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추린 북간도 용정촌 약사 (1922년 ~1923년)
1922년, 서간도 환인현에서 통군부가 결성되었다.
통군부는 8월에 서간도 환인현에서 교섭을 통하여 17개의 무장독립운동단체를 하나로 묶어 민정과 군정을 겸하는 통의부로 자신을 개편하였다. 통의부의 복벽파들이 의군부를 형성하여 나갔다. 의군부와 통의부가 대립하는 사이에 일부 세력이 임시정부와 접촉하여 참의부로 편입되었다. 통의부는 참의부와 정의부로 분열되어 결국 해체되었다.(1924년)
간도의 조선인 총인구수는 32만 3,086명으로 간도 인구의 81.8%를 차지하였다.
22년을 고비로 하여 북간도의 간도국민회는 무장 유격 군사 활동으로 가는 공산주의 계열과 공산당 가입에 반대하고 교회에 남아서 전도활동, 문맹퇴치운동, 농촌계몽운동, 민족교육운동을 하는 자치회 계열로 나뉘었다. 교회에 남은 자들은 교회 장로 또는 목회자가 되어 간도학살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교우와 교회와 마을을 순회하여 돌보며 만몽조약과 삼시협정으로 중국과 일본이 주는 이중의 고난에 시달리는 조선인들의 상조권, 전민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재면, 김약연, 윤화수, 이태준, 조희림 등과 영국더기에 남은 자들은 무장독립운동 대신에 간민사회 계몽과 안정을 추구하는 자치회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김정명 저 ⌜한국독립운동⌟3권. 423,424.425쪽에 의하면 당시 알려진 크리스천 항일운동가는 최빈, 유찬희, 김내범, 조희림, 김강, 유진구, 최도현, 김병식, 허양권, 김약연, 박일환, 박경철, 최기학, 남세극, 마진, 오성묵, 계봉우, 전일, 김하석, 백옥포, 김영학, 정재면, 정안립, 박동원, 양도헌, 김대정, 김재범, 김규면, 최봉의, 구춘선, 이동춘, 이동휘, 황병길, 이명순, 김립 등이었는데 이들은 각자의 노선에 따라 나뉘었다.
고려공산당의 파견을 받은 장기영, 주건 등은 옹성라자(현재 안도현 명월구)에서 고려공산당 만주지방위원회를 설립하고 맑스-레닌주의를 전파하며 지방조직을 확대하였다.
이주화, 이인구 등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에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하는 광복회 등 과외학습소조를 만들고 맑스-레닌주의를 연구하였다. 임민호를 비롯한 동흥중학교 학생들은 “동구청년회”를 조직하고 공산주의 혁명 사상을 선전하였다.
용정 간도 총영사관에 화재가 나서 전소하였다. 현재 용정시 정부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일본의 영사관은 23년에 착공하여 25년에 완공되었다.
❰남양평조선인민회❱가 용정총영사관 산하에 세워졌다.(3,500명 )
❰다라즈조선인민회❱가 용정총영사관 산하에 세워졌다.(3,000명 )
❰흑정자조선인민회❱가 훈춘분관 산하에 세워졌다.(1,645명 )
용정예배당에서 제 2회 간도노회가 열렸다. 23명의 노회 회원들이 참여하여 임원을 개선하였다. 회장 박례헌, 부회장 강두화, 서기 허상훈, 부서기 이종식, 회계 강두화, 부회계 박걸(A.H.Barker)이 선임되었다. 용정에 있는 삼국전도회 가옥을 용정교회에 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가을부터 무산 회령간도에 전도인을 파송하고 하기강습회를 열고 각 미션학교마다 여름학교를 열 것을 결의하였다. 제3차 노회에서는 총회에서 내려 온 위로금을 간도대학살에 참변을 당한 가정에 개별적으로 전하기로 하고 무산 간도 전도인에 허상훈이 결정되었다.
서고도 선교사가 은진중학교 3번째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은진학교는 본격적인 발전기에 돌입하였다. 일본인 히다까 헤이지로가 ❰사립광명사범학교❱를 창립하였다.
1922년에 세워진 학교는 왕청촌민의❰면전학교❱, 의란구의❰춘흥학교❱ 2곳이다.
