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의 심장을 먹는 혈도인마
그 가게 주인은 고검남이 갑자기 그런 수를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삐를 잡고 있던 왼손이 퍽!하는 소리와 함께 지팡이에 적중되고 말
았다. 그는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한쪽 팔이 부러진 것이었다. 고통을
참으며 오른손으로 그 지팡이를 잡고 아래로 잡아 당겼다.
고검남은 가게 주인이 지팡이를 잡아당기자 말에서 길바닥으로 떨어
지고 말았다.
그 한 필의 자줏빛 붉은 준마는 깜짝 놀란 나머지 길게 한 소리 울
부짖더니 냅다 달려갔다.
가게 주인은 대뜸 고검남의 멱살을 움켜잡고 따귀를 갈기고 욕을 했
다.
[제기랄, 개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감히 노부를 때리다니...]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고검남의 반쪽 얼굴이 즉시 빨갛게 부어 올
랐다.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고 돌연 가게 주인의 오른손을 꽉
깨물고 놓지 않았다.
가게 주인은 돼지 멱따는 소리로 부르짖으며 힘껏 팔을 뒤로 잡아
당겼다. 한 조각 고기 덩어리가 고검남의 이빨에 물어 뜯기고 말았다.
그는 두 눈에 흉측한 안광을 빛내며 흉폭하게 말했다.
[제기랄. 노부는 너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겠다. 감히 노부를 물다니!]
그는 두 손을 모으고 고검남의 목을 움켜 잡고 내리 눌렀으며 땅바
닥에 대고 사정없이 목을 조르는 것이었다.
고검남은 숨이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 때, 별안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옆에서 울려 퍼졌다.
[아니, 너는 재물을 노려 목숨을 빼앗겠다는 것이냐? 썩 일어서라.]
가게 주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장대같이 키가 큰 사람이 그의 등뒤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가게 주인은 그 사람의 비쩍 마른 몸을 올려다보았다. 말처럼 길쭉한
얼굴에 몇 가닥 반백의 수염을 기른 사내였다.
그 흑의인은 냉랭히 가게 주인을 바라보더니 냉소했다.
[너는 노부의 말을 듣지 못했단 말이냐? 일어나라!]
가게 주인은 잠시 망설였다. 순간 양쪽 팔굽이 얼얼해지고 온몸이 어
떤 힘에 의해서 끌어 올려지게 되었다.
고검남은 가게 주인에게 목을 졸려서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는
데 갑자기 터질 것 같은 가슴팍에 싱그러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는 두세번 재채기를 하고 두 모금의 숨을 들이마시고 꿈결처럼 두
눈을 떴다.
그 흑의인은 냉랭히 고검남을 바라보았다.
[얘야, 괜찮으냐?]
고검남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대답했다.
[노선배님이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아직 괜찮습
니다.]
그 흑의인은 고검남의 두 발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발
견하자 그 차가운 눈동자에는 한 가닥 연민의 빛을 떠올렸다가 미간
에 한 가닥 살기를 떠올리며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후레자식! 그가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목졸라 죽이려고 하다니... 허! 강호에서 노부를 혈도인마(血屠人魔)라
고 하는데 그 감투는 너에게 양보해야 하겠구나.]
가게 주인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혈도인마라는 말을 듣자 참지 못
하고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무릎에 맥이 빠져 즉시 무릎을 꿇었다.
그는 떨리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혈도인마는 냉랭히 말했다.
[강호인들은 노부의 심보가 검고 손이 맵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귀하
보다 못한 것 같은데, 귀하는 왜 나보고 목숨을 구해 달라고 비십니
까?]
말을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왼손의 소맷자락을 갑자기 날렸다. 그 소
맷자락은 한 자루의 장검처럼 뻗쳐가, 소맷자락이 이르는 곳에 어느덧
그 가게 주인의 가슴팍을 갈라놓고 말았다.
처참한 비명 소리가 그치기도 전에 혈도인마는 다섯 손가락을 소맷
자락에서 뻗쳐내 그 가게 주인의 심장을 뜯어냈다.
