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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주의 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등에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갑니다. 어딘가를 향해서 열심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방 안에는 무거운 돌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돌 하나에는 걱정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고, 또 하나에는 두려움이라는 돌덩어리가 있고, 또 이렇게 보니 실패라는 돌덩이가 가방에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는 그 돌들이 무겁게 느껴졌고요. 무겁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는 점점 지쳐갑니다. 허리가 구부러지지 이 무게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진 것이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나무 아래에서 편안히 쉬고 있던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따뜻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십니까? 내려놓으세요 내려놓으시면 됩니다.
모를 리 없죠. 내려놓으면 편하다는 어쨌든 간에 이 사람의 이야기가 자신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로 다가오게 되었고, 그는 그의 손을 붙잡고 가방 안에 있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게 됩니다. 염려도 내려놓고, 걱정도 내려놓고, 슬픔도 내려놓고, 근심도 내려놓고, 실패도 내려놓습니다. 자신의 짐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게 되자 마치 오랫동안 매었던 족쇄가 풀리는 것처럼 처음으로 자유함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나는 이러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예전에 한 드라마에서 나왔던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왕관을 쓰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라.
왕관을 쓰려면 그 무게를 견뎌야 됩니다. 갑자기 대사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사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무게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정, 직장, 학업 관계 속에서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애쓰고 또 애씁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의 애쓰는 모습, 나의 힘겨운 모습을 직시할 때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바로 죄의 결과, 죄인 된 우리의 현실의 모습이라는 오늘 이 시간 서로를 위해서 우리 예수님의 마음으로 한번 위로하고 말씀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도 무거운 짐 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서로 위로하시라고요. 서로 서로 위로 좀 해주세요.
한 주간도 무거운 짐 지고 사시느라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요. 우리의 힘만으로 이 무게를 감당하기가 참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할 때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와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에게 위로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 말씀 가운데는 분명한 초대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죠.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참된 쉼을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 번째는 주님이 우리의 짐을 아신다는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지를 알기 때문에 선포한 것이죠.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 우리의 인생은 누구나 다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짐은 내 선택에 의해서 짊어진 짐도 있고 어떤 짐은 내가 선택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부득이하게 원치 않게도 떠맡은 짐도 있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짐이 때로는 너무 무거워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경우, 그럴 때 사람들은 극단적 선택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짐을 아시는 분이 계시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예수님께서는 멀리서 우리의 짐을 우리의 고통을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 누구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시고 우리의 짐이 어떠한지 얼마나 무거운지 다 아실 뿐만 아니라 그 짐을 대신 짊어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짐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존재적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고통의 무게를 알고 그것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마음, 깊숙한 내면을 아시면서 공감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거죠.
우리 가끔 종종 힘들 때 이런 말하잖아요. 내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참 좋겠다 그런 표현도 하지, 너무 답답하면 내 마음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런 표현들을 하고 삽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가까운 친구도 내 마음을 알지 못해요. 심지어 함께 살고 있는 가족도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 방법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속담이 있잖아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아무리 깊은 물이라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는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알아낼 방법은 단 한 가지도 없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아신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다 알 수 없지만 우리 주님이 아신다 말씀하시며 히브리서 4장 15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주세요.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시작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 문장을 여러분 보시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얼마나 이해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공감하시는 분, 함께 아파하시는 분, 하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 그렇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아실 수 있었던 것일까요?
먼저는 그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포기하시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똑같은 인생을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의 아픔들을 아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을 보니까 똑같이 배고파 하셨어요. 그분이 하나님이셨지만 여전히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육신으로 사셨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피곤해 하셨고 슬퍼하셨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감정을 다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갖는 고통을 아신다는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아시는 것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짐을 짊어지신다.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죠. 이사야 53장 4절에서 5절 말씀을 우리 큰 소리로 읽어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 물을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아멘 여러분 2천년 전에 감당하셨던 이 십자가 사건은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죄, 그것으로 인해 찾아왔던 고통, 즉 인류의 모든 짐을 대신 지신 놀랍고도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십자가를 짊어진 것은 그저 단순한 육체의 고통, 아프셨겠다, 괴로우셨겠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 상처, 외로움, 두려움, 실패, 이 모든 삶의 무게를 우리 주님이 십자가라는 무거운 짐으로 대신 짊어지셨다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는 없으셨다라고 강조해 준 것이죠. 사실 우리는 겉모습을 보십시오. 다 별 문제없어 보이잖아. 마치 쇼 데이듯이 아무 문제없게 보일 때가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들이 있다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걱정 근심.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그러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139편 1절 2절 이 말씀을 한번 읽어보십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 우리 안고 일로서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우리의 상처를 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슬퍼할 때 우리 주님이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함께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괴로워할 때 우리 주님이 찾아와 주셔서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가 아파할 때에 우리 주님이 오셔서 싸매주시고 위로하신다고 우리가 외로울 때에 찾아와 주셔서 승부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죠.
