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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의 묘미, 혹은 촌철살인의 시학
―김병수 시인의 시집 {세상에 지는 꽃은 없다}
세속적 군상들의 욕망에 대한 비판
김병수 시인의 시편들은 대부분 짧은 잠언(箴言)과 경구(警句, epigram)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시인의 시적 영역이 풍자시에 속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양한 시편들에서 시인은 핵심을 찌르는 경구로 한 개인과 사회가 지닌 부조리한 국면을 드러내거나 혹은 정서적 동인의 정곡으로 파고들어 깊은 울림과 감동을 자아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미학을 실현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는 생략과 비약, 그리고 인간의 생리와 사회의 속성에 대해 근원적인 곳으로 파고 들어가는 통찰력 등이 빛을 발하고 있다. 물론 이 시집의 곳곳에 서정적인 시편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풍자와 비판의 본질이 지적인 영역의 것이어서 기본적으로 기지(機智)와 위트(wit)가 발휘되는 곳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김병수 시학의 본질적 영역과는 거리가 있다.
시인의 풍자적 대상은 크게 보아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세속적 차원에서 현대인이 지닌 어리석음이라든가 우매함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데, 그러한 속성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현대인이 지닌 욕망, 특히 과도한 물질적 욕망이라든가 헛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과도한 물욕과 그것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삶의 본질적인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러한 국면이 시인의 주된 비판의 표적이 되는 셈이다.
다른 하나의 측면은 사회의 부조리인데,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지닌 허점이라든가 기득권층의 잘못된 권력 운영이 빚어내는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과 부정의 등의 부조리한 현상들이 비판의 초점이 된다. 사회적 차원의 풍자는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어둠과 그늘의 핵심을 포착하여 그것을 폭로하고 그것이 지닌 부조리한 면모를 부각시키는 것이 관건인데, 시인은 예리한 통찰과 기지를 발휘하며 그러한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에 대한 풍자는 현대사회의 세태가 지닌 그로테스크하고 전도된 국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데, 그러한 점에서 김병수 시인의 이번 시집은 현대사회에 대한 해부학이자 현상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의 과도한 욕망과 현대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은 사실 시인의 머릿속에 바람직한 세상과 가치가 마련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떤 삶이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지, 어떤 사회가 이상적인지에 대한 어떤 대안을 지니고 있기에 비판은 더욱 생동감을 지니고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풍자시란 사실 풍자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잘못과 허물을 교정하고 수정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충심으로 바라기에 대상에 대한 과격하고 격렬한 비판이 가능한 것이며, 그러한 사상이 전해지기에 독자들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는 김병수 시인이 상정하는 다양한 삶의 비전과 대안을 다룬 시편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러한 시편들이 가장 빛나는 장면처럼 생각된다. 풍자와 비판의 궁극적 근거이자 미래의 지평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풍자적 시편에 타당성을 부여하면서 생산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병수 시인의 시론을 이해하는 것은 풍자적 시편의 바닥에 있는 시인의 시정신을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기에 미리 시에 대한 생각을 다룬 메타시 한 편을 읽어보자.
그토록 빛나던
별들도 실눈으로 웅크린 밤
백지에 모난 점 하나 심는다
돌부처다
땅이 녹고 녹아도 녹지 않는다
세월이 녹슬고 녹슬어도 이끼를 모른다
벼랑 끝이다
마지막 한 토막 숨결마저 삼키려는 듯
파고드는 구더기들
불 꺼진 반디 불빛에 밤새워 살랐다
포성은 멎었으나
아물지 않는 매캐한 잔해의 아우성
퍼런 낙엽의
말없는 낙하로 보듬는 새벽길
소복이 내리니 첫눈에
움트는 상想 하나
쇳조각 목젖을 어르고
사각에 괜 응어리를 녹인다
소생의 바다
백지의 섬 마다
꽃이 피고 새가 난다
―「시」, 전문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언어적 표현이 빛난다. “모난 점”이라는 말속에 시인이 벼리고 있는 가시와 뼈가 담겨 있다. 또한 “돌부처” 속에 은근과 끈기가 숨어 있기도 하다. “쇳조각 목젖”이라는 표현 속에는 촌철살인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모난 점과 돌부처, 그리고 쇳조각 목젖이 향하는 대상으로 “사각에 괜 응어리”가 제시되어 있는데, 시인이 촌철을 가지고 제거하고자 하는 대상이 바로 현대사회의 그늘이라든가 현대인의 가슴속 깊은 곳에 쌓여 있는 한과 불만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주목되는 점은 “소복이 내리는 첫눈”이라든가 “백지의 섬”이라는 이미지인데, 모든 세상의 찌꺼기와 더러움이 무화된 원초적 세계를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처럼 정화된 세상에서 “소생의 바다”가 물결치고, “꽃이 피고 새가 날”기를 소망한다. 시인의 풍자와 비판의 시편들이 자리잡고 있는 근거와 토대를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지향의 방향을 명확히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갱신된 세상과 생명력으로 충만한 유토피아적 비전이 풍자의 궁극적인 지평으로 떠오르고 있다. 김병수 시인이 주목하는 개인적 차원에서 “사각에 괜 응어리”의 가장 주요한 요소는 욕망이다.
