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장소와 더불어 일어나는 일이다. 장소는 삶과 영혼을 세우는 기초적 토대다. 자기 집, 태어난 고장, 병역의무와 납세의무를 지우는 고국 따위의 장소들은 추상적인 것으로 부유하는 삶을 구체적 현존으로 거듭나게 한다. 삶은 내적 공간과 외적 공간의 교감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내적 공간은 자아나 영혼이고, 외적 공간은 신체가 위치하는 장소다. 장소는 실존의 기반이면서 자기 정립의 조건이다. 존재함의 순간들은 장소와 함께 실존의 중심을 꿰뚫고 지나가는 현상이다. 내 몸이 있고 나날의 일상 활동을 품은 여기란 지각 공간이고, 그 지각 공간에는 하나의 중심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여기에 있는 사람이다. 내가 사는 동네와 도시는 지각된 장소들이며 우리의 사고, 지각, 의미가 투영된 공간들이다. 있음이란 늘 장소와 결부되어 나타나고, 거주의 안정성과 친밀감은 이 장소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험에서 비롯한다. 어떤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머물고자 하는 것은 우리 본성의 일부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 있는 동네는 영혼이 실존적 유대를 맺는 바로 그곳이며, 자아가 세계와 유대를 이루는 중심적 거점이다.
『그 골목이 말을 걸다』는 우리의 무채색 기억이 잠겨 있는 골목길에 대한 탐사 기록이다.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고 한다면 그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 바로 종로구 송월동에 있는 서울기상관측소가 그 기준점이 되는 장소다. 이곳에 눈이 내려야 서울에 눈이 내렸다고 말할 수 있다. 벚꽃 표준목도 여기에 있다. 기상관측소의 벚나무들 중에서 이십 퍼센트가 꽃망울을 터뜨린 날이 서울의 공식 벚꽃 개화일이다. 이 송월동은 교북동, 홍파동, 행촌동, 교남동과 함께 행정구역상 교남동 관할에 든다. 이 동네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던 김구가 살았던 경교장이 있고, ‘봉선화’의 작곡가인 홍난파 고택이 있다. 강남삼성병원 언덕길에서 걸어 사직터널까지의 수많은 골목들에는 아직도 일제 강점기의 많은 흔적들이 있고, 지금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숨결이 있다. 그런데 이 일대가 뉴타운 지역으로 지정되어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재개발이 시작되면 그 많은 크고 작은 역사와 사연을 안은 집들과 골목들은 다 사라질 것이다.
가리봉동은 대규모 공단지역과 저소득층 밀집지역을 품고 있다. 구로공단이 있었고, 그 공단에서 일하는 수많은 우리의 누이들이 있었다. 누이들은 여공이라고 불리웠다. 골목마다 넘쳤던 여공들은 이제 보기 드물다. 구로공단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뀐 지 오래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그 많던 우리의 누이들은 이 골목들을 중국동포들에게 내주고 다 어디로 갔을까 ? 가리봉 일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가리봉 일대의 ‘벌집’들이라고 불리던 작은 집에 세들어 살며 낮엔 공장에 나가 돈을 벌고 밤엔 야간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장밋빛 인생을 꿈꾸던 누이들은 거의 다 여기를 떠났다. 그들이 떠난 빈 자리를 이주외국인 노동자들이 차지했는데, 구로구에 등록된 외국인 숫자는 이만을 넘는다. 그들 중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 동포들의 수가 가장 많다. 가리봉1동에는 동포사랑교회, 서울중국인교회, 동포사랑치과, 중국노래방 들이 유난히 눈에 띄는데, 중국동포나 중국 한족들이 많기 때문이다.