그는 냉소했다.
[정말 이상하구나. 이런 사람의 염통도 붉은 색이라니!]
그는 그 가게 주인의 시체를 걷어차 깊은 골짜기로 떨어지게 만들었
다.
고검남은 놀란 표정으로 혈도인마가 손에 들고 있는 그 새빨간 염통
을 입안에 넣고 씹어 먹는 것을 바라보았다.
혈도인마는 쩝쩝거리며 맛있게 그 사람의 염통을 먹더니 입을 열었다.
[노부는 오랫동안 이와 같이 맛있는 염통을 먹지 못했구나. 얘야, 너
는 악인의 염통이 유난히 맛있는 것을 아느냐?]
그는 고검남이 놀라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것을 보고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아, 미안하다. 노부는 맛좋은 것을 보면 식욕이 크게 일어 어린 자네
의 입맛이 노부와 다른 것을 깜박 잊고 말았군!]
재빨리 그는 손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아냈다.
고검남은 자기의 아버지와 함께 우내이마라고 일컬어지는 노인의 표
정이 그토록 온화하고 인자한 것을 보자 약간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는 혈도인마를 바라보고 물었다.
[천하에 노선배님과 식욕이 똑같은 사람이 있을까요?]
혈도인마는 껄껄 웃었다.
[하! 하! 하! 이 녀석 제법이구나. 노부는 식도락에 대해서 많이 연구
했으며, 천하의 기이한 맛을 가진 것을 모조리 맛보고 천하의 기이한
일들을 모조리 구경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네가 던진 그와
같은 질문은 바로 내 비위에 맞는 것이다.]
비위에 맞는다는 말을 듣자 고검남은 깜짝 놀라 침을 삼키며 억지로
자기 자신을 진정시켰다.
[노선배님은 설마하니 저의 염통을 먹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혈도인마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바보같은 녀석. 노부는 한평생 악인의 염통만 먹었는데 어떻게 너와
같은 어린애에게 눈독을 들이겠느냐. 안심해라. 노부는 결코 너의 솜
털 하나 다치지 않겠다.]
그는 고검남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자기 자신도 땅바
닥에 주저앉아 입을 열었다.
[노부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구나. 하! 하! 하! 강호에서 누가 오늘 내
가 이렇게 크게 웃는 모습을 본다면 정말 깜짝 놀라 결코 노부가 혈
도인마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고검남은 물었다.
[노선배님은 한번도 웃어 본 일이 없는 가요?]
혈도인마는 대답했다.
[단 한번 웃어본 적이 있다. 그것은 원수를 내 손으로 죽였을 때였
지...]
그는 갑자기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것은 이십 년 전의 일이다.]
고검남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살아가며 웃는 날이 없다면 그것 역시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
겠네요.]
혈도인마는 안색이 굳어져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너의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다. 노부는 조금 전 크게 소리내어 웃었
더니 속이 시원하고기분이 아주 좋아지는구나. 정말 한평생 없었던
일이다. 이제야 나는 그녀가 어째서 스스로 고해이란인(苦海離亂人)이
라고 자처하는지 알겠구나.]
그의 눈길은 멀리 서쪽을 바라보았으며 물끄러미 반쪽의 핏빛을 띄
운 석양을 바라보면서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러 차례 고해(苦海)에 빠져든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지...]
고검남은 물었다.
[노선배님, 무슨 말씀이세요?]
혈도인마는 그 초점을 잃은 눈길을 거두고 쓸쓸히 웃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한 옛사람을 상기했을 뿐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사람이 늙으면 자꾸 옛일을 되씹는 법이다. 사소한 일에도 옛추억을
돌이켜 보며 감동을 받는 법이지.]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런 말은 그만두자. 얘야, 너는 어째서 이 벼랑 끝에서 악인의 능멸
을 당했느냐?]
고검남은 대답했다.
[저는 그를 길잡이로 고용해서 곤륜산으로 안내하도록 했어요. 그런데
그는 재물을 보고 악독한 마음이 치밀어 저의 목숨을 해치려고 했나
봐요. 만약에 노선배님이 저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아무래도 저는...]