새벽 강경 장에서 떼어 온
동태바위 머리에 이고
행상 나선 엄마의 그림자를
모질게도 쥐어 잡던 육성회비에
독사도 독살할 만큼 돈독이 올랐을 터이고
볼펜 똥을 밥 삼으며
안광으로 블랙홀을 뚫어
개천에서 용 났다 소리도 들었으니
이제는 팔자를 고쳐
고래등에 떵떵대며 살 줄 알았는데
전생의 부자놀음에 물렸는지
돈맛을 못 봐서 그런지
돈 몰라야 행복하다는 것인지
돈이 미쳐 돌아버리도록 돈맹으로 사는 지라
아이구 내 팔자야
끼니 하나 굶고 돼지꿈을 사야하는가
오늘도 가난 홀로 비가다.
―「돼지꿈」, 전문
행상을 하던 어머니의 고된 노동, 가혹하게 독촉하던 육성회비의 서러움 등이 금전에 대한 욕망을 자극했고, 그래서 시적 화자는 그에 부합하여 “볼펜 똥을 밥 삼으며/ 안광으로 블랙홀을 뚫어/ 개천에서 용 났다 소리도 들었다”는 대목에서 출세에 대한 욕망과 그것을 성취한 결과가 요약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돈맹”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 돈맹이란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을 지칭하지만, 돈에 휘둘리는 사람, 혹은 돈에 접근하지 못해서 돈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금융문맹(Financial Illiteracy)이라는 용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돈이 미쳐 돌아버리도록 돈맹으로 사는 지라”라는 구절이 시사하듯이 돈에 대한 집착과 관심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화폐 자본의 흐름은 그러한 사람들을 돈의 노예로 포섭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돈의 논리에 포섭된 삶은 역설적으로 “가난”한 삶에 빠지게 된다. “끼니 하나 굶고 돼지꿈을 사야하는가”라는 구절을 보면, 돈에 대한 논리에 포섭되어 집착하게 되었음을 암시하는데, 집착이 결국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돈에 대한 추구와 갈망이 아이러니하게도 궁핍을 초래하고 굶주림을 야기한다는 것은 욕망의 메커니즘 때문일 것이다. 욕망이란 만족을 모르는 성질이 있으며, 그래서 한계가 없는 무한한 증식만을 초래하는데,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서 욕망은 사람을 궁핍하게 만든다. 다음 작품이 이를 더욱 선명히 보여준다.
밥은 배고파서 먹는 것이 아니다.
산해진미는 말하면 잔소리
불어터진 라면도 그렇다.
먼저 애인에게 맛보이라.
사랑의 하트와 함께
친구에게도 한 볼통 보내라.
입맛이라도 다시라고
먹다 남은 뼈다귀도 버릴 것이 없다.
소셜에 올려라.
해피를 해시태그로
이 법도 잊는 날
아무리 배가 불러도
그대 허영의 허기로 아사할 지니
재삼 명심하시라.
밥은 배고파서 먹는 것이 아니다.
