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부활(막 16:6)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째 되는 날 해가 뜨기 전 여인들이 예수님께 바르기 위한 향품을 준비하여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과 조롱 속에 힘의 논리에 패배한채 죽음을 맞이한 예수님의 장례를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장례 문화는 건조한 기후의 영향으로 굴에 시체를 일 년 보관한 후에 다시 시신을 정리하여 매장을 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시체를 아리마대 요셉이 거두어 무덤(굴)에 보관한 것을 기억하고 여인들이 방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이들이 여자들(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의 담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기득권을 가지고 철저히 힘의 논리로 예수님을 죽게 만든 이들을 두려워해야 했지만 기꺼이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향품을 준비하고 무덤을 찾는 담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빌라도의 경비병이 지키는 무덤(마 27:66)을 찾는 담대함의 이면에는 그녀들에게 무덤의 돌을 ‘누가 굴려 줄까?(3절)’하며 걱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보관한 무덤을 막고 있는 거대한 돌을 옮길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이르자 그녀들은 이미 무덤의 돌문이 굴려진(4절)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거대한 돌문 앞에서 무능력한 그녀들을 위해 하나님이 먼저 일을 하셨습니다.
돌문이 굴려진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 여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지 삼일이 지난 예수님의 시체는 사라지고 빈 무덤 안에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아 있었습니다(5절). 이미 열린 돌문을 보고 혹시라도 예수님에게 불상사나 혹은 문제라도 벌어질까 염려했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흰 옷 입은 청년이 ‘너희가 찾는 못 박히신 예수는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다(6절)’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매를 맞고 죽음을 당하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마 16:21)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제자나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이를 믿지 못하고 기억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담대한 여인들조차도 이를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크리스마스(성탄절)는 신자이거나 불신자이거나 동일하게 의미있고 즐거운 축제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떠들썩한 날로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첫 성탄절은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고, 목자, 동방의 박사들에게 경배를 받았지만 오히려 헤롯 왕을 피해서 조용히 움직여야 했습니다. 첫 성탄절은 외롭고, 춥고, 쓸쓸한 여행길에서 맞이해야 했던 요셉과 마리아의 인생 여정이었습니다.
첫 부활절 역시 연약한 여인들의 놀람과 두려움 가운데서 빈 무덤을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8절) 지내야 했습니다. 가장 값진 선물이자 하나님의 은혜인 부활이지만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불쌍한 사람(고전 15:19)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은 놀람과 무서움으로 부활의 첫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예수님의 시신이 사망의 권세 아래 무덤에 있어야 했습니다.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은 세상의 권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무덤에 머물지 않고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빈 무덤은 놀람과 두려움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부활의 소식을 알렸습니다. 빈 무덤은 새로운 시작이고, 승리의 소식이고, 우리가 전해야 할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행 1:8)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과 힘에 짓눌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승리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죽음으로 거기 계실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과 예상을 넘어서 먼저 갈릴리로 가신 예수님의 행보를 따르는 바다교회 가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