서울 북촌에 속하는 삼청동을 비롯한 원서동, 계동, 가회동, 재동, 안국동, 화동, 사간동, 소격동에는 서울의 오래된 골목들이 밀집되어 있다. 조선의 도읍지 한양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 안쪽에 자리잡은 북촌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양반들의 주거지였다. 전통 한옥들이 많이 남아 있는 이 일대의 골목길들은 한가롭게 걸을 만한 길이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하나였던 손병희,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시인 박인환의 옛집들이 이 동네에 있다. 풍문여자고등학교에서 시작하는 감고당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정독도서관이 나온다. 그 길에서 크고 작은 음식점과 카페들, 화랑들, 티벳박물관과 같은 작은 개인박물관들도 만날 수 있다. 100년 역사를 가진 안동교회도 인근에 있다. ‘한옥이 바다를 이룬 가회동’을 품고 있는 북촌은 우리 선조들의 옛삶의 자취가 많이 남은 동네다. 이 일대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골목길은 종로구 효자동과 부암동 일대의 길들이다. 내가 살았던 곳, 내 삶의 자취가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경복궁 너머 자하문 고갯길에서부터 시작되는 부암동은 내가 열 살 때 서울에 처음 올라와 십여 년을 살았던 동네와 인접한 곳이다. 인왕산 자락과 북악산 자락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부암동은 조선 시대의 고택들과 오래 되지 않은 서민주택들이 어우러진 동네다.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 안평대군의 별장이었던 무계정사(武溪精舍), 소설가 현진건의 옛집, 반계 윤웅렬의 별서를 품고 있다. 이 일대는 불과 사십여 년 전만 해도 능금밭과 복숭아밭이 있었다. 봄이면 복사꽃이 피어 온통 분홍색으로 물든 자리에는 다세대 연립주택들이 빼꼭하게 들어차 있다. 북악산 자락에 있는 백사실 계곡도 이 동네에 인접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백사길 계곡에서 1급수에서만 산다는 가재를 잡고 놀았는데, 지금도 그 계곡에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을까. 들이 있다. 안평대군은 왕가의 권력다툼에서 패한 뒤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가 무릉도원을 꿈꾸며 지은 무계정사는 그 패자의 아련한 꿈을 짚어보게 한다. 세월은 덧없이 흘렀지만 내 꿈속의 무릉도원이던 부암동에 가면 느린 삶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종로구 효자동 일대는 내가 살았던 옛 동네다. 나는 이 동네에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누상동과 누하동은 조선시대 중인들이 모여 살던 위항(委巷)이다. 한옥이 많고 그 한옥들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도 많은 동네다. 내가 가진 골목길에 대한 많은 기억들은 이 동네의 골목길들과 연관된 것들이다. 이 동네는 근대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설가 이광수, 월남한 화가 이중섭, 시인 노천명이 한때 살았고,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인 이상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그 장소들은 대부분 이미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선 탓에 남아 있지 않다. 인왕산 자락에 옥인동 시범아파트가 있는데, 소설가 오상원도 여기에 살았다. 사춘기 때 나는 한 여학생을 흠모했다. 그 여학생은 바로 효자동에 있는 진명여자중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그 여학교의 여학생들이 입었던 교복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라일락꽃 필무렵 그 여학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던 효자동 골목들은 그 꽃향기로 진동했다. 라일락꽃이 피면 바로 그 시절의 꽃향기가 코끝에 맴도는 듯 첫사랑의 순결했던 기억이 내 안에서 폭발한다.
책을 펼치면 프롤로그가 나오는데, 그 제목이 “서울의 숨은 보석을 품은 그곳, 골목”이다. 골목은 집과 집 사이, 벽과 벽 사이를 지나간다. 골목길은 길과 길 사이를 잇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다. 큰 길들은 도시계획이나 구획 정리 등으로 만들어지지만 골목들은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난 길들이다. 큰 길들이 전면을 차지한다면 이면은 골목길의 몫이다. 큰 길들이 정실이 낳은 적자(嫡子)라면 골목들은 첩이 낳은 서자(庶子)들이다. 관악구의 남현동, 종로구의 창신동·숭인동, 중구의 신당동·중림동, 동작구의 노량진동·흑석동, 서대문구의 북아현3동·충정로동 들의 골목길들을 걸어봤는가 ? 그 골목길들을 걸어보지 않고 서울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 큰 길들에는 큰 역사가 있지만, 골목들에는 장삼이사의 작은 삶들이 만든 작은 역사가 있다. 큰 길들은 직선을 지향하지만, 오밀조밀하게 이어지는 골목들은 곡선으로 이루어진다. 부드러운 곡선이어서 딱딱한 직선의 오만이나 위압감이 없다. 미로처럼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 정서의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다. 골목들은 과거의 추억들과 현재 삶의 숨결들이 어우러진 장소다. 그것은 오랫동안 우리 삶의 거점이었으며, 거기에 새겨진 삶의 흔적과 발자취들은 내밀한 삶의 고갱이들이다. 이 책은 서울의 알려지지 않은, 혹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그 많은 골목길들을 탐사하고 그 소감을 김대홍이 글로 쓰고 조정래가 사진으로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