―「아사」, 전문
시적 논리에 의하면 ‘아사餓死’는 생물학적으로 배가 고파서 죽은 것이 아니나 허영심이라는 욕망에 결핍이 생겨서 죽은 것이 된다. 그러니까 “산해진미”라든가 “불어터진 라면” 같은 음식들은 허기를 채우기 위한 양식이 아니라 애인이라든가 친구, 혹은 소셜 네트워크의 접속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 음식물들은 배고픔이라는 요구(demand)를 충족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소비를 과시하여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욕망(desire)의 대상이 된다. 소비 역시 자신의 육체적 필요를 충족하려는 필요 소비가 아니라 자신의 소비 행위를 타인에게 보여주려는 과시 소비의 성격으로 변질된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는 오늘날 특별한 것이 아니며 일상화된 것이 되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욕구는 어느 정도 충족되면 만족에 도달하지만, 욕망이란 한계가 없으며 무한 증식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영원히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는 영양 결핍의 상태에 놓여 있고, 그러한 결핍으로 아사할 위험에 처해 있기도 하다. 더욱 큰 문제는 질주하는 현대사회의 메커니즘이 이러한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별을 본다 했다, 하루에 한 번은
그러나 자전설은 틀렸다.
밤낮 모르는 질주뿐
엉키는 발걸음에 해달조차 숨이 차다.
철이 든다 했다, 꽃 피고 지는 길에
그러나 공전설은 틀렸다.
철모르는 욕망뿐
죄 없는 달력만이 덜컹 목이 잘린다.
비극의 탄생 눈부시나
혁명은 고사하고 의문조차 불온이니
어금니 빠진 허수아비
가여이 가여이 고개를 젓는다.
―「허수아비」, 전문
현대사회의 속도전 속에는 이윤의 논리가 숨어 있다. 시간이란 상품을 생산하는 데 투여되는 비용이라는 것, 따라서 시간을 단축하는 것은 비용을 줄이는 것이며, 비용을 줄이는 것은 곧 이윤을 확대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조금 과장된 논리로 설파되고 있는 “엉키는 발걸음에 해달조차 숨이 차다”라든가 “죄 없는 달력만이 덜컹 목이 잘린다”는 표현들이 속도전에 질식해 가는 자연의 법칙이라든가 생태계의 교란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궁극적 원인에 대해서는 “밤낮 모르는 질주뿐”, 혹은 “철모르는 욕망뿐”이라는 구절들이 정확히 지시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의 질주라는 것이 결국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모르는 욕망이 모든 사태의 동인이 되는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속도전이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빼앗아 “혁명은 고사하고 의문조차 불온이니” 하면서 문제의식을 원천 봉쇄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우리 시의 관습에서 “허수아비”가 ‘가난한 성자’의 메타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을 상기해 보면, “어금니 빠진 허수아비”가 “가여이 가여이 고개를 젓는” 장면이 암시하는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 시에서 묘사하는 ‘그림자’를 향한 애도를 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보다 외로운 신세 있으랴
해마다 우주 탐방 다녀오고
월에 한 번은 달 타령
주말엔 걸어서 세계 속으로
날마다 퇴근하면 여섯시 내 고향까지
시계가 발병 나고
기억조차 몸살이 나도록
멋보고 맛보며 쏘다녔으면서도
가늠 없는 스케줄에
오늘도 제 눈에 밟히는 그림자
―「그림자」, 전문
이 시는 물론 속도전의 폐해를 고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주 탐방”, “달 타령”, 세계 여행, 내 고향 탐방 등의 여행에 중독된 듯한 레퍼토리의 나열은 현대인의 여가 활용에 대한 강박관념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강박관념 속에는 시간을 분초로 아껴서 여행의 풍물을 만끽하고자 하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데, “시계가 발병 나고”라든가 “기억조차 몸살이 나도록”이라는 표현들이 그러한 내면의 초조함과 다급함을 암시해 주고 있다. 문제는 이로 인해서 반성과 성찰을 통한 내면의 성장이라든가 영혼의 성숙과 같은 정신적 풍요로움이 차단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제 눈에 밟히는 그림자”라는 대목이 그러한 사정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보다 외로운 신세 있으랴”라는 구절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분신이자 자아의 내면적 성찰의 이미지인 “그림자”가 눈앞에 명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림자는 자신의 본래 주인에게 소외되어 있으면서 무시당하고 있는 셈인데, 이러한 시적 구도는 속도전과 힐링에 대한 강박관념이 자신의 내면을 공허하게 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시인이 상정하는 금전적 욕망의 문제라든가 여가 활용에 대한 강박관념, 속도전의 생활 방식 등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야기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을 것이다. 사회구조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 시편들을 읽어보자.
2. 사회구조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
탄소가 아니다
문제는 욕망의 온난화다
허나 밥상머리 훈육은 죽었고
수능서 쫓겨 난지도 오래
나는 오늘도 TV 자율학습을 나선다.