우리 찬양으로 고백하잖아요. 예수보다 더 좋은 친구야. 예수보다 더 좋은 친구가 없는데요. 괴로울 때 찾아와서 마음의 평안 주는 신실하신 나의 정신, 외로울 때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 주시는 사랑만은 참신 여러분 이 친구라는 고백이 있는 자들이 그다음에 고백하는 것이 무슨 고백인지 아십니까?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그 생명을 주님께 고백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속사정까지 아시는 주님 나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시며 나의 짐을 대신 주님을 아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 주님의 힘을 얻어서 한 주간도 감사하며 승리하며 사는 존귀하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초대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28절을 다시 보시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승자들아 그들에게 뭘 이야기합니까?
다음에 다 내게로 하라. 모두를 향한 외침 다 내게로 와라.
예수님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초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초대를 듣고 주님께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다는 거예요. 초대를 받았는데 초대에 응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왜 초대에 응하지 못합니까?
사실 잘 알지 못해서 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여러분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그래서 단지 종교 행위 그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삶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과정 이것이 바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주님께 나아가는 데는 몇 가지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자세를 잘 배우셔서 저와 여러분 삶에 적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가지 자세를 제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전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먼저 우리의 짐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셔야 돼요. 온전히 주님께 맡기시기 위해서는 내가 짐이 있다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그리고 온전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맡겨줄 수가 있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요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짐의 무거움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괜찮아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 남들도 다 이렇게 살잖아. 스스로에게 주문을 위해서 그래도 강하게 살아야 돼. 잊을 수 있어.
이러면서 자기 체면을 보는 그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 나아가려면 먼저 내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즉 내 연약함을 인정하고 내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고 깨닫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된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얼마나 연약한 자인지를 깨닫는 지혜가 있어서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이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편 55편 22절은 말씀합니다. 우리 같이 읽어보십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라.
여러분 이 문장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맡기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맡기면 어떻게 하신다는 거예요? 붙들어 주신다. 그 붙들어 주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의인의 요동이 여동환하지 않겠다 여러분 이것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맡기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내 힘으로 살면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의인일지라도 요동하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믿음으로 살지만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순간 나의 삶 가운데 찾아오는 여러 가지 풍파로 인해서 요동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께 맡기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맡아주셔서 의인의 요동함이 영원히 잊지 않게 하겠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그렇다면 맡기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적어도 여러분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요.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조하나 두 번째는 다른 한 두 번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다는 그런 기망이 또 하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 여러분 짐을 맡긴다는 것은 내 노력과 방법으로 산다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방법과 능력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 여러분 맡긴다는 것은 나의 것을 내려놓고 실제적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신뢰함으로 나에게 있는 짐을 맡기는 겸손함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예배와 기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께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길을 허락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죠. 예수의 이름,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 놀라운 은총의 자리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는 종교적 의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만나는 시간이지 우리가 예배할 때 나의 시선이 문제에서 하나님께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걱정과 두려움 대신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게 되는 것이죠. 무거운 짐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선이라는 찬양을 고백하잖아요.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님의 일하심을 선명하게 보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릴 때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는 그때에 네사야는 주의 역사로 일하심을 경험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시고 예배를 통해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는요. 주님과 우리와 마음이 하나 되는 시간 그래서 내 마음을 주님 앞에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이죠. 그래서 기도는 매우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같이 읽어보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의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기도할 때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물론 우리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죠. 내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의지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이 실제 주님을 인정하고 내가 주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바로 기도의 시간이라는 거예요.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로하십니다.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배와 기도는 주님께로 나아가는 중요한 길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와 여러분들이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고 그 자리 가운데 주님과 교제하는 은총이 있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세 번째는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된다는 거예요. 주님께 나아가는 중요한 길 중에 하나는요. 말씀을 붙잡는 것 바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것이죠. 우리가 삶의 현장 가운데 매일 기도하고 매일 예배드릴 수 없잖아요.
물론 삶의 예배자로 기도자로 살아가지만 그것은요 말씀을 붙잡는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 세상의 소리만 듣게 되죠. 그러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막혀버리는 거예요.
