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수행자가 보는 세상과 보통 수행을 하지 않는 일반인들이 보는 세상은 같을까요? 아니면 다를까요? 다른 말로는 수행을 하지 않는 일반인들이 세상을 보는 눈과 수행을 하는 이들이 세상을 보는 눈은 같을까요? 아니면 다를까요?
저는 수행자입니다. 그리고 수행자가 아니었던 저 어린 날에 대한 기억이 그대로 있습니다. 아주 어린 날이었던 스무살 전에는 저 역시 세상을 보는 눈은 당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수행자로 산지 수십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몸은 늙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그냥 봅니다. 세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아무런 상상을 하지 않고, 아무런 해석도 하지 않고,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냥 봅니다. 당신도 이렇게 봅니까?
그리고 저는 세상을 통째로 봅니다. 하나의 사건을 볼 때에 그 사건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다른 일들과 연관된 것으로 봅니다. 당신도 사건을 이렇게 봅니까?
만약 저처럼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살면서 속을 일은 없을 겁니다. 아래 영상을 함 보시죠. 세상돌아보기님을 비판하고자 영상을 퍼 온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세상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서 자신의 희망을 덧씌워서 보기에 하나의 예로써 말하기 위해서 올리는 겁니다.
푸틴 쿠르스크 수복 본격화. 딥스테이트 밀어낸 트럼프 인선...세상돌아보기Gust&Thunder
희망은 거짓입니다. 희망은 예쁘고 착한 거짓입니다. 진실은 희망과는 아무 상관도, 연관도 없는 겁니다. 수행자는 희망에 살지 않습니다. 삶이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있는 그대로 봅니다. 만약 제가 굶어서 죽어간다면 먹을 것이 없는 것을 원망하면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삶은 해프닝입니다. 인생이란 파도에 일어난 거품입니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당신이 죽음을 앞두게 되면 삶은 한순간 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無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때 아무도 태어난 적이 없었고, 죽은 사람 아무도 없던 것이 되는 겁니다.
당신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살아지고 있는 겁니다. 살고 있는 것과 살아지고 있는 것의 차이가 뭔지 아시겠습니까? 지금 이 글은 제가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쓰여지고 있는 겁니다. 글을 쓰는 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이 진실인 겁니다.
https://cafe.daum.net/nuurelarb62/abHO/389
제2부 10.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가?
사람들은 흔히 몸과 마음(생각)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몸과 마음은 왜 내가 아닌가를 먼저 이야기 하기로 하죠. 어려서 산에 가기 전에 우유배달을 했었습니다. 대리점에서 배달도 하고 총무일도 맡아서 했었는데 대리점 주인의 아들이 당시에 대학을 막 졸업하고서 회사에 갓 입사한 친구였어요. 그러니까 저 보다는 대 여섯살 어렸습니다.
어느 날, 심심하다고 찾아와서 형이라고 부르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더군요. 당시나 지금이나 제가 사회의 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서 일반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거의 반드시 대화를 명상과 수행쪽으로 몰고 갑니다. 그리고 결국 "나(너)는 누구인가?"로 몰고 가게 됩니다. 물론 이야기를 듣는 쪽은 제가 이야기를 명상과 수행쪽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이거 눈치채는 사람을 아직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대리점 주인 아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에 물었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니 한번 대답해 봐, 너 자신이 누구 혹은 무엇이라고 생각해?"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대답하는 사람을 아직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대답하기를 "저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입니다." 라고 아주 당당하게 이야기 하더군요. 실제로 이렇게 여기지는 못하더라도 암튼 논리적인 결론이 이렇게 내려졌다는 말일 겁니다.
보통은 자신을 육신이라고 여깁니다. 자신은 육신이고 마음을 가진 육신이라고 여기죠. 혹은 좀 다른 이들은 마음이 자기이고 자신이 육신을 부린다고 여기거나 머 당연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육신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을까요? 엄마 뱃속의 태아였을 겁니다. 그리고 태아는 태아가 되기 전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였을 겁니다. 바람이 불던 어느 날,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는 만났을 겁니다. 그리고 태아가 잉태된 것일 겁니다.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는 이렇게 이름을 특징지워서 말하기 전에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어머니와 아버지가 먹은 음식의 결정체, 곧 엣센스가 변해서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된 것입니다.