혈도인마는 말했다.
[그게 뭐가 그리 고마우냐? 나도 곤륜산으로 가는 몸이다. 가는 길에
너를 데려다 주도록 하지. 아, 그런데 얘야...]
그는 고검남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의 집 어른은 어떻게 된 것이냐? 어째서 너 혼자 곤륜산으로 떠나
도록 내버려 두었느냐? 너는 무엇하러 가는 길이냐?]
고검남은 대답했다.
[저의 아버지께서는 홀로 옥청궁(玉淸宮)으로 달려가셨어요. 저는 마음
이 놓이지 않아서...]
혈도인마는 물었다.
[너의 부친이 누구냐?]
고검남은 대답했다.
[저의 아버님은 고명원이에요.]
혈도인마는 안색이 변하더니 놀라 물었다.
[혈수천마란 말이냐?]
고검남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노선배님은 저의 가친을 아십니까?]
혈도인마는 대답했다.
[내가 어찌 그를 모르겠느냐? 강호에서는 우리 두 사람을 우내쌍마라
고 일컫는데, 내가 어찌 그를 모르겠느냐?]
고검남은 크게 기뻐했다.
[그렇다면 가장 잘 되었군요. 아저씨는 저의 아버지를 도와서 그 나쁜
사람들을 혼내 주세요!]
혈도인마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에게 아들이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두 다리가 불구라고 하더니, 바
로 네가 아니냐?]
고검남은 침울히 말했다.
[제가 아버지에게 누를 끼친 거예요. 그렇지 않았으면 아버지는 곤륜
산으로 가지 않았을 거예요.]
혈도인마는 의아해서 물었다.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이냐? 노부는 알 수가 없구나.]
고검남은 무당산에서 일어난 일부터 다 말해주었다.
혈도인마는 격동하여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영존은 이미 천영보도를 얻은 것이 사실이구나?]
고검남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혈도인마가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
다. 그의 널따란 흑색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어 마치 커다란 박
쥐같았다.
한편으로 그는 속으로 약간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기가 잘못
말한 것이 아닌가 두려웠다. 아주 중요한 사실을 털어놓았기 때문이었
다. 무림을 진동시키고 있는 천영보도는 바로 지금 그의 몸에 있으며
이 보도 때문에 그는 어쩌면 혈도인마에게 찢겨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진저리를 치고 눈에 공포의 빛을 띄웠다.
혈도인마가 광소를 터뜨리자 먼 산벼랑에 부딪쳐 메아리가 울려 퍼
졌다. 한참 후에야 그는 웃음을 멈추었다. 그는 우뚝 버티고 서서, 초
롱초롱한 눈망울로 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고검남을 바라보
며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얘야, 너는 무섭지 않느냐?]
고검남은 침착하게 말했다.
[겁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아저씨가 저를
해치지 않으리라 믿어요.]
혈도인마는 입을 헤벌리고 푸르죽죽한 이빨을 드러내었다.
[노부는 흉악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데, 너는 내가 너를 잡아 먹을까
봐 두렵지 않느냐?]
고검남은 침착하게 응수했다.
[저는 아저씨가 저를 어떻게 하지 않으리라 믿어요. 왜냐하면 저는 어
린애에 불과하고 저항할 힘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아저씨는 크
게 유명한 무림고수가 아니겠어요!]
혈도인마는 일부러 겁을 주는 듯 말했다.
[정말 대담한 녀석이로구나. 너는 정말 노부가 너를 잡아먹지 않으리
라 믿느냐?]
고검남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저씨는 그럴 리 없을 거예요. 저는 아저씨가 그저 겁주려고 하는
말씀이지 결코...]
[닥쳐라!]
혈도인마는 일성을 대갈하더니 쓸쓸히 웃었다.
