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정대로 출발했지만 지나가는 노정은 조금 달라졌다.괘방령 대신 추풍령 휴게소 안에 있는 추풍령IC로 빠져나와 김천 직지사로 향한다. 직지사 주차장에서 바로 옆의 도로로 운수리를 거쳐 고개를 넘는다. 바람재가 6km 거리에 있다는 화실(花實) 동네를 알려주는 곳에서 우두령고개를 멀리서 보면서 호두나무 천지인 고개를 내려가면 모성정에 이른다. 모성정에서 어줍잖은 한문실력으로 더듬거리다가는 일괴 이명균 독립지사의 기념비도 보고 상좌원터를 찾아간다. 방초정에서 특색있는 누정 양식도 보고, 원터도 확인한다. 다시 증산면 청암사까지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 청암사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다 해도 1983년 2월 말의 눈내린 청암사 수도암 산행길만 하랴. 무릎까지 빠지면서 2박3일간 다녔던 시절의 추억을 되씹으면서 찾아간 청암사, 새롭기만하다.
일주문 앞의 잘 생긴 적송의 모습을 보면서 다가간 곳에 젊은 비구니는 풀 뽑기 삼매경에 빠졌고, 절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천왕문에 들어서니 흔히 보던 소상 대신에 그림으로 사천왕을 배알하고 넘어가니 물소리 요란한 곳 양쪽 암벽에 새겨진 각자의 모습이 더욱 요란스럽다. 최송설당이 화주가 되어 다시 중창하게 되었다는 점은 답사 후 최완수의 명찰순례편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시주자들의 공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름을 새겨준 것인가?.대웅전에 가보니. 대웅전 축대가 낯설다.군산 동국사 답사시 보았던 축대 양식, 일제시 공법이요, 일본식 축성 형태를 간직한 모습이다. 뒷곁의 전통 담장 축대 방식과 대조를 이룬다. 중창 건립 연대가 1914년대 임을 보여준다. 이런 건축양식은 극락전과 보광전 옆 건물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절 건축이 웬 궁중 전각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비구니 도량이라서인지 잘 정돈된 모습이다. 예전의 수도암(이제는 수도사가 된)까지는 못 가고, 우두령을 찾아나선다. 다시 고개를 넘고 가는 길에 금년에 완공한 부항호 댐도 본다. 멀리 서쪽으로 삼도봉이 보이고. 백두대간 서쪽사면 의 물을 받아 김천부항댐을 이룬다. 물어물어 마산리로 가는 도중에 들른 세심대에서 잠시 쉬었다 간다. 우암 송시열이 들렸었다는 장구지처(杖구之處)임을 기념하는 세심대 사적비를 보면서 우두령으로 향한다. 백두대간 가는길 답게 심심산골의 산은 고개를 꽤나 넘어야 한다.
마산리를 지나 우두령(牛頭嶺 소머리고개)을 겨우 찾아 넘어간다. 질마재는구성면 마산리에서 대항면 주계리로 넘어가는 고개라는데 백두대간을 가로 지르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신라영역인 경상도에서 백제 영역인 충청도 전라도로 넘어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국경이었으니 당연하긴 하지만 지금도 이리 힘든 곳, 인근의 삼도봉이나, 무풍의 라제통문과 연관시켜 생각해보면 역사의 경계선이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이뤄진 이유를 알만하다. 720m 높이의 우두령을 넘으니 충북 영동군 상촌면 흥덕리이다. 유명한 물한리 아랫 골짜기이다. 낯익은 길로 들어서니 이제는 안심이다. 고개를 하도 여러 번 넘다보니 고개가 아플 정도라는 ( 저급 )유머라고 하면서 뻑뻑해진 고개를 저어보면서 보낸 하루다.
직지사 주차장에서 본 관광안내도 : 3번 도로와 903번 도로로 청암사와 우두령 가는 길을 확인해본다.
우두령이 질마재로 표시되어있다.
우두령의 위치를 확인해본다. 전봇대 너머 가장 잘록한 부분이 우두령 -
산줄기 북쪽으로는 바람재가 있는데 현재의 화실고개에서 6km라고 농장 안내도에 나온다.
호두나무 주산지인 듯 사방에 호두나무가 많다.
고개를 다 내려간 곳에서 만나는 모성정 : 바위 마다 각자가 많다.
굴암이었다가 모성암으로 개칭했다는 각자도 있고, 초계선생의 장구지처이라는 각자도 있고, ..