22년의 학교 명단은 동북조선민족출판사에서 나온 ⌜중국조선족학교지 ⌟에서 확인한 것들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권에 의하면 1922년에 세워진 교회는❰경흥읍교회❱에서 분립되어 나온 훈춘 ❰포은동교회❱ 1곳뿐이다. 그러나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 상권⌟ 530~ 534쪽에 의하면 ❰대랍자교회❱,❰태평동교회❱도 있다.
연변의 민족출판사에서 나온 ⌜종교사⌟ 152쪽에 보면 당시 북간도에는 조직교회가 30개, 미조직교회가 57개, 기도처(개척교회),가 28개로 총 115개의 교회가 나온다. 이는 교회가 1920년 일군에 의한 간도대학살의 파괴와 방화를 신속히 극복했다는 의미와 함께 일본군의 주장대로 대부분의 교회가 초집이었으므로 복구가 어렵지 않았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민경배가 쓴 ❰일제하 간도에서의 한국기독교 과격독립운동❱에 보면 1922년 간도노회에서 활동하는 목사 6인, 장로 50인, 조사 18인, 영수 32인이다. 장로의 숫자가 전에 비하여 6명이 증가하였고 교회 살림을 관리하는 영수의 숫자가 13명이나 늘어난 것은 의미심장하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상해 프랑스 조계 안에 있는 미국인 예배당에서 열렸다.
1월 3일을 전후하여 국내, 상하이, 만주일대, 북경, 간도 일대, 노령, 미주 등지에서 120여 개의 단체 및 지역 대표들 124 명이 모여서 독립운동의 당면한 과제인 최고기관 설치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대표들이 임정해체를 주장하는 창조파와 임정 개조를 주장하는 개조파로 팽팽히 맞서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3월 13일 임시정부개조안이 상정되었지만 양측의 대립이 격화되어 3월 20일부터 휴회로 들어가 정식회의가 열리지 못하였다. 막후교섭으로 개조파가 제출한 제3안인 ‘국민대표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헌법•제도 및 기타 일체를 실제 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조할 것을 결의함’을 다른 안건들을 처리한 뒤에 처리하기로 하였다. 4월 11일에 정식회의를 다시 개최하여 여운형 외 3인 명의로 제출된 ‘본 국민대표회의는 내외의 각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일체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일대 독립당을 조직하기로 결의 한다’는 제안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여운형의 제안이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으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4월 17일 군사분과위원회 이청천 외 6명은 병역 의무와 지원병 제도, 군대 편성에 대한 군사의안을 제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도파 계열이 창조파로 넘어갔고 5월 15일 서로군정서와 한족회가 대표들을 소환하여 김동삼, 김형식, 배천택, 이진산 등이 국민대표회에서 탈퇴하였다. 그 후 윤해가 의장, 신숙이 부의장, 오창환이 비서장에 보선되었으나 5월 16일 개조파의 조상섭, 조상벽 등 42명이 불참을 선언함으로써 회의는 창조파 만의 대회가 되었다. 6월 3일 창조파 만의 회의에서 국호를 한(韓)으로 결정하고 6월 7일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개조파 57명이 반대성명을 냈으며 임정은 6월 6일 국무령 포고 제3호로 이에 반대하였다. 특히 임정 내무총장인 김구는 내무령 제 1호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하였다.
이에 창조파는 노령으로 돌아가서 새 정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 해 한(韓)정부는 노령으로 옮겨 갔으나 레닌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그 결과 한(韓) 정부를 따라갔던 창조파 인사들은 1924년 2월 말을 전후하여 중국지역의 각 단체에 복귀하여 개별운동을 전개하였다.
용정 기차역이 11월에 준공되고 민성가와 건설가에 가로등이 설치되었으며 용정의 최초의 극장인❰성세무대❱가 오픈하였다.
용정에서 조선인 청년 최창호가 중국 군경에 의해 사살 당하였다. 용정 주민들은 자치단(조선인거류민회)과 함께 주민대회를 열어 시위를 하였고 간도 조선인 30만 명의 일본국적 이탈과 중국정부에 제출할 항의문을 채택하였다.
