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향교(仁川鄕校)
1. 인천향교 추계 석전제(釋奠祭)<Covid-19로 簡素祭享 告由祭>
2021년 9월 28일 11시에 열린 인천향교(仁川鄕校) 추계석전제(秋季釋奠祭)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었다.
코로나(Covid-19) 영향으로 석전제가 대폭 축소되고 외부 관광객은 일체 관람이 되지 않았는데 미리 향교에 연락하여 양해를 얻고 참석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다행히 몇 년 전 향교에서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던 김석중(金錫中)님이 제관(祭官)으로 참여한다기에 부탁을 하여 다리를 놓아 성사된 것이다.
김석중(金錫中)님과 나는 23대 전교(典校)님이셨던 강정원(姜汀遠) 전교님 밑에서 함께 한학을 공부하며 경북 금오서원, 파주 파산서원 등 전교님을 모시고 서원견학을 다니기도 했는데 10여 년 전 옛날이다.
10분전에 도착하였는데 황공스럽게도 여러 제관들이 도열한 앞으로 나를 불러 소개를 하고, 모든 절차를 마음 놓고 사진 찍어도 좋다는 허락과 함께 끝난 후 함께 차도 마시며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
인천향교는 문학산(文鶴山) 기슭에 있어 문학향교(文鶴鄕校)라고도 하는데 인천도호부청사 안에 함께 있어 우선 인천도호부 건물부터 소개하기로 한다.
<1>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청사(廳舍)
인천도호부 정문 / 아문(衙門:外三門) / 동헌(東軒)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8도(道)로 나누고 도(道)아래 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도호부(都護府)-군(郡)-현(縣)을 두고 지방행정업무를 관장하였는데 경기도의 경우 3개 목(牧), 8개 도호부(都護府), 10개 군(郡), 12개 현(縣)이 있었다고 한다. 강희맹(姜希孟)의 ‘인천부승호기(仁川府陞號記)’에 의하면 1424년 객사(客舍)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그 이전에 이미 도호부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인천도호부에는 객사(客舍), 동헌(東軒), 내동헌(內東軒) 등 15~6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현재는 객사와 동헌 일부만 복원되어 보존하고 있다. 복원한 건물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화도진도(花島鎭圖)를 근거로 객사(客舍), 동헌(東軒), 공수(公須) 등 7동(棟)의 건물만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당시 도호부의 역할은 수령칠사(守令七事)라 하여 일곱 가지 정사(政事)를 명기하였는데 ①농사와 누에치기 ②인구를 늘리기 ③교육을 진흥시키기 ④군대 관리하기 ⑤부역(負役)을 균등히 하기 ⑥민사소송을 바르게 하기 ⑦부정과 부패를 저지르지 않기 등이었다고 한다.
각 지방관(地方官)의 치적(治積)은 관찰사를 통해 매년 임금에게 보고되었고 유사시에는 군대를 지휘하는 군사지휘권도 주어졌는데 이곳 안내판에 보면 이곳에 부임하였던 부사가 355명이라고 적혀있다.
이 인천도호부관아 건물은 인천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문(中門) / 객사(客舍:邵城館) / 야외공연장
인천도호부 건물은 문학산 기슭에 있는데 원래 있던 곳에서 옆으로 위치를 조금 옮겨 복원(復元)하였다고 하며, 바로 앞에는 8차선 대로가 있고 건너편에는 아시안게임이 열렸던 대형 경기장이 있다.
도호부 정문에 서서 보면 우선 창을 들고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나졸들 동상(마네킹)이 서있는데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정식 관아의 정문인 2층 아문(衙門:外三門)이 위엄 있게 서있다.
바로 앞에 있는 중문(中門)을 지나면 부사(府使)가 집무하던 건물인 동헌(東軒)이 있고 아문(衙門)에서 그 옆에 있는 내삼문(內三門)으로 들어가면 임금님의 위패를 모신 객사(客舍:邵城館)가 보인다.