채널의 강마다 사이렌이다
미어터지는 군침
눈동자 잡아 빼는 물욕
허영의 알코올 허기에
은밀한 색정의 도발을 견뎌내야 한다.
학습은 인내만이 아니다
종강은 아홉시 뉴스
유혹을 못 이겨 얼굴에 똥칠하는
검찰청 포토라인
현장중계 생방을 목도해야한다.
TV는 바보상자가 아니다
판도라의 시대
패가망신을 떨치고
용케나마 가여운 팔자 부지케 하는
지상 최고의 학교다.
―「TV는 바보상자가 아니다」, 전문
근대문명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는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통해서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집어내고 있다. “욕망의 온난화”라는 표현이 함축하고 있듯이 텔레비전은 현대인들에게 온갖 욕망을 자극하는 기제로서 작동하고 있다. “미어터지는 군침/ 눈동자 잡아 빼는 물욕/ 허영의 알코올 허기에/ 은밀한 색정의 도발”이라는 표현이 바로 텔레비전이 시청자들에게 자극하는 욕망의 물목들인데, 식욕을 통한 소비의 조장, 화폐의 증식에 대한 욕망, 그리고 과시 소비 등의 허영심의 자극, 성적 욕망의 도발 등이 그 내용물이다. 또한 텔레비전은 그러한 욕망의 과도한 발현이 야기하는 재앙적인 모습을 생중계함으로써 반면교사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이행하는데, 시인은 이러한 텔레비전의 유혹과 그 파멸적 결과가 “판도라의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백신과 같은 역할로 작동할 수 있다며 그 효과를 조롱하듯이 칭찬한다. “패가망신을 떨치고/ 용케나마 가여운 팔자 부지케 하는/ 지상 최고의 학교다.”라는 진술 속에는 병 주고 약 주는 텔레비전의 아이러니한 모습이 포착되어 있는데, 이러한 이중성은 현대사회가 얼마나 모순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지를 함축적으로 표상해준다. 구조적인 모순 가운데 시인이 직접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권력의 문제이다.
난중의 난
열정 밑천마저 동이 난 시대
꿀 단지 취업 장에
핏줄 땅줄에 가오리 연줄까지 똥줄이 타니
썼다 찢었다 추천장사에
못 먹을 바에는 광을 파니 마니
이기는 게 내 편이다
제비집 뜯어오고 뜯어가기 혈안이니
또다시 신물 나는 윤회에
속이 쓰린 유권자
해 드시더라도 구토 안 날 만큼만
기표지에 엎드려 큰절이다.
―「지방선거」, 전문
욕망 가운데 물욕만큼이나 큰 것이 권력욕일 터인데, 권력의 근원이 인민에 있다는 생각을 망각하고 그것을 장사하듯이 거래하는 현실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바로 권력의 원천에 대한 생각을 망각하고 모두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광적인 열정을 보이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거니와 “난중의 난”이라는 표현이 그 발광하는 모습을 예리하고 암시한다. 어지러움 가운데 가장 어지러운 것이 “지방선거”라는 것인데, 그것이 그처럼 어지러운 것은 “제비집 뜯어오고 뜯어가기 혈안이니”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먹이감을 둘러싼 쟁탈전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니까 풀뿌리 민주주의의 초석으로서 지방 주민들의 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지방선거가 지방 주민들의 바람과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실현하기 위한 거래소처럼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꿀단지 취업 장”이라든가 “추천장사”라는 말들이 민중의 대리인을 뽑는 선거가 아니라 경제적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는 시장으로 전락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시인이 보기에 선거라는 권력 분배의 제도가 민의를 왜곡하고 기득권자들의 이윤을 추구하는 장으로 변질되었다면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법정 역시 다음 시에서처럼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다.
눈은 노예다
소나가 타전하는
디케의 치마 속
법정은 막장 드라마였다.
권력은 포상휴가 중
물정모른 족속이 또 하나 짤렸군
허나 사인은 늘 자살
대리인만이 각본을 만지작거렸다.
증인은 포승 없는 포로
이마에 새겨진 밥줄의 생존법
밑줄 쫙 그으며
핏방울 떡고물 입맛을 다셨다.
