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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장~50장까지와 출애굽기 1장~2장의 의미분석 | |
언약 자손들의 형통 | 자손의 생육과 시련 |
46장~47장 야곱 가족의 이거 48장~49장 야곱의 축복과 예언 50장 요셉의 위로와 약속 | 1장 자손의 생육과 애굽의 학대 2장 모세의 출생과 광야의 시련 |
47장 1절부터는 요셉이 바로에게 형들을 소개하고 그로부터 땅을 주도록 하라는 허락을 받은 후 아비 야곱을 소개하고 아비와 형들에게 땅과 식물을 주어 공궤하는 내용인데, 1절부터 6절까지는 먼저 요셉이 바로에게 아비와 형제들이 온 것을 보고하고, 선택한 다섯 명의 형들을 소개하며 인사를 시키고서 고센 땅을 주도록 허락을 받는 내용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1절)라고 보고합니다. 요셉은 고센 땅을 얻고자 바로에게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왔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목축업을 한다는 것을 바로가 인지하도록 한 것입니다.
앞서 바로는 요셉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애굽으로 속히 올 것을 명하며, 애굽의 좋은 땅과 물건들이 있으니 기존의 집에 있는 물건들을 미련없이 버리고 오라고(창45:17~20) 했습니다. 물건들을 챙기다보면 지체가 되며 총리 요셉으로 인해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공급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집에서 기르며 생업으로 하였던 ‘양과 소와 모든 가축’을 이끌고 왔습니다. 이는 애굽 땅에서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때가 되면 본향을 향하여 출애굽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에게 가족들의 거주지로서 ‘고센 땅’이라고 지정하여 보고합니다. 그리고 그는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2절)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3상절)고 묻습니다. 이는 앞서 요셉이 형들에게 미리 바로의 물음을 예측하여 일러 준 질문입니다(창46:33).
이에 형제들은 바로에게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데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3하,4절)라고 대답합니다. 앞서 46장 34절에서 요셉이 아버지와 형들에게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라고 사전에 일러 주었습니다.
만약 바로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면 목자의 신분을 숨기고 애굽인들이 좋아하는 생업을 가지려고 해야 마땅합니다. 또한 바로는 앞서 가나안에서 양식을 구하러 온 자들이 요셉의 형들임을 알고서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애굽으로 오라고 할 때에, 속히 가족들만 데리고 오고 다른 기타 가구들은 모두 버리고 와서 애굽의 좋은 것들로 가져라고(창45:20)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라고 하며, 바로에게 자신들이 목축을 하는 생업과 신분을 사전 선포해 버립니다.
그리고 형들은 동생 요셉의 총리직에 자신들을 기대지 않고 단지 바로에게 나그네로서의 간청하는 형식으로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왜 그렇게 목축에 매달릴까요? 왜 애굽의 좋은 것과 좋은 곳을 마다하고서 목축과 고센 땅을 고수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곧 제사를 하기 위함이며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이 애굽에 머무는 것에 대한 표현으로 4절에서 ‘~거류하고자’라고 하는데, 원문에서는 ‘라구르(לגוד)’라고 하였으며 뜻은 ‘잠시 동안 머물기 위하여’ 입니다. 즉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에 온 목적이 잠시 동안만 머무는 것임을 밝히는 말입니다. 한편 히브리어 ‘구르’는 특히 혈족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 즉 나그네로 낯선 지역에서 머무는 것을 뜻합니다.
위의 내용들이 확인시켜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창15:13)이 이스라엘에게, 지금까지의 여러 험난한 과정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믿음이 되었으며 삶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야곱과 모든 아들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요셉을 중심하여 믿음으로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고센 땅’이라는 것으로 분명해졌고 ‘목축’이라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형제들의 신분과 간청을 들은 바로는 요셉에게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5,6절)고 하며 요셉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여 줍니다. 여호와께서 작정하신 뜻대로 섭리하여 가시는 일이기 때문에 언약 자손들의 일이 모두 형통하게 잘 풀려가는 것입니다.
7절에서 12절까지는 요셉이 자기 아비 야곱을 바로에게 소개하여 인사를 하게 한 후에 아비와 형들에게 좋은 땅 라암셋을 주고 식물을 주어 봉양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합니다(7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하십니다(창20:7). 열조의 조상 중 아브라함이 선지자라면 이삭과 야곱 역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야곱이 바로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 준 것입니다. 또한 야곱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군주에게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축복을 한 것입니다.
