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맛 / 신면주 (2024. 7. )
녹두죽을 좋아한다. 입맛이 없거나 속이 안 편할 때 먹는 죽이다. 그릇에 담긴 푸르스름한 색만 봐도 반은 나은 듯 편해진다. 뜨끈한 죽을 한술 뜨면 껄끄러운 입안에 부드러운 죽 알갱이들이 퍼지면서 어딘가에서 끌어당기는 느낌을 받는다. 식도, 음식이 내려가는 길이다.
기력 회복에 좋아 옛날부터 널리 사랑받은 녹두죽은 내게 죽 그 이상을 넘는 특별한 음식이다. 이 녹두죽이 내 생애 첫맛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맛보았을 어머니의 젖 맛이나 걸음 떼며 먹었을 밥맛은 전혀 기억이 없다. 의외로 푸르스름한 녹두죽과 하얀 절편 맛이 떠오른다. 음식에 관한, 맛에 관한 이야기가 있을 때마다 이 두 가지가 바로 생각나는 거다. 절편과 녹두죽밖에 먹은 게 없는 것처럼. 이 잊히지 않는 기억이 도대체 몇 살 때였을까 하도 궁금해 어머니께 여쭤보니 네다섯 살 즈음이란다. 할머니한테 받은 따스한 기억의 유산이다.
6·25 전쟁 직후 부모님은 방 하나에 부엌 딸린 초가에서 홀어머니 모시고 어려운 신혼생활을 하셨단다. 지금이야 상상하지 못할 일이지만, 당시 어려운 살림에 단칸방에 부모 모시고 사는 가정이 많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당시 할머니는 사흘에 한 번씩 친구 집에 가 주무시곤 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할머니의 세심한 배려로 태어난 손자였으니 세상의 무엇이 아까우랴. 당시는 전쟁 직후라 초근목피로 끼니 때우는 게 예사였던 시절이다. 그 어려운 살림에도 장성한 자식의 혼사를 치르는 집에는 예를 갖추느라 음식 가지 수가 제법 되었다. 잔칫상에는 새로 탄생하는 부부가 백년해로하라는 뜻의 국수와 함께 빠지지 않은 음식이 절편이었다. 잔칫집이긴 해도 가난한 살림에 동네 사람들 대접하려니 평소보단 먹거리 수는 많았지만 넉넉하진 않았다. 절편도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무늬를 새긴 목도장으로 찍은 절편이 잔칫상에 오르긴 했지만 딱 두 개씩이었단다. 찰기에 서로 붙을까 봐 참기름을 발라 고소하고 반지르르한 떡을 보고 먼저 집에 있는 손자를 떠올렸을 할머니.
할머니는 잔칫상에 놓인 절편 두 개 중 한 개를 잡숫고, 나머지 한 개는 흰 가제 손수건에 싸 오셔서 네 살배기 손자였던 내게 먹이셨다. 흰 손수건 안에 놓인 절편은 기름을 발랐기 때문인지, 맛있는 떡 먹을 기쁨에 그리 보였는지 떡이 반짝거렸다. 그 떡엔 목도장으로 찍은 문양 말고 다른 무늬도 선명했다. 혹시나 집에 가져오다 흘려 귀한 손자 못 먹일까 꽁꽁 싸매다 보니, 엉성한 가제 손수건의 결이 떡에 그대로 찍힌 거였다. 할머니는 당신 사랑으로 꾹꾹 싸맨 떡을 건네주시며 머리를 내내 쓰다듬으셨다.
워낙 어렸기에 그때 먹었던 떡 맛도, 나눈 대화도 기억엔 없다. 그런데도 할머니의 가제 손수건 무늬가 가늘게 찍혀 있던 절편 한 조각과 내 머리를 쓰다듬던 할머니의 따스한 손길은 이순이 훌쩍 지난 지금도 아스라이 떠오른다.
할머니가 위경련으로 힘들어하셨다. 그런 할머니를 위해 아버지는 진정제를 놓아 고통을 줄여주시고 어머니는 녹두죽을 끓여드렸다고 한다. 보리밥 먹기도 힘든 시절이라 녹두를 구하고 또 넉넉히 끓일 형편이 아니었다. 편찮으신 할머니만 드실 녹두죽이다 보니 양이 많지 않아서 다른 가족은 먹을 수가 없었다. 간 보기용 한술 뜨는 것조차 아까우셨다는 어머니의 말씀은 당시 얼마나 가정형편이 어려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할머니는 어머니가 끓여드린 녹두죽을 받을 때마다 미안해하시면서 수저를 드셨다.
어머니는 나가시면서 구수한 죽 냄새에 더욱 할머니 곁에 붙어 앉은 내게 밖에 나가서 놀아라며 데리고 나가셨다. 죽 드시는 할머니를 쳐다보며 쭈빗쭈빗 엄마를 따라 나가던 나는 차마 문지방을 넘을 수가 없었다. 밖으로 한 발만 내놓고 문간에 기대어 김이 오른 죽에 군침을 삼켰다. 그런 내 마음을 다 아신다는 듯 할머니는 몇 숟가락 떠시고는 꼭 불러 먹이셨다. 그때 죽 간이 맞았는지, 뜨겁지는 않았는지 기억에 없다.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위해 일부러 남겨주신 귀한 죽을 먹었다는 기억만 잡힐 듯 잡힐 듯 아련하다. 할머니는 그저 귀하고 맛있는 건 손자에게 먹이기를 7년 동안 하시고 별세하셨다.
손자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었으면 세상에 대한 첫맛 기억이, 할머니가 잔칫집에서 싸 오신 가제 손수건 무늬가 있던 절편 한 개와 편찮으셔서 잡숫다 남긴 녹두죽 먹던 기억일까. 그러한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 부모님의 어른에 대한 공경, 허용할 수 없는 버릇에 대한 어머니의 단호함, 사랑에 기반한 예외를 보여주는 할머니의 자애로움 등 이러한 밥상머리 교육이 나를 사람 구실 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먹방’이라고 하여 음식을 만들고 먹는 방송이 유행이다. 먹고 싶은 음식은 30분 이내 배달받아 먹을 수 있는 음식 풍요의 시대이다. 라떼 세대라 할지 모르지만, 이런 일회성 음식이 난무하는 게 마땅찮다. 동물의 먹거리는 생존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만, 인간이 가족을 위해 만든 음식은 사람의 마음을 담은 결정체이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먹는 이의 입맛과 소화 능력까지 배려한 정성으로 요리한다. 가족은 식사 도구인 수저를 잘 사용하여 고루 나누어 먹는 예절을 배운다. 이런 음식 섭취는 몸을 건강하게 성장시키고 유지하는 동시에, 식재료를 키우느라 땀 흘린 농부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인간의 혼이 깃든 문화의 정수이다.
음식이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려운 시절 할머니가 남겨주신 녹두죽에 담긴 영혼의 풍요는 찾을 수 없다. 배달 음식은 몸은 살찌울 수 있겠지만, 영혼을 살찌우기에는 미흡하다. 모든 분야에서 귀차니즘이 지배하다 보니 영혼의 분주함은 사라지고 편리함의 나태가 일상이 되었다. 정성으로 만들고 고루 나누어 감사히 먹던 우리의 음식 문화는 배달에 밀려 차츰 설 자리를 잃어만 가고 있어 마음의 허기는 점점 더 짙어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할머니가 챙겨 주셨던 절편과 녹두죽이 더 그리워진다.
첫댓글 신면주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글로써 좋은 일 많이 생기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