이후 세상에 나온 후에도 우리의 몸은 어머니의 젖에 의존해서 성장해야 했고, 이후 이유식을 거쳐서 밥과 반찬 그리고 국을 먹으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물과 공기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몸은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성장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따라서 나와 당신의 몸은 곧 음식입니다. 음식이 변해서 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몸이 생긴 다음 세상에 나와서 비로소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물론 뱃속에 있을 때에도 마음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그건 아마도 지금의 마음과는 약간 다른 것이었을 겁니다.
이렇게 형성된 몸과 마음은 성장기를 거치고 노년기를 거쳐서 결국은 죽게 되고, 죽고 나면 불에 태워지거나 혹은 땅에 묻혀서 흙 속으로 돌아갑니다. 몸이 불에 태워지거나 땅 속에 묻히기 전 육신에서 숨이 나갈 때 마음도 같이 사라집니다. 물론 원한이 깊거나 집착이 많은 마음의 경우에 약간 더 상념체로써 시간을 보낼 수는 있겠지만 결국엔 사라집니다.
만약에 자신을 몸과 마음이라고 여긴다면 여기에서 모든 건 끝이 납니다. 죽은 몸은 부활할 수 없고 흩어진 마음은 모일 수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끝이 난 것이라는 것을 인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인들은 죽은 육신이 부활할 거라고 믿는 이들도 있던데 죽어서 썩다 말고 부활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지저분합니다.
다른 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몸과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우리에게 인지되는 대상물로써 인지의 내용물입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나는 대상을 인지하는 주체자인 겁니다. 인지하는 주체가 어떻게 자기가 인지하는 내용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나는 몸과 마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인지하는 자인 겁니다.
그러나 인지하는 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건 눈은 모든 것을 보지만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것과도 같은 겁니다. 또한 손은 모든 것을 감각하지만 손이 손을 감각할 수 없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중심은 중심을 알 수 없습니다. 중심은 언제나 외부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주체는 주체를 알 수 없습니다. 주체는 언제나 객체(대상)만을 알 수 있을 뿐인 겁니다.
주체 즉 인지자는 우리가 인지할 수 없습니다.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지할 수는 없으나 그 작용이 있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코로 냄새맡고, 혀로 맛을 느낍니다. 그리고 피부로 촉감을 느끼고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이 말이 맞나요?
잘못된 말입니다. 당신은 눈을 통하여 보고, 귀를 통하여 들으며, 코를 통하여 냄새 맡고, 혀를 통하여 맛을 보며, 피부를 통하여 촉감을 느끼고, 마음을 통하여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관 즉, 몸과 마음을 통하여 당신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몸은 단지 당신이 타고 다니는 말입니다. 마음은 단지 당신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인 겁니다. 그런데 당신이 인지자 즉, 당신 자신의 실체를 알지 못하기에 당신의 도구를 당신 자신으로 착각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자신은 불행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오해와 착각을 일으키고 일생을 헐레벌떡 하면서 살게 되는 겁니다. 모든 건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당신이 힘들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은 오해에 기반한 겁니다. 당신이 힘이 든다거나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은 당신 자신을 몸과 마음 즉 당신에게 도구로 주어진 것을 자신이라고 여기기 때문인 겁니다.
몸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당신이 실감하든 실감하지 못하든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몸의 죽음은 현실화 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자신을 몸이라고, 마음이라고 여기기 때문인 겁니다. 그러나 인지자는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지자는 타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지자는 쾌락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지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당신의 실체인 겁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당신이 누군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은 실체입니다. 만약 이것이 실체라는 것이 실감나게 다가오거든 이제부터 실체로써 살기 위하여 수행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당신 자신이 인지자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몸과 마음이라고 여기는 한 당신은 불행하고 항상 흔들리며 언제나 죽음의 두려움이 함께 하고 행복과 불행 두개의 제방으로 만들어진 사이에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갈 겁니다.
인생은 그런 겁니다. 이 현상세계라는 것은 상대성의 세계로써 언제나 행복과 불행, 고통과 기쁨, 탄생과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상인 겁니다. 이런 것이 싫고 항상되는 행복 속에 살고 싶다면, 고통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면, 그리고 죽기 싫다면 명상과 수행을 통해서 인지자가 되어서 인지자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인지자란 다른 말로는 부처, 그리스도, 리쉬, 이스와라, 보는 자, 주시자, 이것, 저것, 등 민족마다.. 문화마다 세월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 왔습니다.
당신은 어떤 조건에 의해서 존재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모든 오해에서 벗어나도록 수행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서 스스로 실체가 되었거든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 생기기 전에 내가 있었고, 이 세상이 끝난 후에도 나는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라고 말입니다.
새로운 날 맞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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