[얘야, 미안하게 되었구나. 내가 이렇게 큰소리로 너에게 호통을 지르
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노부가 한평생 처음 보는 귀여운 아이다. 노부는 약간 그 친구
가 부럽구나. 어째서 너를 위해서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는지 알만 하
구나. 만약 나에게 너와 같이 훌륭한 아들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나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고검남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숙부님께서 과찬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조카는 실로 감당할 수 없습니
다.]
[하! 하! 하!]
혈도인마는 소리내어 웃었다.
[겸손할 줄도 알고...]
고검남은 말했다.
[아저씨, 날이 어두워졌는데... 저는 아버님이 걱정돼요. 그 분 혼자 곤
륜산으로 뛰어 올랐으니...]
혈도인마는 말했다.
[노부는 노고(老顧)와 겨루어 본 적이 없지만, 그가 천산파 장문인을
패배시키고 해남검진을 파괴한 무공은 천하에서 제일이라고 할 수 있
다. 사도의 고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격해 갔지만 나는 그
가 틀림없이 그들을 쫓아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몇 명의 정파로 자청하는 장문인들이 문제다. 만약 그들이
염치없이 포위 공격을 한다면 노고는 생명이 위험하게 될 것이다.]
고검남은 다급해졌다.
[아저씨, 빨리 저를 데리고 곤륜산으로 가 주세요. 그래야 아버님에게
도움이 될 게 아니에요. 저는...]
[얘야, 서둘지 말아라!]
혈도인마는 웃었다.
[스스로 정파를 자처하는 노귀(老鬼)들 가운데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없다. 결코 그와 같이 뻔뻔스러운 일을 하지 않을 것이
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그렇게 하리라 믿어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무당
파에서 음모를 꾸민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결코 우리 아버
지를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혈도인마는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음, 그래. 그럴 가능성도 있겠구나. 그 노귀들은 노고가 몸에 천영비
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를 해칠지도 모르겠구나.]
고검남은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빨리 가지 않습니까?]
혈도인마는 대답했다.
[얘야, 안심해라. 그들이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그 후레자식들을
모조리 처리하겠다!]
고검남은 엎드려 절을 올렸다.
[검남이 큰절을 올려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혈도인마는 재빨리 고검남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얘야, 나에게 고맙다고 하지 말고 너 자신에게 고맙다고 하여라. 천
하에 그 누가 있어 너와 같이 효성이 지극한 아이의 성실하고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겠느냐?]
그는 고검남을 안고 그의 얼굴을 한번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
다.
(아! 누가 이토록 귀여운 아이가 아비 없는 고아가 되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사람의 염통을 생으로 씹어 먹는 혈도인마는 깊이 감동을 받았고, 혈
수천마를 도와주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해도 착한 본성이 있으며 양지(良
知)와 열성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이란 없을 것이다.
혈도인마는 왼손으로 고검남을 끌어 안았다.
[얘야, 너는 내 목을 단단히 잡아라. 이제부터 우리들은 밤을 도와 길
을 재촉할 것이고 날이 밝을 무렵이면 옥청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
다.]
고검남은 고개를 끄덕이고 두 손으로 혈도인마의 목을 힘껏 끌어 안
았다.
[아저씨, 안심하세요. 저는 결코 손을 놓지 않을 거예요.]
이 때 어둠의 장막은 하늘을 뒤덮었고 석양은 서산 너머로 자취를
감춘 후였으며 하늘에는 몇 개의 차가운 별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밤바람이 산골짜기에서 불어와 썰렁한 기운을 느끼게 했다.
혈도인마는 왼손으로 고검남을 안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부드러운 머
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얼마나 꿋꿋한 아이냐. 내 어찌 이 아이가 상해를 입도록 할 수 있겠
는가?)
그는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만약 자기가 안고
있는 어린애의 몸에 그가 몽매에도 잊지 못하고 달려오게 한 천영보
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고검남을 곤륜산으로
보내주려고 했을까? 그때도 이와 같이 숭고한 상념을 간직할 수 있었
을까? 목숨을 걸고 고검남의 안전을 지키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을까?
이 점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인성의 약점이기 때문
에 그 누구도 그와 같은 유혹을 물리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 혈도인마는 확실히 천영보도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얘야, 추우냐? 옷을 더 입을래?]
