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조천읍 조천리 119번지. 봉소동.
시대 ; 조선
유형 ; 무덤
조천리 봉소동에는 신천강씨 입도시조 강영의 묘가 있다. 할아버지는 대호군 강서(康庶),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강윤휘(康允暉)이다. 강영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사촌오빠(말젯아버지의 아들)로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10년(1361)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서북면에 침입하고 함경북도 경성을 점령하였을 때, 호군(護軍)으로서 홍건적을 물리치고 공민왕11년(1362) 경성을 수복한 공으로 공민왕12년(1363) 수복경성일등공신(收復鏡城一等功臣)에 서훈되었다.
공민왕8년(1359) 홍건적 침입 때 전 상호군으로서 적을 격퇴한 공으로 1363년 11월에 기해격주홍적이등공신(己亥擊走紅賊二等功臣)에 서훈되었다. 공민왕22년(1373) 강계만호로서 나하추[納哈出]가 보낸 수행원 10여 명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는데, 공민왕이 이 소식을 듣고 소환하여 순위부에 감금시켰다.
우왕2년(1376) 왜구가 연산(連山, 지금의 논산시)을 침범하였을 때 최영(崔瑩, 1316~1388), 최공철(崔公哲, ?~1390), 박수년(朴壽年, ?~1355) 등과 더불어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홍산(鴻山, 지금의 부여)에서 대패시켰다. 우왕3년(1377) 왜구가 강화에 침입하자 판개성부사 나세(羅世, 1320~1397), 조사민(趙思民, ?~1378), 이원계(李元桂, 1330~?) 등과 더불어 격퇴하였으며, 왜구가 영광·장사·해주·평주(지금의 황해도 평산) 등에 침입하자 원수(元帥)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격퇴하였다.
왕실의 외척으로서 영화가 보장되었던 그는 문명으로도 이름이 높았으나 태조7년 일어난 왕자의 난으로 집안이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왕자의 난이란 태조의 첫부인 한씨의 소생인 이방원과 이방간이 중심이 되어 강씨 소생인 방번과 방석을 죽인 사건을 말한다. 이는 태조가 방석을 총애하여 왕세자로 삼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태조가 후계자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 신하들은 공 있는 왕자를 세우려고 했으나 이 말을 몰래 들은 신덕왕후의 울음이 문밖까지 들렸다 한다. 이후 신하들은 세자 책봉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얼마 없어 신덕왕후가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는데 대신들이 말하기를 “방번은 광패(狂悖)하고 방석이 조금 낫다”하여 급기야 방석을 세자로 삼게 되었다. 정도전이 주축이 돼 방석을 옹립하고 다른 왕자를 제거할 모의를 꾸미다 일어난 사건이 이방원과 방간이 일으킨 왕자의 난이다. 이때 방석을 옹립하던 정도전이 주살되었다.(제주신보 171108 김유정 글)
일설에 따르면, 태조7년(1398) 8월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재발할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전라감사(2007년에 전라북도가 발간한 《전라감사》라는 책에는 역대 전라감사 명단에 강영이라는 이름이 없다)를 사임하고 태종2년(1402) 유배나 다름없이 제주에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문중회의 입장은 왕자의 난으로 정치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제주도로 왔다는 것이다.
다른 일설에 따르면, 원래 황해도 곡산 사람이며,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조카이다. 태조7년(1398) 8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사촌오빠란 이유로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을 박탈당하였으며, 태종2년에 맏아들 귀존(貴尊)을 비롯한 가속(家屬)을 충청도 보령에 남겨 두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강영 감사가 낙향할 무렵 고려의 유신(儒臣)으로 충절이 귀감이 된 김만희(金萬希)공과 이미(李美) 공과 한천(韓蕆) 공과 더불어 제주에 입향한 四大賢人으로 일컫고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信川康氏濟州道宗親會長 康政統 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康永이 전라감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없으며, 康永으로는 검색 결과가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강영이 도착한 곳은 조천읍 함덕포이며, 이후 제주 고씨를 배필로 맞아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으며, 정(禎), 복(福), 만(萬) 세 아들을 두었다. 주민들에게 충효의 도리와 예의범절을 가르쳐 그가 전한 학문과 교화는 여러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제주도의 문화유산 63쪽)
그의 묘는 함덕 지경에 있다고 되어 있을 뿐 수백년간 실묘(失墓) 상태로 있었으나 1950년 우연한 기회에 묘를 찾게 되었다. 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 끝에 비석처럼 생긴 돌이 걸리자 이를 당국에 신고하였고,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 그 돌은 강영 묘에 넣었던 지석임이 밝혀진 것이다. 지석에는 피장자의 이름과 그 글을 쓴 사람의 이름도 있었는데 지석을 쓴 사람은 제주목사로 근무하던 기건(奇虔)이었다. 이 지석은 제주대학교박물관에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나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지석은 가로9.2cm, 세로 18. 2cm, 두께 2.8cm 직사각형 모양으로 앞면에 ‘信川康永監司 壬寅隱跡於斯’뒷면에 ‘有 禎福萬 三子 有忠義 靑坡志’라고 쓰여 있었다.(제주신보 171108 김유정 글) 신천강씨제주도문중회에서는 강영이 1413년 사망하였다고 하며, 壬寅년은 세종4년(1422)이다. 강영의 묘 오른쪽 앞에는 기건 목사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적은 비석도 세워져 있다.