일본국적 이탈운동을 하는 이유는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일본과 중국 양국의 이중법률을 받음으로 일상생활에 막대한 곤란을 당하는 것과 조선인으로 행복한 생활을 살기 위한 것과 일본이 조선 동포의 생명재산을 완전히 보호할 능력 유무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중국 측에도 거세게 항의 하였는바, 간도는 국제적 조약에 의하여 조선인이 거주할 권리가 있고 또 60여 년 동안 황무지를 개간해서 옥토를 만든 공로가 있으므로 거주할 권리가 있음에도 백주에 죄 없는 양민을 총살한 일, 세금을 제한 없이 받아서 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일, 하급 관리들이 주민에게 무리한 압박을 하고 불법행위로 생활의 안정을 방해하는 일, 법률에 위반되는 세금을 강제로 받는 일 등이었다.
거류민회 집행위원회는 김정기와 윤화수, 정재면이 외교위원으로 선발하여 자치민단 운동을 이끌어 갔다. 그러나 조선민단 건립운동은 일본과 중국 양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중국 측은 조선민단을 빌미삼아 일본이 재차 출병하는 기회를 조성하는 것으로 의심하였고 일본 측은 조선민단 건립운동이 북경과 봉천지역에서 김규식과 장진우가 추진하는 ‘조선인자치기성회’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극력 반대를 하였다. 이로서 조선민단 설립과 자치문제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1920년대 후반 조선인거류민회는 조선인 문제를 일본에 의존하여 해결하고자 하며 친일적 경향이 강해졌다.
김영학의 발기에 의하여 국자가에서 ❰간민교육연구회❱가 결성 되었다. 회원이 700명이었고 회장에 김영학, 부회장에 이동춘, 총무에 황일포, 의사부장에 김정기, 연구부장에 윤하수(윤화수), 편찬부장에 임계학이 선임되었다.
8월에 길림성 경무처 처장 종육과 연길도윤 도빈은 선후하여 “각종 종교의 전도활동을 일률로 보호한다.”고 선포하였다.
공산주의자 조선대표단 23개 단체의 52명이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회에 참석하였다.
일본에서 유학한 김봉익, 주채희 등 북풍파가 용정에서 노동운동을 조직, 매수공인조합, 용정양무직공호조회, 건설자동맹을 세웠다. 또한 이병석을 회장으로 하는 노동회와 노동학원을 창설하였다. 이 외에도 노동자단체로 연길운수조합, 연길계량기조합을 만들었다.
1923년 2월 이동휘는 중국 동북지방에 본부를 둔 공산주의 단체인 적기단을 영고탑에서 설립하여 최계랍(최봉설)을 단장으로 세웠다. 적기단은 발족하자마자 공산주의를 선전함과 동시에 일제의 관공서 파괴와 친일분자 숙청에 앞장을 섰다. 그들은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 제휴를 시도하였고 다른 공산주의 단체의 재정을 후원하였다. 언제든지 두만강을 건너 진공작전을 펼 수 있도록 결사대를 조직하여 안도현 유두산 인근에 150명을 액목지방에 200명 정도를 대기시켰다.
고려공산당 돈화현 중앙총감부(회장 구춘선)는 임시대회를 열어 간부 구춘선, 마진, 재정부장 최한, 외교부장 김호석, 편찬부장에 김계산(광복단의 김성극), 통신부장에 김창립을 선임하고 적기단과 함께 공산주의 사상 선전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경비는 적기단의 지원을 받기로 하였다.
국민회 군사부는 러시아에서 돌아온 고려혁명군사회 이용, 임표, 김홍일, 박춘일, 마건, 마충걸, 서상용, 최기학, 장기영 함께 흩어진 독립군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군비단과 국민회 군사부를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사회를 조직하였다. 마진이 집행위원장, 이용이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대한의용군사회는 자체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모연대를 소백초구, 용암촌(명동촌), 의란구 걸만동, 화첨자, 종성대안, 무산간도로 보냈다. 모연대원들은 과거에 모두 간도국민회 회원이었으나 고려공산당 당원으로 전향한 사람들이었다.
