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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적 생성 미학
- 송명화의 본격수필, <1+1=?>을 읽고 -
권대근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그리하여 당신이 때로 고궁의 계단이나 도랑의 푸른 잔디 위에서 또는 당신 방의 삭막한 고독 속에서 취기가 이미 줄었든가 아주 가버린 상태에서 깨어난다면 물으시오.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벽시계에게, 달아나는 모든 것, 탄식하는 모든 것. 구르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 물으시오. 지금 몇 시냐고. 그러면 바람은, 별은, 새는, 벽시계는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 당신이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시오. 쉬지 않고 취하시오! 술로, 시로, 또는 도덕으로, 당신의 취향에 따라."
-샤를 보들레르의 '취하시오‘ -
1. 들어가며
데소와르는 미적 기본 형태를 미적 정취의 기본 형식으로 분류하여, 미와 추를 기본 축으로 하여 숭고미에서 비극미가 파생되고, 희극미에서 우아미가 파생된 것으로, 그리고 숭고미와 우아미는 양감정으로, 비극미와 희극미는 혼합감정으로 설명하면서 미적 감정의 질적 차이를 보편화하였지만, 그것은 주제적 차원에서 발견되는 미의식이라 수필 전체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평자는 수필미학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향, 멋, 맛 등으로 삼원화하여 정리한 바 있다. ‘향’은 인물과 사건의 차원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미의식이라면, ‘멋’은 배경이나 분위기 차원에서 발견되는 미의식이다. ‘맛’은 주제 차원에서 발견되는 미감이라 하겠다. 송명화의 수필은 이런 세 가지 미를 다 가져 본격수필이라 할 수 있다. 미의식이 녹아있어 송엽차 같은 송명화의 수필 <1+1=?>(에세이문예 2009년 여름호) 속으로 들어가 향, 멋, 맛을 동시에 느껴보자.
2. 개미의 동선과 그녀의 수필적 삶
송명화는 사십 줄에서 자아실현 방법론에 대해 고민하다 수필을 택하고, 이후 한 번도 흐트러짐 없이 수필의 길을 걷고 있는 본격수필가다. 그녀의 수필적 삶은 진리를 찾기 위해 맹진하는 ‘개미의 동선’과 너무 흡사하다. 개미가 먹이를 찾기까지의 동선을 살펴보면 실타래를 아무 생각 없이 풀어놓은 것 마냥 복잡하다. 때로는 같은 길을 지나가기도 하고 정처 없이 한 장소를 맴돌기도 한다. 개미의 행동은 머리카락 뒤엉킨 것처럼 어수선해 보인다. 먹이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먹이가 어디에 떨어져 있는지 모르기에 멋대로 배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먹이를 찾으면 귀신 같이 집으로 달려간다. 그것도 제 위치에서 제 집 구멍까지 최단 경로를 찾아 일직선으로 돌아간다. 다른 개미들이 먹이가 있는 곳을 똑바로 찾을 수 있도록 페르몬을 분비하면서다. 에세이문예 주간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며, 본격수필이론에 따른 수필 작법을 에세이문예에 연재하며, 바른 수필 쓰기를 선도하는 것 역시 개미의 ‘페르몬’ 분비와 닮았다.