이 객사는 가운데 지붕이 조금 높은 칸은 임금님의 위패를 모신 소성관(邵城館)이고 양 옆으로 붙은 두 칸은 중앙에서 내려온 중앙관리들이 묵는 숙소(宿所:客舍)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둘레에는 민속공연을 할 수 있는 공연장도 있고 전통문화 체험관,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등 여러 시설들이 들어서 있는데 문학산 기슭이라 주변 경관도 매우 아름답다.
<2> 인천향교(仁川鄕校) 건물구조
대성전(大成殿) / 명륜당(明倫堂) / 왼쪽은 명륜당, 앞은 서재(西齋)
인천향교(仁川鄕校)가 있는 곳은 인천시 문학동(文鶴洞) 미추홀구(彌鄒忽區) 매소홀가(買召忽街)인데 인천향교(仁川鄕校) 또한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추홀(彌鄒忽), 매소홀(買召忽)은 삼국시대(三國時代) 인천을 부르던 지명이었다.
도호부 정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우뚝 솟은 홍살문(紅箭門)이 보이는데 인천향교를 오르는 문으로 옆에는 역대(歷代) 인천부사(仁川府使)들의 공적을 찬양하는 선정비(善政碑) 14개가 늘어서 있다.
이 선정비는 시민들이 부사(府使)의 선정(善政)을 기려 세운 것도 있지만 부사직을 퇴임하며 본인이 스스로 세운 것도 있다는데 일부는 시민들이 적절치 않다고 항의하여 뽑아서 엎어놓은 비석도 있다.
조선시대, 각 지방마다 있었던 향교(鄕校)는 현유(賢儒)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배향(配享)하며 지역 주민들의 교육(敎育)과 교화(敎化)를 목적으로 하던 기관으로, 인천향교에서는 해마다 봄의 춘계석전대제(春季釋奠大祭), 가을에 추계석전대제(秋季釋奠大祭)을 봉안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분향례(焚香禮)을 올린다. 그 밖에도 필요할 때 간소하게 올리는 고유례(告由禮), 성년례(成年禮), 기로연(耆老宴), 자연보호활동 등의 행사를 하는데 금년의 추계석전대례는 고유례(告由禮)로 올리는 것이라고 한다.
홍살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50m 쯤 오르면 외삼문(外三門)이 있고 문을 지나 석조계단을 오르면 곧바로 인천향교 건물로 명륜당(明倫堂)이라는 현판(懸板)에 제일 먼저 보인다.
건물 가운데의 문으로 들어가면 왼쪽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明倫堂)이고 오른쪽은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재실(齋室)인데 기다랗게 붙어있는 건물이다. 재실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동재(東齋) 뒤쪽에 아담한 교직사(敎職舍)가 있는데 향교 건물 관리인이 기거하던 건물이다.
다시 돌아 나오면 명륜당 앞에는 작은 마당이 있고 좌우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는데 유생들이 기거하던 건물이며, 명륜당 마당에서 다시 계단을 오르면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大成殿)이 있고 좌우에는 향교의 내력(來歷) 기록물을 전시한 자그마한 방인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갖추어져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주 건물인 대성전(大成殿)은 성현(聖賢)들의 위패를 모시고 석전제를 올리는 곳인데 이곳에는 공자(孔子)를 위시하여 5성(五聖)과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位牌)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5성(五聖)은 ①공자(孔子) ②안자(顔子) ③증자(曾子) ④자사(子思) ⑤맹자(孟子)를 일컫고,
18현(十八賢)은 ①설총(薛聰) ②안유(安裕) ③김굉필(金宏弼) ④조광조(趙光祖) ⑤이황(李滉) ⑥이이(李珥) ⑦김장생(金長生) ⑧김집(金集) ⑨송준길(宋浚吉) ⑩최치원(崔致遠) ⑪정몽주(鄭夢周) ⑫정여창(鄭汝昌) ⑬이언적(李彦迪) ⑭김인후(金麟厚) ⑮성혼(成渾) ⑯조헌(趙憲) ⑰송시열(宋時烈) ⑱박세채(朴世采)를 모신다.
인천향교의 모든 건물들은 모두 아기자기하고 모여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아담하고 정겹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