중앙총감부는 중국 연변지방 조선인 사회에 공산주의 선전을 청년학생층을 대상으로 삼아 펼쳐갔다. 그리하여 연기현의 묘구, 다조구, 북하마탕, 국자가, 화첨자, 와룡동, 화룡현의 대랍자, 왕청현의 봉오동, 대감자 지방을 중앙총감부의 활동무대로 넓혀갔다. 국민회 군사부가 폐기된 후에 설립된 중앙총감부는 적기단과 함께 고려공산당의 중요한 조직체로 초기 공산주의 운동 단계에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국민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하는 고려공산당 만주지방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당시 이동휘의 파견을 받은 장기영, 주건, 김창순, 김하수, 마천룡이 옹성라자의 방진성, 이환수, 최동욱, 황일포와 함께 간도국민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만주지방위원회를 만들었다.
정재면이 은진학교 교감으로 부임하였다.
영신중학교가 일본인 히다카 헤이지로에게 넘어갔으며 그 때부터 조선총독부와 일본 외무성의 지원을 받았다.
대성중학교 학생들이 수일간 동맹 휴학을 하고 학교에 모셔 있는 공자의 위패를 뜯어내고 공교회 성원이며 보수적인 임봉규 교무주임을 몰아내고 외국어 교과목을 증설하였다.
박윤서, 주건 등이 마준과 함께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에❰사화과학연구회❱,❰학생친목회❱등 혁명단체를 조직하였다.
조선인 초기 공산주의자 김사국, 방한민, 김정기 등이 용정 대성학교 안에 ❰동양학원❱을 열어 70여 명을 학생을 받아들여 공산주의 이론을 강의하였다. 그는❰학생친목회❱와❰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고 북간도를 순회하며 청년들을 사로잡았다.
간도 7개 사립학교 축구대회가 용정에서 열렸다. 은진학교가 우승하였다. 7개 사립학교는 정동, 창동, 명동, 은진, 대성, 동흥, 영신학교 이다.
1923년에 세워진 학교는 왕청의 ❰광선학교❱, 훈춘 마적달의 ❰오도구소학교❱,❰영신여중❱ 3곳이다.
1923년부터 학교 명단은 동북조선민족출판사에서 나온 ⌜중국조선족학교지 ⌟에서 확인한 것들이다.
간도노회는 노회 제 4회 모임을 용정 토성보예배당에서 가졌다. 선교사 1인, 목사 6인, 장로 25인이 참석하여 임원 개선을 하였다. 회장은 김내범 목사, 부회장 이병하 목사, 서기 문재린, 부서기 허상훈, 회계 박례헌 목사, 부회장 정재면 이다. 년 1회 정기노회를 여는 것과 도제직사경회를 가지는 것 그리고 박례헌 목사를 용정교회 전임 목사로 파송하고 교회 내에 사립학교를 설립할 수 있음을 권학소에 통지할 것과 각 학교가 예배당을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홍보하기로 하였다. 은진학교와 영신학교의 불화에 대하여 6인 위원회를 두어서 화해를 주선하기로 하였다.
용정선교국 열었던 박걸(Baeker. A.H) 선교사는 1923년 건강을 잃어 귀국하였고 터론토에서 1927년에 소천하였다. 그는 간도 주재 최초의 선교사로 선교기지를 조선인들의 독립운동 모의 장소로 내주었으며 용정중앙교회를 부흥시켰으며 동산교회와 제창병원과 명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의 부인 박혜선은 1929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성진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으며 원산의 성경학교에서 교장으로 봉사를 하였다. 그 또한 건강을 잃어 1938년에 귀국하였다.
1923년에 세워진 교회는 현재로서는 파악할 길이 없으나 연변의 민족출판사에서 나온 ⌜종교사⌟ 152쪽에 보면 당시 북간도에는 조직교회가 29개, 미조직교회가 44개, 기도처가 44개로 총 117개 교회가 있다. 원인을 할 수 없지만 미조직 교회들이 기도처 수준으로 퇴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 상권⌟ 530~ 534쪽에 의하면❰남양평교회❱,❰구세동교회❱,연길❰대구시교회❱,❰구사평교회❱도 있다. 구사평교회의 경우 1912년에 설립된 교회와 같은 교회가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것인지를 확인해야한다. 구세동교회도 1913년에 설립된 교회이므로 확인이 필요하다.
9부로 계속됨
2026년 3월 15일 일요일 묘시
우담초라하니 올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