“안락과 휴식 대신 고뇌와 자성으로 붉은 글밭을 메우며 나는 나의 확고한 주인이 되고 싶다.”던 그녀는 본격수필의 선두 주자로서 한 길을 가고 있다. 자신의 확고한 주인으로서 내딛는 당당한 삶의 발자취는 개미의 동선을 연상케 한다. 그녀는 십수 년 전부터 수필에 입문하여 본격수필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때로 타 장르의 유혹에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다스림이란 문학적 고향을 찾아 신춘문예라는 고지를 점령하고, 에세이문예를 통해 오직 본격수필 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녀의 초기 수필 <바람>에서 우리는 수필을 선택한 그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연푸른 장막이 걷히고 햇살이 창을 찾아들었다. 벚나무 새 잎들의 표면에서 맑게 빛나는 아침을 본다. 지난 밤 그처럼 혹독하게 단련 받았건만 잎은 더욱 싱싱하게 빛난다. 격심한 고통을 지나 안정된 세상은 전보다 한층 더 평온하다.”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혀 어지럽고 막막한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터널의 끝은 항상 출구가 있다. 그리고 그 터널이 길면 길수록 출구의 빛은 더 환하다는 것을 송명화는 확실히 알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3. 다양한 사랑의 방정식과 해석
송명화의 수필 <1+1=?>은 문학의 영원한 숙제인 ‘사랑의 방정식’에 관한 수필이다. 그것도 부부간의 사랑에 대한 글이라 더욱 관심을 끈다. 원만한 결혼 생활을 해나오면서 작가로서 성공한 그녀가 풀어내는 사랑의 방정식이 평범한 논리의 교과서적인 사랑론이라면, 굳이 여기에 소개할 가치조차도 없을 것이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부부 사랑학개론은 헌신과 희생, 인내와 갈등이 기반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녀는 사랑학을 다시 보기를 통해 재정립하려 한다. 이러한 ‘다시 보기’는 송명화 수필의 주요한 창작 동기의 하나라 하겠다.
1+1=1이 된다면 둘은 일심동체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생각과 꿈이 다른 개인들이 만나 한 마음 한 몸을 이루었다면 그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을 하지만 둘 다 자신을 버려야만 이룰 수 있는 상태가 그것이 아니던가. 일심동체란 말에서는 눈물의 냄새가 느껴진다. 한 집안의 장손으로서, 아들로서,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서 해내어야할 책무에 묶인 삶의 고뇌에 대해 얼마나 많이 들어왔던가. 집안의 체면을 위해, 전통의 계승을 위해 솟을대문 안에 갇히는 삶은 사극의 단골메뉴가 되었다. 현대극에서는 자식과 며느리를 좌지우지하는 부자 어머니의 손바닥 위에 선 나약한 부부들의 모습에서 1+1=1의 상태를 느낀다. 희생이라는 강요받은 고고함 때문에 한숨받이 삶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1+1≠1이 되길 바라는 것이 옳으리라.
- 송명화의 <1+1=?> 전개부에서 -
위의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는 부부일심동체라는 말에서 눈물의 냄새를 맡는다. 부부가 하나라는 말에 심한 거부감을 보인다. 평범한 상식에 대한 회의는 창의적 인식으로 발전하여 사랑의 다양한 공식에 대한 입장으로 나타난다. 삶에서 가끔 반은 규칙적이고 반은 우연적인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러한 현상들을 일컬어 우리는 유우성contingency이라고 한다. 예상할 수 있는 것과 예상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요, 결혼 생활은 바로 그 현장이다. 또한 ‘예스’와 ‘노우’ 사이에 끼어 있을 때 인간은 가장 많은 학습 기회를 얻는다고 한다. 만약 우리에게 닥치는 일들이 시간표대로라면 학습프로세스는 제로에 가까워진다. 반대로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 앞에 직면하는 경우라면 역시 학습의 의지는 전무할 것이다. 송명화는 1+1=1이라는 결혼방정식에 대해 의문을 눈길을 보낸다. 비범을 평범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창의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평범한 것도 비범하게 바라볼 줄 아는 마음과 눈을 지닌 사람에게만 우연이나 실수까지도 행운이 되는 창의적 수필쓰기의 가능성이 찾아온다. 송명화의 수필 1+1=?은 끊임없는 회의의 결과이다. 1+1=1이 평범한 상식이라고 우리가 여겼다면, 그녀는 그런 논리와 상식 속에 살면서 1+1= 3이란 도식을 우연히 발견한다.