후손들이 조천서원상도사(朝天書院尙道祠)를 지어 득성조(得姓祖)와 시조(始祖)와 중시조(中始祖)와 정숙공(靖肅公)과 입도조(入島祖)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5일 제향(祭享)을 드리고 監司公墓祭도 奉行하고 있다.(信川康氏濟州道宗親會長 康政統 글)
<우리나라 으뜸마을 함덕리>에 따르면 신촌리에 사는 자손 강우범씨의 꿈에 현몽하여 찾게 되었다고도 하며, 경암풍수지리연구회에 따르면 제주고씨를 부인으로 맞아 禎, 福, 萬 세 아들을 두었으며, 묘를 실전하였으나 1929년 신안 김달원 지관의 안내로 묘를 찾았으며, 39세손 강용범, 강정생이 1937년 방묘 앞 제절(除節,祭砌,諸節=무덤 앞에 평평하게 닦아 만든 땅, 자손들이 늘어서서 절할 수 있도록 산소 앞에 마련된 평평하고 널찍한 부분)을 파헤쳐 벼루만한 지석을 발견하므로 확인되었다고 하였다.
1937년 지석이 발견될 때 무덤의 형태가 방묘였으나 후에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용묘로 만들었다. 무덤의 문인석, 동자석, 상석은 조면암으로 만들어졌는데 1969년에 만들어진 석물들이다. 왼쪽으로는 강영의 아들 셋이 실묘(失墓)한 관계로 3기의 비석단을 만들어 기리고 있다.
이곳의 풍수 형국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혹은 봉황이 둥지에서 알을 품은 봉소포란형(鳳巢抱卵形)으로, 묘의 좌향은 동북향이다. 묘 앞에 둥글게 정원을 설치한 것을 금계의 알을 상징한다고 한다.
2017년 4월에는 신천강씨제주도종친회가 조천읍 신촌리에 영암(감사공)강영(康永)문화회관을 개관하였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유습(遺習)을 따라 향리(鄕里)에 향처(鄕妻)와 서울에 경처(京妻)를 두었다. 향처가 이방원의 어머니 신의왕후이고 경처가 후에 신덕왕후가 된 강영의 큰아버지 딸 4촌 누이 강씨이다.
이성계와 강씨의 인연은 우물가의 인연으로 시작되었다. 강씨는 대단한 미색이었고 지혜가 있는 여인이었다. 어느 날 이성계가 사냥을 다녀오는 길에 목이 말라 물가에 이르러 어떤 여인에게 물 한 그릇을 청하자 그 여인은 물을 뜬 후 물그릇에 버드나무 한 줌을 띄웠다. 이를 본 이성계가 그 이유를 물은 즉,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보아하니 나리께서는 갈증으로 먼 길을 달려오신 것 같은 데 냉수를 급하게 마시게 되면 물체에 걸려 탈이 나실까 봐 일부러 천천히 드시라고 그러한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성계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의하면, 강씨는 본관이 곡산(谷山)으로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조선 건국 전에 태조 이성계의 비(妃) 안변(安邊) 한씨(韓氏)가 공양왕3년 5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는데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개국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고 그 슬하에 8명의 자녀(진안대군 방우, 영안대군 방과(2대 정종), 인안대군 방의, 회안대군 방간, 정안대군 방원(3대 태종), 덕안대군 방연, 경신공주, 경선공주)를 두었다. 이성계가 조선 태조에 오르자 계비(繼妃) 강씨는 현비(顯妣)에 책봉되었다.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는 태조5년(1396) 사망하였으며, 소생으로는 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경순공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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