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땡땡땡 하는 곳에 가자!" (죽었다가 살아난 4살 어린이 이야기 , 장길준 목사의 증언에서)
저는 금구면 면소재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술꾼, 노름꾼이었으며 집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잡고 노름을 해서 집을 3번이나 노름빚으로 날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의 집 문간방에서 산 기억이 많이 있습니다.
저희는 10남매인데 5남매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나 5남매만 살아남았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아파서 죽어갈 때 마다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였습니다. 우리집에는 단골무당이 있어서 수시로 굿을 하고 점을 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며 자녀들의 이름을 절에 올리고 불공도 열심히 드렸습니다.
우리집은 아버지의 노름과 어머니의 굿으로 편할 날이 없는 집이었습니다.
1946년 전국에 콜레라가 발생하여 이남에서만 5월에서 10월 사이에 1만 명 정도가 죽었습니다. 홍역도 대유행을 하였는데 당시 4살인 저의 형 장길선이 홍역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방 윗목으로 옮겨놓고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한참 우는 중에 비몽사몽간에 죽은 아들이 “엄마! 땡땡땡 하는 곳에 가자.” 라고 하는 말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시 그 지역에서 땡땡땡 소리가 나는 곳은 교회 밖에 없었으므로 어머니는 죽은 아들이 교회에 가자 고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들의 말을 그렇게 이해한 어머니는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교회로 죽은 아들을 들쳐 업고 용감하게 갔습니다.
마침 아버지가 죽은 아들을 등에 업고 교회로 가는 어머니를 보고 “ 전염병으로 죽은 애를 업고 나가다니 제 정신이여! 사람들이 보면 가만히 안둔다고. 미쳤어! 빨리 집으로 가!”하면서 야단을 치며 “애가 죽었다고 에미까지 미쳐! 내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고만!” 하면서 죽은 아기는 뺏지 못하고 돌을 들어서 어머니에게 던졌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던지는 돌에 맞으며 아들을 살리려는 일념으로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죽은 아들을 업고 달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미친 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머니의 절박한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교회당 마루에 눕히고 펑펑 울었습니다.
교회는 난생 처음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강대상 아래에 앉아서 “우리 아들, 어린 것을 불쌍히 여겨시고 살려주십시오.” 라는 말만 혀가 닳도록 계속 반복하였습니다.
당시 교회에서 시무하고 계시던 전도사님과 교우들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날에 죽었던 저의 형 장길선이 살아났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셔서 형이 살아나자 온 교회가 감사와 은혜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시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공과 굿을 끊고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희 집안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할렐루야!
이버지는 술과 노름을 끊고 신앙에 입문하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하나님께서 끝까지 불러 주시고 붙잡아주신 덕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형님 장길선은 그 교회에서 유초등부, 중고등부, 청년부 교회학교를 거치며 교회 집사가 되었으며 훗날에 수석장로가 되어 오랫동안 모교회를 아름답게 섬겼습니다.
저는 형, 장길선의 소생으로 인하여 처음부터 크리스천이 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므로 태어나면서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3,4살에 소꿉놀이를 할 때부터 전도사, 목사가 된다고 하였고 76년 9월에 서원한대로 목사가 되어 현재까지 46년째 뉴욕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어린이교회학교 교사로 섬겼으며, 중학교 시절에 전도사님이 출타로 수요예배 인도자가 없을 때 제가 인도하며 말씀을 증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신학공부를 하면서 청년 전도사로 성덕교회에서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금구교회를 집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금구교회와 고락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다 금구교회의 기억입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몇 가지 무거웠던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겠습니다.
기장과 예장 교회가 나뉠 때 진통이 컸습니다.
그러나 저희 어머니 고 김수원권사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내 아들의 죽은 몸을 받아 준 교회가 여기 있는데 어디로 가겠느냐?” 며 중심을 잡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분리된 교회에서 그쪽 교회로 적을 바꾸면 송아지를 사준다. 쌀을 준다하며 교인들을 유혹하였지만 어머니는 “우리 아들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데 그까짓 송아지와 쌀이 문제냐!” 며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박태선 장로의 신앙촌 전도관이 금구에 세워졌습니다.
몇 가정을 제외하고 교회의 중진들이 흔들리며 다 빠져나갔습니다. 교회가 휑하고 텅 비어서 그 때 참으로 서글펐습니다. 그러나 저의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우리 가정을 불러준 처음 자리인 금구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금구교회로 은혜가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저희가족은 참으로 금구교회로 족하였습니다.
처음 금구교회 건물은 양철 지붕으로 지어진 교회였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서 어린이교회학교를 다니며 행복한 교회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후 좀도리 쌀 운동처럼 적은 돈을 모아서 양철지붕을 헐고 두 번째 건물을 지었습니다.
세 번째로 구교회당을 어렵게 매각하고 현 교회당으로 터를 옮겨서 현재의 새 건물을 멋지게 지었습니다. 그 후로 어린이집과 서비스센터가 완공되어 어린이집과 기타 지역사회를 섬기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시는 교회로 아름답게 성장하였습니다.
세 번째 건물을 지으면서 교회가 건물과 대지 등기를 저희 어머니 고 김수원의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저는 일찍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우리 5남매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등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며 뜻을 받들어 모친 사후에 어머니에게 재산을 상속 받은 것으로 하여 고스란히 교회에 증여하여 교회가 서류상으로도 완벽하게 정리하도록 협조하였습니다.
100주년 된 저의 모교회인 금구교회를 사랑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서 여러분들의 얼굴을 뵙는 것이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100주년 행사에 오라는 교회의 초청을 받고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한번 방문하고 싶은 모교회였으므로 아내에게 모교회 100주년 행사에 다녀와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기대와 다르게 크게 반대를 했습니다.
은퇴를 1년 앞두고 있는 목회자가 1달 전에 한국에 다녀왔는데 보름 만에 또 나간다고 하면 교우들이 싫어할 것이니 보기에 좋지 않고 덕스럽지 않아서 반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반대에 직면하여 다투고 싶지 않아서 가슴 아프지만 모교회 방문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내가 기도하며 생각해보았다며 “200주년 예배에는 죽어서 참가하지 못할 것이니 살았을 때 100주년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은혜이고 축복이다.” 고 하였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기가 살아난 저는 비행기 티켓을 구하기 위해 항공사의 뉴욕~서울 노선을 다 뒤졌습니다.
가격은 평균 5,600달러인데 가격이 비싼 것은 고사하고 5월 초부터 14일 사이에 자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기자 명단에 넣었는데 저의 번호가 무려 100번이 넘었습니다.
10번 안쪽이면 조금의 가능성이 있지만 100번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미련이 있어서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적었습니다.
대기자 명단을 신청한 며칠 후, 그러니까 한국에 나오기 사흘 전 정도에 항공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뉴욕~ 서울 간의 특별기가 뜨게 되었으니 원하시면 바로 항공운임을 입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동원하여 610만원을 입금하고 번갯불에 콩을 튀어먹듯이 나와서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게 되어서 너무 영광스럽고 너무 기쁩니다.
할렐루야!
76년 전 저의 형님을 살려주신 하나님께 이 자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형을 고쳐주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금구교회에 계시며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앞으로 100년이 지난 후에
200주년 기념예배를 드릴 미래 금구교회와 미래의 성도들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5월 15일 오후 3시 금구교회 100주년 예배에 들은 장길준 목사의 증언을
2022.5.19.목요일 저녘에 정리하여
우담초라하니 2022년 5.20일에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