고검남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 춥지 않아요. 아저씨 고마워요.]
혈도인마는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떠나도록 하자. 추워진다면 언제든지 나에게 이야기
해라.]
그는 마치 커다란 새처럼 우뚝 솟아 있는 벼랑 위에서 몸을 날리더
니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산속으로 내달았다.
엷은 달빛 아래 험준한 산과 산등성이, 그리고 막다른 계곡과 벼랑은
그저 희뿌연 그림자처럼 보였다.
혈도인마는 그와 같이 황량하고 조용한 산등성이 사이를 달리고 무
수한 벼랑을 건너뛰기도 했으나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멈출 줄을 몰
랐다. 고검남은 바짝 혈도인마의 목을 껴안고 있었다. 약간 우울해 보
이는 한 쌍의 눈동자로 뒤로 달려가는 듯한 산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는 무수한 상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홀로 곤륜산으
로 올라간 부친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별과 달을 바라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하늘이시여. 보호해 주세요. 아무쪼록 우리 아버님이 편안 무사하시기
를 비나이다.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으시기를 비나이다.)
혈도인마는 절세의 경신법을 펼쳐 곤륜산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가
고 있었으나 고검남은 여전히 그가 좀 더 빨리 달렸으면 하고 바랬다.
심지어 자기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쳐 새처럼 곤륜산 꼭대기로 날아
올랐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시각은 쉬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차가운 달 그림자도 기울고 동녘
하늘에 어느덧 희뿌연 빛이 피오 올랐다. 사방에 우뚝 우뚝 솟아 있는
묘들과 울창한 숲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기온은 더욱 차가워졌다. 그러나 고검남은 조금
도 한기를 느낄 수 없었다. 그는 혈도인마의 몸에 매달려 있었고 혈도
인마의 온몸은 불타는 것처럼 화끈거렸으며 이마에서 땀방울까지 맺
혀 있었다.
고검남은 하얗게 세어진 귀밑머리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고 속
으로 미안함을 느꼈다.
[아저씨, 지치셨어요. 좀 쉬어 가세요.]
혈도인마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한번 몰아쉬었다.
[너는 뭐라고 했느냐?]
고검남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지치신 것 같아요. 저를 내려놓고 좀 쉬도록 하세요.]
혈도인마는 아! 하더니 고개를 쳐들고 하늘빛을 살폈다.
[노부가 정말 늙었나 보구나. 이 정도 달려왔다고 지쳐서 이 모양이
되다니. 좋다! 우리 좀 쉬도록 하자. 날이 밝을 무렵에는 틀림없이 도
달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앞에 있는 산이 보이지? 저게 바로 곤륜산의
주봉(主峰)이란다!]
혈도인마는 고검남을 업고 이와 같이 험준한 산속에서 달음질치면서
길을 주의해야 했고 속도를 빨리해야 했기 때문에 지극히 힘을 소모
했다. 지금처럼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안위를 걱정하고 전력을 다해
달려 본 적은 없었다.
무림에서 경신법이 아무리 고명한 사람이라도 결코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체력을 극도로 소모하여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었다.
혈도인마는 고검남을 한 널따란 바위에 앉혀 놓고 말했다.
[얘야, 너도 좀 쉬어라. 나는 좀 정좌를 하고 운기조식을 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곤륜산에 올랐을 적에 너의 아버지를 도와싸우지 못
하게 될 것이다. 명심할 것은 나를 방해하지를 말라는 것이다. 나는
한 잔의 차 마실 여유만 있으면 된다.]
고검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저는 방해가 되지 않을 거예요.]
혈두인마는 고검남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
기행공을 했다.
사파의 내공신법은 연마하는 시일이 짧아도 거두는 수확은 엄청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내공에는 나쁜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어느 정도에
이르면 반드시 피가 거꾸로 흐르고 주화입마한다는 사실이었다.
