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나루터에서
매월 첫번째 금요일 저녁 황금수저회를 즐기는 날이다. 2020년 9월 4일(금) 저녁 5시 27분에 5호선 마포역 1번 출구에서 뻐드타 막사리 엉까페 치빠후 조단서 버브바 까토나 일곱명의 지기들이 만난다. 이곳에는 아들이 경영하는 연세한강병원이 있으며 애비로서 약제실 약사로 근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은 마포대교 아래에 있는 한강 마포나루터 근처로 향한다.
오늘의 야외특별 메뉴는 회초밥과 연어 광어 참치로 조합된 회와 더덕무침 돼지갈비찜 그리고 뻐드타 아내가 손수 만들어준 얼갈이김치 견과류 소주 맥주등으로 구성을 한 특식이 아닌가. 3밀(密)인 밀폐 밀집 밀접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객들의 시원한 선택이다. 10개월이 넘도록 아직도 COVID-19라는 녀석이 전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있다.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나의 건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도 방역수칙에 적극 협조해야 하지 않을까.
마포하면 노객들에게는 얼른 뇌리에 떠오르는 단어가 있을 게다. 소금과 새우젓과 마포종점이 떠오를 것이다. 한 가지 더 마음에 새겨볼 역사의 현장이 바로 지금 마포역 4번 출구 근처에 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8시경 약 1천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인 장소이다. 광화문과 남대문 근처에서 " 대한독립만세 "를 부르짖던 피맺힌 함성이 지금도 마포대교를 흔들고 있는 모양새가 아닌가. 현재는 불교방송국이 있는 빌딩의 앞 화단에 표지석만이 자리하고 있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관심없이 그저 스쳐지나갈 뿐이다.
마포나루터는 조선시대부터 곡식을 비롯하여 새우젓 소금등을 한양뿐 아니라 삼남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으로도 유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소금장수들이 거처를 하던 곳이 지금의 염리동이다. 그 때의 모습은 재개발등으로 사라진지 오래이고 흘러간 세월일 뿐이다.
마포나루 근처에는 바로 토정동이 있다. 1517년(인종 1년)에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난 이지함(李之菡)의 토정(土亭)이라는 호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는 용산의 마포 강변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다음 아래에는 굴을 파고 위로는 정사를 짓고 스스로 호를 ‘토정(土亭)’이라고 했다. 지금은 거의 잊혀진 1년 운세를 읊은 토정비결(土亭秘結)이 한 때는 유행하기도 했다. 일백여장 정도의 페이지에 엮어 낸 예언(?)을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년 운세로 받아들이던 그 자체가 쓴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1967년도 은방울자매가 불러서 70년대를 휩쓸던 노래 가사이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전차(電車)와 그 때의 아쉬움도 묻어나는 노래가 아닌가.
대학교 3학년 겨울밤이다. 학년말고사 공부를 하노라 학교도서관에서 밤 늦게 교문을 나선다. 경한이라는 친구와 둘이다. 샛노오랗게 캠퍼스를 아름답게 물들이던 은행닢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땅바닥에 나딩구는 낙엽이 되어 짓밟히고 쓸려 버리고 만 것일터이다. 황량하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가슴을 파고들며 옷깃을 여미게 한다. 교문 바로 앞에 멍개 해삼을 파는 리어커가 시선을 잡는다. 사과 반쪽에 옷핀 몇개를 꽂아두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사람 저 사람 멍개 해삼을 찍어 먹는 포크인 셈이다.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 몇닢으로 멍개 해삼을 한입에 밀어 넣는다. 멍개 해삼의 특이한 향기가 폐포 속을 파고 든다. 입안에 군침이 목젖을 적시지만 더 이상의 추가할 방법은 없다.
아쉬움을 뒤로 한채 종로구 명륜동 캠퍼스에서 금호동까지 귀가를 한다. 경한이는 집이 수원으로 기차 통학을 하고 있는 동기생이다. 전차표는 몇장 여유가 있어 을지로4가 전차종점까지는 별문제가 없다. 이 때의 전차는 공중에 가설한 전선으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아 전기의 힘을 동력으로 하여 궤도 위를 달리는 차량이다. " 땡 ~ 땡~ 때에엥 " 종소리를 울리며 시속은 약 20Km 정도로 오십여명 타면 만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노선은 청량리에서 서대문, 돈암동역에서 을지로4가,왕십리에서 서울역, 서대문에서 남대문 , 서대문에서 마포, 서울역에서 노량진등등의 기억에 남아있다.
자동차 공업이 발달하여 넘치는 차량에 교통의 방해물로 전략한다. 마침내 1968년 말에 폐기가 되고 사라진다. 지금은 서울역과 경희궁 역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을 정도이다. 마포 공덕역 근처에는 아직도 그 당시 철로가 남아있다. 이곳이 바로 밤깊은 마포 종점이리라.
목차
주머니에는 아직 남아 있는 전차표가 있다. 을지로4가까지는 전차(電車)에 오른다. 예서부터 금호동집까지가 문제이다. 버스를 탈 버스표도 동전이 한냥도 없다. 멍개 해삼값으로 두녀석들이 털털 털었으니 어찌할 것인가. 걸어서 을지로 6가 계림극장 앞에서 장충체육관을 지나 약수시장 해병대고개 지금의 3호선 전철이 통과하는 동호터널이다. 금호동 4가 1483번지에 도착하니 통금 사이렌이 고막을 때린다. 근심스런 나의 오마니는 한 마디의 말씀도 없으시다. 용돈 투정 한번 부리지 않는 자식에 대한 안스러움이련가. 그저 아들녀석의 이부자리를 보듬어 주실뿐이다. 왠지 모를 서러움이 복받쳐 오르고 하염없는 눈물이 베개를 흥건히 적신다.
" 정남아 , 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너를 만날 수가 없구나, 회복이 되어 내가 한국에 나가서 너를 볼 수 있을지도 장담을 못 하겠다, LA 동기들과 즐겁게 시간을 가져라. 미안 하다 ~~~~ " 그 때 미국에 있는 대학동기생 경한이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가슴을 조이고 있다. 착하고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녀석이다. 아내랑 모처럼 미국여행을 하고 있을 때이다. 아들 며느리가 존스흡킨스 대학병원에서 연수를 하고 있을 당시였으니 벌써 친구가 떠난지도 10년이 훌쩍 지난 세월이다. 콩팥인지 방광인가 비뇨기계통의 암(癌)으로 고인(故人)이 된 절친(切親)의 한명이다.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명복(冥福)을 빌뿐이다.
황금수저회 노객 일곱명이 마포나루터 옆에 마포대교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햇살은 서산에 저물고 희미한 가로등이 술잔에 아롱지며 한강물을 일렁이게 하고 있다. 터져나오는 지기(知己)들의 웃음소리도 밤 깊은 마포나루터를 들썩이고 있는 게 아닌가. 밤 깊은 마포종점과 대학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다.
2020년 9월 4일 무 무 최 정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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