판관은 안대가 두려웠나
23.5도 기운 실눈으로
노회하게 모범답안을 썼다
권력은 무죄다
원고는 웃음으로 울었다
생매장 진실이 슬퍼
인간이 가여워
판결문 골마다 눈물이 흘렀다.
―「행정법원」, 전문
잘 알려져 있듯이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 테미스의 딸인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거머쥐고 있는 조각상으로 표현된다. 디케의 눈을 가렸다는 것은 만인에게 공정하고 선입견이 없음을 뜻하고, 그녀가 든 저울은 형평성을, 그리고 칼은 정의 실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어떤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불변의 가치를 의미한다. 법의 상징으로서 대법원 앞에 설치되어 있는 디케의 조각상은 우리 사회가 법에 기대하고 바라는 가치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 시에서 시인은 그러한 가치의 표상인 “법원은 막장 드라마였다”라고 하면서 전도된 법정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디케의 치마 속”이라는 표현 역시 법정은 부끄러움으로 난무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으며, “권력은 포상휴가 중”이라거나 “핏방울 떡고물 입맛을 다셨다”는 표현들이 왜곡된 사법 정의의 현실을 고발한다. 결국 “판관은 안대가 두려웠나/ 23.5도 기운 실눈으로/ 노회하게 모범답안을 썼다/ 권력은 무죄다”라는 표현 속에 저간의 사정이 요약되어 있는데, 만인에게 공정하고 선입견이 없이 판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안대”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지구의 기울기인 23.5로 기울어 진 현실을 반영한 판결이 횡행하며, 권력의 입맛에 맞는 선고가 모범답안이 되는 법정의 현실이 정의의 여신이 목도하고 있는 광경인 것이다. 욕망을 부추기며 그 파멸적 결과를 경고하는 텔레비전이나 이윤추구의 장으로 전락한 지방선거, 그리고 권력의 입김에 의해 좌우되는 법정의 현실 등의 사회는 총체적 난국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사회는 곧 기적이 일반화된 사회이기도 하다.
철없이 꽃이 피고
콩 심은 곳에 팥이 나고
씨 없는 것들이 활보다
제철이 아닙니다, 비켜서고
뿌린 대로 감사하며
된서리 맞고서야 붉어지는 대추가
기적 같은 세상이다.
기적은 가뭄에 콩 나듯 해야지
순간순간이 기적이고
천지사방 지천이면 어찌 살라는 것인지
신의 뜻 찾아 나서는 눈동자
백지에 서릿발이다.
―「기적」, 전문
“기적은 가뭄에 콩 나듯 해야지/ 순간순간이 기적이”다는 진술에는 왜곡되고 전도된 사회의 구조와 현실이 응축되어 있다. 기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지칭하거나 신(神)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 등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기적이 상식적인 판단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일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기적이란 매우 드물게 발생하는 것이 정상적이며, 그것이 다반사로 발생한다는 것은 상식이 어그러진 세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신에 의해서 행해진 불가사의한 일이 기적이라면 그것은 곧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으로서 역시 정상적 사회에서는 보기 드믄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오늘날의 우리 사회가 “순간순간이 기적”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천지사방 지천”에 깔려 있다고 진술한다. 그 구체적 모습은 “철없이 꽃이 피”기도 하고, “콩 심은 곳에 팥이 나고”, “씨 없는 것들이 활보”하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된서리 맞고서야 붉어지는 대추가/ 기적 같은 세상”으로 여겨진다는 것인데,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 기적처럼 여겨진다는 것은 곧 자연적 법칙에 어긋난는 것이 오히려 정상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외와 파란이 정상으로 취급되는 사회현실은 자연적 법칙과 섭리에 어긋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사회일 수가 없을 것이다. 시인의 사회적 비판이 지닌 강렬도와 예리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3. 시인이 꿈꾸는 삶과 가치
지금까지 김병수 시인이 욕망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현대인과 전도된 질서로 왜곡되어 있는 사회 구조에 대한 시인의 날카롭고 강도 높은 비판적 시편들을 읽어보았다. 이처럼 강렬하고 전면적인 풍자의 정신을 시화하고 있다는 것은 시인이 그만큼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우리 사회에 대해 관심과 애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풍자적 시가 사랑을 전제하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증오나 저주가 되고 마는데, 그렇게 될 때 시적 감동과 공감은 사라질 것이다. 시인은 풍자의 이면에 현대인의 삶과 우리 사회에 대한 애착을 심어 놓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는 것은 시인이 추구하는 삶과 가치에 대한 진솔한 시편들 때문이다. 어쩌면 김병수 시인의 시편 가운데 가장 반짝이는 부분이라고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만큼 삶의 비전과 이상적 사회에 대한 대안을 다룬 시편들에는 진정성이 숨어 있으며 깊이 있는 성찰과 반성이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가락 긋지 마시라
겨울가지에 떠는 꼴이라고
눈물짓지 마시라
묻히지도 못할 죽음이라고
지축이라고 하여도
신이라 하여도