내가 아끼는 후배내외는 맞벌이 부부였다. 생활비를 똑같이 부담하고, 나머지는 각자 저축도, 소비도 알아서 하고 서로 간섭하지 않는 삶을 살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양보하지 않고 혼자일 때와 마찬가지로 살아갔다. 상인들의 말로 하자면 본전치기인 셈이라 할 수 있겠다. 얼핏 자유롭고 행복한 듯 보이는 것도 잠시, 그들의 결혼생활은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철저히 자신만의 삶을 살면서 상대방의 영역을 들여다보지 않는 방임형의 삶이라면 함께 할 필요가 무엇이 있을 것인가. 1+1=2가 되는 삶도 행복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
- 송명화의 <1+1=?> 전개부에서 -
1+1=2라는 사랑의 방정식은 작가의 견해에 따르면, 방임형의 사랑이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이라고 설파했다. 주성분이 빠진 인간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역설을 가져다주는 말이다. 사랑은 인간의 근원이 된다는 의미다. 인간의 행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루소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이 없는 인생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저마다 다른 사랑의 방정식 속에 살면서 사람들은 그 사회적 가치나 통념을 좇아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고 희생하고 양보하면서 결국 한 많은 일생을 보낸다. 온전한 자기의 정체성을 버리고 남편의 룰에 따라 자신을 동화시키는 여인에게 ‘과연 사랑은 무엇인가’란 문제를 제기하는 수필 1+1=?은 결혼 생활을 성찰을 통해 다시 바라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힘 있는 수필이다.
인간은 동물에 속하면서도 인간을 보고 동물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첫째,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사고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인간들은 서로 모여서 이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에게 공통되는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생(生)과 사(死)라는 운명일 것이요, 영혼과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과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들에게는 자기 생각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욕망이 있는 것이다. 이 욕망을 선한 의지로 승화시키는 일이 인간다운 삶의 과제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1+1=1이란 도식 속의 사랑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욕망이 승화되지 못하는 구조다. 한 사람의 희생이 전제되어야만 성립할 수밖에 없는 논리이기에 그녀는 대담하게 이런 유교적인 결혼관에 의해 형성된 상식을 뒤엎는다.
1+1=1.5가 되기도 한다. 한 쪽의 희생을 딛고 이루어가는 사랑은 자연수를 이루지 못한다. 평생 만족하고 살 수도 있겠으나 자신을 낮추고 꿈을 전지한 사람이 어찌 삶을 완전하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내면에 있는 숭고한 잠재력을 꾹꾹 눌러 가며 엮은 삶은 가슴앓이로 남게 될 위험이 있다. 가천 수바위 만큼이나 장대한 배우자의 기에 눌려 살아온 전통적인 여인들의 삶은 한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삼대독자 집안에 시집가서 아들을 낳겠다는 일념으로 무려 열 명의 자녀를 낳은 친구의 엄마가 동네 사람들의 입에 오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였다. 잘 나가는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 시댁의 압력에 못 이겨 결혼과 동시에 전문직을 접는 내 친구의 모습에서 완전한 자연수 1이 0.5로 줄어드는 서글픈 현실을 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수바위와는 대조적으로 밭두둑에 비스듬히 방치된 듯 기대 누운 암바위의 낮은 처신에서 1+1=1.5를 보았다.
- 송명화의 <1+1=?> 전개부에서 -
사랑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남는다. 수필 <1+1=?>에는 그녀의 사랑에 대한 지론이 질펀하게 녹아 있다. 사랑의 방정식은 그녀 앞에서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1+1=1.5라는 그럴듯한 이 사랑의 공식은 가천 암수바위의 대비에서 비스듬히 방치된 듯 기대 누운 암바위의 낮은 처신으로 비유된다. 상식을 깨는 작가의 용기에 감복하게 된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많은 만남을 이루기도 하고, 그만큼의 이별을 체험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시인 마리 로랑생은, 죽은 여자보다 좀더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라고 했다.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잊혀진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1+1=1이라는 도식과 1+1=1.5라거나 1+1=2라는 논리에는 만남과 이별의 인생사에 운명적으로 내재된 비극이 녹아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일반적으로 누군가와 결혼해 살 수밖에 없는 유한적 존재로서의 운명을 타고난다. 인간의 만남과 사랑에는 이별의 아픔이 녹아 있다.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겪는 인생의 한 단면에는 저마다의 가슴에 숨어있는 추억이 있다. 그러나 송명화는 결혼을 통해 인간의 삶에 예고된 비극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그 비극은 또 다른 행복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감동을 준다.