세상의 군주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없는 자요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만 하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야곱은, 비록 양식을 얻고 애굽의 총리로 있는 아들로부터 봉양을 받는 처지에 놓였어도,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한 애굽의 왕이라지만 하나님이 없는 그에게 만나자마자 처음으로 한 일은 하나님의 복을 기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로는 야곱에게 “네 나이가 얼마냐”며 물을 때에(8절)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9절) 바로에게 답하며 그에게 축복하고 나옵니다(10절). 이 말은 야곱이 살아온 지난 날을 회상하며 하는 말입니다. 지난날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보냈으나 이제는 요셉을 만나 형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위의 본문에서 ‘나그네 길의 세월’은 ‘예메 쉐네 메구라이(יםל ני ימי)’인데, 뜻은 ‘머무름의 년들의 날들’로 직역됩니다. 여기서 ‘머무름(메구라이)’이라는 말은 야곱이 이 세상에서의 삶도 잠시 머무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는 야곱이 생의 말년에 와서 그의 인생관의 변화를 뜻합니다(잠16:31참조).
야곱은 세상의 모진 풍랑을 경험한 후 말년에 와서, 인생이란 이 땅에서 잠깐 ‘머무는 곳’이라는 순례자로서의 삶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고후4:18 참조). 실로 야곱이 깨달은 바와 같이 인생은 이 땅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며 이 땅의 삶으로만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잠시 머무는 것에 불과하며 인생은 순례자의 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히11:9,13 참조).
이어서 야곱은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여기서 ‘험악한 세월’은 단지 고생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산 인생임을 의미합니다.
인생이 우리의 뜻대로 된다면 그것처럼 편안한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이 힘든 것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험악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험악한 인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한다면 험악한 인생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을 바라보는 야곱의 새로운 시각이었기 때문에 바로의 존재 위치나 힘을 초월하여 축복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저주로 끝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에게 축복을 하고서 나옵니다(10절).
요셉은 바로가 지시한 대로,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살 곳을 주었는데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습니다(11,12절).
‘라암셋’은 ‘왕의 집’이라는 뜻인데, 고센 땅에 있는 한 도성 이름입니다. 이곳이 애굽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자손의 중심 거주지가 되었으며 또한 출애굽을 위하여 집결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출12:37).
13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보여주신 꿈의 계시대로 기근이 더욱 심하여, 요셉이 곡식으로 애굽과 가나안의 돈을 다 거두고 계속하여 모든 짐승까지 다 거둠으로, 무리가 토지까지 곡식으로 사라고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계속되게 하시는 기근에 의하여 애굽의 모든 소유를 바로에게 돌아가게 하시는 섭리입니다.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갑니다(13,14절).
본문에서 ‘더욱’은 원문에서 ‘메오드(מאד)’인데 이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로 ‘굉장히’, ‘엄청나게’, ‘매우’, ‘대단히’라는 뜻을 가집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당시 근동 지역에 밀어닥친 기근이 매우 심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당시 기근은 모든 땅을 말라붙게 하였고 먹을 것은 찾아볼 수도 없게 하였으므로, 이제는 저장된 식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말씀합니다. 이러한 근동 지역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예비된 풍부한 양식으로 공급하셔서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언약대로 선택하신 백성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는 섭리이십니다.
그리고 ‘황폐하니’라는 말은 ‘쇠약하다’, ‘기운이 없어지다’, ‘실신하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땅이 오랫동안 계속된 이상 기온 및 자연재해로 그 힘을 완전히 잃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그 땅에 사는 사람들도 역시 기운이 없어지며 실신할 정도에까지 이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이 바로에게 꿈으로 보여주시며 계시하신 것에 대하여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셉에 의해 칠 년 대풍년 때에 거두어 창고에 예비된 양식은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 곧 은으로 교환되어 모두 바로의 궁으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마저 떨어지자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이르되 돈이 떨어졌사오니 우리에게 먹을 거리를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15절)하며 호소합니다.
위의 본문에서 애굽 백성들의 다급함과 처절한 호소가, ‘떨어졌사오니’와 ‘죽으리이까’라는 단어에서 확인됩니다. 이는 큰 기근이 진행 중인데도 불구하고 돈이 떨어져서 더 이상 양식을 구하지 못한다는 절박함의 표현이며, 이로 인하여 양식을 관장하는 요셉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다급함을 토로하며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탄원을 들은 요셉은 “너희의 가축을 내라 돈이 떨어졌은즉 내가 너희의 가축과 바꾸어 주리라”(16절)고 합니다. 요셉은 백성들의 돈이 다하자 이번에는 가축을 비롯한 소유물을 식량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요셉은 돈이 떨어진 백성들에게 저들이 가진 가축으로 양식과 바꾸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러한 요셉의 정책에 백성들은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끌어오는지라 요셉이 그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받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되 곧 그 모든 가축을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먹을 것을 그들에게” 줍니다(17절). 백성들은 집집마다 소유한 가축을 요셉에게 끌어와서 양식과 바꾸었고 그 해 동안에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해 동안’이라는 것은 기근이 시작된 지 육 년째 되는 해입니다. 이어지는 23절에서 ‘종자 분배’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습니다.
