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가 넘어가고 있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 또 그다지 피곤하지도 않다. 어제 저녁 이곳 도봉산 입구에 위치한 국립공원 생태 탐방 연수원에 코압 갤러리 소속작가 11명과 함께 MT들어왔다.
3시 30분쯤 억지로 눈을 붙였다. 5시20분에 기상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등산길에 나서려는데 한형배 관장과 이득효 선생님이 내 인기척에 깨어나 함께 산에 가자한다. 마당바위 코스로 두 시간 등산을 다녀왔다. 7시40분에 숙소에 도착하니 김숙기 관장께서 어느새 일어나 식사준비를 완벽하게 셋팅해놓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계셨다. 늦어도 8시에는 숙소를 나서야 인사동에 시간에 맞게 도착될 수 있으리란 계산에 허겁지겁 밥을 먹다보니 먹고 있으면서도 속이 편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화 내리에 도착하니 야수회 작가들이 우리 보다 먼저 도착하여 모란 앞에서 한창 스케치 중이었다. 작년에 그림을 그렸던 장소까지 마을을 따라 올라가다가 다시 내려오던 중 어느 집 대문 앞에 소담스럽게 핀 하얀 모란꽃 앞에서 우뚝 발걸음이 멈추어지고 말았다. 더 이상 다른 곳을 다녀보고 자시고도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빠르게 그 자리에 이젤을 펴고 자리를 잡아 놓았다.
식당이 있는 선두포구항은 내리에서 채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밴댕이 완자탕과 밴댕이회가 오늘 점심 밥상이다. 그런데 이 최고의 상찬을 받아 놓고도 식욕은커녕 속이 미식 거려 죽겠을 노릇이다. 아침밥을 너무 급하게 먹은 것이 기어코 탈나고 만 것이다. 가스명수까지 먹어가며 억지로 식욕을 돋워 보지만 이 역시 허사다. 화우들 입에서 오늘 밥상이 끝내준다는 탄성이 쏟아져 나오면 나올수록 속은 이래저래 더욱 뒤집어져 환장할 노릇이다. 아그~ 이 보들보들한 밴댕이 회 한 점 먹어보겠노라 일주일간 침을 꼴깍였는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점심을 거르고 다시 내리의 모란꽃 앞에 돌아와 서니, 밥 못 먹은 설움은 어느새 싹 가시게 하고도 남을 만큼 탐스럽게 만개한 모습의 하얀 모란이 오후의 수직 광선을 받아 더욱 눈부시게 나를 반기고 있었다. 어디선가 한 점의 바람이 살며시 불어온다. 모란 꽃잎 한 자락이 춤을 추듯 맵시 있게 팔을 접고 돌아간 후, 정체모를 미묘한 향기가 뒤따라 와 애간장을 녹여내듯 아늑하게 만든다. 아! 이 향기가 바로 모란꽃의 향기였단 말인가? 처음 맡아보는 은근한 냄새다. 진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다. 톡 쏘지도 그렇다고 밍밍하지도 않은 이 향기는 분명 잘 익은 명품의 포도주에서나 맡아볼 수 있는 그 미묘한 부케 향에 비견되지나 않을까? 서시가 지나간 들 이 향기가 날까보냐? 낙랑공주가 지나간 들 이 향기가 날까보냐?
내 옆에 자리 잡고 앉은 미상 씨와 길하 씨도 도무지 이 흥분을 감당키가 힘이 들은 탓인지 붓 한 번 들었다가 사진기 한 번 들었다가 다시 붓 한 번 들었다가 다시 사진기를 들고는 이 꽃 저 꽃으로 옮겨 다니고 있는데 가히 그 모습이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사진 한 장 찍고는 “아 좋다!” “아!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탄성을 지르는데 정말이지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자연히 붓은 형상에 구애되지 않고, 흥분된 마음 들키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멋과 흥에 겨워 냅다 막춤을 추워대기 시작하였다. 흥분된 놀부 마누라 주걱에 밥풀이 몇 개나 붙어있었을까? 아마도 내 30호 캔버스에 자리 잡아 놓은 모란꽃만큼은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채 반에 반도 못 그리고 모란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 통탄스러운 마음을 어찌 할꼬?
그리움은 헤어짐에서 생기는 보석과 같은 결정체란 말을 어디에선가 들은 것도 같은데 아! 나는 이 이별을 통해 얼마나 아파하고 또 그리워하며 이 그림을 완성해 나갈 것인가?
2012.5.13
첫댓글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찬란한 모란과 부회장님의 작업에 몰입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저절로 에너지가 충전되는듯~~
잊지 못할 5월의 어느 멋진날이 될 것 같습니다.
몸도 않좋으셨는데 사무국장으로 끝까지 세심하게 살피시는 모습에 그저 감탄할 뿐~~
버스에서의 유머도 굳~~ 사투리 넘 웃겼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노화된 눈으로 조박만한 글을 읽는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웃기는 것도 여유가 있고나서야 가능한 법인가 봅니다.
하긴 그 서툴게 읽은 것이 더 웃겼노라 는 분들도 계시긴 하였지만…….
늘 어여삐 보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