어떤 사랑이 좋을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모두가 바람직하다고 말해 줄 관계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일까. 벌은 꽃에게서 꿀을 따지만 꽃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꽃도 꿀을 벌에게 나누어주지만 자신의 열매를 알차게 맺어낸다. 내 몸 안에, 가슴 속에 배려와 이해의 우물을 깊이 파 놓고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사랑을 한다면, 꽃과 벌처럼 좋은 상생의 삶이 보장되지 않을까.
1+1=3이 된다면 어떨까. 나와 너의 삶은 서로의 존중 속에 그대로 유지된다. 그리고 하나 더, 새로 생긴 울타리로 인해 ‘우리’라는 더욱 발전된 하나의 관계가 추가되는 그런 만남이라면 두려움 없이 결혼서약을 해도 좋지 않을까. 나는 네가 아니고 너도 내가 아니다. 서로 인정해주고 격려해주고 조언해주고 기회를 만들어주어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준다면 1+1=3이 된 주인공들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 송명화의 <1+1=?> 전개부에서 -
작가는 바람직한 사랑의 모형을 제시하면서, 벌과 꿀 그리고 꽃의 삼각관계를 보여주면서, 상생의 관계를 취할 수 있는 사랑의 형태를 제시한다. 결혼한 당사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내 몸 안에, 가슴속에 배려와 이해의 우물을 깊이 파 놓고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사랑’이 1+1=3이란 것이다. 수필은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다. 지식과 체험과 사상이 용해되어 예술적인 문장으로 표현될 때, 한 편의 멋진 수필이 탄생된다. 아름다움은 현란한 빛깔과 진한 향기를 통해서만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시대 현실과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위정자의 이념에 따라 달리 정의되고 평가되지만,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진실이 배제된 아름다움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 일반적 통론이다. 한 작가의 가치는 한 시대를 대변함으로써 그 폭을 확장할 수 있다.
송명화 수필의 우수성은 지식과 체험과 사상이 용해되어 예술적인 문장으로 드러나 독자로 하여금 상상과 연상 체험을 겪게 한다는 데 있다. 1+1=1이 되는 현실은 소슬대문 안에 갇힌 삶으로, 1+1=1.5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가천 수바위와는 대조적으로 밭두둑에 비스듬히 방치된 듯 기대 누운 암바위의 낮은 처신으로, 그리고 1+1=2가 되는 현실은 철저히 자신만의 삶을 살면서 상대방의 영역을 들여다보지 않는 방임형의 삶으로 제시된다. 현실이나 대상을 보는 예리한 눈맛이 바로 이 수필의 고유한 맛이다. 수필의 맛을 문학 본질적 요소로 보면 <인식>에 해당한다. 수필의 <맛>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데서 나온다고 하겠다. 이 수필에서 빛나는 중요한 사고 유형은 창의적인 사고와 비판적인 사고다. 두 사고 유형은 맛있는 글을 만드는 데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미래적 생성의 미학
