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마치 KTX를 타고 광주에서 서울까지 가다 간간히 간이역에 서는 식으로 심리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각각의 역 이름은 심리학 서적으로 원한다면 다른 책을 빌려 그 역에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기차 창문 바깥으로 시간에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심리학의 풍경들이 흥미로웠다. 특히 몇몇 주제들은 현대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기에 더더욱.
개인적으로는 후성설 개념에 관심이 많다.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떠한 변화를 경험한다는 과학적 사실이 인간은 변한다는데 기대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은 신경가소성을 크게 가지고, 태어났을 때 일부분 빈 서판으로 구성된 뇌의 영역을 경험에 따라 새롭게 채워넣는다. 이런 일들이 언제 어디까지 가능하고 언제부터 되지 않는다는지는 발달심리학의 과학적 분석으로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빌렸지만 다 읽지 못했던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을 다시 빌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후자의 방법 부분은 이미 쏙 빼서 읽었다. 교과서적인 말일 수 있지만 '상대방의 말을 성심성의껏 존중하며 대화해야 가능하다'이다.)
> 지능의 실험적 연구
우리의 삶을 지대하게 바꾼 것 중 하나인 IQ 지수의 기반을 닦은 책이다. 모르긴 몰라도 학교 저학년 때 이 테스트의 결과에 따라 다른 교육을 받게된 사람들이 한국에도 수십만은 될 것이다.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너는 돌고래니, 원숭이니 했던 이야기들이. 한국이 외모지상주의라고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반박 불가능한 지상주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을 잘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또한 똑똑한 사람을 굉장히 사랑하는 것이다. 특히 똑똑함은 선이며 반박 불가능한 목표가 된다. 금권과 외모는 끊임없이 도덕 윤리적으로 도전받는 반면 똑똑함은 신성불가침 영역에 있다. 가끔 그게 어떤 의미인지 고민스러울 때가 있다.
> 정신분석학 입문
프로이트도 실생활을 사는 우리에게 되돌릴 수 없는 영향을 주었다. 다른 무엇보다, 무의식적으로라는 말을 어떤 단어로 대체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면 된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정의가 엄정하게는 완전히 다를지라도.) 리비도도 빼놓을 수 없을테고, 현재의 정신의학 토대가 완전히 달라졌을테고. 그러나 원문을 안 읽고 싶은 기묘한 마음이 있다. 읽다보면 이걸 이렇게까지 해석할 수 있나? 하는 의문에 빠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심리유형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MBTI가 바로 이 책을 기반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파급력을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타인과 자신에게 어떤 것을 보는 관점이나 동인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그걸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더 매끄럽게 만든다는 것에서 후한 점수를 준다. 책에서는 프로이트와 아들러, 융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데 학문적으로 깊은 골이 나타날 수 있다는걸 곱씹게 된다. (오랜 친구와 MBTI로 치열하게 싸운 적이 있는데, 그는 MBTI를 기반으로 자신의 성격 중 '평생 변할 수 없고 결국 상대가 수용하던가 포기하던가 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주장을 강화하는데 썼기 때문이었다. 그 기억이 난다.)
> 교육심리학 강의
레프 비고츠키는 처음 들어본 인물이라 재미있었다. 하지만 본문 내용은 갑자기 치고들어온 장 피아제가 많이 차지해 아쉬웠다. 아마 촘스키의 번형생성문법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장 피아제가 좀 더 맞다는 쪽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 카운슬링의 이론과 실체
현재로서는 익숙한 내담자 중심의 상담의 기초를 쌓은 사람이었다. 다른 것보다 실무자 입장에서 등장한 이론이라는게 마음에 끌린다. 문제아라고 불리는 아이들 수천명을 10년 가까이 만나는건 어떤 일일까.
> 정체성과 생활주기
적어도 그 8단계가 무엇이고 어떤 결함이 발생하는지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교양책 답게 이론적 영역은 줄이고 전체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배치했다. (시험내기 좋아보이는 부분이다.)
> 침묵에서 말하기로
페미니스트는 이런 방식으로 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동일성 페미니스트와 차이 페미니스트. [일그러진 몸]에서 정리된 것을 처음 본 개념인데, 전자는 양성은 동등하며 모든 일을 동등하게 할 수 있다는 가정이며, 후자는 양성은 다르며 그에 따라 어떤 일들을 진행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일그러진 몸]에서 여성의 노동을 연구하는 저자는 페미니스트들과 고용자 양측에서 갈등을 겪는다. 차이를 확연하게 나타내는 연구를 할 경우, 그에 따른 차별의식이 구성될 수 있으니 동일성 페미니스트들이 싫어하며, 연구의 결과에 따라 일터를 개선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고용자들도 싫어한다. 아무래도 캐럴 길리건도 차이 페미니스트였을 것이다. 나도 후자에 가깝지만 연구와 정의가 중립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개념들을 읽을 때는 매우 고심스럽다.
> 의미의 복권
이 책을 읽으며 이 사람을 낚았다고 생각했다. 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많이 일치해서 이 사람의 책을 읽고 싶었지만 [의미의 복권]은 번역본이 없고, 교육심리학 책 한 권만이 번역되어 있다. 패러다임과 내러티브 둘을 다 잡고, 인간이란 일화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식을 이해하고 있는 나에게 많은 동감이 되는 내용이었다.
> 대화적 자아
사고를 대부분 말로 하는 편인 내게 굉장히 흥미로운 개념이었다. 보통 프로이트의 초자아를 설명할 때 마음 속에서 어떤 거슬리는 일을 할 때 '안 돼'라는 목소리가 들린다는 식으로 표현되는데 (혹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직설적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그 개념을 훨씬 확장시킨 내용이었다. 페르소나와 비슷할 수도 있지만, 그 쪽은 좀 더 태도나 도구에 가까운 느낌이라면, 이 쪽은 또 다른 자아들, 내 속에 내가 더 많다는 의미로 쓰여 생각해보게 된다.
다른 일정이 생겨 심리학 독서 소모임에 부득이하게 참여 못 하게 되어 글이나마 남겨보았다.
P.S. 다들 즐겁게 독서모임 하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똑똑함은 신성불가침 영역에 있다"
의대,치대,약대 그리고 서울대를 말하는 걸까요?
서울대생 비판하면 가격지심 쩐다고 하던데
그런 구체적인 인간상이라기보다는 고지능 선호라고 할까요.
어떤 탁월함과 뛰어남을 지능으로 납작하게 만들어 지능을 높이는 쪽을 선호하고 그렇게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강하게 느껴요. [지능의 역설]이나 [똑똑함의 숭배]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명확하지는 않네요.
예를 들자면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표현이나, '과학적 00'이 가지는 함의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