세상은 말합니다. 니 힘으로 다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게 맡기라고 이야기하죠. 세상은 너 스스로 강해져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족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5절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같이 읽어봅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라.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앞길 인생의 여정길에 내 발의 등과 빛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인도하는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특별히 여러분 삶 속에서 우리가 죄 짓잖아요. 사실 이 자리에 있을 때는 별로 죄 지을 이유가 없잖아요. 예배 드리고 하나님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마음속에 죄 지을 수도 있어요. 사실은 미운 생각지 말지 짜.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는 죄하고는 좀 멀리 살잖아요. 삶의 현장 속에서는 우리가 말씀을 놓쳐버리면 죄 짓기 잃습니다. 그게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죄를 이길 힘을 얻기 위해서 시편 119편 11절에 이런 말씀도 주셨잖아요.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면 아마 불순종의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붙잡을 때에 삶 속에서 여러분 영적 전쟁에서 지지 않는 자, 또한 죄와 타협하지 않는 자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갈 수가 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붙잡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붙잡기 위해서 아침마다 말씀을 펼치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 그것이 여러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참 소중한 것이다.
여러분 말씀 속에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말씀 속에 내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 보여주신다. 이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가는 종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요.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상황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서 낙심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기도했는데 왜 변하지 않아? 이 변화되지 않는 모습으로 인해서 실망하고 낙심하게 돼요.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래서 약속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게 믿음이에요. 고린도후서 5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도 읽어보십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한다.
여러분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것을 신뢰함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요. 우리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수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저와 여러분들에게 한 주간을 살아가며 지쳐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내게로 오라 이렇게 초청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초청에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초청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 그렇게 어려운 것 아니에요. 네 가지 말씀드렸죠. 내 짐을 단정하고 주님께 맡기는 두 번째 예배와 기도를 주님과 교제하는 것 세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사는 것.
네 번째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 여러분 언제 하시겠어요?
지금 이 순간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고 주님, 내가 주님께로 나아가겠습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임을 기억하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겠습니다. 주님의 초청 앞에 저와 여러분들이 아멘으로 순종하고 나아가는 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우리 초청 받으면 우리가 응답하잖아요. 응답할 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마지막 기록돼 있죠.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내가 너희를 수배하리라 먼저 부르셨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우리를 부르신 대로 두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내게로 와라 추청하셨어요. 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이 뭐라고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렐루야 오는 자에게 쉼을 주시죠. 이게 주님의 약속이에요.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수고와 노력의 연속입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수고하고 또 수고하시죠.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합니까?
여러분 가족들을 위해서 얼마나 애씁니까? 그렇죠 자신을 위해서 또 얼마나 애를 씁니까? 나의 인생을 위해서 정말 더 멋진 인생을 위해서 얼마나 투자를 많이 하는지 몰라요.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불안과 염려가 가득한 내 삶을 보게 되는 것이죠. 가시지 않는 피로감으로 인해서 지쳐 있는 나의 삶을 보게 됩니다.
물론 세상적 방법으로 쉴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요 아 나 진짜 쉼을 좀 얻어야겠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고요. 어떤 사람은 내가 진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좀 힘을 내야겠다. 그래서 음식 맛있는 음식으로 나의 삶을 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 취미를 택하는 사람들 중에서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요. 그래도 사람이 여유가 있어야 돼 그래서 일부러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 열심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런 지적 세상적 힘은 매우 일시적이라는 거 그 순간에 내가 추구하는 바를 진행할 때는 쉬는 것 같아요. 그래 이것이 참 좋은 거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외적인 환경이 변해버리면 다시 불안해지는 거예요. 다시 염려가 내 마음 가운데 가득 차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휴가 갔다 오고 오시죠? 휴가 때 좀 좋잖아요. 그래도 다 내려놓고 그냥 있자. 그런데 여러분이 끝나면 어떻게 됩니까? 후유증이 있죠. 오히려 더 그러나 계속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또 무거운 짐 앞에 우리는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신은요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 허락하신 참 자유함과 만족함이 바로 주님 앞에 서 시는 신이다라는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에게 미치느라. 그런데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그러니 그의 평안이 이겼으면 좋겠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어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나의 삶에 대해서 무엇으로 인해서 지쳐 있습니까?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 시간 초대의 음성 내게로 와라. 이 주님의 음성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찾아와 주시는 사랑의 메시지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 앞에 주님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 그동안 내가 교만해서 내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해서 맡기지 못했습니다. 이제 주님 내가 주님께 맡기기를 사랑하겠습니다. 주님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 더 깊이 만나는 은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말씀이 나의 삶에 푯대가 되어서 삶의 현장 속에서 사람과 싸워 지지 않도록 나에게 말씀으로 붙잡아 주십시오. 주님 내가 믿음으로 순종하겠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여러분 우리에게 세상에 줄 수 없는 평강이 넘치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 한 주 살아가실 때 이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오늘 이 시간 주님이 우리에게 추천하신 이 초대의 말씀 앞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나아져서 이번 한 주 살아갈 때 내가 주님 앞에 살았으니 참 평안했구나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러한 큰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