전통적으로 노마드적 생성의 길을 탐구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참이고, 다른 하나는 선이고, 나머지 하나는 미다. 참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의미하고, 선은 현실적으로 정당한 것을 의미하지만 미는 미래의 생성을 뜻한다. 따라서 참은 과거에 끊임없이 존재하였던 노마드적 생성의 길이고, 선은 과거의 선분에 따라서 현실적으로 만들어진 원칙이다. 그러나 미는 과거에 끊임없이 존재하였던 길도 아니고, 그것에 따른 현실적인 원칙도 아니다. 미는 지금까지 전혀 존재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존재하게 될 가능성이며, 그래서 끊임없이 미래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진과 선은 과거의 지속이라는 동일성을 추구하지만, 미는 현실적 단절을 통한 미래의 차이를 추구한다. 노마드적 생성의 길에 대한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를 구성하는 이 세 가지는 항상 상호보완적이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지니는 ‘관계의 욕구’를 해결하는 바람직한 방법으로 사랑을 들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이해와 존중, 보호와 책임을 속성으로 하는 그야말로 완전한 사랑이다. 살기가 어려워질수록, 산술적인 개념이 앞서는 법이다. 1+1=1이라는 집착적, 종속적, 실정법적인 관계나, 1+1=2라는 산술적, 세속적 관계가 아니라, 1+1=3이란 영적 관계, 사이의 미학이 존재하는, 그래서 배려가 바탕이 되는 관계 초월적 상태가 가장 바람직한 부부관계라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삶에 주인공의 역할을 하면서도 상대방이 가치를 지향하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배려와 이해를 깔아준다면 누군들 감동하지 않을까. 철학자 라캉이 말하는 ‘간격’이나 ‘사이’를 인정하려는 태도가 필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 송명화의 <1+1=?> 전개부에서 -
인용 예문에서 알 수 있듯이, 송명화가 내세우는 관계미학은 ‘영적’ 또는 ‘사이’에 존재한다. 한마디로 관계 초월적이다. 남편이 하늘이고, 아내가 땅이란 이분법은 어디에도 없다. 서로가 자신의 주인이면서 상대방의 가치를 다만 지향할 뿐이다. 노마돌로지의 예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비슷하다. 진과 선을 토대로 하는 미조차도 세상을 사유하는 인식적 틀이 어느 하나의 길로 규정된 것이고, 어떤 하나의 이름으로 틀 지워진 것이다. 따라서 미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차이가 난다. 신라시대의 아름다움, 조선시대의 아름다움, 그리고 오늘날의 아름다움이 다르듯이 서양의 아름다움과 아프리카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의 아름다움은 다르다. 길이나 이름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 또한 아름다움으로 규정되면 이미 아름다움이 아니다. 따라서 길이나 이름이 이미 길이나 이름으로 규정된 것을 벗어나면 무한한 길이나 이름이 생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 또한 이미 규정된 아름다움으로부터 벗어나면 무한한 아름다움이 생성된다. 1+1이 1이나 2가 아니라는 사고는 기존의 도식이나 관념을 벗어난 철학적 사유다. 에히리 프롬의 관계방정식이나 라캉의 사이미학으로 자신의 1+1=3이란 사랑학 방정식을 설득시키려는 의도도 매우 성공적이었다.
나르시시즘에 돌을 던지는 사람만이 함께 가는 인생길의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 터, 옆구리가 허전하다고 아무나 손을 잡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결혼한 것을 후회하면서 자신의 삶을 누르고 사는 것, 성급하게 한 결혼을 못 견뎌 인연의 끈을 끊는 것 둘 다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잘 알면서도 쉽게 그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많은 것은 왜일까. 아집의 울타리를 걷어낼 수 없다면 자신만의 울타리 속에서 혼자 사는 게 더 나은 선택이지 싶다.
1+1=3, 비록 수학시험에서는 틀린 답이 되겠지만 결혼의 방정식, 사랑의 방정식에서는 그것이 정답이지 않을까.