기근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칠 년 동안 계속되었고, 칠 년째 되는 마지막 해에 종자 분배가 이루어졌다고 볼 때, 본문의 ‘그해 동안’은 기근이 시작된 지 육년 째 되는 해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자 요셉에게 지혜를 주셔서 백성들을 선하게 다스리게 합니다.
'그해 동안에 먹을 것’이 떨어지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가축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토지뿐이라
우리가 어찌 우리의 토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18,19절)고 합니다.
위의 본문에서 ‘새 해’는 칠 년 기근의 일곱째 해를 뜻합니다. 이제 백성들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몸과 토지뿐임을 밝히며 양식을 주고 살 것을 청합니다.
그리고 바로의 종이 되어서 종자를 주게 되면 저들이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않을 것임을 말합니다. 백성들은 막다른 상황에서 오직 요셉의 호의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모든 식량의 근원지이기 때문입니다.
기근은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꿈으로 계시하시고 있게 하신 사건입니다. 기근으로 인해서 애굽 백성은 돈을 내어놓고 가축과 토지를 내어놓고 몸마저도 내어놓습니다. 몸까지 내어놓았다면 그들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어 다스리는 세상의 실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지금 요셉과 이스라엘이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이 기근에 몰린 백성들로부터 제사장들의 전지를 제외한 애굽 전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주고 토지법을 세워 백성으로 경작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백성들의 요구를 들은 요셉은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됩니다(20절).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근을 이기지 못하고 시달려 토지까지 모두 팔게 되고 그것이 바로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요셉이 백성들을 애굽의 영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성읍들에 이주시킵니다(21절). 그러나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22절) 그래서 26절에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애굽에서의 요셉의 치적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확증하여 주는 사실 증거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본서를 기록할 당시 애굽의 모든 토지가 바로의 소유였으나 제사장들의 토지는 바로의 토지가 되지 아니한 것은 요셉이 애굽을 통치할 당시 제사장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백성 요셉이 애굽을 통치한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확증하여 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요셉의 사건뿐만이 아니라 이 사건과 이어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창세기의 모든 내용이 역사적인 실재 사실인 것입니다.
요셉은 거두어들인 토지와 함께 거주지를 성읍들로 이주를 통한 개혁을 단행합니다. 성읍은 대풍년 때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인 곡식을 저축한 성을 말합니다. 즉 백성들로 제때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으로 옮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고센 땅에 거주하는 이스라엘은 모두 그곳에 머물도록 하여 출애굽을 준비하게 합니다.
요셉이 백성에게 종자를 주면서 이르기를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23,24절)고 말합니다.
요셉은 바로와 모든 백성들을 위해 종자를 지급하여 그 땅에 뿌리게 한 것입니다. 이는 큰 기근이 서서히 끝나감을 뜻합니다.
위 본문에서 ‘오 분의 일’이라는 것은 정액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율을 말하면서, 수확따라 상납할 것을 명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오분의 사’를 가지고서 토지의 종자와 가족의 양식으로 삼을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백성들은 응답하기를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25절)라고 합니다. 이는 요셉의 토지에 대한 세금 정책이 백성들에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위 본문에서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는 ‘우리들이 나의 주의 눈 속에서 은혜를 발견할 것입니다’라고 해석됩니다. 특히 본문에서 ‘발견하다’는 뜻의 동사 ‘니므차(נמצא־)’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과거에 은혜를 입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거듭 은혜 입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단어입니다.
한편 요셉은 애굽에 처음 왔을 때에는 종의 신분이었으나 이제는 오히려 애굽 사람들에 의해 ‘나의 주(아도니)’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의 배후에는 실로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들이 원래는 죄의 종으로 살아왔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놀라운 구원의 역사 가운데서 확인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자기 백성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종과 같이 온갖 고난과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그를 다시 부활하게 하셔서 왕의 왕으로 높이시고 그를 따르며 믿는 자들에게 자녀삼아 주셨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토지법과 세금에 대하여 법을 세우므로 인해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며 오늘날까지 이”르게 됩니다(26절). 즉 오 분의 사는 백성들로 종자와 가족들을 위해 양식이 되게 하고 ‘오 분의 일’은 바로에게 상납하여 국고에 들어가므로 국가 역시 안정적으로 정치를 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애굽의 신들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음을 말씀합니다.
