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관점] ㅡ kjm / 2019.8.18
지금의 세상은?
여러모로 불확실성이 증대하고 있다!
10년 후엔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ㅡ 정치 지도, 경제 지도, 군사 지도, 사회 지도, 환경 지도
시간은 마냥 속절없이 흐른다!
계속되는 각기 다른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른 결과물들이 쏟아진다. 그러면서 일희일비한다. 그러면서 "시간을 보낸다." 이것이 첫 번째 관점이다.
두 번째 관점은, 상황변화와는 독립적으로 차근차근 계획된 대로 진행시킨다. 이전에 앞서 '10년 후의 그림(지도)'이 선행됨은 물론이다. 결과물은 10년 후에나 나타난다.
철학적으로, 전자는 상대론(상황론)이고, 후자는 절대론(원칙론)이다.
정치와 경제는 전자를 따를 것이고, 군사와 환경은 후자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관점을 또 보자.
역동하는 세계에서일수록 주목되는 것은 '군중심리'다.
군중 속의 대중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지 못 한다.
가령, '평화'를 원하는 지 '경제적 이득'을 원하는 지 혼란스러운 감정 상태에 스스로 결정하지 못 한다.
이 때, 누군가가 앞에 나서서 선동하면서 여론 조작을 통해서 군중 심리를 자극하면 '집단적 오류'에 빠져들게 된다. 다양한 가치들을 배제시킴과 동시에 하나의 유일한 가치만을 신봉하게 된다.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을 낳게 된다.
하나는 '군중의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군중에의 사랑'이다.
'군중의 사랑'은 배타적 선언의 사랑이며, '군중에의 사랑'은 비배타적(포괄적) 선언의 사랑으로 '군중 속의 고독'까지도 포용한다.
전자의 특징은, "no mercy"이며, 후자의 특징은, "no echo"이다.
전자가 '용암의 분출'이라면, 후자는 '메마른 땅에 물주기'가 되기 쉽다.
전자가 '절대적 가치의 추종'이라면, 후자는 '상황론적 지평의 확장'이다.
사람들은 종종 '선악의 이분법적 판단'을 습관적 혹은 관습적으로 적용하려 든다.
형식논리나 귀납적 판단 외에도 당위판단 및 가치판단도 있겠고, 가치 판단에도 선악판단과 미추판단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가령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대한 판단을 하는 데 있어서, 다분히 의도적인, 선악판단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따지려 든다.
마치 '선악 방정식' 문제를 내놓고, 이리저리 숫자들을 대입시켜가면서 자신의 의도를 충족시키려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숫자들 중에는 이승만이나 박정희, 전두환 등은 대입에서 예외로 둔다. 게다가 '시대적 상황론'은 고려조차 안 하려 든다.
이런 무모한 판단들을 배경으로 부시의 '악의축' 선언이 있었고 이는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스며들었다.
경제학조차도 자본주의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이라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일무이한 선악판단으로 재단되어 배타적 선언을 하게 된다. 결국 우리의 경제학은 '성장의 경제학'으로 고착화되면서 '경제 공황'에 대해서는 무방비, 무답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즉, 성장에 대해서는 너무 잘 설명하지만, 저성장이나 마이너스 성장과 공황 상태에 대한 설명에서는 무지하기가 짝이 없어 허둥대다가 그대로 두들겨 맞게 되는 것이다.
핵무기들을 필요 이상으로 수천기씩 만들어 쌓아 두는 것도 결국은 감축할 방법을 못 찾기 때문이다. 여기엔 다분히 '죄수의 딜레마'가 작용한다.
남북 교류에 있어서도, 정치, 경제, 군사적 접근에만 매몰되어 문화적 교류의 진전이 없기에 더욱 더디게 되는 것은 아닐까?
방탄소년단이라도 보내 보는 것은 어떨지...
언젠가 "불확실성을 타고 넘는다"는 말을 한 것 같은데, 왠지 반응이 없는 것 같다.ㅎ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