매달리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
한 순간만이라도
자유로 살리라
그는 찬바람 허공 속
탯줄을 끊었다
식어버린 심장을 깨우는
장렬한 전사의 꿈
오늘도 몸부림이다
―「연」, 전문
하늘에 떠 있는 연(鳶)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작품인데, 시인이 주목하는 연의 특징은 자유와 주체로서의 속성이다. 연은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삶을 꾸리고 있으며, 어떠한 타자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주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 연을 통해 읽어내는 이러한 속성이란 물론 시인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자 가치일 것이다. “매달리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라는 표현, 그리고 “한 순간만이라도/ 자유로 살리라”나는 경구 속에 그러한 가치가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러한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는 찬바람 허공 속/ 탯줄을 끊었다”라고 하면서 어떤 단절과 결단을 촉구한다. 또한 “식어버린 심장을 깨우는/ 장렬한 전사의 꿈”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단절과 결단이 매우 어려운 투쟁과 분투의 결과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탯줄”이란 물론 의존적인 일체의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지금까지 시인이 구축한 풍자의 논리를 상기해 보면, 그것은 자신을 노예처럼 부렸던 욕망의 유혹, 혹은 헛된 욕망으로 빠져들게 했던 허영의 자극과 같은 것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시인으로 하여금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주요한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이란 어쩌면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운명애(運命愛, Amor fati)적 삶일지도 모른다.
대낮에 보면
세상에 못난 놈은 없다
잘 안 나가는 때가 있을 뿐이다
노을에 보면
세상에 잘난 놈은 없다
잘 나가는 때가 있을 뿐이다
다투지 마라
모두가 다 때의 그림자
제 빛으로 빛나는 놈은 없다
―「때」, 전문
여기서 “때”란 시기나 시절, 혹은 시운(時運) 등을 의미하며, 좀더 확대해 보면 운명(運命)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 시의 제목인 “때”는 인간의 삶 바깥에서 그것을 움직이는 더 큰 손이 있고, 그 손의 움직임에 따라 인간의 삶은 부침과 곡절을 거듭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때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잘 안 나가는 때가 있을 뿐이”고, “잘 나가는 때가 있을 뿐이”며, 그래서 세상만사에서 “제 빛으로 빛나는 놈은 없”게 되며, “모두가 다 때의 그림자”가 되는 셈이다. 모두가 다 때의 그림자라는 말은 곧 삶이란 운에 좌우되기 때문에 운에 맞겨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그것을 향유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다. 때를 향유한다는 것은 행운이 오건 불운이 오건 그것을 능동적인 에너지로 삼아서 자신의 삶을 개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또한 니체가 말한 운명애(運命愛, Amor fati)처럼 창조적인 삶일 수도 있다.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관조하면서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다음 시처럼 나무의 삶일 수도 있다.
물처럼 굽이굽이 돌아가라고
바람처럼 너울너울 사르라고
다들 그렇게들 사노라고
세상은 말하는 데
여린 싹 하나
벼랑길 이고지고 한 평생
제 빛깔 꽃 피우고
이제는 모두가 떠나간 광야
나 홀로 운명에도
보이지 않는 발자국 소리
미소로 기다리는
한 그루 고목이여
상선上善은 약수若樹다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상선은 약수다」, 전문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노자(老子)의 경구를 비틀어 상선약수(上善若樹)라는 말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발상이 기발할 뿐만 아니라 시적 깊이까지 담보하고 있다. 시인이 추구하는 삶은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잠언이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물처럼 굽이굽이 돌아가라고/ 바람처럼 너울너울 가르라고/ 다들 그렇게 사노라고” 하는 삶의 방식을 거부한다. 세상에 순응하고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평범한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약수(若樹)의 삶을 지향하는데, 그것은 “여린 싹 하나/ 벼랑길 이고지고 한 평생”을 살아내는 그러한 삶의 방식이다. 시인이 약수(若樹)의 삶을 지향하는 까닭은 그러한 삶이 “제 빛깔”의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이 지니고 있는 개성과 고유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곧 약수(若樹)의 삶의 방식인 셈이다. 또한 그것은 “이제는 모두가 떠나간 광야/ 나 홀로 운명에도/ 보이지 않는 발자국 소리/ 미소로 기다리는/ 한 그루 고목이여”에서 알 수 있듯이 다가오는 운명을 사랑하는 운명애적 삶이기도 하다. 약수(若樹)로서의 삶이란 곧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아모르파티로서의 삶의 실천이기도 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운명애적인 삶이란 곧 다음 시처럼 자유로운 삶이기도 하다.