27절에서부터 31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 족속이 고센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고, 이스라엘이 나이가 많아 요셉에게 자기를 선영에 장사하도록 요셉으로 맹세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고센 땅에서의 이스라엘은 애굽의 토지법이나 세금에 관계없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거주의 이동 없이 지냅니다. 그리고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합니다(27절).
여기서 ‘생육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라(פדה)’는 ‘열매 맺다’, ‘가지 치다’는 뜻이 있으며, 또한 ‘번성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바(רבה)’는 ‘증가하다’, ‘우글거리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인구가 증가하는 과정과 결과를 표현하는 말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열조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창13:16,15:5,17:2,17:6,22:17)에 대한 성취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계승되었으며(창26:4,26:24,28:3) 그리고 야곱에게도 계승된 것입니다.
소수의 인원으로 애굽에 내려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양육하심의 복으로 말미암아 ‘생육하고 번성했다’는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과 열조의 약속이 이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절대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신실하신 분이시며 또한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15:29)
여호와께서는 일곱 해 동안 극심한 흉년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언약 자손을 굶어 죽게 하지 아니하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셔서 언약대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그들로 깨닫고 경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 본문을 읽고 공부하는 독자들에게 주시는 의미입니다.
야곱이 애굽 땅에서 십칠 년 동안 살았으며 야곱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였습니다(28절).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니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29,30절)라고 대답합니다.
본문에서 ‘허벅지’는 ‘환도뼈’를 가리키는데, 고대 근동 지방에서 이 뼈는 남자의 성기와 관련되어 생명의 원천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손을 넣고 맹세하는 것은 그 맹세의 효력이 후손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맹세로서 반드시 준수할 것을 다짐하는 행위였습니다(창24:9 참조).
그리고 ‘인애와 성실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뜻하는 것으로서, 야곱은 요셉에게 하나님의 성품으로 맹세하며 자신의 요구를 들어 줄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는 것은,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나를 그들의(조상) 무덤 안에 나를 매장하라’가 됩니다. 즉 조상들과 함께 묻히게 하라는 뜻입니다.
나이 많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여호와(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이심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위의 본문 내용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으로 자신의 위골된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게 하면서까지 맹세하게 하며,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일백사십칠 년 동안 살아오면서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언약하신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언약대로 그의 자손이 애굽에서 사백 년이 지나면 반드시 자기 선영이 있는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가 애굽으로 향할 때 브엘세바에 이르렀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창46:4)고 언약하신 말씀을 그는 잊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에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말씀대로 행하겠음을 다짐합니다. 야곱은 또다시 요셉에게 이르기를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합니다(31절). 야곱은, 몸은 점점 더 쇠하여져 갔으나 영혼은 더욱 여호와를 의지하며 감사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요셉에게 다시 한번 맹세의 다짐을 받고서 하나님께 경배한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경배한 것은, 요셉이 자신의 맹세를 다짐하였고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창46:4). 그래서 요셉으로 반복하여 자신을 선영에 장사하도록 맹세하게 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야곱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을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통하여 자녀들에게, 저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원히 거할 땅은 오직 가나안뿐 임을 온몸으로 증언합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민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하신 삶의 터전으로 지정해 주신 땅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거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 민족들이 자기들 고유의 영토를 지키고 그리워하는 것 이상의 절대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자신들이 지금 평안히 머무르고 있는 애굽 땅을 언젠가는 떠나 가나안 땅에 돌아가 영구 정착하려는 것은, 언약 백성이요 선민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절대적 가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의 땅 가나안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 언약하신 선민으로서의 고유한 지위를 유지하며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한 가장 원초적 조건입니다. 실로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민족의 육체적, 영적, 법적 뿌리였던 것입니다.
가나안이야말로 열조와 선민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구체적 증거의 하나입니다. 가나안 땅은 열조에게 약속하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삶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당장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애굽 땅에서 요셉의 비호 아래 영광과 번영을 구하며 우거하고 있으나, 때가 되면 그 역시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필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 정착하여야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갈 땅은 오직 가나안뿐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애굽에 내려갔던 이주 제 일 세대의 가장으로서 자신의 유해를 필히 가나안 땅에 묻게 함으로써, 이같은 사실을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더욱 극적이고도 상징적으로 분명히 보여준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겸허해지고 진지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유해를 꼭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 것은 더욱 생생한 육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구약의 가나안 땅은 영적으로 신약의 교회를, 그리고 더욱 궁극적으로는 저 하늘의 천국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시신을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는 야곱의 유언은, 온 세대의 성도들에게, 성도들은 오직 믿음 안에서, 교회 안에서, 언젠가는 영원히 저 하늘의 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