정파의 내공신법에는 그런 부작용이 없었다. 물론 진도는 비교적 느
리지만 근기를 튼튼히 하기 때문에 시일이 오래 될수록 내공이 더욱
깊어지며 털끝만큼도 요령을 피우지 않게 된다. 따라서 사파의 사람들
은 공력이 지극히 깊어지게 되었을 적에 주화입마의 현상이 나타나게
될까봐 조마조마해지며 온갖 방법을 다해서 주화입마를 피하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오직 천영상인 한 사람만이 사파에 입문해서 주
화입마를 피할 수 있었고 무극(無極)의 한계까지 올라 천하에 으뜸가
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여타의 무수한 사파의 고수들은 최후에 가서는 이와 같이 불태우는
듯한 고통을 피하지 못하고 지극히 비참하게 죽어간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천영보도가 강호에서 그토록 커다란 가치를 가지게 되
고, 정사를 막론하고 그 보도를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 된 원인이었다.
만약 사파의 사람이 얻게 된다면 반드시 그 자신의 몸에 도사리고
있는 후환을 제거하고 무상의 신공을 연성해서 천하 제일인이 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무림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게 될 것이
었다. 반면 정파의 사람이 취득하게 된다면 그 자신의 무공을 더욱 발
전시켜 천하제일 문파를 만들 수가 있으니...
고검남은 몸에 지니고 있는 그 한 장의 해어진 양피지가 그토록 진
귀한 물건인 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다만 부친이 그것을 귀하게 여기
고 그에게 잘 보관하라고 당부했기 때문에 잘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
다.
이때 그는 비스듬히 그 바위에 앉아서 엄숙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혈도인마를 바라보며 부친의 안위를 염려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그는 혈도인마의 약간 희어진 머리카락 위로 몇 가닥의
허연 안개 같은 것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니 점차 김같은 것이 짙어
지면서 마치 찜통의 뚜껑을 열어 놓은 것처럼 뭉실뭉실한 뜨거운 열
기가 그의 머리 위에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공을 연마한다는 것은 정말 기묘한 일이로구나!)
그는 속으로 생각을 했다.
(아버지 역시 머리에서 허연 김이 솟아나고 아무렇게 손으로 후려쳤는
데도 그토록 여문 바위가 쪼개졌었지...)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강호에서 옳은 일을 행하고 세상을 자기 집처럼 여기고
떠돌아다닌 것처럼, 나도 그런 커다란 재간이 있다면 지금쯤다른 사
람에게 이끌려서 산 위로 오르지 않았을 것이고, 이곳에서 애태우며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처지에 놓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자기의 양쪽 다리가 어릴 적부터 불
구였기 때문에 무공을 배우지 못했다고 탓했다.
그가 자기 자신을 탓하고 있을 적에 갑자기 혈도인마의 온몸이 마치
하얀 안개에 뒤덮여 있는 것 같았고 그 몸을 에워싸고 있는 안개는
갈수록 짙어졌다.
그는 속으로 놀라 자기가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방을
바라보니 조금 전 똑똑히 보이던 뫼와 숲들이 지금은 하얀 안개에 완
전히 뒤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잠시 동안에 산속에 커다란 안개가 피어오른 것이었다.
산골짜기 쪽을 내려다보니 구불거리는 안개가 마치 파도처럼 끊임없
이 치닫고 뒹굴고 있었다. 한가지 상념이 번뜩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이와 같이 심한 안개라면 길을 잃게 될 것이 아닌가!)
그는 두려워져서 두손으로 바위를 딛고 똑바로 몸을 앉혔다. 혈도인
마를 부르려고 했으나 조금 전에 당부한 말을 상기했다. 혹시 그의 운
기조식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그는자기 자신을 억눌렀다. 안개는 갈수록 짙어졌고 점점 퍼져나가
온 산을 숫제 뒤덮어 버린 것 같았고,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과 맞
닿은 것 같았다.
잠시 동안인데도 사방은 희뿌연 안개로 다섯 손가락을 코앞에 뻗쳐
도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같이 짙은 안개 속에 갇히자 마음속으로 느끼는 공포감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