꽃은 눈 밖에서 피어나고
까마득하여 별
우리는 하나다 세우는 핏대는
살얼음 빙판
꿈의 뿌리를 불태운다.
거리를 두시라
그대 아닌 것들과
숨죽인 아픔이 절뚝이는 곳까지
더 멀리 거리를 두시라
그대 자신과는
고래의 허기가 잠드는 그날까지
거리를 두시라
지푸라기 순간이라도
존재하는 것들은 다 거리를 둔 덕분
거리가 존재다.
―「거리가 존재다」, 전문
여기서 ‘거리’란 곧 여유의 다른 말이기도 하고 관용과 포용의 뜻을 담고 있기도 하며 성찰과 관조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시인이 이러한 거리를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거리에서 꽃이 피어나고 별이 반짝이며 빛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너무 가까운 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하나다 세우는 핏대는/ 살얼음 빙판/ 꿈의 뿌리를 불태운다”는 시구에서 알 수 있듯이 거리를 무시한 합일과 일체는 언제나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불안과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상선은 약수다」라는 시에서 강조한 “제 빛깔(의) 꽃”을 피울 수 없도록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무 가까운 거리는 개성과 고유성의 생명력이 발현될 수 없도록 하는 압박과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대 아닌 것들과/ 숨죽인 아픔이 절뚝이는 곳까지/ 더 멀리 거리를 두시라”라고 하면서도 “그대 자신과는/ 고래의 허기가 잠드는 그날까지/ 거리를 두시라”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과도 거리를 확보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는 곧 자신의 삶이란 자신의 의지만으로 꾸려갈 수 없으며, 앞에서 강조한 다가오는 운명을 향해서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타자에 의존하지도 않지만, 자신의 삶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삶 또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욕망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시인의 날카로운 풍자가 향하던 지점이기도 하다. 결국 시인의 풍자는 이러한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의 향연, 운명애적 삶을 위한 여정이었던 셈이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표제시를 읽어보자.
동백은 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느냐
엄동에 부릅뜬 눈동자
겨울을 떨치는 외로운 투신이다.
벚꽃은 지지 않는다.
들리지 않느냐
대지를 울리는 아우성
새 봄 외치는 척후의 나팔이다.
꽃 진다 말하지 마라.
세상에 지는 꽃은 없다
죽어 다시 피어나는 몸부림이
진정 꽃이다.
―「세상에 지는 꽃은 없다」, 전문
시인이 “동백은 지지 않는다”라고 하거나 “벚꽃은 지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결국 “세상에 지는 꽃은 없다”라고 진술할 수 있는 것은 동백이나 벚꽃이 바람과 같은 외부의 힘에 의해 몰락하면서 마음이 꺾이거나 좌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엄동에 부릅뜬 눈동자”라든가 “대지를 울리는 아우성”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면, 동백이나 벚꽃은 의지적 존재로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구도로 인해서 그들의 낙화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동백이라든가 벚꽃 등의 세상의 꽃들은 자발적인 낙화를 통해서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면서 자연의 이법과 섭리를 실현하는 과정에 동참하는 셈이다. 결국 자신의 삶이 짊어져야 할 운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의지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운명애적 삶, 곧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삶에 대해서 “겨울을 떨치는 외로운 투신이다”라고 하거나 “새 봄 외치는 척후의 나팔이다”라고 하면서 주체적인 삶이 실현하는 생명성의 고양을 암시한다. 그리고 “죽어 다시 피어나는 몸부림이/ 진정 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벗어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온전한 본성을 실현하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시인의 문명비판과 사회비판, 그리고 세속적 인간의 속물적 삶에 대한 비판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