초계 선생의 시로 보이는 한시 7언 절구('달빛은 차가운 나무를 덮고, 안개는 강가에 어렸네
강성 마을에 꽃이 가득하고, 여울에는 푸른 물이 넘실넘실'이라는 뜻인듯 멋대로 해석해 본다.)
이상하게도 4행으로 되어야 할 시가 전편 2행만 있고 나머지 2행은 보이지 않는다.
중국 두목의 시 '야박진회'의 첫행(烟籠寒水月籠沙)과 흡사한 시귀이다.
김천시청 홈피에 의하면 모성정은 연안 이씨 초당 장원(1560 - 1649)이 글을 외우고, 목욕하고, 바람을 쐬면서 거닐던 곳이었다. 『투간욕작강호객, 환파문왕재후거: 시골의 자연에 묻혀사는 선비들이 낚시대를 던지고자 하고, 문왕이 수레에 실려 돌아오기를 싫어하도다 』와 『사무충효외 허로굴암변: 충효 밖에 할일이 없으니 굴암변에서 한일이 헛되이 늙었도다』와 같은 글은 선생이 남긴 시의 일부이다.
모성정에 올라 경치를 둘러본다.
대한 의사 일괴 이명균 선생의 유적을 둘러본다.
상좌원 표지석만 있고 내용은 없다.
방초정: 마루 아래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가 되어있고 위에는 방바닥이 정방형된 온돌방이 있다. 온돌방 사방은 들창문을 닫고 온기를 보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들창문 속에 또 작은 창문이 있고... 더운 여름과 서늘한 시기에 알맞게 설계된 정자이다.
창호지를 정갈하게 바른 들창문에서 바라보는 앞 연지, 빨간 백일홍, 연지에는 하늘을 뜻하는 섬이 두 개나 있다. 일(日) 월(月)을 상징하는 것인지? 군자의 꽃인 연꽃 대신에 수련이 있다.
정자 사방을 둘러보는 차경(借景)의 멋을 즐긴다.
정자 안에는 오고간 사람들이 써놓은 시귀가 있고, 8방 귀퉁이에는 8경(예" 眉山半輪')을 적어놓고 경치를 감상한 것 같다.
방초정 옆의 정려각 앞에 세워진 비석이 눈길을 끈다.
충직한 노비를 기리는 비가 신분을 뛰어넘은 모습 정신을 보여준다.
구성초등학교 정문 옆에 있는 곳에 원터 자리 표석이 있다.
고개고개 넘어 찾아간 불령산 청암사 일주문
일주문 편액과 청암사 대웅전 글씨는 한말 검사출신의 성당 김돈희가 썼다.
글림으로 된 ㅅ사천왕믄을 지나면 물소리 요란한 좁은 입구 석벽에 가득한 각자들이 나타난다.
현재 청암사 건물은 영친왕 보모상궁인 최송설당의 재정지원에 의해 지어진 것이란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름이 유난히 크다.
남향한 대웅전의 좌우 건물(진영각, 종무소, 육화료)은 새 을(乙)자 형으로 지어져 있다.
일제 통치시기인 1910년대의 건축이라서인지, 대웅전의 축대 축성방식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대웅전 뒤의 석벽과 대존된다.
대웅전 뒤의 석벽
범종각 쪽에서 바라본 청암사 전경
초록색 기와지붕 건물이 대웅전이고 앞의 건물이 정법루이고 왼쪽이 육화료
몇 십년전 만해도 대웅전 뒤의 송림이 노송으로 울창했다는데 산판으로 벌목한 탓이라, 다만 몇 그루가 일주문 앞에 남아있을 뿐이라니. 인간의 탐욕이 도량에까지 스며든 것일까?
극락전 옆의 보광루와 양 옆의 건물, 극락전 입구는 솟을 대문처럼 되어 있고, 건물도 궁궐식이어서 특이하게 여겨진다.
1910년대의 건축이라서인지 난간의 모습과 처마 받침기둥, 들창문 쇠걸개 보기
20114년 완공괸 김천부항댐 모습 멀리 왼쪽으로 삼도봉과 백두대간 줄기를 볼 수 있다.
이곳은 우암 송시열이 지팡이 짚고 칡신 신고 주유천하한 곳이라해서 '장구지처(杖屨之處)'라고 한다.
백두대간 우두령은 해발 720m 높이에 있다.
우두령을 상징하는 황소상 뒤에 적어놓은 우두령 이야기
생태계 보호용 다리가 세워져 있다.
백두대간 등산용 안내도에 나와있는 고개
질매재 표시가 애매하게 우등령과 같게 되어있는데, 실은 , 남쪽 마산리에서 북쪽 주계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