한 댓글 달아주어서 고맙네. 장마철 건강 조심하게.
엄마 가신지..얼마 않되서 그런지..어제가 엄마 생신 이였기에...더욱 가슴이 아려옵니다 왜 엄마라는 단어가 그리 가슴 아프게 하는지?
못해 드렸든 불효 했든 생각으로 늘 후회하며 옛어른들에 말씀에 살아 계실때 잘하라는...이제야 그말이나를 더욱 슬프게 하네요
글 너무 잘읽었습니다
우리 나이에 엄마라는 단어는 얼마나 따뜻한지 언제나 눈물이 나도록 그립지요.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돈암동 빵집이면 전차 종점에 있던 우리 동기생네 집 아닌가?
잘 지내고 있겠지? 전차 종점의 태극당 빵집은 너무 고급이었고 성북경찰서 네거리에 조그만 빵집이 있었지. 자네와 또 몇이서 함께 학교가는 길에 말일세.ㅎ
박코프맞아요 엄마...지금은 부룰수 없는 이름이네요
잘읽었어요 , 고맙구먼요....
오랜만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잘마철에 우울하기도 하고 우리 엄마 생일이 요즘이라 그리움이, 서글품이 가득한데
나를 울리네요 그당시 고생않은 엄마가 몇몇이겠어요 또한 우리엄마도 되게 미인인데....ㅎㅎ
남자들도 그리 애틋한 엄마의 사랑을 그리워하는군요.
이 선배님,
아들들은 표현이 적고 서툴러서 그렇지, 딸이나 아들이나 엄마 찾는 마음은 같을 겁니다.
박코프, 자네의 글을 사대부고 미주동창회 홈페이지(http://www.bugophila.org)의 '시와 수필' 게시판에 올렸네. 미주동창 홈페이지에 한번 들어가 확인바라네.
글 쓰신 박연우 선배님과 부고USA에 실어주신 최동익 선배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똥질을 해대면서도 먹는 것은 그래도 다 찾아 먹었다"는 구절에서는 허리를 잡고 웃었고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우리 어머니를 눈시울 뜨거워짐 없이 회상할 수가 없다"는 대목에서는
고3때 별세하신 저의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치솟아 콧등이 시큰했습니다.
박 선배님의 글을 읽으면서 웃고 울고... 그렇게 잘 감상 했습니다.
멸공! 잘 하셨네. 14회에 이렇게 글 잘 쓰는 수필가 있었는줄은 몰랐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