- 송명화의 <1+1=?> 결말부에서 -
작가는 나르시시즘에 돌을 던지는 사람만이 함께 가는 인생길에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옆구리가 허전하다고 아무나 손을 잡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집의 울타리를 걷어낼 수 없다면 자신만의 울타리 속에서 혼자 사는 게 더 나은 선택임을 강조하고 있다. 결혼이 능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이’나 ‘간격’의 미학을 통해 사랑이 ‘이해’나 ‘배려’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다‘는 송명화의 관계 초월적, 영적 관계 정립 논리에 공감이 가는 것은 그녀가 세운 방정식이 주관적이면서도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나 선함도 그 무엇으로 규정되면, 플라톤의 이데아나 유일자라는 ‘1’이라는 숫자의 절대성으로 빠지거나 그 무엇과 그 무엇이 아님이라는 ‘2’라는 숫자의 대립적 관계로 빠지게 된다. 1이라는 절대성은 유아독존의 도그마에서 독선과 독단의 폐해를 보여주었고, 2라는 대립성은 세상을 이원적 구조로만 파악하게 해서 흑이 아니면 백이라는 흑백논리의 모순을 세상에 전파했던 것이다. 작가는 이런 절대적 가치와 대립적 구도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관계미학이 절실한 부부 관계에 대입시켜 관계 초월적이란 가치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1과 2라는 숫자의 절대성이나 동질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3’이라는 숫자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5. 나오며
맛과 멋 그리고 향을 간직한 송엽차를 한 잔 마시며, 송명화의 수필을 마무리하려 한다. 작가의 말대로 ‘사랑은 도처에 널려 있다. 길거리에 걸린 포스터 속에도, 잠시 들여다 본 텔레비전 화면에도, 자전거를 끌고 나간 공원의 벤치에도, 멋진 풍광 속에 들어선 서양풍의 낯선 숙소에도, 지나다 우연히 고개를 돌린 성당의 성모상 앞에도 사랑은 있었다. 모두가 다른 모습이면서 또, 같은 모습을 한 사랑이 여기도 저기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완전한 사랑을 규명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찾는 길은 미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유교적 관습의 울타리 속에 형성되어 왔으며, 사랑론 역시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의 굴레를 벗어나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한 축은 이런 새로운 시도를 곱게 보려하지 않는 데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송명화는 ‘보이지 않는다’의 작가정신으로 보수적인 사랑론에 정조준을 가했다. 그녀의 이런 인식적 글쓰기에 의한 설득전략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하고, 또 그 작업의 진로를 우리는 호감어린 눈으로 기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필가 스스로 확고한 자기 논리를 갖추고 있으며, 또 그것을 체험이나 관찰을 통해 미적으로 증명해 내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칸트가 정립한 ‘미적 취향’, 이나 ‘미적 의무’를 이해하는 독자라면, 이 수필의 위대성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수필을 창작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며,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공감대 위에 놓고,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송명화의 사랑학에서 ‘3’이라는 숫자는 1과 2의 다음에 오는 숫자가 아니라 1과 2라는 숫자가 가지고 있는 절대성이나 그 무엇이라는 동질성으로부터 벗어나 그 어느 하나가 아닌 수많은 다수를 사유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찾아내어야 이 수필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따라서 ‘3’은 니체나 푸코가 현실적 원칙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초인’을 의미한다. 경계를 초월한 ‘사이’에 빛이 몰리듯 사랑은 ‘사이’ 공간을 둘 때, 상생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바로 송명화의 사랑 방정식이다. 따라서 송명화의 이 사랑 방정식은 '1+1=1'과 ‘1+1=1.5,’ '1+1=2' 그리고 '1+1=3'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녀가 ‘1+1=3이라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사랑의 방정식을 세우고, 이를 자신의 경험과 서양의 철학적 배경을 통해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작품은 미적 구조로서의 쾌락성과 인식구조로서의 교훈성을 동시에 유인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하겠다. 깊은 철학적 사유와 심리학적 접근, 경험과 관찰에 의한 그녀의 수필 쓰기는 우리 수필을 한 단계 업그래이드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랑에 대한 그녀의 철학적 인식과 사유는 한마디로 탁월했다. 평자는 이 수필을 미래적 생성 미학의 표본으로 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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